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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량치차오 지음, 최형욱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최형욱
엮고 옮김 / 글항아리
조선망국사략(朝鮮亡國史略)
‘장대(章臺)
궁전의
버들이여!
옛날에는
무성하더니 지금도 그러한지?
설사
긴 가지 옛날과 같았더라도,
필경
남의 손에 당겨져 꺾였으리라!
청일전쟁
전의 조선과 청일전쟁 후의 조선을 비교해볼 때,
더구나
청일전쟁 후의 조선과 러일 전쟁 후의 조선을 비교해 볼 때,
나는
눈물이 눈썹에 넘쳐흐름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전적(典籍)에
이르기를,
상례(喪禮)의
지극한 애도는 군자가 그 근본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3000년
된 이 오래된 나라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멸망하는데 그와 친속의 관계를 가진 이로서 어찌 그 종말을 장식하게 된 사실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이로써
비애를 생각하니 가히 그 비애를 알겠다.’
외국인(중국인)의
눈에 비친 망국(亡國)의
기록이다.
이
글은 지은이 량치차오가 1904년
9월
24일에
기록한 「조선망국사략」이다.
지은이는
비애를 느낀다고 하지만,
나는
분통을 금치 못하겠다.
어찌해서
나라를 그 지경까지 만들어놓았을까.
화가
치민다.
「조선망국사략」은
량치차오의 대표작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를 높이고 그로부터의 영향을 적극 받아들인 데는 무엇보다 그가 조선 망국에 대해 동정을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망국사략」은
일제의 강점 시도가 본격화되는 1904년
발표한 글이다.
여기서 표현되는
장대(章臺)는
원래 전국시대 진나라 함양에 세워진 궁궐로,
그
뒤 궁전이나 유곽의 의미로 쓰였다.
장대류(章臺柳)는
장대에 심은 버들을 가리키며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한다.
여기서는
조선을 비유했고,
이로써
속국을 일본에게 빼앗긴 것으로 인식한 중국 지식인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느낄 수 있다.
청일 양국의
조선
광서(光緖)11년
청일과 맺은 톈진조약(天津條約)에서
이미 기울어진 나라꼴을 볼 수 있다.
그
조약문중 일부는 이렇다.
‘앞으로
조선이 유사시에 처할 때 청국은 군대를 파병함에 있어 먼저 일본에 교서로 자문하며,
일본이
파병함에도 청국에 교서로 자문한다.’
무슨
말인가,
도대체
이 말이.
국제법
이론에 따르면,
조선은
이미 청일 양국 공동의 보호국으로 되었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갑오전쟁(1894~1895년의
청일전쟁)은
결국 조선이 번속이냐 자주국이냐의 문제로 양국이 서로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은이는 전 중국이
다부지게 조선을 장악하지 못한 실수로 조선 땅을 일본에 빼앗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국이
공동으로 내정에 간섭한다는 논의가 타협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일본은 거리낌 없이 독점의 기세를 드러냈다.”
이건
뭐 조선 땅이 먼저 먹는 자가 임자라는 이야긴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오래 되었다.
그
시작은 위와 같이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을 일본에 병합시키고 완전히 접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작업을 매우 끈질기고 교묘하게 진행했다.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누구인가?
량치차오는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끝은
일본인이었다고 하면서 덧붙이길 ‘중,
러,
일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라고
했다.
특히 조선 멸망의 시작과 최대 원인을
궁정에 두고 있다.
대원군에
대한 언급은 온갖 안 좋은 수식어는 모두 동원되다시피 한다.
‘대원군이라는
자는 본디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그
음험하고 사나운 성질은 온 한국의 조정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교만하고
흐리멍덩하면서도 조급하고 시샘이 많으니 주권자의 그릇이 못 된다.
조선은
본래 오래 되었지만 중도에 이미 쇠미해졌음에도,
섭정
초기에 그는 기강을 정돈해야 할 바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경관 토목공사를 일으켜 숭엄하게 할 생각만 하여,
전국
백성의 피와 땀을 짜내어 경복궁을 중수했다.
