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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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정말 잘 쓴다고 감탄하게 만드는 사람이 몇 있다. 리베카 솔닛, 정희진, 은유. 유발 하라리, 유시민...

그 중 정희진은 박학다식함과 적확함으로 감동적인 글을 쓴다. 그런 정희진이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으로 꼽은 이가 있다. 놀라웠다. 고수가 인정하는 고수라니.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라니. 그가 바로 김혜리다. 그래서 당장 그의 책을 샀다.

읽으면서 놀랐고 매혹되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제자에게 선물했다.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그리로 초야에 묻혀 있었구나.(물론 그는 지금도 활발히 저작활동을 하는 기자이다. 초야에 묻혀있다는 것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아쉽게 생각해 한 말일 뿐이다)

 

그가 다루는 영역이 영화와 미술이라 대중에게 엄청 다정하지는 않다. 그러나 근래 이토록 아름답고도 섬세한 글을 쓰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정치사회적 의미 있는 글을 읽어야만 좋은 독서를 했다고 흐뭇해 하는 나인데도 그런 색채가 쏙 빠진 글을 읽고 감탄한다. 한때 신경숙이 풍미했던 90년대, 오직 그 문체만으로도 신경숙을 찾아 읽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 문장의 미학만으로도 김혜리의 글을 더 찾아 읽고 싶어진다.

 

글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아주 오래된,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을 새삼 한다. 역할과 기능이 빠진 글 자체라는 게 존재 가능하느냐는 질문, 그런 글이 필요하냐는 질문, 해묵은 논쟁. 그런데 김혜리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스스로 다시 질문하게 된다. 그는 소위 말하는 순수문학을 한 이도 아닌데 말이다. 정말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면, 안 팔려도, 영향력이 없어도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런 욕망, 아주 근본적인.... 욕망.

 

술은 행복과 불행, 섹시함과 분노를 모두 부풀리기에, 아주 잠시나마 삶이 꽉 차 있는 듯한 감각을 준다.

 

취기가 오를 때면 차오르는,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된 듯한 안온함이 여기 있다.

 

이런 문장들을 보면 김혜리는 혼자, 취했을 때, 생각에 잠겼을 때, 미지의 것으로 충만한, 그런 것들을 잘 아는 사람 같다. 나는 그의 문장 몇몇에 작은 깃발을 붙여 놓고 성우처럼 읽기 연습을 해본다.

 

우리는 사랑할 때 상대를 나로, 인간을 신으로, 기도를 율법으로 착각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매끄럽고 딱딱하게 경직돼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렇게나 혐오했던 군중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내 집에 손님으로 초대 받은 기분이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하염없이 기다리다 문득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최윤정 <노스탤지어> 연작에 부쳐)

 

죽음의 냄새와 질감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한 화가였다(카라바조를 일컬으며)

 

심한 통증이 엄습하면 우리는 갑자기 몸을 하나의 공간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자궁은 동굴이 되고 내장은 협곡이 된다. 격심한 감정은 혈관을 달리며 전신에 메아리친다. 영혼과 의식이 거주하는 우리 안의 차원 없는 공간이 불현듯 실루엣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욕망은 언제나 사랑을 참칭하며 상대를 나의 일부로 만들고자 한다. 은둔에 가까운 둘만의 생활 속에서 화가는 끝없이 통합의 환상과 분리의 고통을 오갔으리라.

 

개는 인간도 아니면서 이미 짐승답지 않게 됐다. 고양이가 은근한 거리를 둔 우정의 마스코트라면 개는 자아를 팽개친 애정의 표상이다. 고양이가 예술의 포즈를 가졌다면, 개는 때로는 비굴하게 매달려야 간신히 지탱되는 삶의 얼굴이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모두도 한 번쯤은 이 개처럼 연약하고 맹목적이었다. 고야의 <>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깊은 우물에 빠져 허덕였던 인생의 연약했던 한 철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의 뜻과 그 종착점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걷고 있는 이 길의 풍경을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

