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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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에는 그야말로 감각에 관한 모든 지식이 집대성되어 있다. 삶에 필요한 잡다한 지식을 얻는 재미가 있는데 문장 또한 원문을 찾아 읽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아예 필사를 하기 위해 따로 테이프를 붙여둔 페이지도 여럿이다.

 

나는 노안이 오기 전까지 굉장히 좋은 시력을 가지고 40여 년을 살았지만 반면 왼쪽 청력이 거의 없는 상태로 그보다 긴 세월을 살아야 했다. 감각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대개는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나빠질 때야 비로소 그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잃어버린 청력은 너무 오래라 그만 익숙해져 버렸지만 눈이 불편해지자 세상이 우울하게 느껴졌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이 없는 존재는 귀신이나 천사뿐이라고 말하면서 감각으로부터의 자유는 긍정적인 어떤 것, 초월적 평정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좋은 감각이 늘 우리를 행복하게만 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인공 이소골 수술을 하고 나서 처음엔 잡음과 소음이 너무 선명하게 들려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 적응을 하고 난 후엔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음악을 입체적으로 듣게 된 기쁨을 맛본다. ‘죽음과 강렬한 감각은 공포인 동시에 특권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감각은 그로 인해 행복하든 불편하든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준다. 하긴, 살아있다는 것 역시 공포이자 특권 아닌가.

 

책은 맨 처음 후각을 다룬다. 다른 감각과 달리 후각과 미각은 공통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내용들이 있다. 저자가 언급하는,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너무나 궁금하다. 아무리 멋지게 묘사를 한들 알 수가 있나. 가령 제비꽃 향기 같은 것.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그건지 몰랐을 것이다. 무슨 향수를 사야 할지 몰라서 제비꽃 향의 바디 워시를 샀지만 분명 나폴레옹을 행복하게 했다던 조세핀의 향이 이런 냄새는 아닐 것 같더라.

 

혁명의 열정을 담은 신경림 절창 <돌아가리라>에는 그이의 몸에서는 신살구 내음/취할 듯 진한 살구꽃 내음이란 구절이 나온다. 시적 화자는 땅을 잃어버려 반역과 혁명의 열기에 젊은 혈기를 싣는 젊은 농노인 듯 하며 그의 연인 연이의 몸에서 살구향을 맡았다는 것이다. 젊은 날, 좋아하는 여자에게서 살구향이 나더라는 이야기는 직간접적으로 많이 들어보았다. 나 역시 스무 살 시절, 남자친구 몸에서 항상 똑같은 비누냄새가 난다고 느꼈더랬다(결혼하고 그 향기가 사라졌다.) 가장 아름답고 열정적인 시절에만 만x을 수 있는 페로몬의 향기일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레 미제라블>의 마리우스가 그랬듯, 80년대 거리의 우리들이 그랬듯, 혁명의 열정은 늘 사랑의 열정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다.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만이 누군가를 미칠 듯이 사랑하여 없는 향기도 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또 그런 이들만이 혁명을 꿈꿀 수 있는 것이리라.

향기는, 냄새는 그 실체는 묘사하기도 어렵고 공감을 얻기도 어렵다는 면에서 허망하고, 아름답다. 저자 역시 냄새가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강하게 움직이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냄새는 수수께끼이고 이름 없는 권력이며 성스러움이다.’라고 표현했듯이. 학생들과 문학적 글쓰기 공부할 때 익숙한 냄새 설명(묘사)하는 글 써보기로 시작해 볼까 한다. 누구나 냄새에 대한 경험은 있으니까.

 

향수 이름에는 그 편안한 향과 반대로 강렬한 이름이 많단다. 데카당스(타락, 쇠퇴, 퇴폐), 포이즌, My sin, 오퓸Opium(아편) Indiscretion(무분별, 경솔) 옵세션(집착), 터부....

