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합본)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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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 권의 책으로 거듭났지만 내가 읽은 구판 <소피의 세계>는 소위 벽돌책이었다. 청소년들에게 철학을 쉽게 알려주는 놀라운 소설이라는 화려한 명성 때문에 집어들었지만 이 두께 때문에 아이들이 압도되지 않을까 걱정했더랬다. 그리고 물론 나의 동시다발이책저책뷔페초밥골라먹기식독서 습관 탓이기도 하지만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어른도 단숨에 쉽게, 재미나게 읽을 책은 아니란 것이다. 중간쯤 읽을 때, 슬슬 책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할 무렵, 지인의 중학생 아들에게 이 책(물론 세 권짜리 새 판본이지만)을 선물한 나를 좀 반성하는 바이다.

어렵고 방대하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다니 조금은 쉬운 용어들로 갈무리를 했을 거라고 기대해 보지만, 구판에서는 어려운 용어들, 예스러운 표현들도 많다. 아무리 쉽게 풀어쓴다 한들 철학이, 그것도 서양 철학사를 망라하는 내용이 결코 쉬울 리 없다. 이 책은 반드시 어른이 먼저 읽고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눠보시라 권한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일단 어른이 되었지만 제대로 철학을 공부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읽으면 정말 좋을 만큼 서양 철학사가 잘 정리되었다. 최근에 넓고 얇게 지식을 정리해 준다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이보다 깔끔하게, 그러면서도 왠지 요약본을 읽는 것 같은 씁쓸함을 느끼지 않도록 정리된 책을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단지 지식만 나열하는 철학 강의가 아니라 어떤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세상과 철학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일관되게 이끌어 가면서 철학사를 정리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 철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단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올바른 철학적 탐구 자세, 삶을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될 철학적 탐구 자세를 간직할 수 있도록 철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얼마나 막중하고 귀한 일인가. 요슈타인 가아더는 그 자신 고등학교 철학교사로서 평생 이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의 교사이자 철학자로서의 고민의 집대성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성공했다.

 

이 책을 찬양하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특히 소설로서의 성취이다. 어쩌면 소설은 장치일 뿐 정착 철학을 전하고 싶었을 터이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함에도 어찌나 철학적인지, 새벽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나도 모르게 명상의 자세를 하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는....(과장 아님).

 

이 소설은 액자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하 소설의 스포가 있으므로 아직 전반부를 읽고 계신 분이라면 내 글은 여기까지만 읽으시고 책을 다 읽은 후 나와 공감의 끄덕임을 나누길 바란다) 주인공 소피는 사실 유엔군 소령이 자신의 딸 힐데에게 철학을 알려주려고 쓴 소설 속 주인공이다. 문제는, 소피는 자신이 그저 현실 속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청소년에게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재미있는 구조적 장치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한다. 종교적 신이든 자연 그 자체이든, 우주의 물리적 질서이든, 나를 있게 하고 살게 하고 결국은 죽게 할 어떤 존재, 우리 스스로의 의지를 뛰어넘는 거대한 어떤 존재에 대한 궁금함은 모든 인간과 생명의 근원적 질문 아닐까? 소피와 소설의 작가는 마치 인간과 신(자연)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때로 인생은 누군가의 조종과 농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거대한 매트릭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어린 아이들이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해보는 상상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영화로 승화된 상상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은 그런 고민 자체를 종교적으로 구조화했지만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세계와그 세계 속 등장인물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결국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작가는, ‘내가 지금 나라고 느끼는 나는 진짜 나인가, 아니면 누군가 만든 존재인가? 나의 행동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떤 거대한 존재의 조종에 의한 것인가?’라는 철학적 고민을 자기 작품 속에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그 사실은 책의 말미 무렵에나 밝혀진다. 그전까지 그저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철학사를 열심히 설파한 크눅스 선생과 요슈타인 가아더의 노력에 경탄했지만 이런 구조를 알게 된 후에는 작가의 천재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인 소피와 크룩스 선생내가 소설 속 인물이라니! 내가 실존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종당하는 존재라니!’ 하는 존재론적 깨달음과 괴로움은 결국 그들을 만든 작가, 즉 힐데의 아버지인 크낙 소령의 몫이기도 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 역시 역시 요슈타인 가아더가 창작한 인물에 불과하니까. 이 질문은 끝이 없다. 요슈타인 가아더도 역시 누군가의 창조물일지도 모른다이 책을 읽은 나도, 당신도...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서구의 시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 배경이 없어도 나의 근본을 사유할 때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영화 <매트릭스>는 기독교적 색채를 니체적으로 전복시키고도 같은 질문을 완전히 새롭게 구현해 현대인들의 실존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나.

