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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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1.

수업 내용 요약과 수업 준비를 위한 독서 노트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필요 없어졌고, 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깨우친 박식한 언어는 더는 쓰지 않게 되면서 그녀 안에서 지워졌다.

 

<세월>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교사였단다. 교사이자 작가라는 정체성에서 동질감을 느껴서 그런 걸까, 아마도 퇴직 즈음에 쓴 듯한 그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작년부터 나는 학교에 남아 있는 오랜 세월의 자료들을 하나씩 버리고 있다. 30년도 더 된 5차교육과정의 교과서들, 오래 전 제자들이 찾아와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손에 들려보내려고 보관한 여분의 학급문집들, 교무수첩, 교육과정이 바뀌어 쓸모도 없게 되었으나 아이들이 정성껏 만들었기에 차마 버리지 못했던 신문, 시집, 소설, 수필, 시화들. 후배들에게 수업의 예시로 보여주려 고이 간직했던 그것들은 디지털 시대에 활용할 일이 없어진 손으로 쓴 것들이다. 자기 아버지 이야기, 여자 친구 이야기가 눈물처럼 아로새겨져 있는 학생들 글을 버리는 일은 왠지 가슴이 아프다. 내가 개발하고 여러 해 검토해 다져 만든 수업 지도안은, 내게는 보물이었겠지만 이제 곧 쓰레기가 될 터이다. 어차피 버려질 것들, 조금씩 미리 버려야 할 것들이다. 아니 에르노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정년퇴직을 5년 남긴 중학교 교사이다. 34년 동안 남자중학생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쳤다. 남은 5년은 긴 세월일까 짧은 시간일까.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온통 나의 말과 수업에 집중될 때, 깊은 생각으로 그 어린 얼굴들이 회한에 잠기는 표정을 지을 때, 친구들과의 수업에 한껏 즐거워할 때, 나는 교사가 된 나 자신을 기특해했고, 행복해었다. 그러면서도 몇몇 어린 남자들의 지저분한 수컷 본능과 잔인한 성정을 만날 때는 난감하고 절망스럽기도 했다. 저 아이들을 어떻게 잘 가르칠 수 있을까, 무엇이든 다 해줘서라도 좋은 삶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과, 1, 일주일에 두어 시간의 만남으로 저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있는 건지 회의를 느끼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곤 했었다.

 

최근에 학교 현장을 힘들어하는 교사들의 목소리로 세상이 시끄럽다. 사실은 해묵은 문제가 이제 터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도 덩달아 학교가 힘들다. 고통을 당한 이들의 아픔에 지나치게 공감을 하는지 몸이 아프고, 이 깊고 복잡한 문제를 풀 해법을 갖고 있지 못해서 차라리 다 놓아버리고 싶기도 하다. 지난 34년을 살얼음 밟듯이 지나왔는데 아직 5년이나 남았나 싶어 남은 시간이 두렵기도 하다.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만나는 것은 교사의 능력이나 정성과 무관하게 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나도 앞으로 어떤 거친 학생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든다 

 

2.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그녀라는 명칭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지금, 글로써 미래의 자신의 부재를 형태로 만들어 놓아야 하며, 20년째 자신의 분신이자 동시에 앞으로 점점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될, 아직 미완성인 수천 개의 메모 상태에 불과한 이 책을 시작해야만 한다.

 

곧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글로 남기려는 용기는, 그가 꽤 괜찮은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노의 <세월>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이 추억담에 그치지 않는다. 유럽의 역사와 프랑스의 정치, 가로의 세월 틈틈이 엮인 씨줄의 개인사들이 다 담겨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그 동네 사람들은 아르노의 글에 깊은 감회를 느낄 것 같다. 읽다가 픽, 웃은 대목이 있다. ‘미테랑의 재선이 우리를 안심시켰다. 우파 정권 아래에서 항상 분노하며 사는 것보다 좌파 정권 아래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지금을 사는 이 씁쓸한 공감마저 이것도 지나가리라가 될 것이겠지만, 멀지 않은 세월 속에서......

 

삶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발전이었다. 그것은 잘사는 삶과 아이들의 건강, 빛이 잘 들어오는 집 그리고 밝은 거리, 지식, 시골의 어두운 것들과 전쟁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했다.

 

우리를 휩쓸어가는 것들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우울함을 느꼈다.

 

우리는 디지털로 현실을 고갈시켰다.

 

3.

그이의 글에는 노년의 회환과 더불어 삶의 덧없음, 그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우주적 통찰이 있다.

 

부모들은 이따금씩 우리에게 대답하는 것을 잊고 초점 없는 눈빛으로 우리가 없었던, 우리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그 시간, 옛날을 응시하는 듯했다.