그걸 저자는 향수는 충격을 주는 동시에 우릴 사로잡고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면서 기쁨을 주는 불안이라고 표현했다. 그래, 그런 걸 매혹이라고 하겠지. 비 오기 전, 혹은 비 온 후의 바람 냄새를 좋아하는 데 그게 습기가 후각 능력을 높여주고 저기압이 휘발성을 만들어서 그렇단다. 예민한 감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학을 하게 만들거나 과학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전자에 해당하고 내 동생은 후자에 해당한다. 다른 요소와 결합하면 달리 발현이 되겠지만 나의 예민한 후각은 나를 더 감성적으로 만드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였나 보다. 인간의 후각은 점점 약화되며 중년일 때 가장 그러하단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비의 냄새, 숲의 냄새, 내 아이들의 냄새에 둔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마를 받은 아기들은 그렇지 않은 아기들에 비해 체중 증가 속도가 50% 빠르단다. 사랑의 손길이 중요하다는 것은 여러 실험으로도 입증되었지만 과학이 아니어도 그냥 이해가 되는 대목 아닌가?

나의 자녀들은 지금도 부모나 조부모에게 스킨십을 아끼지 않는다. 그애들이 어렸을 때 받은 것을 돌려준다는 느낌이다. 그게 아이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해서, 그리고 만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기도 해서 자주 만지고 안아주고 주물러주며 키웠지만 그렇게 키운 것이 늙어가는 우리에게 돌아온다. 참 감사한 일이다.

작년에 학부모 상담연수 대신 전교생 가정에 보낸 내 자녀 이해하기편지 시리즈에 당신은 오늘 당신의 자녀를 안아주었습니까?’ 질문을 던지며 하루 한 번 이상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 주거나 악수를 하거나 등을 토닥여주는 행동을 하시라고, 체크리스트를 보내 보았다. 답신은 의무가 아니었는데도 여름방학이 끝나고 1/5이 넘는 학부모님이 한달 간 열심히 쓰다듬어주고 다정한 말을 건넸던 체크리스트를 빼곡하게 작성해 보내왔다. 아이들이 가정통신문이나 학교에서 보내는 발신물들을 거의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리고 한 달 내내 그리 하는 부모님의 과제를 만나본 일 많지 않으실 학부모님들을 생각하면 굉장히 놀라운 분량이었다. 늙어서 다 돌려받으실 거다.

 

책 속에서 본 내용 중 촉각은 시각과 더불어 우리가 삼차원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부분, 그리고 실험에 따르면 손이나 팔을 잡아주기만 해도 혈압이 떨어진다’, ‘염주 돌리기 같은 것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뇌파의 패턴을 바꿔놓는다.’, ‘기혼이냐 독신이냐의 차이 없이 애완동물 키우는 사람들이 가장 오래 생존한다는 내용이 참 좋았다. 코로나 때문에도 그렇고 경계가 애매해진 가치관들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다정하게 다가가고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며 학교에 다니고 싶다. 옷깃을 살짝 잡으면 선생님?’ 하고 다가오는 아이들과 어깨를 맞대고 책 이야기, 공부 아이기 친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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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선의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
이소영 지음 / 어크로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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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의와 배려는 얼마나 힘이 있을까. 학교에서 어린 소년들에게 배려와 공감의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노라고 어느 시사주간지에 칼럼을 썼더니 세상 독한 댓글들이 달렸다. 이 험한 경쟁사회에 살아남아야 할 아이들에게 선생들이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나 가르치고 있으면, 그 아이들이 나약하게 자라 도태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부도덕한 교사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런 댓글은 어떤 정신 나간 한 사람이 자기 안에 쌓인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어쩌다 올린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댓글을 단 또 다른 사람도 있었다. 물론 아이들에게 그런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긍정적인 댓글이 더 많긴 했지만 나는 공감과 배려가 모두가 공감하는 가치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순진함에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중학생들과 좋은 낯으로 좋은 이야기들만 나누며 살아서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보고 있나 보다, 내가.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나가야 할 세상은 그악스러우니 남을 밟고 올라가라, 강해져라, 독해져라, 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아이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들을 것이며 아마도 스스로 몸으로 깨닫게 될 거다. 강해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강해진다고 해서 남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버리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배려를 가르쳐도 세상에 나가서 각박한 현실을 만날 텐데, 배려를 배웠다고 해서 나약해지지 않을 텐데, 잔혹한 전사를 키우듯 그렇게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란 말인가?

