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사이언스 - 아름다운 기초과학 산책
나탈리 앤지어 지음, 김소정 옮김 / 지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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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실주의자이고 합리주의자이다. 있는 것만 보이고 앞뒤가 맞아야 믿는 사람이다. 몰라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을까 봐 최대한 많은 것을 보려 애쓰고 마음을 열어놓으려 노력하며 공부할 뿐이다.

침대 머리맡에 사주명리학 책과 더불어 과학 에세이들도 쌓여 있다. 무엇을 아무리 공부해도 세상 이치를 깨우칠 리 없으며 어떤 통찰력을 갖게 되더라도 진정한 세상의 이치를 다 알기엔 편협한 생을 살다 갈 것이다. 하지만 알아가려는 그 노력의 여정은 즐겁다. 알면 알수록 내 존재의 하찮음이 느껴지는데 그 깨달음이 더욱 즐겁다. 내 존재가 작아질수록 생명과 죽음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유시민이 과학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책 읽어보라고 권한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원더풀 사이언스>이다. 누구는 이 사람의 입담을 칭찬했지만 미국식 유머가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유와 표현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래서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술술 읽히는 글을 만날 때마다 갖는 의문인데, 원 글을 잘 쓴 걸까, 번역을 잘한 걸까? 글 자체가 복잡하고 난해한데 깔끔한 문장의 번역이 나올 리는 없을 것이다. 원래 잘 쓴 글을 망치는 번역도 쉽진 않다. 아마도 이 책은 원저자 나탈리 앤지어의 뛰어난 글솜씨가 좋은 번역가를 만났을 것이다.

 

확률, 척도에서 시작해 화학, 물리, 진화생물, 분자생물, 천문학으로 끝난다. 과학이야기가 천문학에서 끝나면 인문학도들도 마음이 놓인다. 이 공부의 끝을 우주의 존재론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하면 이 모든 존재와 고민이 공즉시색(空卽是色) 같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생각이 그러니까 나의 삶은 얼마나 짧으며 나는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로 끝나지 않고 내 존재의 하찮음 덕분에 삶에 대한 집착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 공부를 하면서 그런 성찰을 얻다니. 최근에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그렇고 김상욱의 에세이들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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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상형문자 b판시선 19
고명섭 지음 / 비(도서출판b)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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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시인 그랑그루아가 떠오른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서술자, 혹은 호메로스 같은 시인일 수도 있다. 고명섭은 인류사의 파노라마를 타고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는 무대에 선 사회자 역할을 한다. 때로는 변사처럼 주인공의 목소리를 내고 때론 주인공 혹은 대척자나 주변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시집을 읽었는데 역사극을 본 듯도 하고 심리와 상황 묘사가 탁월한 대하소설을 읽은 듯도 하며 새삼 짚어보는 철학자, 문학가, 역사 속 인물들을 가장 처절하고 부끄럽고 나약하고 비루한 밑바닥의 개인 서사로, 업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는 기분이 든다. 9000원밖에 안 되는 이 책은 마치 얇으나 깊은 마법서 같다.

 

고명섭 시는 모든 시가 서사시이다. 과거형 어미가 형식을 지켜 올리는 고대의 연극을 연상케 하기에 현대시적인, 시적인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탐색, 탐구의 여정을 호메로스 같은 고대 시인의 서술 형식을 빌려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는 플라톤이 등장하고(이데아, ) 비트겐슈타인의 서사가 있으며(헛간의 빛) 카프카가 담긴다(몰래 쓴 편지). 니체와 칸트를 아우른다. 그들 자신이 쓴 책도, 그 주장을 재해석한 책도, 소설로 그 삶을 재구성한 책도 세상에는 많지만 마치 그들이 되어 그 삶을 살아본 듯 그들의 몸이 되어 아픔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그들이 걸었던 흙길을 같이 걸으며 밤 늦은 시간 펜촉을 사각거리거나 열등감에 젖어 고개를 숙이는 이런 시는 없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많지만 그걸 통섭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은 더 많지만 그게 지금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고명섭이라는 한 평범한 기자는 어떻게 그런 경지에 갔을까.

이것을 뒤에 평론을 쓴 신형철은 ‘(고명섭은) 자신이 천착한 사상가와 예술가의 삶의 한 국면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을 본 것이었으리라.’ 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 는 이런 고명섭의 목적의식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무너진 집, 돌담 옆에 주둥이를 잃어버린 항아리

물기 없는 흙바닥의 아가미처럼 헐떡거리는 아가리

병조각 널린 길에서 발가벗고 뒹구는 몸뚱이

벌레 먹은 세월이 엉겨 썩어 들어갈 때

책의 문을 열면 굴뚝새 한 마리 푸드덕 날아갔다.

