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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가 인간을 보면? - 다큐PD 이채훈의 빅 히스토리 인문산책
이채훈 지음 / 더난출판사 / 2015년 7월
평점 :
『ET가
인간을 보면?』
이채훈
/
더난출판
에드가 미첼은 1971년
아폴로 14호를
타고 달에 착륙,
달
표면을 밟은 여섯 번째 지구인이 됐다.
지구로
돌아올 때 그는 다른 우주비행사보다 창밖을 내다볼 시간이 더 많았다.
눈앞에
깜깜한 우주가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와,
저게
나의 별이구나,
내
몸이 저 별과 이어져 있구나,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에게
이 경험은 ‘사마디(samadi,
삼매체험)’였다.
여러
사물을 개별적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하나의 단일체로 경험하는 것,
타자와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체험이었다.
그는
푸른 지구와 합일된 자신을 본 것이다.
그것은
신의 얼굴을 손으로 만진 느낌이었다.
비슷한
체험을 한 우주비행사들이 많다.
우주공간에서
철이 든다고 할까?
공통점은
지구라는 별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공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이채훈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30년간
MBC의
다큐 PD로
일했다고 소개된다.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리즈를
통해 제주 4.3,
여순사건,
보도연맹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추적했다.
그
외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
〈비엔나의
선율,
마음에서
마음으로〉
〈정상의
음악가족 정트리오〉
등
음악 다큐멘터리도 연출했다.
“머무는
곳 어디서든 주인이 되자,
서
있는 곳 어디에든 진리가 있다”
저자의
아포리즘이다.
인문학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책
한 권 분량으로 잘 요약해 놓은 고전들을 달달 외운다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지혜는
선물처럼 다른 사람이 갖다 주는 게 아니다.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피와 살에서 솟아나야 비로소 내 지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남의 이론을 객관적 지식으로 포장해서 제시하지 않는다.
내
몸과 마음과 머리로 부딪혀서 파악한 것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글일 뿐이다.
인문학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수많은 책들과 이 책을 구분하는 특징은 ‘내
머리로 생각하라’는
것,
이것
하나뿐이다.
이
책에서 발견할 데카르트,
키르케고르,
니체에
대한 글들은 특히 이 점을 강조했다.”
등장하는 존재감들이 매우
다양하다.
닭,
디오게네스와
개,
피론의
돼지,
침팬지와
보노보,
아프리카,
네아네르탈인과
크레마뇽인,
함무라비
법전,
지구,
우주,
빅뱅,
에피쿠로스,
춘추전국시대의
반전사상 양주(楊朱),
키르케고르,
데카르트,
니체
등등.
인간의
거울,
침팬지와 보노보
동물원에서 원숭이와 침팬지의 인기도가
높은 편이다.
다른
동물우리 앞엔 사람이 없어도 이 둘 앞엔 항상 사람들이 몰려있다.
아마도
그들은 비록 우리 안에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 그들 역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지 모른다.
1967년에
동물학자 데스몬드 모리스가 《털
없는 원숭이》란
책을 냈다.
모리스는
이 책에서 인류가 선천적인 강력한 충동에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실을 불변의 진리로 믿고 사는 이들에게(거의
대부분이 그렇지만)강한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서구의
교회는 이 책을 몰수해 불태우기까지 했다.
사람보다 침팬지를 더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매스컴의 힐난에 제인 구달은 이렇게 답했다.
“침팬지는
매혹적이다.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보다 침팬지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역시 사람을 더 좋아한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또 다르다.
보노보는
연구 대상이다.
인류의
또 다른 사촌이라는 표현도 한다.
“20년
동안 보노보를 관찰한 일본의 다케시 후루이치 박사에 따르면 보노보 집단 간의 살상은 없다.
보노보는
낯선 집단을 만나 공격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 섹스로 긴장을 푼다.
수놈들은
극도로 긴장해서 소리를 지르고 나무를 흔들지만,
암놈은
서로 쓰다듬어주고 함께 먹으며 친선을 도모한다.
자연스레
평화가 이뤄지면 1~2주씩
함께 살기도 한다.”
네안데르탈인과
크레마뇽인
이 책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크 클라프진스키는 《마지막
네안데르탈인 아오》에서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과의 첫 만남을 그려주고 있다.
“저
자의 목소리는 동물이 내는 소리와 같고,
피부는
부분적으로 털에 덮여 있습니다.
그는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닙니다.
그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를
죽이거나 그가 온 곳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동물은
인간을 볼 때 똑 같은 종으로 본다.
흑이니
백이니 하면서 구별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대하면서 마치 크로마뇽인이 네안데르탈인을 본 것처럼 하지는 않은가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대형 포유류가 지구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대형 포유류의 멸종 지점과 시기를 활용하여 우리 조상의 이동경로를 파악한다.
그런
연유에서 네안데르탈인이 크로마뇽인과의 만남 때문에 멸종하게 됐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조상은 대형포유류뿐 아니라 사촌인 네안데르탈인까지 절멸시킨 셈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음악-언어를
사용한 상냥한 족속이었다고 상정한다면 무척 마음 아픈 결론이다.
21세기,
지구촌을
가득 메운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멸종시킬 능력과 가능성이 있는 종족은 누구일까?
외계인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볼 때,
우리를
멸종시킬 무서운 종족은 우리 자신일 확률이 거의 100퍼센트다.
물론
운석 충돌 등 자연재해로 멸종할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류가 곧
멸종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지혜를 찾아내고 이를 실천할 주체가 우리 자신뿐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의 관심은 ‘사람’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선상에 놓고 사람답게 살다가는 삶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길 바라고 있다.
책을 펼치기 전에 이 책의 제목인
『ET가
인간을 보면?』에
대해 잠시 생각해봤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ET는
인간을 보고,
‘참
희한하게도 생겼구나.’
했을
것 같다.
여태
멸종안당하고 살아왔다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본다.
“인간과
ET가
실제로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와의 만남은 인간의 의식과 철학에 큰 충격을 안길 것이다.
그들의
존재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문명사적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탐욕과 이기심을 극단까지 몰고 가서 자멸의 길로 뛰어드느냐,
아니면
평화와 상생의 철학을 받아들이고 우주의 겸허한 일원이 될 것이냐 선택해야 할 때가 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