전후
5년에
걸쳐 백성에게 가렴주구(苛斂誅求)한
바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결두전,
원납전
등등 여러 명목으로 남김없이 잔혹하게 착취했다.’
‘양반’에
대한 평가
량치차오가 조선의 양반들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과 표현 역시 만만치 않다.
‘조선은
귀족과 미천한 집안의 구분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매우 엄격하다.
이른바
’양반‘이라는
자들이 나라의 정치,
사회,
생계상의
세력을 모두 농단했다.
양반이
아니면 관리가 될 수 없고,
양반이
아니면 학업에 종사할 수 없으며,
양반이
아니면 사유재산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사실상
조선국 내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자,
독립
인격을 가진 자는 오직 양반뿐이다.
그러니
양반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저
양반이라는 자들은 모두 높이 받들어지고 넉넉한 곳에 처하며,
교만하고
방탕하여 일하지 않고,
오직
벼슬하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았다.
다른
나라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오직 직업 없는 사람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량치차오는
이 글의 목적을 중국인들을 겨냥해서 썼다.
그래서
조선의 상황을 거울삼아 중국인들에게 교훈을 담아주고자 노력했다.
일진회
량치차오는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일본이요,
일본을
도와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한국의 일진회라고 못을 박는다.
‘일진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정당의
이름을 사칭하고 적에게 아부함으로써 부귀를 얻은 자들이다.’
일진회의
우두머리는 송병준,
이용구라고
지목한다.
송병준이
특히 주동자다.
‘병준이라는
자는 전에 국사(國事)와
관련된 범죄로 일본에 10년
동안 도망쳐 있다가,
러일전쟁
때 일본군 향도가 되어 귀국한 자다.’
송병준을
표현하길 ‘본래
음흉하고 악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으며,
기회를
틈타는데 교묘했다고 한다.
량치차오가
유일하게 좋게 평한 조선인은 안중근이다.
조선의
풍토에선 1억
만 명 중에서 한둘 정도밖에 안 나올 정도로 귀한 존재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진회가 일본을 도와
나라를 넘겼는가.
일본
메이지 37년
8월
한성에서 일진회가 열렸다.
그
제1정강(政綱)은
바로 일본에 대한 찬조를 명시한 것이었다.
몇
달 되지도 않아 전국적으로 호응하여,
회의
참가자가 수십만이 되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일병합조약
드디어 모두 다 일본에
넘어간다.
협정
조항 제1조는
이렇다.‘한국
황제 폐하는 앞으로 한국 정부의 일체 통제권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일본인들이
조선인 나아가서 한국 사람들을 우습게 볼만하다.
‘완전히
영구적으로’라는
문장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조선은
이로부터 다시는 국가가 아니었다.
조선은
이로부터 황실이 없게 되었다.
조선의
주권자는 10년
전에 본래 임금이었다.
이제
망해서도 임금 자리는 얻게 되니 가히 한은 없으리라.
다만
그 황실 재산을 향유할 수 있는지 여부는 조약 가운데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다.’
다분히
비꼬임이 들어간 언급이다.
이 책의 글들은 전체적으로 량치차오
개인의 시각이다.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관점을 나타내고 있진 않다.
다소
제국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눈에 띈다.
조선에
대한 동정에서 벗어나 비난과 비판을 넘어 조소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 존망의 위기 속에서도 개인주의적이고 대의의존적인 안일과 무지,
무능에
젖어 있던 조선의 상황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이는
결국 현재의 국제정세와 미래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바로 보는 시각이 될 것이다.
지은이
량치차오는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
뒤,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된 지 10년
뒤,
서구의
충격이 중국으로 한창 물밀 듯이 거세게 쳐들어오던 시기에 태어났다.
격동의
근대 전환기를 살면서 끊임없이 시대를 주도해나간 유신파 계몽주의 지식인의 대표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소개된다.
그의
계몽 사상과 학술,
문화계의
혁신 노력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