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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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말줄임표......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너무 끔찍해서. 전쟁의 증언을 듣는 일은 어떨 때 유효할까.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서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할 때. 물론 그런 일이 꼭 필요한 사람들은 그런 책을 읽지도 않지만 말이다.

여자의 목소리로 전쟁을 증언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어쩌면 한일 위안부 문제가 이슈가 될 때 그나마 거의 최초의 여성적 관점의 전쟁 조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천수만 년 이래 늘 그랬듯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던 여성의 피해자적 관점의 증언이었다. 알렉시예비치처럼 참전했던 여성의 눈으로 전쟁을 증언하는 일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독보적이다.

 

왜 하필 여자의 전쟁 이야기여야만 하는가? 그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활동가의 냄새를 맡았다. 80년대 대학가에서, 그 이후에 많은 현장에서, 경색되지 않은, 살아 숨쉬는 활동가들이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의 피끓는 증언을 위해 단내 나고 땀내 나고 피비린내 나는 목소리로 열변을 토할 때, 결코 달변이 아니면서 말은 중간에 격앙 혹은 울음으로 툭툭 끊어지고 목소리는 쇳내가 나고 앞뒤도 없고 불안하고 그럴 때, 그런 이들을 보는 일이 감동스러우면서도 불편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난 기분이다. 글이란 게 보통 가슴이 끓어올라 써댔더라도 거듭 읽고 고치는 과정에서 순화되고 점잖아지는 법이다. 자기미화에 자기변명에 자기자랑에, 글은 점점 단정해지게 마련인데 이 사람의 글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설득하는 과정 그 자체가 날것으로 글에 다 녹아 있다. 이런 글은 또 처음 본다. 이 글을 꼭 써야 하고 이 책을 꼭 출간해야 하는 절박함은 작가가 를 알리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이 증언 그 자체를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것에 있음을 힘주어 말해준다.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읽히지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는 것 말고도 세상에 이런 목소리와 열의로 말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는 것, 그의 태도, 이런 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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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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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국어교사이지만 외국인을 가르칠 수 있는 한국어교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10여 년 전 서울교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을 듣고 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몹시 어려웠다. 함께 수강했던 이 중 필기에 붙은 이가 23% 정도였고 그나마 다른 기관보다 많은 것이란다. 면접도 흔한 통과의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근무하는 사립학교는 서울의 꽤 괜찮은 대학 병설학교다. 캠퍼스 안에 어학원이 있어 나도 영어를 배우려 몇 학기 다녀본 일이 있다. 한국어 과정도 있어서 들여다보았다. 내가 퇴직을 하고 이곳 한국어 강사로 일하겠노라 하면 받아줄까? 이런 상상도 하면서. <코리안 티처>를 읽어보니 전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나이 많은 이를 강사로 받을 이유가 전혀 없겠다. 그리고 교단에서 국어를 가르쳤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어를 잘 가르치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하여간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소설은 내게 매우 익숙하게 다가왔다. 전반적으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뒤표지에도 쓰여 있듯 고학력 여성 노동자의 애환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낯설지가 않다. 개개인의 서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처절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그리도 자기 삶을 힘겨워하는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라떼는시대의 무게와 청춘의 무게, 개인의 무게가 삼중고로 나를 짓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눈에 칼날을 세우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힘들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게 비교가 될까? 나는 지금의 청춘을 살고 있지 않은데 청춘의 눈으로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80년대는 적어도 취직은 잘 되지 않았느냐고 누군가 말한다. 그건 남자들 얘기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 여학생은 20% 정도밖에 없었다. 비사범대였던 우리 과에서 교직을 이수한 학생이 16명인가 그랬는데 대부분 성적 하위권이었던 열 명 정도의 남학생들은 졸업 전에 이미 전부 사립학교에 채용이 되었고 여학생 중 교사가 된 이는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나는 강원도에서 직접 우리 대학 출신 학생을 채용하고 싶다고 온 젊은 이사장(그 역시 남학생을 원했으나 그들은 모두 졸업 전 취업을 했기에)에게 뽑혀 강원도를 마다하지 않고 갔기에 교사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거의 만점에 가까운 우등생이었지만) 나중에야 자기 모교에 임용되었다. 여성으로서의 삶은 시대의 무게와 또 다른 방식으로 교직한다.