이제 곧 열릴 인공지능의 세계에는 이보다 좀 더 치밀하고 좀더 공허한 존재론이 난무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한때는 께서 그걸 말해주실 수 있으리라 믿었고 인간의 시대, 계몽의 시대에는 철학자들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보자했으나 이제 곧 AI사실은 내가 니 애비다라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

 

크녹스의 말 : 전혀 다른 작가가 어딘가에서, 딸에게 줄 책을 쓰고 있는 유엔군 소령 알베르트 크낙에 관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니?

 

 

묻는 자는 가장 위험한 인물

어쨌든 소설은 크눅스 선생이 드문드문 소피를 만나(처음에는 편지로) 철학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선생은 소피에게 철학적 질문의 출발은 너는 누구니?’,‘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지?’에서 시작된다면서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위 질문을 포함하여 어떻게 세계가 창조되었는가. 사건의 이면의 의도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는가? 이런 해답은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 소피에게 던져진 질문은 나 역시 나의 학생들에게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다. 국어 수업 중에 가끔 토론을 하지만 저런 철학적인 질문을 풍부하게 이끌기에는 수업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가끔 언론의 진실성에 대해 사실이면 곧 진실인가?’ 혹은 사춘기의 특성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저자 셀리 케이건이 던진 질문들 육신이 없어도 ’‘나는 존재하는가? ‘라고 부를 때 그 존재는 육신인가, 뇌인가, 영혼인가, 기억인가?’ 등의 질문을 던져 토론을 유도해 보기도 하지만 매우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토론수업이 꼭 필요하지만 쉽지 않아서 몇 해 전에는 바칼로레아 논술토론반동아리를 운영해 본 적이 있다. 기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주제 중 중학생에게 적합한 주제들을 골라 토론을 해보았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서는 도덕과 사회 시간에 토론 수업을 이끄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토론수업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이 경쟁과 성취 중심의 대한민국 청소년들도 철학적인 청년들로 자라나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 중 원자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존재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은 묘하게 인간사의 고뇌를 불식시켜 준다. 어차피 원자로 돌아갈 것을, 그리고 는 사라져도 나를 구성했던 원자는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을..... 허무할 것도 없고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인생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누만. 이 책과 동시에 읽고 있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좀 다른 접근이긴 하지만 허무하므로 인생은 치열하다.’ ‘내가 저 먼 우주의 한 줌 먼지로 사라지더라도 아쉬워하지 말라말한다. 한 사람은 유물론자이고 한 사람은 절대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이긴 하지만 거대한 원칙 앞에 한없이 작고 작은 인간 존재를 깨닫게 해 준 철학자들로 인해 우리는 유한한 인생의 고뇌를 조금은 놓을 수 있다.