책 속으로 난 길은 하구의 강줄기같이 흩어지고

숲은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 잎사귀를 뚫고 햇살 몇 가닥 들어와

큰 나무뿌리의 이끼에 맺힌 빗물의 잠을 깨웠다

이 숲 어디엔가 손길 닿지 않은 유적 묻혀 있지 않을까

...

 

책 속으로 들어가 책과 책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멋대로 난 풀잎의 혓바닥이 종아리를 스치고

사금파리들이 발가락에서 피를 핥았다

손전등을 들고 더듬어 보는 숲의 상형문자

입 꼭 다문 문자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 고명섭 <상형문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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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말들 - 프랑스어가 깨우는 생의 순간과 떨림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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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정치적 지향은 나와 비슷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닮았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삶을 꿈꾸는 나 대신 그걸 직접 살아가고 있는 그의 체험 삶의 현장’, 거기 더해진 통찰적 지성은 내게 대리만족의 기쁨을 준다.

 

사실 프랑스어야말로 내 희망 외국어 공부’ 1순위였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공부했고 대학에 가서 교양 불어 수업을 들었다. 언어에 재능이 있었더라면 좀 더 공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연인이 된 프랑스어에 대한 이야기를 목수정이 들려준다. 적으나마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 프랑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어보련다.

 

아름답다를 입에 달고 사는 프랑스

닮고 싶은 프랑스 문화를 알게 되는 점도 좋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천지 만물 속에서 시시각각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찬미하며 서로의 미적 감각을 자극하는 오랜 언어습관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단다. 열정적인 모습도 좋다. 프랑스어에 ‘Je n’ai pas d’envie 앙비가 없어(간절하지 않아)‘ 라는 말은 전 괜찮아요쯤 되는, 권유를 차단하는 말이라지만 속뜻을 보면 간절한 열망만이 우리를 움직일 거라는 의미가 있단다.

 

코팽 바게트는 저렴하다

1970년대까지 바게트 가격을 국가가 매년 정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다른 책에서 목수정은 우리가 식구라는 단어를 갖고 있듯이 프랑스인들도 친구를 코팽(copain)(함께 빵을 나누는 사람)’이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우리가 쌀값을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인들은 지금도 바게트는 저렴하게 판다. 2023년 평균가 1유로에 약 80센티 길쭉한 것이나 60센티 통통한 것 2종을 판단다.

 

절박함의 정신분석학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살아남은 유대인 그룹 중 어린 나이에 레지스탕스 활동한 그룹은 우울증을 겪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전사라는 자의식이 그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한편, 우울증을 가장 심하게 겪은 수용소에 끌려갔던 아동 그룹은 대신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경우가 많다.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행복에 과잉투자한 결과이다.

 

이 내용은 매우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절박함은 사람을 성공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물론 궁지에 몰려 회생의 기회마저 잃어버리는 제 3세계의 수많은 역사와 비교해 보면 유대인들의 삶의 특수성을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상처를 노력과 성공으로 극복하려 애썼다는 이야기 말고, 스스로 전사로 싸웠던 이들이 우울증이 적었던 이유와 상관관계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강한 자의식과 자존감을 갖는 일은 성공이나 성취와는 다른 영역이다.

 

프랑스 엄마들에게 한국이 배워야 할 것

프랑스 엄마들은 마지막에 안아주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는 과정을 거친다. 아무리 어려도 얼굴을 마주 보고 화나지 않은 목소리로 게임의 규칙을 단단한 어조로 설명한다. 저자의 또 다른 책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나 <프랑스 아이처럼>에 소개된 이야기를 종합하면 프랑스 가정교육은 매우 엄격한 편이고 일관된 면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육은 공교육도 문제, 사교육도 문제이지만 가정에서의 교육은 더더구나 일관성도 없고 교육이랄 것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경향이 있다. 다정하지만 단호한, 그리고 일관성 있는 교육의 태도는 부모와 교사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정책의 연대, 박애와 복지

저자는 문화 발전에서 정책과 제도가 중요함을 말하면서 90년대 스크린 쿼터제를 언급한다. 어지간해서 집단행동이나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는 영화인들이 대거 거리로 나와 스크린 쿼터제 유지를 주장하는 걸 보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외국영화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건가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한국영화 발전의 바탕이 되었을 거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장하준 교수도 <맛있는 경제학>에서 했던 것 같다. 취약한 존재에게 공동체나 가정, 가장이나 리더가 생명줄을 붙들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국가가 펼치는 정책과 제도는 그런 역할을 한다. 자유시장경제니 적자생존을 아무 데서나 떠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정부나 지자체가 평등을 지향하면 만든 모든 정책에 솔리다리테(연대)란 말이 들어간단다. 프랑스 혁명 정신 중 박애의 현대 버전으로 봐야 할 듯하다고 말한다.