 

만약 이 소설이 각각의 개성과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캐릭터들의 연대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런 뻔한 구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많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므로. 많은 연대와 극복과 투쟁들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체념(묻어버림), 포기(혼자 우울증 약이나 수면제로 스스로를 달램), 소통 부재(모두가 낯설고 적으로 느껴짐)가 존재하니까. 그래서 아마도 어떤 이는 이 작품에 대해 그토록 혹평을 달았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 인물들이 다들 저마다 악다구니를 하고 있다고. 저마다 똑똑하고 저마다 아프지만 너는 어떠니? 내게 너의 힘든 사정을 말해봐. 우리 같이 생각해 볼래?’ 라고 말할 여지는 없는, 이것은 현실일 것이다.

사족을 하나 단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일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은 그러나 여러 가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안다. 소설 속에 지뢰처럼 박혀있는 부당하고 부당하고 부당한 일들에 모두들 스러지지는 않으리란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소설은 그렇게 단절적으로 끝나되, 나는 혼자서나마 아닐 거야, 라는 희망을 읊어본다. 스물다섯 살 난, 잠시 일을 쉬고 있는 고학력 실업자인 내 딸에게 이 책을 읽으라 권할지 말지는 좀 생각해 보려 한다. 이 소설이 생각거리를 줄지, 그녀의 우울을 부추길지 잘 판단이 안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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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의 말 - 파리에서, 밥을 짓다 글을 지었다
목수정 지음 / 책밥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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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의 글을 빼놓지 않고 읽게 되는 이유가 뭘까? 발랄한 진보를 표방하던 그 이의 정체성은 독특했다. 문화와 글쓰기, 정치라는 요소가 적절히 배합된 데다 프랑스 현지인이 되어 살아가는 이국적인 이력도 매력적이다. 프랑스어를 쓰면서 그곳의 문화를 말한다고 해서 자본주의적이고 사대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는 점도 독특하다. 가진 자들의 빈 곳을 들여다보는 안목도 있고 대안을 모색하는 힘도 있다. 목수정 같은 이들이 한국에서 그와 비슷한 위상을 유지하면 살 수 있었을까? 유럽이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말이다. 한국에서라면 어떤 인맥, 특히 작은 인터넷 매체라도 조직에 속해야만 기사다운 기사를 썼을 것이고, 그것이 족쇄가 되어 쓰고 싶은 글을 맘껏 쓸 수 없게도 되었을 것이다. 목수정은 자신의 이력으로 프랑스의 공동주택과 교육, 예술가의 삶을 조망하는 글들을 쓰고 그것을 책으로 내면서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 사회의 내면과 이면을 보고 배우게, 혹은 비판하게 도와주었다. 말 그대로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다리 역할을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음식 이야기다. ‘글 쓸 소재가 없었나? 혹은 잘나가는 작가를 출판계에서 기획적으로 우려먹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음식이야기라면 신물이 난다. 방송은 온통 먹는 이야기다. 많이 먹고 잘 먹으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안고 사는 편이라서 왜 이 사람마저 음식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거꾸로, 목수정이라면 다른 접근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에서는 식구(食口)’라는 말로 가족을 표현하고 프랑스에서는 코빵(빵을 나눠먹는다는 뜻)’이란 말로 친구를 표현한단다. 먹는 것은 사람들의 친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목수정은 음식이야기로 대동단결 혹은 연대, 혹은 공동체를 말하고 싶었던 거다.

   

    