 

다른 철학책과 달리 마음에 남은 부분이 있다면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유사성을 말하는 장면이다. 둘 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문답법의 거장이었고 권력자들에 대항한 비폭력주의자였다는 것, 그리고 부당한 재판과 사형을 당했지만 사면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소크라테스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지역과 시대를 넘나들며 진정으로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은 또한 이 질척거리는 삶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작가는 소크라테스를 확신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고 무관심하지도 않았다.’고 표현한다. 아우렐리우스도 그러했고 예수 역시 죽음 앞에서 인간적이었다. 진정 큰 사람들은 함부로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오만방자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방대한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다루는 철학이라 말하는 것은 결국 서양철학이라는 것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은 서양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제자라곤 함께 사냥길에 나선 어린 마을 청년 몇이 다인 소박한 문명의 마을 지도자들 중에서 아우렐리우스 못지 않은 우주적 존재론을 말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소피는 나와 비슷한 듯 조금은 결이 다른 불편함을 말한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등장한 여성철학자 시몬 베이유를 공부할 때 소피는 남자 철학자들은 모두 그들 고유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 관심은 실제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인간은 모두 중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서. 나 역시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서 노동과 땀냄새가 없는 귀족 남자들의 윤리를 지금 시대에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를 고민했다. 소피는 삶은 임신과 출산으로 시작되는데, 지금까지는 그들의 철학 세계 속에는 아기 기저귀와 빽빽거리는 울음 소리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역시 소피는 자신의 이름답게 지혜롭다. 소위 철학사들은 늘 서양, 강자, 남자 중심으로 펼쳐졌다. 남아 전해지는 게 없는데 무엇을 어찌 다룰 수 있겠냐고 항변할 수는 있지만 철학사를 고찰할 때 늘 왜 약자와 노동자의 관점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옳을 것이다.

 

책이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로 끝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 실존주의는 결국 이 세계가 어떻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되돌아갈 그런 영원한 본성은 없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또 자기가 언젠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리고 삶에 대해 아무 의미도 인식할 수 없을 때에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사르트르는 그 불안 때문에 더더욱 삶이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거대한 실체 앞에 작디작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떠오른다. 2십억 광년의 고독을 느꼈던 다니카와 순타로 시인과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고뇌했던 박정만의 시세계가 떠오른다. 그렇게 이 책은 철학에서 시작해 우주 이야기로 끝난다. 신이든, 자연신이든 우주물리학이든 인간의 존재는 하염없이 작고 작위적이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철학하는 책, 소피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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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 낙인과 혐오를 넘어 이해와 공존으로
나종호 지음 / 아몬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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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지 말자고 주장하는 정신과 의사의 글이다. 나종호 선생은 선택지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가묻는다. 마치 개인의 의지에 따라 하지 않아도 되었을 선택을 한 것처럼 표현하지 말라는 저자의 주장에서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일갈한 에밀 뒤르켐이 떠오른다.

 

학교 상담실에서 자살 위험 학생을 상담할 때 자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는다. 처음에는 그 서약서가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됐다.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것도 무서운데(너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니?라고 어떻게 묻지?), ‘자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자.’라고 말하는 일은 쉬운가. 하지만 요즘 전문상담사들은 그렇게 상담하라고 교육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살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결국 자살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생각 단계에서 그것을 소리 내 말하고 의논하고 위로받고 치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허망해 보여도 자기 글씨로, 자기 목소리로 자살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라고 말한 사람은 스스로의 약속에 책무감을 느낀단다.

 

죽고 싶다는 말의 진심은 어느 정도의 비율, 어느 정도의 깊이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의식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심인지는 본인도 모를 일이다. 강렬한 살고 싶다가 죽고 싶다는 의식으로 발현된 것일 수도 있고 단지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죽고 싶은 기분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정말, 더는 갈 데가 없다는 막막함에서 아주 근원적인 궁극의 극단 앞에서 진심으로 죽음을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살 시도자, 혹은 성공자 중 정말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조하지 말아달라고 생각할 사람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그 방증이 자살 시도자들이 깨어나면 하는 말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란다.