 

아이들은 살아본 적 없는 그 시간에 대한 끈덕진 아쉬움을 간직했다. 타인들의 기억은 그들이 간발의 차이로 놓친, 언젠가 살아 보기를 희망했던 시대를 향한 비밀스러운 향수를 안겨주었다.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마치 이 호칭이 자신의 조부모님에게 귀속된 것처럼, 그들이 돌아가셨어도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는 본질의 어떤 것처럼.

 

이제는 그녀가 달리는 세상 속에서 부동의 자세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들의 배우자의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 .. 이 세상에서 자신이 빠르게, 지체 없이 대체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 개인의 회고사나 푸념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그이는 글 속에서 <그녀>는 거울 속, 사진 속의 끊임없는 타인에 해당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늙음을 인정하긴 어렵다고 푸념하면서도 이렇게 자기 객관화에 노력을 다했기 때문에 그의 글은 어른스럽다. 그리고 아름답다.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기대고

계절의 냄새를 손으로 잡았다.

 

최근에 아주 예쁜 색감의 잉크를 몇 병 샀다. 색깔별로 만년필을 갖지 못했기에 딥펜이 필요해 펜촉 몇 개를 사달랬더니 남편은 펜촉 수만큼의 펜대도 주문해 주었고 집에 있는 나무를 깎아 잉크병과 펜대를 놓을 수 있는 거치대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잉크를 찍어 에니 아르노의 다음 문장을 옮겨 적어본다. 아슬아슬한 나의 부모들, 머지 않아 다가올 나와 남편의 미래, 저렇게 허무하지만 너무나 허무하기에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집착할 것도 없는 삶에 대해, 그의 글이나 나의 마음같은 문장을 한 글자씩, 바다 색의 잉크로, 녹음의 빛깔로, 누런 종이에, 펜촉으로 종이를 살며시 갉아대며, 우리 모두 언젠가 사라질 존재로서, 그렇게 태어나고 사라질 것이라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질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쌓인 사전은 삭제될 것이다. 침묵이 흐를 것이고 어떤 단어로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입을 열어도 나는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세상에 단어를 내놓을 것이다. 축제의 테이블을 둘러싼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며, 먼 세대의 이름 없는 다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점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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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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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세속적인 욕심이 없으면서도 책임감은 강한, 그리고 통찰적인 측면에서 진정 똑똑한 사람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기레기라는 멸칭은 그런 세상의 기대가 높은 만큼 꼭 그만큼의 실망의 표현이라 생각하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진정한 기자정신을 가진 훌륭한 기자도 많다고 생각한다. <시사인>이나 <한겨레21> 같은 데 실린 심층 취재 기자를 보면 기자는 다 기레기라는 말 함부로 못 할 것이다. 앞에 언급한 매체 말고도 다른, 포털에 잘 노출되지 않는 언론사에도 훌륭한 기사와 기자가 많을 것이고. 그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내가 아는 기자들의 책은 꼭 사서 보는 편이다. 그런데 마침 장일호 기자의 책이 나왔단다.

 

그는 몇 년 전 내 글의 원고 담당 기자였다. <시사인>에 방문해 잠시 만났다. 그때 만난 그이에게서 다른 기자들과 딱히 다른 면모는 보지 못했다. 겸손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만큼의 사회성을 가진 일반적인 기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주로 전화 통화를 나눴지만 당시 막 시작된 남혐 여혐에 대한 원고에 대해 조심스런 의견을 주고받은 기억도 있다. 그때 받은 인상도 신중하고 진지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나온 책에 에세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전문적인 취재 글이 아닌 부담 없이 읽어도 되는 책이라 여겼다. 그냥 의리로,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집어들었던 책.... 그만큼 나는 장일호 기자를 잘 몰랐던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여태 내가 써왔던 글들이 부끄러웠다. 이 책 속 글들은 나는 진정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던 걸까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든다.

이 서평으로나마 장일호 기자, 당신의 글은 깊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는 말 전하며 건강은 좀 어떠신지도 묻고 싶다. 아프지 말고 좋은 글, 좋은 취재 더 많이 부탁한다는 인사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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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우주 - 커다란 우주에 대한 작은 생각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지음, 심채경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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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런 거 좋아한다. 과학과 문학의 만남도 좋아하는데 거기에 미적인 필터를 하나 더 씌운 글이라니! 그리고 번역자로 심채경은 정말 제격이다. 과학과 인문학과 미학의 만남이 원저에서도 역자에서도 딱 맞아 떨어진다.