동양에는 음식을 통해 건강을 다스리는 식약동원(食藥同源)'의 개념이 있다면 서양에서는 이제야 그런 관점에 관심을 갖는다면서 중세 마녀사냥이며 각국의 기대수명 이야기를 펼친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성평등 지수가 낮은 나라일수록 남녀 간 기대수명 차이가 벌어진단다. 우리나 일본처럼 여성의 지위가 낮은 나라에서는 6~7세 정도 차이가 난다. 쉽게 말하면 여성을 차별하는 나라의 할아버지들이 일찍 죽는다는 거다. 이런 통계수치는 내가 가르치는 남자 중학생들과 성차별토론을 할 때 좋은 학습 자료가 될 것 같다. 요즘 젊은 소년, 청년들은 자신들이 여성들보다 덜 똑똑하고 더 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정말로!). 피해의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성들의 삶이 힘든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야동은 즐기고 싶어 한다. 그것은 여성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논리의 모순을 토론으로 하나하나 혁파할 수도 없고, 만약 논리로 이긴다 해도(실제 남녀공학에서 이런 토론이 벌어지면 여학생들은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주장을 펼치지만 남학생들은 분노를 안으로 삭이는 장면이 펼쳐진단다) 남학생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머리로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거다. 무엇보다도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남혐여혐의 문제, 남녀 차별의 문제를 성 대결로 인식하는 것은 몹시도 안타깝다. 그래서 이런 수업 말미는 늘 여자들이 군대도 가지 않고 힘든 일도 하지 않으려 한다, 남녀차별은 남성도 당한다, 페미니즘은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본다, 이렇게 분개하며 남성과 여성이 각을 세우고 서로 다툴 일이 아니다. 젊은 남자와 여자는 모두 기성세대나 기득권자들에게 취업이나 경제적 약자로서 피해를 보는 측면이 있다. 모두 약자라는 것이다. 연대를 해도 모자랄 남성과 여성이 서로 맞서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볼까 생각해야 한다. 여성의 인권이 제자리를 찾고 여성이 권리를 누린다고 해서 남성의 권리를 빼앗아 오는 게 아니다. 남녀 모두의 인권이 존중받고 평등해져야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남성이 차별받는 부분이 있다면 그 또한 같은 논리로 이에 적용된다.” 이렇게 정리하곤 한다. 하지만 수천 수만 년 기득권자였다가 이제는 그 어떤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구박만 당한다고 생각하는 열대여섯 살의 남자사람들은 반격은 하지 않아도 내 말에 마음을 풀지 못하는 표정들이다. 다음 수업에는 남녀차별이 적은 나라일수록 남성여성 모두가 행복하게 산다더라는 통계를 같이 인용해 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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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나에게 건네는 말 - 내가 왜 힘든지 모를 때 마음이 비춰주는 거울
고혜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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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 칼 융

안으로 뛰어들지 않고 세상을 향하는 길은 없다. - 칼 융

 

융의 말은 모두 네 안의 무의식과 그림자를 주의해서 살피라는 뚯인 것 같다. 오늘 날에는 개인을 중시하는 근대화를 거쳐 개인의 열등한 부분과 욕망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 시발점이 융이었다. 물론 융 이전에 우리에게는 질척거리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선언한 프로이트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실체에 좀 더 섬세하게 다가가고 인간답게, 의미 있게 무의식의 존재적 가치를 논한 융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융의 이론 중에서도 꿈의 의미에 대해 고혜경이 특별히 정리한 책이다.

 

나는 나의 직업적 필요에 의해서도 심리학책을 열심히 읽고 있지만(학교에서 상담 업무를 맡고 있다), 사실은 나 자신 많은 꿈을 꾸고, 즐기고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영감을 얻기 때문에 내 꿈이 궁금해서라도 꿈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다. 당연히 꿈 분석에 공을 들인 융 이론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다.

 