목수정은 결혼 대신 그와 거의 비슷한 효력이 있는 팍스시민연대계약을 했다. 저소득층에 정부가 지원하는 기초생활비를 활동연대수입이라고 부른다.

 

혐오와 저출산

한국에서 저자 소개 등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유럽에서는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유럽의 인종 쓰레기로 모는 4종 세트는 극우 인종주이자, 마초, 동성애 차별주의자, 유대인 차별주의자란다.

혐오와 차별은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야말로 혐오가 분열로, 결국 사회 파괴로 나아가는 대표적 사례일지도 모른다. 지금 뿌려진 분열을 씨앗으로 앞으로 더 대대적인 홍역을 치를지도 모른다.

 

마치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절반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남성들의 보편적 인식에 기대 아젠다를 이끌었듯. 젊은 여성들의 반정치 의식이 비혼과 출산 거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정책들을 남발하고 있는 현실처럼 이민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그치지 않으면 오래오래 엉뚱한 뒤치다꺼리로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하게 될 것이다.

 

갈등이 파도를 치지 않으면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땅 밑으로 곪고 썩는다. 지금의 남녀갈등이나 저출산 문제 등은 미투와 연관해 남녀차별의 쌓이고 쌓인 갈등이 폭발하고 떠오른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반드시 한 번은 겪어야 할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방인과의 갈등, 소수의 약자들을 대한 비뚤어진 시선의 문제들도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 일이다. 약자가 언제까지나 소수는 아닐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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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개정판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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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손으로 익히는 일이든 글자를 익히는 일이든, 진정한 공부는 본인의 열망에서 비롯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무지한 스승>에 보면 서로의 말을 알지 못하는 프랑스의 교사 자코토와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의 학생들이 만난다. 학생들은 결국 대역판을 놓고 스스로 프랑스어를 깨우쳐 간다. 이 책을 보면서 <더 리더>를 사전을 놓고 읽어가던 내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저런 과정이 가능할까, 에는 회의가 들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하는 동기가 없는 것이다.

 

딸 아이 이야기를 하자. 6학년 때부터 날라리 경계선에서 자그마치 4, 5년을 놀기만 하다가 급기야 고2 , 자퇴를 할까까지 고민을 하던 아이가 여름방학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대학을 꼭 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는 강남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쌓아 올린 과정을 따라잡기 위해 맨땅에 헤딩을 했다. 전자사전에서 영어발음을 찾아듣는 과정은 느리고 답답했다. 저렇게 공부를 하다간 재수하기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가 왜곡되었든 어쨌든, 저렇게 머릿속에 넣는 지식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든 어떻든. 그리고 아이는 자기 몸으로 스스로 깨치고 나온 알껍질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여,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을 때 그렇게 부딪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자랑스럽다.

 

다시 <무지한 스승>으로 가면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고 서로 측은히 여기는 평등한 능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곧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역량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쾌락 중 가장 달콤하여 무리의 모든 욕구 중 가장 절박한 것이다.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전제되고, 거기서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닌 머리와 글로 하는 공부만을 성공의 열쇠로 삼는 세상에서는 진정한 공부가 가능하지 않다.

 

 

너무나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 중에 인디언의 공부방식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 겨우 편입이 된 체로키 족 아이들이, 시험을 본다 하니 자기들끼리 책상을 붙여 앉더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라할 때는 항상 함께 힘을 합쳐해왔다는 것이다. 평가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국어 수행평가는 대개 뭔가를 해내야 하는 것인데 그때 능력보다는 해내는 과정, 과정에서의 성취, 그리고 성실성을 본다. 그러니 수행평가 아닌가? 이미 많은 것을 습득한 아이들은 그 수행평가도 대체로 잘하긴 한다. 그러나 의외의 능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있어 이 수행평가는 의미가 있다. 독해능력은 떨어지지만 토론을 잘 하는 아이, 토론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중재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 지필고사 점수는 낮지만 글은 잘 쓰는 아이, 책자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일을 잘하는 아이...