책에서 다루는 과학 이야기는 각 부분마다 짧고 쉽다. 중학생 정도면 읽을 만하다. 우리나라 중학생들이 즐겨 읽을까, 라는 질문에는 뭐라 답을 못하겠다. 재미있거나 학습적으로 유용하거나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책을 끼고 다니는 중학생들을 많이 보고 싶다는 욕심은 가져본다. 그림은 감각적이고 문체는 더욱 그렇다. 다루고 있는 우주와 자연이야기는 적절히 지적이면서 또 아름답다. 그래, 원래 과학이란 게 탐구력 있는 사람이 욕심을 낼 분야라기보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만지고 싶은 분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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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대한민국 중딩이 코로나를 만났습니다

저기요, 고객님 체온 재게 마빡 좀 / 중2는 압축 성장 중 / 중1을 아십니까 / 보육과 교육 사이에서 /코로나 시대에 엿본 다른 수업 이야기

2부 모여서 더욱 아름다운 풀꽃입니다

텔레파시와 제로 콜라 / 말을 잘 탄다는 몽골에서 온 그 아이 / 어떤 학교폭력 이야기 1 /어떤 학교폭력 이야기 2 / 투덜이 웅이가 기특한 진짜 이유 / 모두에게 왕관을 / 뜨개질도 좋고 순정만화도 괜찮아 /친구 사귀는 것도 용기가 필요해

3부 요즘 중딩이 뭐 어떻다고요?

급식실 이야기 1 / 급식실 이야기 2 / 사춘기와 갱년기, 잘 쓰면 잘 산다 / 엉엉 울던 그 아이 / 국어를 잘해야 연애를 잘 한다 / 몽골 소년도 아는 우리말 / 요즘 아이들 어휘력 / 닥치고, 안아 주기 / 친구와 함께라면 공부도 즐겁다? / 학교에서 스마트폰은 / 대한민국에서 중2로 산다는 것 / 남중생 언어생활 관찰기

4부 학교에서 행복합니다, 우리는

모둠 수업을 하는 이유 / 웃기는 선생님이 되자 / 남자 중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칠 수 있냐고요? / 학교에서 꼭 해 보고 싶은 성 의식 교육 / 여자애들은 원래 똑똑한가요? / 고독과 적막을 즐기는 학생을 위한 공간 / 너를 기다리는 선생님을 기억해 주렴 / 우리 학교의 숨은 고수

5부 세상을 향해 날개를 폅니다

학교가 교도소는 아니잖아요 / 너 깍두기 할래? / 학생 인권을 가르쳐야 교권도 산다 / 폭력의 대물림을 끊는 방법 / 작지만 당당한 너희들의 자존감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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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학 동문선 문예신서 183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동문선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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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온 이 책의 역자는 오역을 경계하며 번역에 매진했노라 고백하는 후기를 책 뒤에 실었다. 그 진중함에 웃음이 나왔던 것은, 내가 책을 읽는 내내 이 아름다운 책의 절반을 이해하지 못하고 날려버리는 것을 번역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래, 언어의 차이,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하자. 유난히도 프랑스 저서는 이해가 어려웠던 경험들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하자. 물론, 곽광수 교수의 글 자체가 본문의 문투와 많이 다르지 않을 걸 보면 그분만의 독특한 언어 세계가 있고, 그것이 번역에 그대로 반영된 것도 있을 것 같다. 가령, ‘새롭히다와 같은, 우리 말에 없는 표현 같은 것, ‘살다라고 쓰고 꼭 () 안에 體驗이라고 쓰는 것, ... 역자는 프랑스어와 한국말 사이의 간극을 메울 표현을 찾으려 고심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먹히고 어떤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시를 읽는다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시는 원래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아름답기만 해도 되는 것이 시라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를 시집이라 부르겠다. 다락방, 지하실, 조개껍질 안, 좁고 넓은 공간, 상상의 공간, 현실의 공간, 우주의 공간, 그리고 원, 심지어 차원을 넘어서는 변증법적 공간까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상념과 감각과 상상, 그리고 몽상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학문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 시집을 읽듯이 만나야 한다. 이 책은 곧 절판에 이를 것이고,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시는 세월이 가도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 책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데, ‘난해하다는 혐의로 사라져 버릴까봐, 너무나 아깝다. 바슐라르의 표현에 무릎을 치며 잠 이루기 전까지 이 책을 읽은 날이 많고 많지만 특히 공기에 속하는 것과 대지에 속하는 것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그 탁월함에 잠을 깼다. 이미 많은 이들이 땅과 하늘, 현실과 몽상, 몸과 영혼의 세계를 고찰했겠지만 하필이면 그것을 공기와 대지에 비유하다니. 체 게바라의 꿈과 리얼리스트를 만났을 때처럼 그 시적이고도 적확한 표현에 놀란다. 시인들은 몸의 뿌리를 대지에 내리고도 공기의 삶을 사는 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직 현실만을 살며 몽상의 세계, 시의 아름다움, 또 다른 차원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한 이들을 일컬어 2층밖에 없는 인간이라 표현한다. 지하실이나 지붕 밑, 다락과 같은 공간의 몽상적 의미, 심연, 심리학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심연과 그림자, 자기만의 꿈과 몽상을 지니지 않은 이의 영혼은 얼마나 핍진할까.

