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10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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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혼불이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장길산도 태백산맥도 토지도,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참으로 재미있게 읽었건만, 혼불은 작가가 일부러 작정으로 하고 '난 재미있는 것을 쓸 생각은 없다!', 선언하고 쓴 소설 같다.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의 형태를 빌어온 방대하기 짝이 없는 자료집일지도 모르겠다...

토지가 이야기의 극적 구성력에서도, 인물의 개성에서도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매료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면 혼불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질의 어떤 집념이 느껴진다. 어쩐지 여기서 소설적 재미를 운운하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강실이와 강모의 이야기는 소설의 중심을 흐르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최명희는 이 소설을 완결한 게 아니라는 느낌이 책을 덮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 이유가 강실이, 강모, 오유끼의 뭔가 이어갈 것만 같은 그 이후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도 까닭이겠지만 어쩐지 인생이란 게 나 하나가 죽어도 어디선가 또 다른 인생들 혹은 나의 피줄들이 이어나갈 어떤 생이 더  계속되듯이 강실이 강모는 '그렇게 불행하여졌습니다. 혹은 다 잊고 잘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계속, 어디선가 계속 살고만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최명희는 죽었지만 어쩐지 미완인 듯한 이 작품에 미련을 두지 않을 것만 같고 아니 어쩐지 그 분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별 연연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미완으로 남은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아쉬움으로 혹은 동료가 혹은 후학이 그 작품을 완결시키려 애쓰는 설정은 너무 만화적인가? 10권을 덮으면서 나는 누군가가 이 이야기의 끊어진 뒤를 이어나가고 싶어 미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최명희 마음 속에 남아 다 못 푼 이야기들을 불러올 수도 비슷하게 엮을 수도 없는 안타까움으로 아프게 부서지는 어떤 다른 작가의 혼... 왜 내가 그런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아픈 영혼에 감정을 이입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교사의 눈으로 책을 읽는 일이 많다. 혼불은 특히 더 그렇게 읽었다. 자연인으로서의 내가 이 책의 그림자엔 별로 어리지 않았다.이 책의  접혀진 수 많은 흔적들은 99% 교단에서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부분들이다. 실지로 나는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수업을 할 때 책 중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다가 혼나는 민재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읽어주었다.  앞으로도 무수히 그렇게 인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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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5-07-2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꽃선생님.. 너무 오랫만에 오셨어요... 저두 혼불 보고 싶은 책인데... 평이 극과 극으로 갈려 있어가지구 망설이구 있거든요..

달팽이 2005-07-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놀랍군요...저두 사두구 아직 못읽고 있는데...
시작만 하면 어케든 읽을 듯 한데....
언제 한번 들어보아야겠군요...

비연 2005-07-2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혼불을 다 읽고나서...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결말을 보며...
어쩌면 최명희 선생님이 더 많은 하실 말씀들을 지닌 채 가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저는 좋았습니다, 이 작품^^
 
서늘한 미인 - MBC 김지은 아나운서가 만난 스물한 명의 젊은 화가들
김지은 지음 / 아트북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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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가 미셸 투르니예와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게 된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면 여성형 철자를 더 붙여 자신의 프랑스식 애칭을 '미셀'로 지었다는 그녀의 '천박한' 취향에 혀를 찼을 것 같다. 그러나 좋아하는 문인에 대한 열정이 여고생의 그것처럼 순수하여 사람 사이의 이런 인연이라면 그런 이름을 갖고 싶기도 하겠다고 이해가 된다. 이 책의 본류인 미술평론 사이사이에 자신이 어떻게 작품들을 만나고 예술적 감각을 키워나갔는지 하는 이야기들이 더 흥미를 끄는 것은, 그녀가 자랑해서가 아니다. 이야기마다 진실성이 느껴진다. 천성적으로 그녀는 고요한 가운데 안으로 끓는 열정을 지닌 이이며 눈치보기보다 자기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실천적인 애정을 퍼붓는 사람인 것 같다.