 

이 책, 사소한 따스함에 대해 말하는 이 책은 좋은책이지만 어쩌면 내가 받은 공격과 비슷한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 작디작은 선의가 세상에 얼마나 영향을 주겠느냐, 혹은 세상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그런 것도 선의라고 할 수 있냐, 이런 식의. 그런데, 그럼에도 나는 이런 글과 책들이 세상에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심지어 올해 새학기 중1 ‘한학기 한 권 읽기수업에 따스한 책상자라는 프로그램을 넣었다. 청소년 소설마저 상상력의 극대화, 각박한 현실의 상징적 반영이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어떤 소설들은 그래도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고 아이들에게 속삭여준다. <순례주택><이상한 의류수거함><시간을 파는 상점><나의 우주에게> 이런 책을 담아놓았다. 험한 세상을 이겨내는 마음은 결코 냉정한 마음이 아니다. 그렇게만 살아왔던 사람들아, 당신들이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 보아라.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면 따뜻해지지도 못한단 말이다. 저자 이소영은 배려를 위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따뜻하지만 단호하게 나는 냉소보다는 차라리 위선을 택하려 한다.’라고 말한다. 깊이 동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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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보르헤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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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보르헤스의 강연을 모아놓은 책이다. 어떤 작가에 열광하면 그의 강연이나 소소한 행적에도 관심을 갖게 되겠지만 문학성이 높은 작품의 저자일수록 강연은 실망스러울 수 있다. 문체가 아름다웠던 작가가 말은 평범한 경우도 있고(물론 말이 평범하든 어눌하든, 거장이 실시간으로 내놓는 말을 듣는 그 현장성만으로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걸 글로 옮겨놓으면 실망스러운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순수한 문학적 정신이 화려한 언변이나 현실적인 표현으로 훼손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어쩌다 이 책으로 먼저 보르헤스를 접하게 되었는데, 난해하다는 보르헤스의 장벽을 좀 쉽게 넘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아마도 보르헤스는 말과 글이 일치하는 사람인가 보다. 번역서이긴 하지만, 만약 이런 식으로 강연을 한다면 현장에서 듣는 이들에게는 그 음성 자체가 시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스페인어권에서 죽은 사람 중 얼마나 많은 이가 내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나는) 개인의 불멸은 믿지 않지만 우주적 차원의 불멸은 믿습니다.

 

이런 말은 내가 사춘기 때 했던 생각과 닿아 있는데, 영성에 관한 언설이기도 하지만 문학의 본질을 건드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현재는 항상 극히 작은 과거와 미래의 미립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 우리는 변하는 존재이자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 가변성 안에 영속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독서처럼 강연도 합작품이라고 말한다. 강연이 청중과의 호흡으로 합작품이 될 수는 있겠지만 독서는 내밀한 작업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책을 읽는 순간 저자와 만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어느 날은 막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연인처럼 느껴지고 어떤 날은 돌봐야 하는 늙은 부모같이 애틋하면서 지긋지긋해지기도 한다. 책과 내가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염오를 극복하기도 한다.

 

나는 나는 항상 천국은 도서관과 같은 것으로 상상했습니다.’ 보르헤스의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나의 책장을 바라보며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보고 흐믓해 하다가, 죽기 전에 저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든 적 있다. 오래 전에 나온 좋은 책 중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다가 매달 새롭고 재미난 책들은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 죽음의 시간이 다가옴을 알고 맞이해야 한다면 가장 아쉬운 것이 바로 읽지 못하고 떠나는 책들이지 싶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말대로 하늘나라에서 도서관을 만날 수 있다면 죽음도 나쁘지 않으리라. 물론 나는 내세도 다음 생도 별로 믿지 않는 편이지만 그 문학적 표현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서둘러 책을 읽어야겠다는 강박도 덜어준다. 지금 못 읽으면 죽어서 천천히, 오래오래, 영원히 읽자, 지금처럼 그냥 아무거나 읽고 싶은 것 먼저. 어디에 써먹어야 하므로 읽을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읽을 필요도 없고,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도 없이, 오직 즐거움만을 위한 독서.