 

책에 의하면 자살 생각에서 시도까지의 시간은 10분이 걸린다 한다. 대개 그 자살 생각이라는 것이 지속적이고 근원적이기보다 충동적으로 불쑥불쑥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심신이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본인도 주변 사람도 그 위험을 못 느끼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불쑥 올라올 때 주변에 자살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들이 놓여 있지 않은 것도 중요하단다. 자살을 도울 물건들을 찾는 동안 마음이 안정되고 생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물건들을 치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총기를 보이지 않게 치우거나 자물쇠를 채워두는 것, 뾰족한 것이나 밧줄 등을 멀리 두는 것 등도 필요한 시도란다. 정부에서 자살 예방의 방법으로 번개탄 판매를 금지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소했지만 저자는 그것이 아주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책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뉴욕의 사례들을 다루고 있지만 마국보다 열세 배 (10만 명당) 자살자가 많은 한국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많다. 나는 남자중학교에서 20년 넘게 상담 업무를 맡고 있다. 학교 상담에서 자살 위험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학생이나 학부모 모두 자살 고민이나 시도 등의 문제를 학교에서 아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감추기 바쁘다. 상담 과정에서도 학교에서 만나는 상담사를 선생님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만난 자살/자해위험 학생(혹은 가정)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발견하는 자살 생각 학생 중에는 심각한 경험을 원인으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왕따 당한 일이나 가정에서 부모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상담 내용은 비밀에 부치지만 범죄나 자살과 관련된 내용은 학부모에게 고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학부모 상담을 병행하고 서로 몰랐거나 오해했던 부분에 소통이 이루어면서 학생의 자살 생각이 줄어드는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러나 심각하고 근본적인 상처(부모의 학대나 심각한 상실 등)가 원인이었다면 학교 상담실이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전문적인 상담이나 치료를 권유하는 일뿐이다.

 

지속적 애도 장애라는 공식 진단명이 있다 한다. 상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용어란다. 당연한 것 아닌가? 실연의 상처가 깊어도 오래 가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잃었다면 그 정신적 충격은 가히 병을 부를 만하지 않을까? 시의성과 무관하게 쓰인 이 책에서 발견한 이 구절이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는 이태원 참사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1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고 믿기지 않는다.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더 놀라운 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언론이 이태원을 언급하지 않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은 기억말고는 없다. 덜 아픈 죽음이라도 자꾸 그들에 대해 말하고 기억하는 것보다 좋은 추모는 없는데 하물며 허망하고 무도하고 억울한 죽음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세월호도 아팠는데, 그나마 세월호 사건은 끊임없이 부정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슈화가 되어 그나마 덜 잊혀지기라도 했는데 어떻게 이태원 이야기는 이토록 쉽게 잊히는 걸까. 누가 언급하지 말라고 으름장이라도 놓은 걸까? 부모들은 어떻게 이 영원히 극복될 수 없는 슬픔을 위로받는 걸까? 함께 뜨개질을 하고 아이들 교복을 입고 연극무대에 서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함께 팽목항에 들러 같이 소리쳐 아이들 이름을 불렀던 세월호 부모들은 그래도 그렇게라도 연대와 애도를 함께 했겠지만 이태원의 부모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 무도한 세상에서...

 

칼 로저스는 자기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상담자를 만난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단다. 그런 존재를 만나는 일은 인생의 귀한 경험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나처럼 어린 학생들을 만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의 눈빛과 몸짓으로 그 어린 사람들이 보내는 상처의 사인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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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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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아픈 이야기도 싫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늘 해피엔딩인 권선징악의 세계도 싫다. 아니, 나는 그냥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 소설은 열심히 읽는다.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어쩔 수 없이 읽어야만 한다. 특히 소설 읽고 노래가사로 재구성하기라는 수행평가를 하려면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가지고 들어가는 50여 권의 소설(해마다 업그레이드 된다)의 내용을 내가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책 소개를 할 때 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하고 대화를 나눌 때 소설 속 상황을 잘 알아야 흥미를 지속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평가를 할 때 소설의 내용이 노래 가사에 잘 반영되었는지알려면 내가 당연히 소설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 학교 도서실 사서 선생님은 이런 나를 위해 끊임없이 새로 나온, 혹은 새롭게 발굴된 좋은 청소년 소설을 권한다. 다른 책을 한아름 빌려가는 내 손에 지난 가을 덥썩 쥐어준 책이 이 <경우 없는 세계>이었다. 작가의 이름이 낯익다. 화제작이라 하여 읽은 <유원>의 작가 백온유다.