그날 밤 야마시타는 정녕 혼자였을 수도 있고, 깊이 고독했던 나머지 혹은 불꽃의 흥취가 도저히 남과 나눌 수 없을 만큼 충만해 사람 무리를 짐짓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야마시타 기요시 <불꽃놀이>에 부쳐.18세에 방랑을 시작해 밥을 얻어먹고 마을을 떠날 때면 작품을 남기곤 했다는 일본의 화가 야마시타에 대한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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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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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기란 무엇인가. 글쓰기의 유의미함에 대해서 은유, 정여울, 리베카 솔닛, 정희진 등이 이야기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버지니아 울프도. 누군가 나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세 번째 책이 나왔을 때. 바쁜 와중에 책을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물었지만 그 질문은 내게 나는 왜 글을 썼으며, 쓰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으로 환원되었던 기억이 있다. 나의 답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였다. 살아있음의 증명을 글이 대신해 준 것이었다. 어려서는 글이란 다른 예술적 재능들과 마찬가지로 타고나는 것이지, 범인들이 함부로 집적거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학을 공부하겠노라고 선택했지만 그냥 읽는 게 좋았고 나아가서는 가르치며 아이들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을 뿐이지 쓰는 게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천상의 문장은 타고나야 쓰지 갈고닦아 쓸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내가 제자들에게 문학이 곧 삶이 되는그런 삶을 가르쳐왔듯 나도 삶 속에 녹아 있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 것뿐이다. 소소하고 시시하고 사사롭지만 글로 담아내며 내 삶을 다독이고 조금이라고 괜찮은 사람이 되려 애쓰기, 힘든 일을 글쓰기로 위로받기,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세울 때 글쓰기로 주변을 다스리기, 등등

 

고미숙이 말하는 글쓰기의 의미는 나의 것보다는 좀 더 학구적이기는 하다. 일단 우리의 몸이 걷고 움직이며 살아가듯 우리의 정신은 글쓰기로 그런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변과 교감하기 위해서(독설적 글쓰기를 버렸다 한다), 아기가 직립을 위해 고개 들기를 하듯이 튼실한 일상과 거룩한 비전을 세우기 위해서,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주도하기 위해서,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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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동어미전
박정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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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댁은 화기가 뻗쳐오를 때면 늘 하던 대로 두어 번 숨을 고르고는 골내댁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이 사람아 성내지 마고 저 사람 심정을 살피게. 젊으나젊은 기 시집이라꼬 와가 허구한 날, 남의 빨래품에 방아품 팔아 늙은 시어마이하고 병든 서방을 봉양할라만 그 속이 얼매나 썩었을로. 저도 오죽 답답꼬 속상하만.... ’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이사람아 성내지 마고... 하고 자기자신에게 이야기를 나눈다. 융이 말한 자기화에 성공한 성숙한 인격이다.

그리고는 두어 걸음 물러서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골내댁의 손을 잡았다.

골내 새사람, 내 하나 물어봄세. 그래, 골내서 살 적에 남들 다 가는 화전 놀음, 자네 혼자 안 가이 그 속이 시원턴가?” 질문하며 설득하기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청풍댁이 골내댁의 언 손을 연신 주무르며 말한다. 청풍댁은 속으로는 골내댁의 골질하는 작태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해의 마음을 내오는 것이다. 어른은 이런 거다.

 

책에는 너무 많은 여성서사가 들어있다. 처음에는 골내댁이나 청풍댁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봄이 이야기를 하는가도 싶었다. 한참을 읽다가 왜 제목이 덴동어미전인가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는 덴동어미를 그저 엿장수로 동네 이야기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 정도라 생각했으니.. 알고 보니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되 끝끝내 강퍅해지지 않고 세상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인 덴동어미가 화전놀이에 가서 좌중을 이끌어가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그는 온갖 세상사를 짊머졌을 뿐 아니라 그것을 나름대로 극복한 해탈적 존재이며, 혼자 고난을 극복하여 영웅이 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아우르는 사회자이며 지도자 역할을 한다. 그런 인물 현실 세계에서도 남자들 서사에서도 흔치 않다. 더 놀라운 게 있다

 

덴동어머를 천하다 기구하다 배제하지 않고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멍석을 깔아주는 이가 동네 여성 지도자 역할을 하는 안동댁이다. 반상이 어우러지고 있는 자, 가난한 자가 함께 노는 대동의 세상, 비록 단 하루지만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해탈과 해원의 시간이 펼쳐진다. 고집 세고 권위주의적인 양반 남자들과 봄이를 탐하는 악한 의붓오라비도 나오지만 덴동어미가 겪은 남정네들이 모두 기구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단순히 남녀 대결구도를 만들지 않는 지혜로움도 엿보인다.

