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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피린과 기도
이만홍 / 두란노 / 198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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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피린과 기도] 한 신경정신과 의사의 상담일지와 신앙에 대한 생각이 잘 정리되어있다. 여전히 기도와 의학적 치료를 별개로 생각하는 신앙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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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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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의 문법 】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_소준철 / 푸른숲


“가난과 빈곤”


“이제는 가난의 문법이 바뀌었다. 도시의 가난이란 설비도 갖춰지지 않은 누추한 주거지나 길 위에서 잠드는 비루한 외양의 사람들로만 비추어지지 않는다.” 그 문법의 대명사 중심엔 도시의 길거리에서 ‘폐지 줍는 노인들’이 존재한다.


대학에서 심리학, 국제관계학, 사회학을 전공한 저자는 ‘도시연구자’로 소개된다. 저자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현장조사 작업을 기초로 했다. 저자는 2015년 3월의 어느 날, 가양역 근처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작은 골목을 지나가는데, 1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재활용품을 줍는 노인 여럿을 보게 됐다. 그녀들은 함께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어떤 갈림길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졌다. 알고 보면 경쟁 중이었던 상황이며, 고물은 먼저 발견한 사람의 차지가 되기에 굳이 남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재활용품을 줍는 노인의 일과 삶을 살펴보겠다며 연구를 시작했다.


일상적으로 ‘가난’과 ‘빈곤’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저자는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가난이란 ‘간안(艱難)’, 어려울 간과 어려울 난을 합친 두 자를 어원으로 둔다. 이로부터 파생된 건 ‘가난(家難)’으로 “집안의 재난”이거나 그 상태를 말한다. 빈곤(貧困, poverty)이란 “가난하여 곤한 상태”. 다르게 말하자면 “가난하여 살기가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둘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회과학자들은 이 둘을 다르게 쓴다. ‘가난’은 현상을 묘사할 때 사용하며, ‘빈곤’은 분석에 동원한다.


책은 오후 1시부터 밤 12시 30분까지 14개의 시간(장)으로 나뉘어 가상의 인물 윤영자의 하루 중 일부와 이에 대한 해석으로 이뤄졌다. 윤영자라는 인물(1945년생)은 폐지나 폐품을 수거해서 살아가는 노인층들의 공통분모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1945년생(보통 해방동이라고 부름)은 2020년을 기준으로 76세(만 75세)이다. 서울의 북아현동 고지대가 주무대이다.


한국사회의 인구가 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노인계층의 가난’이다. OECD 가입 국가 가운데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전체인구 중 빈곤 위험에 처한 인구의 비율)은 17.4%, 65세 이상 노인만을 살펴볼 때,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43.8%이다. OECD 가입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이어지는 희한한 통계는 65~69세의 고용률에서 한국(45.5%)은 아이슬란드(52.3%)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70~74세의 고용률은 33%로 OECD 가입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 이 통계만 보면 한국사회에서 노인들이 살아가기에 괜찮은 듯 해보이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한국의 노인은 일을 많이 하는데도 빈곤하다는 뜻이다. 아니 굳이 일을 안 하고도 최소한의 기본생활은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노인들이 유모차, 카트,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폐지를 수집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2020년 정부는 1조2천억 원을 투입해 73만 개의 일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과연 그게 정답일까? 노인일자리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노인의 ‘고용’을 늘리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지혜가 모아져야 할 것이다. 물론 국가적 재원이 필요한 사항이기에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노인층은 193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에 출생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 분들은 1980년대 말부터 적용된 사회보험(특히 국민연금)에서 제외된 처지라 물질적 부를 축적하지 못한 이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땅한 생계의 재원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세대 가난한 노인들의 삶을 위해 다각도로 대안을 제시하며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고민하며 풀어나가게 되길 희망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그런 일과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온전히)개인의 잘못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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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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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_래너 미터 / 글항아리


“장제스에 대한 새로운 평가”