 

우리 학교는 서울 시에 몇 남지 않은 사립 남자중학교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점점 그렇게 변해가기도 하지만 특히 청소년 소설에는 남자 청소년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별로 없다. 실제로 책을 읽는 비중도 여학생들이 많고 쓰는 이도 그러하다. 젊은 남자들의 서사는 게임의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있나 보다. 그래서 나처럼 남자 청소년들과 문학을 가르치는, 요즘 세상에 좀 희한한 직업을 가진 이들은 이래저래 생각할 것도 많고 찾아볼 것도 많다. 전작 <유원>도 대단한 서사와 문체로 쓰이긴 했지만 여성 청소년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니 좋은 작품이되 우리 학생들에게 읽히기에는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그랬던 경험 때문에 작가 이름을 보고 머리에 (우리 아이들이 이 책을 좋아할까?) 물음표를 달고 읽기 시작했다. 주로 출퇴근할 때 지하철을 이용하는 날 책을 읽는데, 두 번째 책을 들고 나온 날엔 길지 않은 정거장을 놓칠 뻔했다. 책 속 이야기, 치밀하고 처절하다. 시작할 때 펼쳐지는 피폐해진 쓸쓸한 청년의 아픈 이야기가 고통스러운 서사가 읽기 싫어 소설을 멀리하는 내게 또 불편한 마음을 준다. 그러나 그가 자동차 자해 공갈단이 된 한 청소년을 거두는 이야기에서부터 열심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가출 청소년 이야기를 왜 쓰고 싶었을까? 작가의 어떤 경험치가 그런 주제 의식에 맞닿았을지 궁금해 하다가 나 역시 학교를 떠난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안타깝고 궁금한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

비교적 평화로운 우리 학교에도 한 해 한두 학생씩 불편한 유예(의무교육인 중학교 교육을 마치지 못하는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면 자퇴가 아닌 유예가 된다.)가 발생하는데 그렇게 학교를 떠나 어지간해서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정말 궁금하다.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아주 드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도 그들의 소식을 모른다. 소식이 들려온다 한들 소년원에 갔다. 보호관찰 중이다, 정도이다. 전국에서 한해에만도 수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는데 그 중 대다수가 가정폭력에 시달리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거나 돌봄에 방치되어 범죄의 길에 발 담그는 경우, 혹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 학교밖 청소년들에 대한 걱정이 나를 사로잡은 것처럼 백온유 작가도 가출한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그들의 내밀한 삶과 상처는 무엇인지 고민했었나 보다.

 