 

그러나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모둠활동을 싫어한다. 특히 수행평가를 두레로 하면 많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모둠이 공동 점수를 받으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가 누구냐에 따라 점수 편차가 심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폭탄인 아이가 자기 모둠에 들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경우도 많다. 그 아이들에게 먼저 이 과정 자체가 진정한 공부임을 설득시키는 일에 주력한다. 공동으로 행하는 수행의 과정이 능력 있는 아이들에게 고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리더십을 고양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진정 이 사회의 리더가 될 만한 아이들이라면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친구, 능력이 부치는 친구를 만나더라도 그들에게 맞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진정한 능력은 뭔가를 잘 만들고 발표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는 능력일 것이다.

 

고속도로 하이패스가 도입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반면 독일에서는 일부러 지하철 등에 매표창구를 자동화하지 않는다고 한단다. 일정 수준 인간이 일을 해야 할 자리를 남겨두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한단다. 일자리 창출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랑시에르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하냐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쩌면덕분에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끊임없이 위와 같은 문제제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채널의 <공부 못하는 나라> 독일은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묻는다. 학업성적이 높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럼 잘 사는 나라를 왜 만들어야 하는가? 행복하려고? 그래서 대학진학률이 높고 아이들 학업성적이 높은 우리나라는 행복한가? 아니, 잘 살기는 하는가 말이다. 결국은 몇몇 소수의 잘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우리 모두 놀아나는 것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 공부 잘하는 아이도, 중간인 아이도, 못하는 아이도 모두 불행한 나라. 여기서 대입시를 위해 매진하라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엄마들이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이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막아줘야 하고, 적어도 엄마가 스스로 아이가 지치도록 채찍질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 좋은 세상이라면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만 잘 갈무리하면 사회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막 돌아가고 있다면 내 자식만 잘 자라도록 바라는 모성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권력이나 힘이란 게 진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휘둘러지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권력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자들이 권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자에 대한 두려움과 부러움을 가질 때, 즉 환상 속에서 극대화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말하자면 교육과 권력의 상관관계가 그런 환상 속의 두려움으로 극대화되고 있는 사회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열패감은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근원에는 가진 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퍼트린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있고 그 공포에 우리 모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성은 힘이 세다고 하지만,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진정 수퍼맨의 파워를 발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모성이라면 그 힘을, 자기 자식을 채찍질하고 다른 자식들을 밀어내는 데 써서는 안 된다. 우리 머리 위를 뒤덮은 거짓 이데롤로기를 걷어내는 데에 그 모성파워를 써야 할 것이다. 평등의 공동체, 나눔으로써 배우는 세상, 무지해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식을 잘못 써먹어서 부끄러운 세상을 인식하는 그런 올바른 배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써야 그것이 진정한 모성애인 것이다.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 이성적 피조물로서의 자기에 대한 즉자적 무시의 늪에서 말이다. 문제는 해방된 인간들과 해방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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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허수경 지음 / 난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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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이런 소설을 좋아할까. 허수경의 어린 시절, 1960년대 시골 분위기 물씬한. 소설의 99%가 순우리말로 쓰인. 헤어진 누이가 산을 지키는 영험한 매의 가족과 함께 자라나고 매가 사람이 되었다가 매가 되었다가 하는 이야기. 소설의 서사보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시처럼 펼쳐지는 이런 책을 1분도 안 되는 숏폼 영상에 익숙한 우리 아이들이 읽을 수 있을까.

 

요즘 아이들 이야기를 좀 해보련다. 교사들이 글자로 읽는 교재보다 영상으로 수업 구성을 한 지는 꽤 되었다. 화면으로 보고 공부하는 데 익숙해진 어린 학생들을 위한 흐름이다. 최근엔 그 영상조차 너무 길면 집중하지 못하는 걸 발견한다. 2시간 정도의 영화를 보게 된다면 중간에 지루한 장면에서 엎드려 자는 학생이 생길 정도라 이젠 교사들 사이에서 긴 영화를 참고 보는 것도 좋은 학습이 되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아예 수업 시간에 들어와 있지만 약 세 시간 이상 읽어야 한 권을 읽는 독서수업에서도 이 책 저 책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아무리 쉽고 재미난 책을 가져와도 진득하게 앉아 읽어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꽤 많다. 그런 시대에 제목 <가로미와 늘메>부터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런 책, 우리 학생들이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을 내게 권한 사서 선생님은 어렵겠지만 꼭 읽히고 싶은 책’, 이라고 말했다. 그 오래된 정서와 말맛을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어 하는 사서 선생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레 미제라블>을 고전이라고 읽지만 우리는 영원히 19세기 프랑스의 뒷골목을 이해할 수 없다. 문학은 지금 현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모르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현재와 잇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청소년 소설이 꼭 21세기 학교와 학원, 거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만 담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새 학기의 한 권 읽기 책 목록에 이 책을 넣었다, 그리고 아름답게 이 책을 소개하여 읽고 싶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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