고혜경은 혼자서 꿈을 다루고 싶다면 예술 작업을 추천한다. 꿈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꿈 내용을 기반으로 시를 쓰거나 춤으로 표현하는 등’. 나는 드문드문 일기장에 기록하던 꿈을 이 책을 읽은 이후부터는 아예 한 파일로 따로 저장하며 기록하고 있다. 다양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융 식의 해석을 찾아보기도 하고, 심지어 인터넷에 떠도는 동양식 해석(불이 나면 돈이 들어온다든지, 죽은 사람을 보면 좋다, 이런 해석을 보면 해석은 얕은 것 같아도 어딘가 분석심리학적 요소가 있다. 꿈은 반대라고 하는 것은 꿈이 주는 불길한 메시지가 사실은 당신 안에 풀어야 하는 불안, 욕망, 억눌림 등을 헤아리라는 의미와 상통하기도 한다.)도 찾아보면서 비교한다. 같은 꿈을 동양식, 프로이트 식, 융 식으로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책에서 나는 내 꿈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들을 찾아보았다. 가령, 나쁜 남자에게 쫓기는 꿈을 자주 꾸는데 그것에 대해 고혜경은 내 안의 억눌린 불안이 그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불안에 예민한 나의 성정은 그 자체로 날 불안하게 한다. 그렇게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나를 열심히 살게 하고 실수하지 않게 하고 글을 쓰게 만든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는 정체를 밝히라고 말하고 싶기는 하다. 그러고 보니 책을 쓰면서 이런 꿈을 덜 꾸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세우고 싶은 나의 존재감은 아마도 글 쓰는 일로 충족이 되는가 보다. 내 안의 거친, 상처받은 아니무스는 내가 낸 책 몇 권으로 양지 바른 곳에 얌전하게 드러나고 내 꿈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내가 많이 꾸는 꿈 중에는 꿈도 있다. 꿈속의 집은 나의 정신세계를 뚯한단다. 과거에는 위태로운 집, 잠기지 않는 문, 그 집에 누군가 침입하는 꿈을 꾸다가 점점 꿈속의 집이 넓어지더니 급기야 집안에 너무 많은 문이 있어 밤이 되면 잠그러 다니느라 애를 쓰는 꿈을 꾸곤 했다. 여전히 잠기지 않는 고장 난 문들이 많았고 집은 지나치게 넓은데 너무 많은 물건이 쌓여 있는 꿈, 때로는 물이 새거나 창틈으로 물이 스며드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마치 침대 머리맡에 10여 권의 책을 쌓아놓고 읽는 나의 현실생활의 습관과도 닮았다. 이 일 저 일을 벌여놓고 시간 날 때마다 조금 씩 조금 씩 수행하는 내 일처리 방식과도 닮았다. 결코 심심한 적은 없지만 영어공부 하다가 스페인어 공부 하다가 수를 놓다가 해금 연습을 하다가, 취미도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하는 내 놀이방식과도 닮았다. 가끔 나는 무언가를 이루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가 뭘까 궁금할 때가 있다. 영어공부를 한다면 하루 열 시간씩 6개월을 영어에 미쳐 살았다는 사람처럼 해야 효과가 있을 터이지만 나는 내키는 대로 하루 10, 20, 이런 식으로 공부한다. 물론 그렇게 곰실곰실 쌓아나가는 성과들이 의미가 없거나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꿈은 아마도 나에게 좀 더 굵직하게, 좀 더 큼직하게 삶을 경영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게 아닐까? 아니, 꿈은 경고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나의 전전긍긍을 그렇게 어수선한 집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해석하는 게 맞겠지.

 

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내 모습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한다. 전의식을 반영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현실과 다르게 보이는 현실인물들도 나의 욕구나 불안을 반영할 것이고 속에 만난 죽거나 죽이는 인물 역시 내가 현실에서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메시지일 것이다. 꿈속에서 보이는 위협적인 인물, 미운 인물들의 모습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위협요소이거나 스스로 싫어하는 모습이다. 그런 인물들을 만나면 물어보라고 한다. 왜 내 꿈에 나타났는지. 이름을 불러주고 말을 걸면 모호함은 정체를 드러내고 부풀려진 에너지는 수그러든다. 이와 같은 과정은 고혜경이 광주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꿈분석 작업을 할 때도 한 말이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씻김굿처럼 죽은이를 불러 못다 한 말을 하게 하는 의례까 죽은 자뿐 아니라 산 자를 치유하는 좋은 행사인 것처럼 꿈속 인물 즉 나의 무의식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결국 현실의 나를 위한 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꿈은 대개 모호하게 끝난다. 누군가를 찔렀지만 그가 죽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어디선가 떨어졌지만 박살이 나기 전에 꿈에서 깬다. 그런데 저자는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열어보라고 한다. 꿈의 결론을 위해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은 무의식을 만나는 일, 너의 정체는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 오래 묵은 불안 혹은 욕망을 들추거나 청소하고 해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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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특별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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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어디선가 들은 아름다운 구전가요가 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이제는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 모두 눈을 감고 생각하자

 

(중략)

산속에 사는 사람 감자 캐먹고

물가에 사는 사람 물고기 먹고

뒤뜰의 풀잎은 이슬 먹는데

별나라 사람들은 무얼 먹을까

 

쌍안경으로 별자리가 보이냐?