가출의 이유도 다양하겠지만 주인공처럼 얼핏 안정적으로 보이는 가정에서도 청소년의 등을 떠미는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처럼 어떻게든 올바르게 살아내려 애쓰는 아이들도 많겠지만 본의든 아니든 일탈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일이 더 많다. 이 책은 그런 아이들의 핍진한 세상을 집약해 보여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내려는 아이 하나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아무렇게나 막 살아버리려는 주인공 인수의 손목을 잡는다. 인수가 나빠지려 할 때마다 뒤에서 가만히 잡아당겨 주던 경우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을 때, 홀로서기를 애쓰던 인수는 거리를 떠도는 이호를 자신의 옥탑에 이끌어 먹이고 재움으로써 경우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호에게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말라고, 그래도 네 곁에 다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알려주려 애쓴다. 어쩌면 그런 힘들이, 그런 손 하나가 우리가 아이였을 때 우리가 더 불행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 많은 나쁜 것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좋은 사람만으로도 세상은 살아지고 나는 더 나빠지지 않기도 하고 그런다. 그걸 보면 착하고 좋은 것은 얼핏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을 지탱하는 정말 힘센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경우처럼, 그리고 이제 인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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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입문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크리스토퍼 원 지음, 김요한 옮김 / 서광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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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는데, 이 정도 살아보니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은 인생의 이치가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산 날보다 남은 날이 적다 보니 죽음에 대해 자꾸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의 말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철학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요즘 철학을 궁금해하는 이유가 저런 이유와 맞닿아 있는지 어떤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그냥 겉으로만 설명하자면 철학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도 되는 걸까, 늘 걸렸던 마음을 이제 조금이나마 정신적 여유가 생겼을 때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피의 세계>에서 소피가 일갈했듯이 서양의 중년 남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그 철학이라는 세계에 반감이 느껴진다. 기득권의 가치를 반영한, 노동을 모르는 사유만의 세계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대체로 정치권력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민중이 삶과도 가깝지 않은 그 철학이라는 세계, 아니, ‘서양 철학이라는 세계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아 공부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부채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어쨌거나 비판을 하든 수용을 하든 뭘 알아야 할 수 있을 것 같아 좀 읽어보려 애쓰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문화가 다르고 번역의 높은 담을 넘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사유가 사유를 낳다 보니 어려운 말들이 춤을 춘다. (어쩌면 철학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떠들어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이러저런 철학 개요서들을 읽을 때마다 늘 등장하는 이름, 아리스토텔레스. 그에게 맨 처음 매력을 느꼈던 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였다. 정작 제대로 된 연구가 있을까 싶을 만큼 방대한 저서를 남긴 사람이다 보니 어딘가에 알려지지 않은 저서가 더 있지 않을까상상의 여지가 있다. 거기서 비롯된 상상은 소설의 근간을 이루었다.

최근에도 철학서마다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의 보수성을 뛰어넘는,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철학을 펼쳤나 싶어 그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제일 처음 읽어보겠노라 덤빈 것이 바로 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그나마 연구서인 이 책을 권한 출판사를 원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인 줄 알고 집어든 나의 무지를 원망한다. 책의 많은 부분은 저자의 해석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추출의 방식으로 읽었다. 연구자의 고뇌따윈 됐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말만 추려보는 방식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말들도 모호하고, 연구자들의 해석은 믿을 수가 없다. 연구자들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중번역에는 오류와 오해의 소지가 없으리란 법 없어서 하는 말이다. 물론 문화와 가치관이 달라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윤리적으로 옳다고 말한 그 탁월성이라는 것, 타고난 최고 좋음의 경지가 과연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가치일까 생각해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중용이니 관조니라고 번역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최고의 가치들은 격동의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가치일까.

물론 시대가 다르니 현대적 관점으로 그의 철학을 논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일단 지나간 모든 업적은 어차피 극복해야 하는 업적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자연과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걸림돌이 되었다고 주장한 유시민의 입을 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그림자가 크고 영향력이 커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당시의 시점에서 그의 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해 봄으로써 그의 진정한 가치를 가늠해 보련다. 당시로서는 (앞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비하여) 사유보다 실천, 귀족적이기보다 시민적인, 조금은 더 자연친화적인, 본성보다는 관계성을 중시한 꽤나 진보적인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탁월성이 품성의 탁월성들과 사유의 탁월성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탁월성을 중간 상태(중용)’라고 정의하며 중용이란 두 극단 사이에 위치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가장 완전한 목적은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며 결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추구되지 않는다.’고 했단다. 칸트가 연상된다.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이성과 일치한다. 그는 행위에 관한 원리나 규칙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탁월성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이 즐거워야(적어도 고통스럽지 않아야)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고귀한 것이 어떤 고통을 감내하는 일을 포함할지라도 그 사람은 즐겁게 그 일을 할 것이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을 갖춘 품성 상태가 중용상태라 주장한다.

 

잘 만들어진 작품은 더 이상 빼거나 보탤 수 없다. 욕망이나 감정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과 목적, 사람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이 중간이자 최선이고 이것이야말로 탁월한 것이란다. 즉 탁월성은 두 대립적 극단 상태의 중간 상태(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이다.