“우리에게 항일은 당을 발전시킬 수 있는 호기다. 역량의 70퍼센트는 우리를 발전시키는데 쓰고, 20퍼센트는 국민당을 상대하는 데, 10퍼센트는 항일에 써야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마오쩌둥이 팔로군의 출동을 앞둔 산시성 뤄촨(洛川)서 열린 비밀 간부회의에서 한 말이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생각이 한국전쟁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국과 일본의 분쟁은 193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닌, 그로부터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부터 중국과 일본은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었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 당시 분열되고 군벌화된 중국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군벌화와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은 청의 마지막 50년 통치 동안 중국을 뒤흔든 광범위한 폭력문화를 초래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은 “외국 악마들이 모두 죽으면, 큰비가 내릴 것이다” 따위의 선동적인 구호로 가뭄에 시달리는 지역 주민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가뭄과 기근은 지방의 폭력 사태를 더욱 부추겼다.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뒤 이 유약한 시대에 장제스가 태어났다. 장제스는 젊은 시절부터 중국이 다시 통일되어야 하고, 중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군사적, 정치적 삶을 바쳤다. 이 책의 저자 래너 미터는 인도출신 영국 역사학자로 중국현대사를 전공했다. 저자는 『중일전쟁』을 통해 국민당의 장제스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이 무렵 일본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일본은 19세기 말 강력한 근대 민족국가인 제국의 길로 나아갔다. 1894~1895년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중국과 격돌했다. 일본은 조선뿐만 아니라 타이완의 지배권도 주장했다. 더욱 욕심이 난 일본은 러시아가 이미 식민지로 만든 만주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벌인다. 8만 명의 일본 병력이 부상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전술적인 면에서 앞섰던 일본이 러시아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일본 관동군은 만주에 주둔하면서 점차 병력을 늘려나갔다. 최초 1만 명에서 편성된 이 부대는 1933년에는 11만 4000명까지 증원된다. 당연히 일본은 중국에 큰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된다. 1931년 9월 18일, 선양(沈陽, 만주 서부에 있는 이 도시는 당시에는 평톈奉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부근의 철로에서 폭탄이 터졌다. 1905년부터 이곳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폭파가 중국 반일분자들의 소행이며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선언했다. 실제로는 폭발물을 터뜨린 장본인은 일본군이었다.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일본군의 비열한 행위였다. 일을 벌린 관동군 장교 두 사람은 심지어 도쿄의 민간 정부에 보고조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작전 개시 일주일 만에 일본은 프랑스와 독일을 합한 만큼의 영토를 점령했다. 3000만 명의 인구가 그들의 지배아래 들어갔다.


이 사건 이후 몇 년이 흘러 1937년 여름, 베이징 중심가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평범한 마을 완핑에서 다시 전쟁의 불씨가 살아났다. 마르코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라고 극찬한 루거우챠오(蘆溝橋)주변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중일 전쟁은 장장 8년을 끌게 된다.


전쟁 내내 장제스는 안전한 후방(충칭)에 머물면서 일본군이 알아서 물러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치열한 외교전으로 열강들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아울러 지속적으로 일본을 향해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소련의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그동안의 손실을 어느 정도 회복한 중국군은 만주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 대패하자 형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얻었다면서 1939년 12월에는 무려 100만 명의 병력으로 전면적인 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그 동안 마오쩌둥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대일항전 내내 몇 차례 폭격을 받은 것 외에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던 옌안(마오쩌둥의 공산당 근거지)은 가장 안전한 도시 중 하나였다. 수시로 최일선을 돌아보았던 장제스-쑹메이링과 달리 마오쩌둥은 8년 항전 내내 단 한 번도 옌안의 동굴을 나간 적이 없었다. 오히려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에게 패하고 도시를 빼앗겼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쁨의 환호성을 내며 좋아했었다고 한다. 

만약 공산당이 항일의 주체였고 일본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면 옌안은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군이 우한을 접수한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주력은 우한에 집중되었으며 화중과 화난에서 국민정부군과 치열한 일진일퇴를 벌였다.


실제로 중국공산당 핵심 간부들 중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장제스 정권은 공산군을 국민정부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여단장급 이상 간부 31명에게 소장 이상의 계급을 부여했다. 그중 5명이 항전기간에 죽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은 팔로군 참모장이었던 줘치안 한 사람뿐이었다. 이는 상장급(대장) 10명을 비롯해 집단군 사령관 2명, 군단장 7명, 사단장 22명 등 무려 200여 명에 달하는 고위 장성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국민정부군과는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항일전쟁사는 국공내전에서 장제스가 패배하고 냉전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구도아래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역사는 힘 있는 자에 의해 쓰여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마오쩌둥을 우두머리로 한 중국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후에도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국내에 소개 된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을 다룬 여러 책에서도 장제스의 이미지는 별로 좋지 못하다. 장제스의 독단적인 결정, 판단 미스, 국민당 고위급들의 부정부패, 민심 상실 등등의 여러 논점들은 허위는 아니지만, 공산당의 부풀린 작품이기도 하다. 중국공산당 역시 이러한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여러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이다. 번역과정에서 Forgotten Ally는 ‘역사가 망각한 그들’이라고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그들’은 중일전쟁에서 무한 희생을 치룬 장제스와 국민정부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공산당의 과거를 통해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본다면 너무 앞서가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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