 

에머슨은 도서관을 가리켜 마법에 걸린 수많은 책들이 있는 마법의 방이라고 말함.

그들은 우리가 부를 때에만 잠에서 깨어난다. 우리가 책을 열지 않으면 그 책은 글자 그 자체, 그리고 기하학적인 종이 더미일 뿐.

 

시에 대한 언급에도 격하게 공감한 부분이 있다. 그는 시란 이미 존재하지만 숨겨져 있던 것이라면서 시인으로서의 내 임무는 바로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어쩌면 나도 그것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라고 말한다. 나 역시 내 마음을 그대로 시로 쓴 것 같은 작품들을 만날 때, 이래서 내가 굳이 시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나에게 시인의 재능이 없어도 아쉽지 않다는, 시인이라는 존재들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는 충만한 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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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양장) - 사유와 열정의 오선지에 우주를 그리다 문화 평전 심포지엄 3
마르틴 게크 지음, 마성일 옮김 / 북캠퍼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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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때와 대학 시절 가슴 속에 깊이 품었던 질문은 바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 거기서 거기일 게 분명한 같은 구조의 존재가 선과 악의 끝과 끝을, 고귀함과 미천함의 끝과 끝을 달리는 일이 많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그 질문은 점점 옅어진다. 인생 거기서 거기다, 위대함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그토록 어마어마한가? 이런 회의도 들게 된다. 훌륭하다는 인물들 삶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나약함, 현실주의, 위선이 존재하던가.

 

하지만 베토벤을 읽고 들으면서 다시 그 질문을 돌이켜본다. 한없이 하찮기도 하지만 한없이 위대할 수도 있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그 질문을.

 

사실 베토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음악은 흘려들어 아는 정도였고 인성이 괴팍한 천재 정도로 여겼으니까. 마르틴 게크의 <베토벤>은 그 문장이 훌륭하다는 서평을 어디선가 보고 궁금해서였다. 문장 그 자체의 아름다움은 내 관심사 중 하나이다. 공부 삼아 읽었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책을 읽고 거기 언급된 그의 음악을 하나씩 찾아 들으면서 읽게 되었다. 게다가 집에는 남편이 사 온 얀 카이에르스의 <베토벤>도 있어 같은 장면이나 음악을 언급할 때 두 책을 함께 펴놓고 읽었다. 마침 이채훈의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말하자면 책 세 권으로 베토벤을 만난 셈이다.

 

제일 먼저 <에로이카>를 들었다. 나폴레옹과 얽힌 에피소드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새삼 나폴레옹에 대한 새로운 상념과 더불어 음악이 궁금해진 것이다. 책 속에서 독일 이상주의를 대표하는 헤겔, 휠덜린, 베토벤은 1770년생 동갑내기로 한 살 위인 나폴레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된 후 휠덜린이 쓴 <축제의 제후>는 가상인물이며 헤겔은 나폴레옹 체제를 기껏해야 이성 국가로 가는 과도기로 보았고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주려던 교향곡 <에로이카>의 헌정 표지를 찢어버렸다.’ 라는 내용을 읽으면서는 예술가는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새삼 한다. 거리는 조금씩 다를 수 있을 수 있으나 삶과 세상에서 동떨어진 예술은 없다는 게 나의 의견이고 예술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 대목에 마음이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나폴레옹은 침략자이고 독재자이며 권력욕의 끝판왕으로 평가받지만 이 세상을 근대로 나아가게 한 대단한 사람임은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헤겔이나 베토벤 등은 나폴레옹을 통해 세상의 격변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때의 격정은 베토벤의 다른 음악에도 자주 등장한다. 베토벤의 음악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사람의 마음을 웅장하고 비장하고 장엄하게 해준다. 실제로 그는 그런 가치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멀리서 프랑스 혁명에 동조했고, 나폴레옹이 그 혁명을 마무리하는 사람일 것이라 기대했다. 만약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에로이카>를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다면 베토벤은 자신이 숭고하게 생각하는 거대 담론 가치를 그대로 독재자에게 바치고 현실정치와 손잡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끝내 그런 권력욕과 타협하지 않았다.