단 하루의 화전 놀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펼치는 신세한탄에서 사람들은 덴동어미의 기구함을 통해 오히려 힘을 얻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저리도 기구하건만 끝끝내 살아내는 그 힘, 그 모든 기구함을 노래와 각설로 풀어내는 긍정의 힘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녀들은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인간다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들 역시 청풍댁처럼 덴동어미처럼 너그러운 이해와 연대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친정 어머니가 읽을 책을 빌려달란다. 공부는 많이 못했지만 젊은 시절 서점할 때 책깨나 읽었던 양반이다. 총기가 좋아 젊은 시절 읽은 책이며 팔았던 책의 내용과 저자를 다 기억한다. 지금도 소일거리로 한자를 쓴다. 그런 어머니에게 좋은 머리를 물려받고도 동생들은 식구들이 모여 술 마시는 자리에서 어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대기업에 다니며 억대 연봉을 받는다고 자기들 하는 일의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면 어머니가 하나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대화의 중심을 고루 돌리며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줄은 왜 모르는 걸까. 그나마 엄마는 요즘 무슨 드라마 보셔?” 하고 질문을 던져 겨우 노인네가 말문을 열려 하는데 화제를 가로채서 회사 이야기를 하는 동생이 얄밉다. 엄마는 다 알아듣는다. 엄마가 너보다 책도 더 많이 읽는다, 이 헛똑똑이야....

 

어머니는 최근에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과 도올의 강의록을 읽었다. 그리고는 책을 빌려달란다. 나는 이금이의 <소희의 방>과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그리고 이 책 <덴동어미전>을 챙긴다. 이 험난한 여자들의 이야기에 안 그래도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76세 노모는 우울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10년 병수발 후에 2014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고, 혼자 쓸쓸해서 늘 너넨 짝꿍이 있지, 난 없다!’를 외치는 이 양반은 덴동어미의 기구한 삶에 반사적으로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으려나.... 내일은 엄마랑 족발이라도 시켜먹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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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일 - 지적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스탠리 피시 지음, 오수원 옮김 / 윌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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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중1 자유학기제 예술체육에서 드라마 이야기반을 운영했다. 수업이 대부분 원격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지난 겨울방학 내내 쌓아두고 읽었던 글쓰기 관련 책들이 좀 머쓱해졌지만 말이다.

 

드라마의 기본을 공부하고 간단히 구상도 해보는 수업이라 처음에는 글쓰기의 기초 비문이 아닌 문장에서 출발해서 문단의 구성이나 전체 이야기의 얼개(플롯)까지 를 간략하게라도 가르쳐야겠기에 글쓰기 관련 책들을 쌓아놓고 보았던 것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나야말로 체계적인 글쓰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 좋은 글은 그런 훈련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진정성은 좋은 기능성을 만났을 때 꽃을 활짝 피울 수도 있으니까, 나의 학생이든 나든 체계적인 글쓰기 학습은 유용하다.

 

이 책이 문장 공부에 꽤 도움이 된다는 평을 받긴 해도 영문학 중심의 책이다 보니 한국적 문장 구사에 엄청 도움이 되진 않는다. 다만 책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문장 하나를 문단으로 확장하는 연습을 좀 더 해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가령, 뜬금없이 독자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글쓰기 내 이럴 줄 알았다 , 뭐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든지 -, 사유만으로 펼쳐지는 문장이라든가 시간 흐름을 무시하는 방식이라든가 디킨스 식으로 대조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마틴 루터 킹처럼 구조화한 글쓰기 등등 다양한 글쓰기 방법을 훈련해 보는 것 말이다. 학생들에게도 ‘~했더라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써 보게 한다든지 주어 서술어(나는 일어났다)만으로 시작해서 각종 문장성분으로 확장하는 방식, 드라마를 보고 대사의 빈 부분을 채워 넣어보는 연습 등을 시켜보면 좋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어 공부를 하는 중이라 책 속의 영어문장을 감상하는 재미가 더 쏠쏠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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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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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진보도 경제성장도 부서지기 쉬운 생물권 내에서 일어나므로 과학과 경제가 전속력으로 달리면 그 충격파로 생태계가 불안정해진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부유한 미국인들과 똑같은 삶의 척도를 제공하려면 행성이 몇 개는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구뿐이다. 진보와 성장이 결국 생태계를 파괴할 경우, 흡혈박쥐와 여우, 토끼만이 아니라 사피엔스도 호된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생태계 붕괴는 경제파탄, 정치 불안, 삶의 척도 하락을 초래해 결국 인간 문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우리는 진보와 성장의 속도를 늦추어 그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유발 하라리의 강연 영상이 유명하대서 찾아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지 꿈에 그가 나타났다. 나는 손을 들고 어수룩한 영어로 질문을 던졌던가. <호모 데우스>에서 결국 우리는 데이터 교의 시대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결론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거냐고. 그의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깨고 나서도 생각은 이어진다.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뒤로 미루려 애를 써야 할까? 아니면 전기의 시대, 스마트폰의 시대를 처음 맞이했을 때처럼 뭔가 더 긍정적인 활용을 위해 마음을 열어야 할까?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현대를 데이터 교의 시대로 규명한 결론이 아니었다. 경제성장률이 0%가 되면 오히려 환경오염이 덜 된다는 구절이 가정 충격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까? 경제를 잘 모르고 경제적 변화에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사에서 올해 경제성장률이 떨어질 거라고 뜨면 괜히 덩달아 걱정을 하곤 했던 나의 무지가 우습게 여겨졌다. 코로나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질 거라고 하지만 그 역설로 지구가 깨끗해지고 인간이 아닌 다른 종들은 좀 더 살기 좋아졌다는 기사를 보면서 그래, 전염병의 두려움 뒤에서 사람들은 이제 한 번쯤, 왜 그리 경제성장에 목을 매고 살았는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이런 경제적 타격은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직격탄으로 오기 때문에 낭만적으로만 생각할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시적으로, 그리고 음모론적으로 경제성장이 모든 국가 행복의 잣대라고 생각하는 이들, 그리고 그 신화에 놀아났던 우중들에게는 분명 중요한 죽비가 될 것이다.

