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창고로 가는 길 - 박물관 기행 산문
신현림 글, 사진 / 마음산책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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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의 '세기말 불르스'가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뭐였는지, 사진이 조금 곁들여진 외국시모음집이었던가. 그녀는 솔직하다는 점에서, 한때 몹시 외로웠다는 점에서 나와 닮은 점이 있다. 게다가 자기를 미화시키지 않는다는 장점까지 있다. 이땅의 30대(이제는 40대까지?) 젊은 여성 문인들이 아닌척 하며 자기도취적이고 미화적인, 그리고 시니컬한 글들을 쓰면서 비슷한 자아를 가진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었고, 그리하여 많이 '팔아먹기'도 했다. 신현림은 그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재치와 감성까지!

그래서 이 매혹적인 제목의 책이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사진, 박물관, 시인, 이 결합. 거기다 '기행'. 그래서 급히 가지고 싶어하고 기다렸던 책이, 아 글쎄 신변잡기 일기장 같이 보이는 건 왠일일까. 물론 일기가 문학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여지껏 신현림의 글쓰기가 마치 혼자 누구도 의식하지 아니하고 쓴 듯이 써서 더욱 솔직하고 발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리하여 빛나는 것과 그리하여 부족한 것 사이는 백지 한 장 차이란 말인가. 사진도 그렇다. 그런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책에 보여줄 것으로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사진을 놓는 편집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사진들이 조잡해 보이는 것도 거슬린다.

신변잡기 같이 보이고 넋두리 같이 들리지만 그 안에 빛나는 감성을 보며 즐겁던 신현림의 글귀들도 기록을 위한 기록, 혹은 출판을 위한 출판, 어린 사람의 일기장 같이 느껴지는 부족함으로 보여 영 거슬린다.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괜찮게 여겼던 작가를 덜하게 보게 된게 아깝다는 것이다. 이 책을 만나지 않고 한참 후 그녀가 정성껏 쓴 다른 책을 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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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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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추리소설이 주는 재미, 긴박감, 논리적 해법, 이런 것들은 내가 평소에 즐기는 것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다른 추리소설도 이 정도를 갖출 수 있다면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라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 매혹된 것은 그런 부분은 아니다. 에코가 중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책을 읽으며 도저히 20세기에 쓰여진 책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중세로 우리를 이끈다.

아, 물론 중세 유럽, 카돌릭, 이것도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요한묵시록도 내가 성서를 읽을 때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니었던가. 흥미를 느꼈던 부분이 있다면 중세 카돌릭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해 갖고 있던 관점이다. 그리고 윌리엄이란 사람의 미덕. 종교인으로서뿐 아니라 어니 세기 어느 곳에서나 윌리엄과 같은 인물은 (실존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으로서)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선지자나 현자나 지도자로서 보다는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졌기에 더 매력있다.

또 하나, 에코의 이 문장력! 이 책이 길고도 길었던 것은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오래오래 즐길 수 있었던 축복이었다. 소설도 어찌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을 때 밑줄도 치지만 중요한 페이지를 접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책을 다 읽은 후 접힌 부분을 펴면 대개는 밑줄도 없다. 연필을 들고 그 페이지를 다시 읽으면서 대체 왜 이 페이지를 접었는지 생각해 본다.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안는 곳은 아마도 강도가 떨어지는 어떤 귀절이 있었을 터. 과감히 접힌 곳을 풀어버린다. 어떤 곳은 그 묘사 전체를 갖고 싶은 곳을 수도 있다.

장미의 이름, 특히 하권에 무수히 접힌 자욱을 본다. 아드소가 여자 때문에 흔들리는 '3시과' 부분은 미간에 얼음칼을 들이댄 듯 서늘한 아름다움마저 있다. 그 심리 묘사의 탁월함, 그 신비한 분위기, 갈등... 알 것 같다, 알 것 같다....

물론 에코의 문장이 탁월했겠지만 번역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훌륭한 글들도 오만방자한 오역으로 인해 우리에게 졸문으로, 어렵기만 한 글로 다가오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문학적 감각이 뛰어난 번역가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훌륭한 번역에 대한 평가와 보상에 인색하다. 그 만큼 오역과 날림번역이 많았던 것이 탓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책을 읽으면서 번역자가 누구인가 확인하고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관심으로 그가 많은 번역작이 있고 더러 소설을 쓰기도 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찾아 읽기도 했다. 소설이 내 취향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쨌건 문학을 하는 사람이기에 더 아름다운 번역이 가능했겠구나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창작품만으로 충분히 성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움베르코 에코도 이윤기씨에게 조금은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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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대장 존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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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학교 가는 길에 온갖 공상을 하고 뭐, 꼭 그걸 진짜라고까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정말 이러저러한,- 어른들이 보기엔 시시껍절한- 일들이 참으로 나름대로 중요할 수 있다. 있었다. 나도 그랬다. 말 잘 듣는 아이 축에 들었지만 온갖 공상들과 사건들이 내 머리를 참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른은, 선생님은 어떤가? 그림책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사각모를 쓰고 나오는 근엄한 선생님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존의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몰아부친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가령 그런 거짓말이 아이의 상상력에서든 불안한 현실에서든 강박증에서든 어떤 심리적 원인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번이라도 그걸 헤아려보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다.

