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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평점 :
재미있는 발상이다, 경제학과 요리 이야기를 연결하다니. 위트 있는 필체도 좋은데 영어로 쓴 책이라니! 아마도 미식가일 것이 분명한 장하준 선생이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경제학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는 신고전학파 (자본주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자본주의자, ‘보호무역’이라 폄하하지 말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정책적으로 무역과 경제에 개입해 약(한 나라)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이다. 이 책은 그런 관점을 요리 이야기와 다양한 사례, 그리고 비유로 쉽게 들려준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흔한 경제학자들의 경제학 이론을 연대기적으로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다 읽고 경제학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갈증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를 권한다. 경제학 흐름이 궁금하다면 <지대넓얕>류의 재미난 책도 많다. 물론 나처럼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는 지식을 취하는 독서에 약한 사람들이라면 역시 이 책 <경제학 레시피>가 딱 좋을 것이다. 양 많고 칼로리 높고 호불호 갈리는 유럽의 식당보다 이것저것 조금씩 먹어보며 맥주 한잔하는 스페인식 타파스 문화가 더 마음에 드는 입 짧은 미식가라면 더더욱.
경제학을 잘 몰라서 이런 의문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경제학은 공부하면 할수록 자본주의 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일까? 주변에서 자본주의 경제학 말고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경제학자들을 본 적이 없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장하준도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약자와 빈자를 위해 공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얼마든지 자본주의하에서도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정책의 중요성을 자주 이야기한다. 인정. 문화를 바꾸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혹은 느리다. 역사의 흐름은 보통 정치적 변화에서 온다. 그는 전쟁 같은 혁명과 개혁이 불가할 때 정치적인 정책 변화로 얼마든지 세상이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다. 물론 의문이 안 드는 건 아니다. 대개는 부자였던, 나중에 권력을 잡아 부자가 된 이들이 약자를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할 수 있으려면 어떤 동력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라서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경제적 변혁은 정치 변혁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정치적 변화의 동력은 대개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말이다.
장하준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세계를 주름잡으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강자와 약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시장에 맡기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국가가 적절히 개입해 정책으로써 거대자본과 강자에 맞설 수 있기를 저자는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학은 삶에 엄청나게 크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 세금 복지 지출, 이자율, 노동시장규제 등의 정부 정책, 일자리, 노동 환경, 임금, 주담대와 학자금 대출 상환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심지어 그는 ‘당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경제학 이론은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경제는 당연히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아니, 적어도 대한민국만 보면 경제학 이론은 몰라도 주류를 점하고 있는 경제학적 가치관이 사람들의 가치관의 중심이 되는 것만은 맞는 것 같다. 돈은 언제나 중요했지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는 더 이상 부정의가 아니지만 지금처럼 능력껏 벌어서 잘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시대도 없었다.
다만 장하준이 신고전경제학파를 반대하면서 국가의 적절한 정책적 개입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강자의 입장을 대변해서 그리 말하는 게 아니다. 미국은 레이건 이후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장하준이 말하는 국가의 개입은 약자를 보호하고 중소국들이 강대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침탈당하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말하는 것이다.
자유시장주의자였던 밀턴 프리드먼(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언급했던 경제학자)은 칠레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단다. 그러니 경제적 주장이 독재자의 정치에 맞닿아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프리드먼이 ‘완벽한 자유 무역이 행해진 75년’ 이라고 묘사한 기간은 엄밀히 말하면 강대국의 ‘자유’ 무역을 말하는 것이다.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경제 영역의 자유로, 기업이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런 자유 개념을 가져와 마치 보편적인 자유인 듯 외치면 안 된다. 프리드먼과 윤석열이 말하는 자유와 프랑스 혁명의 기치였던 자유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큰가. 물론 사람들은 이미 대선을 치르기 전 프리드먼을 언급한 후보에게서 그런 낌새를 맡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경제를 모른다고 ‘책 한 권만 읽을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폄하하였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 일관되게 자신의 경제학적 가치관을 정치와 정책에 반영하고 있음을 주시해 봐야 한다. 그걸 사람들이 이미 간파했다 해서 막을 수 있었을까 싶긴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역사적 정치적 테크놀로지적 문제 때문이고 그는 그들이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말, 공감한다. 이제는 누구도 이 명제를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장하준은 적극적인 개입과 자국 보호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 예로 우리나라 현대차를 든다. 현대그룹은 다른 부문에서 만든 돈을 현대자동차에 쏟아부어 초기에 적자만 내던 회사를 지탱하게 했다. 또한 수십 년 동안 한국 소비자들은 품질 떨어지는 국산 차를 견뎌야 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호받지 못했으면 한국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라 말한다. 정부도 손을 보탰다. 1990년 초까지 한국 정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현대차 등 하이테크 기업들, 특히 수출 지향적 기업들이 특별 저리를 융자받을 수 있게 보장해 주었다. 현대차를 살리느라 국민들은 손해를 봤다고 아우성이지만 국가 경제가 국민 경제에 직결됨을 생각하면 의미가 없다 말할 수 없다면서.
독일의 예도 든다. ‘철과 호밀의 결혼’이라 부르는 비스마르크 주도로 기존 부자들(융커)과 신흥 중공업 자본가들 사이에 맺은 정치적 동맹(호밀 생산자들과 철 생산자들 사이의 연합) 말이다. 이 덕분에 독일은 경제가 성장하여 당시 1위였던 영국을 따라잡았단다.
보호무역이 필요하다, 정부가 저극적으로 정책개입을 해야 한다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 미국이 주장하고 이명박이 표방했던 신자유주의도 그런 주장을 했으니까. 강자가 말하면 우리 마음대로 할 테다, 이고 약자의 입장에서 주장하면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를 달라, 라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장하준은 후자의 입장이고.
심지어 장하준은 부자나라에서도 혼합경제 시대보다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기간 성장률이 더 둔화하고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며 금융위기도 더 자주 발생했다고 말한다. 물론 개발도상국들에 운용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재앙에 가까웠고. 결국 부자나라에도 별 도움 안 되고 가난한 나라들에게는 피해만 입힌 정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경제 정책에 큰 힘을 발휘하는 이들은 주로 이 부류의 학자와 관료들이다. 덜 보수적인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그나마 나은데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영락없이 미국의 입장에 선 경제 정책들이 나온다. 아무리 그런 정책이 자신들 개인의 영달과 가치관(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학자들이 주류이므로)에서 나온다지만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반하는 정책을 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복지에 대한 장하준의 생각을 살펴보자.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한 개인의 불안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잘 설계된 복지국가는 새로운 기술과 노동 관행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을 줄여서 자본주의 경제를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장하준은 주장한다.
그런 역설은 비스마르크의 예에서 알 수 있다(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비스마르크는 복지 국가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이란다. 노동자를 산업재해로부터 보호하는 세계 최초의 공공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로 경도되어 사회주의가 확산하지 않도록 하려고 그랬다는 것.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중도우파 성향의 정당들마저 복지 국가의 필요성을 많이 받아들인 이유가 정치 안정을 위해서라니 우리나라 보수정권들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복지는 결코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