 

이 책과 거의 동시에 강맑실의 <막내의 뜰>를 읽고 그 직후 공선옥의 <춥고 더운 우리집>을 읽었다. 두 작가들의 깊은 상념처럼 나 역시 집 꿈을 자주 꾸고 결코 삶에서 연관성이 있을 리 없는 건축 관련 책들을 뒤진다. 사람들은 왜 '집'에 집착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삶의 기반이라서 그러하다는 현실적 이유 말고, 집은 몸 다음으로 영혼을 담는 그릇인 것이다. 그것을 바슐라르는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 하나의 우주라고 표현했다. 이 책 속의 우리들 각자에게는 꿈의 집이, 사실의 과거 너머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추억 꿈의 집이 하나씩 있다라는 표현을 혹시 강맑실이나 공선옥도 읽은 건 아닐까. 좋은 추억만은 아니더라도 과거의, 특히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는 일은 묘하게 참된 자신을 만나는 것과 닿아 있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 대한 사유가 표현되는 것이 바로 시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시학(詩學)’이 붙은 것이다. ‘시는 그 위대한 기능으로 우리들에게 꿈의 상황을 되돌려 준다.’ 그리고 시는 존재 차원의 거소. 존재의 집인 것이다.

 

융은 집의 공포를 지붕 밑 곳간과 지하로 나눠서 설명한다. ‘집주인(의식)이 지붕 밑 곳간에 들어가면 생쥐와 쥐들의 소란이 조용해진다. 이곳에서는 낮의 경험이 밤의 공포를 지워 버릴 수 있지만 지하실의 어둠은 밤낮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문명은 더 이상 촛대를 들고 지하실에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은 개화되지 않는 법. 무의식은 여전히 지하실에 내려가기 위해 촛대를 든다. 지하실의 벽은 땅속에 묻힌 벽, 이쪽 벽면밖에 없는 벽. 땅 속에 묻힌 광기, 벽 안에 갇힌 드라마....’라고 바슐라르는 융의 심리학에 기대 몽상의 의식 세계를 집에 비유해 분석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장 라로슈의 아름다운 시들을 인용한다.

 

내 마음에 세워진 집

내 침묵의 성당

매일 아침 꿈속에서 되찾았다가

매일 저녁 버리네

새벽으로 덮여 있는 집

내 젊은 시절의 바람()이 열려 있는 집 장 라로슈

    

이 작약은 어렴풋한 집

거기서 누구나 밤을 되찾네

...

모든 꽃받침은 집이다 장 라로슈

 

바슐라르는 아름다운 말에는 아름다운 사물이 대응되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윤동주가 바슐라르를 읽었을 리 없지만 그 역시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라고 썼다. 말은 때로 허위로 사람을 현혹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세상을 예술로 채워주는 존재이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머니는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의 시인 정재학은 나의 직장 동료이다. 그의 시 세계가 오묘하고 뛰어날 뿐 아니라, 현실의 건실하고 다정하고 신사다운 그의 모습과 시속의 세계가 너무 달라 농담 삼아 융 심리학의 관점에서 정 시인의 시 세계를 분석해 보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콤플렉스와 그림자, 무의식과 심연의 세계가 따로 있겠으나 어떤 이는 평생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을 자양분 삼아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다음 구절은 정재학 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시란 언제나 꿈을 몽상으로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시적 몽상이란 기본적인 이야기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콤플렉스의 응어리 위에서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은 깨어 있는 몽상을 사는 것이며 특히 그의 몽상은 세계 속에서 세계의 대상들 앞에서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 주위에, 하나의 대상 속에 우주를 모은다.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많은 작가와 시인을 만나고 그들의 글과 시를 떠올리다니. 그리고 그가 이끄는 미지의 세계를 몽상할 수 있다니. 이 책을 아껴 읽은 시간은 고작 몇 달이지만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깊은 꿈의 아홉 단계를 넘나들다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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