 

<월광> <템페스트> 정도나 들어보았고 다른 교향곡도 잘 알려진 악장이나 테마 부분 정도나 들어보았던 내가 3, 5, 9번을 거쳐 6번까지 차례로 다 들어본다. 집에서 20년 넘게 자리만 차지하던 클래식 cd 세트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출퇴근 차에서 오롯이 나와 음악에 집중해 베토벤을 들으며 2021년 가을을 보냈다. 가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음악을 들으러 간다. 3c열 등받이 높은 좌석에 앉아 듣다가 졸다가, 이렇게 나만의 시간을 즐기곤 하지만 그건 음악을 감상한다기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누리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음악을 듣는다. 지난 40여 년 동안 아프고 바빠 다른 세계의 것으로 밀어두었던 음악의 세계로 들어간다. 2의 인생은 이런 것 아닐까?

      

<합창> 교향곡 가사를 보면서 그 장대한 스케일에 감동을 받았다. 당연하고 위대한 거대담론인데 뻔하지 않은 가치를 담고 있다. 실러의 시라고 한다. 뻔한 듯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향해야 할 가치들은 소중하다. 당연하지만 자주 이야기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개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삶의 작은 부분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때로는 인간 공동체의 가치를 함께 언급하고 공유하고 되새기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틴 게티는 우리는 음악을 관통하는 위대하고 실존적인 메시지를 감지해야 한다.’ 고 썼다. 동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기도하는 듯한 태도는 청자를 강요하지 않고 숨 쉴 수 있게 하는 모차르트의 연극적 태도와 대비된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왜 내가 베토벤에 더 끌리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즐겁게 살기보다 기도하듯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물론 이다음에는 모차르트를 살펴볼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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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1-2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꽃선생님 오랜만에 보게 된 리뷰 반갑습니다
베토벤에 관한 글 중 전 가장 최근에 본 게 “인간으로서의 베토벤”이었어요. 좋은 책이었어요. 리뷰 써 주신 이 책은 또 다른 서술로 읽어봐야겠어요. 문장도 좋다니 더 마음 당깁니다.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아프고 바쁘셨던 40년 지나 제2의인생 응원합니다. 이 책 담아가요. 건강하세요.

풀꽃선생 2022-01-23 16:18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 오랜만입니다. 제가 서재를 너무 소홀히 해서 서평을 몰아쓰고 있다가 프레이야님을 만나 얼마나 반가웠게요. 님의 서재에 들어가 둘러보면서 재미나고 예쁜 것 많은 북카페에 간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하루 종일 푹 빠져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수다도 떨 수 있을 것 같은... 새해에도 건강하고 좋은 글 좋은 마음 많이 나누어 주세요.
 
[전자책]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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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사가 되었지만 만약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공부해 보고 싶었던 학문이 건축학, 천문학, 그리고 미술이었다. 모두 재능이 부족했다. 가지 않은 길은 늘 아쉽고 그립고 신비로운 법이다. 책에서 위안을 얻지만 특히 미술 에세이, 과학 에세이, 건축 에세이를 좋아한다. 그 모두는 과학과 공학의 영역임과 동시에 문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니 심채경의 글이 나를 부를 수밖에. 한겨레 신문에 연재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어머, 이 사람,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맛있게, 황홀하게 읽고 난 후, 아쉬움과 그리움을 품고 있을 때, 그때 그의 책이 나왔다 하니 당연히 반길 수밖에.