 

역사적 통찰이 중요한 이유

20세기 들어 질병 뿐 아니라 전쟁도 사라지고 있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전쟁은 당연한 일, 평화는 일시적이고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인간의 폭력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20세기에는 5%, 21세기 초에는 약 1%로 줄었다. 2012년 세계 사망자 수는 약 5600만 명. 이 중 62만 명이 폭력(전쟁 12, 범죄 50)으로 사망, 80만 명 자살, 150만 명 당뇨병으로 사망. 현재 설탕은 화약보다 위험하다.

 

2010년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총 100만 명, 비만으로 죽은 사람 300만 명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통찰의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높고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미래를 바른 방향으로 전망하게 한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말하고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제 사회의 형성 과정을 공부하고 미국 흑인들이 노예무역의 참상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들의 목표는 과거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통찰력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가령, 책의 도입부에 나오는 현대의 사정은 전에 생각해 본적이 없던 이야기라 놀라운 충격을 주었다. 태어나서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된 군부독재 정권은 분단을 빌미로 늘 전쟁을 위협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쟁의 위험은 실재하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국제적으로 곳곳에서 테러와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 20세기를 관통하였고, 21세기에도 핵전쟁 위협 등이 사라지지 않았다. 공포는 상존하지만 통계로 보면 그 이전 역사 속에서 늘 당연히 여겨졌던 전쟁이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사라지고 있다니.

 

민주주의가 유용한 이유

엄밀히 말하면 알고리즘과 데이터가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예견하고, 경고하고, 대비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정말 유발 하라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불확실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나마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집중해서 책을 읽는다.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라기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즉 자본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삶의 형태일 것이다. 그는 민중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 이유는 독재국가보다 민주주의 국가의 병사와 노동자들이 더 뛰어난 수행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서 전제주의를 벗게 된 게 고작 몇 백 년이다. 실제로야 어떻든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게 된 게 어디냐. 이럴 때일수록 대중의 민주주의 가치를 드높여야 함을 저자는 말한다. 동의한다. 이제는 계급이 사라진 자리에 부자라는 계급이 이전의 왕권보다, 전제주의 시절의 독재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되었지만 그리고 그런 부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본질은 어떠하더라도 선언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먼저 세우는 게 어디냐 말이다.

 

저자가 예견하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상상은 잘 되지 않지만 지나간 과거에 비추어 예상을 해본다면 이렇다. 스마트폰의 세상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를 예찬했다. 놀라운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것처럼 생각했다. 나는 조금 과장해서 그가 악마의 화신처럼 느껴졌다. 지금 사람들이 환호하며 경탄하고 경배하는 그 세계가 결국 인간을 옭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한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즐거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결국 사람들을 단절시키고 불행하게 할지도 모른다. 데이터교의 미래도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 환호하면서 데이터교의 미래 사회의 긍정성을 논하고, 더 발달시키기 위해 모두 힘을 합치고 정책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그런 행동들은 예견된 부정적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부정함으로써 자기합리화하려는 행동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거부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의 세상, 기후변화의 세상, 데이터 만능의 세상, 전염병 창궐의 세상 등등 예견은 되지만 막을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세상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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