중용에 대해 가장 납득할 만한 설명은 이것이었다. ‘용감함과 경솔함은 모두 위험에 직면했을 때 공통적으로 대담무쌍함과 확고함을 가지고 있지만 용감한 사람이 오직 확고함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때에만 그렇게 하는 데 비해 경솔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확고함을 갖는다진정한 용기는 만용이 아니며 두려움 없는 상태도 아니라는 것. 두려움과 확고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중용이 바로 진정한 용기라는 것이다. 흔히 오독하듯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상태를 중용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용기는 단지 두려움을 통제하게 만들어 주는 품성이 아니고 고귀한 것을 위해서 두려움을 통제하게 만들어 주는 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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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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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시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떤 예술적 에너지이든 그것이 예술적으로 발현되려면 찰랑거리다 넘쳐야 하는 기준점이 있다. 신형철에게 그런 시적 에너지가 있다. 아니, 그의 책 곳곳에서 이 사람은 시인이 되었어야 했겠다 싶은 대목을 발견한다. 아마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 것이다. 글에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내가 놓쳤을지도?)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을 것 같다. 그만큼 그의 표현은 빛나는 지점이 있다. 대신 그는 시와 시인들을 사랑했다. 평론가가 되어 시에 대해 글을 쓴다. 그가 다른 평론가와 다른 점은 평론의 렌즈가 아닌 시인의 렌즈로 시를 본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시를 분석하기 위해 시를 읽지 않는다. 일단 그 자신 가슴으로 시를 읽고, 누구보다 시인들에 경탄한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많은 시들을 가로로 세로로 모아 새로운 시론을 짠다. 그것은 시 한 편을 잘개 쪼개는 작업과 매우 다르다.

 

세상에는 시를 쓴 마음이 있고 그것을 읽는 마음이 있겠지. 시인은 때로 시를 읽는 사람들의 새로운 시선에 스스로도 놀랄 것이다. 그런데 거기 더해 신형철처럼 시인과 같은 마음으로 시를 깊게 고급지게 다시 읽는 사람이 있다면, 시 읽은 다른 이들이 ~ 그렇게도 읽을 수 있겠군깨닫는다. 그것은 시의 또 다른 세상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긴 하지만 일단 예술가의 손을 떠난 후 작품은 감상하는 이의 몫이 되면서도 그 가는 길에 무수히 많은 예술적 감흥들이 일어난다. 예술의 파생상품이 무수히 발생한다. 평론은 일종의 그 파생된 예술품이랄까. 신형철은 이미 그 자신의 평론으로써 또 하나의 예술적 지평을 구축했다. 시를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때로는 시보다 더 아프고 더 아름다운 평론이라니....

 

시를 좋아한다고 해도, 음악을 좀 듣는다고 해도, 그 넓디 넓은 영역들의 접점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형철의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놓는다. 내가 읽는 시들이 아주 별나라의 것들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최승자를 걱정하는 마음을 읽을 때 나는 그가 나와 같은 시대, 같은 정서, 같은 정신적 세계를 살고 있구나, 하고 조금은 기뻤다.

내가 가장 핍진할 때 만났던 최승자의 시. 어쩌면 교과서에서 배웠던 좋은 시의 기준과는 너무나 달랐던 그의 시, 명성 따위를 모르고 읽고, 마음에 담았던 그의 시. 그의 시가 좋았던 이유를 나는 나의 외로움, 너덜너덜한 청춘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 그는 이미 훌륭한 시인이었다는 것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되다니.

그리하여 하여간, 동시대의 우리들은 함께 최승자를 걱정한다. 힘을 내 더 좋은 시를 쓰시라,가 아니라 건강하시라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신형철과 함께

 

자신감을 잃고 주눅들 때마다 나는 최면을 걸 듯이 속으로 말해왔다 시는 나를 사랑한다. 시가 나를 사랑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너의 장례식은 언제나 나의 장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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