 

우주를 향하는 그리움이 과학자의 것이든 문학을 하는 이의 것이든 같을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시로 썼을 것이고 어떤 이는 공식으로 풀려 애썼을지라도, 방식은 다를지언정 그런 일을 마음에 품고 시도를 한 시작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심채경은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아주 짧아도 좋으니 직접 쓴 문장만으로 보고서를 완성하라고 요구한단다. 그러면서 남의 업적을 내것인 양하는 태도는 국가나 가족에 대한 긍지를 느낄 때나 쓰는 것이요, 남의 글 베끼기는 타자 연습할 때나 하는 일이다. ’라 말한다.

최근에 나도 중2 학생들에게 설명문 쓰기를 두 달 정도에 걸쳐 천천히 가르치는 프로젝트 수업을 했다. 가장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형식의 완성도 높은 설명문 한 편을 길게 써 보면서 글의 형식적 틀거리만이라도 제대로 공부했기를 기대한다. 열다섯 살 소년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다양한 형식의 글들을 써야 할 것인가. 그 고통의 문턱을 넘기 위한 수련의 시간을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그러나 제대로 경험하게 하고 싶다. 설명문의 기본, 설명문다움, 문장의 기본 형식을 가르치는 일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심채경의 말 대로 학문할 때의 글은 형식도 갖추어야 한다. 다양한 공간과 시간을 넘어 그야말로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문적 글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해주는 글을 쓰는 일도 이렇게 힘겨웠다. 그 형식 하나를 숙지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 하필 그 수행평가를 진행하는 동안 심채경의 글을 읽으면서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이런 걸 가르쳐야 해.... 물론 나는 궁극적으로 좋은 문학적 글을 쓸 수 있는 학생들을 기르고 싶다만, 민주시민교육으로서의 기본 국어교육이려면 실용적 글쓰기를 바탕으로 해야 하니까, 문학적 글쓰기는 아련한 영역으로 잠시 미뤄둘지라도 말이다.

 

수성 이야기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연결할 수 있는 그의 지성을 축복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는 게 마흔세 번째인지 마흔네 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 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얼마 전에 누리 호가 발사되었다. 책 속에는 달 연구가로서 우리나라 정부가 달 탐사를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해왔는지가 기록돼 있다. 2007년에 노무현 정부에서는 2020년 달 궤도선을 발사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는데 2011년 이명박 정부가 그것을 2023년으로 미뤘단다. 그리고 그 다음 대선 토론에서 박근혜가 2017년으로 당긴다는 공약을 발표했다가 어찌어찌하여 현재로는 2022년 여름 발사가 목표란다. 하지만 누리호 발사할 때 뉴스에 나온 전문가 말로는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의 협의(허락?)라는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단다. 운전 중 마침 정차한 지점에서 누리 호 발사의 카운트 다운을 함께 목청 높여 외쳤던 나는,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는 뉴스에 옆 차에서 쳐다볼 정도로 격렬하게 박수를 쳤던 나는 잠시 달을 사랑하는 것과 달을 연구하는 것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잊고 그 모든 관계자들과 동지가 된 기분을 맛보았다. 달님은 참 가까이 떠 계신 듯하다. 남편 손을 잡고 뛰쳐나가 본 월식의 동쪽 하늘도 가까웠다. 미국의 허락이 더 먼 시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우리들의 별 목록에서 사라진, 그러나 마음에는 남아 있는 명왕성에 대한 저자의 글을 소개한다. 사뭇 자존감, 당당함, 의연함, 이런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명왕성, 그리고 그에 대한 심채경의 사유가 담긴 부분을.

 

고대의 인류도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해가 이끄는 시간을 따라 생활하고, 별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달을 눈으로 좇고 혜성이 나타나면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때도 명왕성은 제 궤도를 묵묵히 돌고 있었다. 우리가 행성이라 부르든, 왜소행성이라 부르든, BTS가 명왕성의 번호 134340을 노래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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