작사가도 작곡가도 알 수 없는 이 노래, 윤동주의 <눈 감고 간다>와 앞부분이 비슷한 이 노래가 나의 시심(詩心)과 우주적 상상력을 동시에 자극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 역시 태양을 사모하고 별을 노래하는 아이였던 까닭이다. 6학년 교과서 거의 끝부분에 실렸던 지구과학은 신비롭고 흥미로웠다. 학습을 해야 할 내용 - 태양계 별들의 순서나 거리 따위 도 재미있었지만 덧붙여진 별자리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진심으로 별나라가 궁금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가 과학연구학교였던지라 6학년 여름방학 내내 과학연수를 받는 교사들과 함께 과학교과서 전 과정의 실험을 다 해 보며 서울 어린이 과학경진대회 준비에 매진했다. 그때는 나름 과학 소녀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무렵 지구과학을 배울 때에는 엄마에게 천체망원경을 사달라고 졸랐다. 어디선가 당시 신세계 백화점 맨 위층에서 학습용 천체망원경을 판다는 정보를 입수해 엄마를 설득했던 것 같다.

엄마가 어렵사리 사온 것은 그러나, 천체망원경이 아니라 고감도의 쌍안경이었다. 엄마는 그것도 무척 비싼 것이고 백화점에 천체망원경을 팔지 않아서 대신 사온 것이라고 하셨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을 보았는데 당연히 별이 보일 리 없다. 고개를 뒤로 꺾고 하늘을 휘젓던 내게 보인 건 달님. 그런데 놀랍게도 달의 분화구가 다 보이는 게 아닌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달의 앞모습만 보는 게 지쳐서 그만 둘 때까지, 꽤 오랜 가을과 겨울의 시간 별자리 대신 달을 바라보면서 사춘기 초입을 지났다. 그때 엄마가 진짜 천체망원경을 사다 주셨으면 혹시 이과로 진학하고 천문학을 전공했으려나.

 

상상력이 풍부해야 과학을 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다 보면 과학은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정연함으로 끝을 맺을 것이지만 저자처럼 그 중간을 감성과 상상력으로 채우는 이들이 있겠다 싶다. 아니, 과학자야말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입증하는 그 과정은 상상력이 아니면 가지 못할 미지의 길이지 않은가.

가끔 자신의 우울의 끝을 우주로 날리는 학생들이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학생들 중에는 생각을 확장하고 확장하다 하늘과 별에 대한 궁금함으로 펼치는 이들도 있다. 상담실에서 만난 학생 중에 그렇게 우주에 대한 관심을 넌지시 드러낸 아이가 있다. 그에게 <코스모스>를 선물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어른이 보기에도 너무 두껍다(보급판도 자그마치 719). 아무리 아름다운 문체에,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라 해도 과학의 기초 상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지루할 것이다. 나 역시 어떤 대목은 중학교까지 열심히 공부한 과학상식에 기대어 갑자기 튀어나오는 유클리드나 피타고라스를 겨우겨우 감당하며 읽어야 했으니, 공부가 싫고 학교가 괴로운 그 학생에게 과학책을 건넨 게 과연 잘한 일일까? 하지만 나는 아무 데나 펼쳤을 때 여기저기 보이는 행성들의 사진이나 상상화라도 들여다보라고 이 책을 안겨주었다. 혹시 또 아는가, 우울이 극심할 때, 그러나 우주로 날아갈 수 없을 때 상상으로 별나라를 여행하듯이 이 책의 아무 대목을 읽으며 그 소년도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지.

 

우울 따위 우주로 날려 버려!

케플러가 자기 어머니를 마녀사냥에서 구해내기 위해 책을 썼다는 이야기나 칼 세이건이 집필할 때 사슴이 집 앞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어깨 너머로 그 원고를 들여다본(?) 이야기, 원시인들이 별자리를 보며 지구세상을 상상하는 이야기이며 인위도태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일본 바다에서 잡히는 사무라이의 얼굴 모양의 게 이야기 들은 그냥 그 이야기만으로도 흥미롭다. 과학은 논리가 아니라 꿈꾸기에서 비롯된 희망임을, 그래서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마치 문학도가 품고 사는 윤동주 시집처럼, 누군가의 손때 묻은 기타처럼, 어린 날을 위로해주던 그림책이나 애착인형처럼 그냥 품고만 있어도 따뜻하고 신비로운 그런 책이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곳이 아닌 먼 곳으로 가고 싶어 우울하다는 사람을 만나면 당장 이 책을 사서 베개로 삼으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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