게다가 벌을 준다. 300번 쓰기, 벽 보고 서있기, 빈 방에 갇혀 있기...그런 과정을 거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걸까? 학교 가는 길에 하마나 사자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점잖아지는 과정이 교육이란 걸까? 더구나 3,400번 똑같은 말을 베껴쓰거나 가두어지면서? 그래서 비로소 존은 '학교가는 일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까지 교화된다. 그리고 학교에 가보니 선생님은 고릴라에게 잡혀있다. 존은 자기의 상상력 속에 그림자처럼 남아있는 어린시절에게 그렇게 고한다. '학교에 고릴라 따위는 없다'라고.

이것은 한편 검은 옷과 사각모와 회초리와 벌과 쌀쌀맞은 말투로 상징되는 - 나도 교사이지만, 왜 고래로 항상 교사들의 이미지는 그런 것일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 마치 '정치인', '위선적인 종교인', '권위적인 교사' 식으로 고정된 부정적 이미지.... 인정한다. - 교사, 학교, 교육에 대한 똥침이요 복수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달라져가는, 단정해져가는, 세계가 좁아져 가는 존의 성장기록이기도 하다.
불쌍한 존 패트릭 노먼 멕허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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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왕 - 안데르센 동화 2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 지음, 이브 스팡 올센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한길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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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마도 크리스마스 즈음에 '눈의 여왕'을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따위로 본 기억이 있었던 듯하다.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지만 무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눈의 여왕과 눈의 세계가,그 이미지가 뇌리가 강하게 박혔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읽거나 본 것들의 향수는 지독할 정도로 강하지 않은가. 책 목록을 훑어보다가 '눈의 여왕'이란 제목을 읽자마자 그 이미지가 선연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저없이 샀다. 아, 물론 그 이전부터 안데르센의 알려지지 않은 동화들을 읽고 싶은 욕구가 있었지만.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악마가 만든 비뚤어진 거울이 산산조각나서 세상에 흩어지는 이야기도 20여년 전 쯤 본 기억이 난다. 카이와 게르다의 이야기는 어렴풋하지만... 나는 또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헤매는 이야기들 중간중간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 책을 읽고 눈물날 때가 더 많구나- 특히 게르다가 꽃을 많이 키우는 할머니의 정원에서 꽃들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 꽃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만 꽃들은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다.

게르다는, 꽃들의 이야기 마다마다에서 카이를 본다. 메꽃이 '그분은 오시지 않는 걸까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엉뚱하게 '그 분이란 게 카이야?' 라고 동문서답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쿡, 하고 웃다가 그만 가슴이 뭉클했다. 사랑에 빠지면,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세상 모든 이야기가 그 사람 이야기로 들린다. 그렇지 않은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이야기 중 어딘가에서 그 사람 냄새를 맡고 싶기 때문이다...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이야기는 모험담에 가까운 듯 보이지만 동화 속 인물들이나 이야기의 전형성보다는 소설과 같은 극적 구성이 더 돋보인다. 더구나 북유럽의 분위기. 아무리 안데르센이 유명하다고 해도 서구유럽과 북미적 정서를 어쩔 수 없이 더 많이 접해온 우리로서는 그의 동화 중에서도 그런 정서에 걸맞는 것들을 더 많이 만났나 보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면서 박노자의 노르웨이문화비평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별 관심 갖지 않았던 또 다른 미지의 땅이 궁금해진다.

어른들에게도 청소년들에게도 자꾸 동화를 권하고 싶다. 유치하다고? 동화이기 때문에 속도를 빨리 해도 좋고 좀 유치한 듯 보여도 무방한 가운데 더 깊고 더 상징적인, 그러면서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게 동화인 것 같다. 요즘 읽은 어떤 소설보다 짧고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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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공간의 환상 다빈치 art 5
안토니 가우디 지음, 이종석 옮김 / 다빈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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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구조, 환상적인 색감,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공간감. 돌이나 벽돌, 타일 따위는 보드라운 진흙과는 다르지 않은가? 그 단단한 것들로 이처럼 곡선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내다니. 어쩐지 나는 후앙 미로의 그림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감흥을 받았다. 물론 그것은 곡선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점과 화려한 색채가 비슷하다는 것이고, 가우디의 건축물은 복잡미묘해서 더더욱 신비한 무엇이 있다.

이 책만으로는 건축의 기능성과 가우디의 건축미학이 어떻게 접점을 이루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진을 허겁지겁 눈으로 좇으며 마치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감상하듯이 그렇게 책을 읽었으니까.오히려 글로 된 설명 부분은 나중에 다시 가우디를 만날 기회가 오면 정리를 하겠노라며 대충대충 읽어나갔을 정도이다. 그러나 가우디의 말 중에서 오래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집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그 위생적인 환경을 갖추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술적 환경을 통해 사람들이 좋은 품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물론 가우디가 특히 비중을 두고 힘썼던 부분은 후자일 터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전통 가옥이란 것도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의 집에서는 삶이 곧 예술인 경지의 건축미학을 볼 수 있었던 데 비해 가우디의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예술건축'은 우리의 것보다 고도의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천의무봉의 경지에는 한참 떨어진, 한 뛰어난 '인간'의 손놀림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잘은 몰라도 앞으로도 뒤로도 이 사람과 같은 '조물적인' 건축가를 만나긴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스페인에 가게 되면 꼭 그의 '집'들을 만나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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