글은 참 재밌게 읽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솜씨가 대단하다. 편견을 가지고 이 책의 무게를 가벼이 보았던 내가 미안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사람이 소개하는 작품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차 싶었다. 전시회장에 울리는 내 발자욱 소리를 즐겼던 나, 배가 너무 불러 핸들에 걸릴까봐 운전을 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그 먼 길을 지하철 타고 (출산을 며칠 앞 둔 추운 2월에) 과천 현대미술관을 찾을 정도였던 나, 그녀의 책 속의 작품들은 왜 이리 낯선가. 그러고 보면 나의 미술 취향이라는 것은 매우 보수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회도 유명하고 큰 전시회 쫓아다니기에도 바빴나 보다. 아니 어쩌면 나의 취향의 문제이기도 했겠지만 내게 열린 마음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은지는 꽤 오래 되었는데 얼마 전 우연히 내가 '아지트'라 부르는 토탈미술관과 가나아트홀에 가서 나는 이 책 속의 작품들을 만났다. '번역에 저항한다'전과 팝아트에 관한 전시회였다.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상하게도 나는, 뮤지컬을 보고 나면 그 작품의 다른 갈래(영화나 책, 관련된 사진이나 전시 등)을 만나게 된다. 관심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도 할 것이다. 대개는 작품을 먼저 알고(도판으로 보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 다음 작품에 대한 이러저런 설명이나 감상을 만나곤 했는데 책을 먼저 읽고 작품들을 만나는 것도 참 괜찮은 공부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떠난 사랑도 세월이 흘러서도 다시 나를 살게 하는 것이다. 김지은 씨의 그 책이  새삼스레 무겁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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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애와 루이, 318일간의 버스여행 1
최미애 지음, 장 루이 볼프 사진 / 자인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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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도 여행을 매우 좋아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열정적으로 여행을 즐길 처지는 못된다. 그래서인지 여행기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그 기분도 좋지만 여행이란 게 왜 원래 떠나면 고생인데도 돌아오고 나서 아련히 남는 그곳의 향기와 분위기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람을 미치게 하지 않는가. 여행기는 말하자면 고생은 쏙 빼고 감성만 즐길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상상여행장치' 비슷한 게 아닐까.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들고 살까 말까 망설일 때만 해도 그럴 듯한 사진들과 얼마 안 되는 글, 그리고 자신이 매우 특이한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출판사의 상업적 목적과 버무려진 책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애, 그 사람의 얼굴이 어찌나 친숙하게 머리에 남아 있던지 이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나라면 미애처럼은 여행하지 않는다. 나의 여행이래 봐야 지극히 평범한 '관광여행'  '문화여행' 정도일 뿐이다. 내 맘 속엔 미친듯 포효하는 록가수를 키우고 설산에 묻혀죽는 염원이 있다 할지라도 실지로는 낮으막한 산 오르기도 힘겨워한다. 유럽 여행 갔을 때 하루 12시간씩 걷던 다리가 피곤한 게 아니라 10시간 넘는 비행기 안이 힘들어서 지병인 베체트의 반점이 돋아 올랐던 나이다. 그러니 고생을 사서 하는 수백일 간의 버스여행, 내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한비야를 읽을 때에도, 한비야 식 여행이 탐났던 게 아니라 그녀가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던 거였다. 미애 씨의 여행은 내가 이 생에 절대로 만날 리 없는 거리와 사람들을 대신 만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미애라는, 누구보다도 독특한 끼와 역마살을 가지고도 정말 평범하고 따뜻한, 오만하지 않은 품성을 가진 착한 여자를 만나게 했다. 나는 모델 출신에 프랑스 사진작가와 결혼한 여자이면서도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아이들을 꼬질하게 입혀서 사진을 찍힐 수 있는 그녀가 맘에 든다. 계속 모델로 살면서 명품과 스풋라이트에 싸여 살기를 희망하지 않고 재밌게 메이컵아티스트의 길을 간 그녀가 맘에 든다. 오지를 다니며 여자들을 찍을 때 그녀만의 미적 감각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그녀의 눈이 맘에 든다. 때묻지 않은 사람 눈에만 보이는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

아무래로 사람은 꾸며놓아야 아름답다.  꾸미지 않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기도 어렵지만 그걸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만나기 어렵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촌스러우면 아름다움이 감해진다. 이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 아름다운 사람, 매력 있는 사람은 잘 꾸민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헌 옷을 입었든 드레스를 입었든, 화장을 했든 안 했든 자기한테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액세서리를 생전 하지 않는데 만약 그 사람이 목거리라도 한 줄 했으면 참으로 그 미모가 어긋났을 것만 같다. 어떤 이는 아주 작은 귀고리를 즐겨하는 데 그걸 그렇게 맛깔나게 하고 다닌다. 문제는  꾸미는가, 가 아니라  어울리는가 이겠지. 미애는 아름다운 사람인 것 같다. 그녀에게 화장을 하고 멋진 옷을 입혀놓으면 참 멋질 것 같다. 그런데 보라, 저 허름한 옷에 화장도 하지 않고 그을린 그녀의 얼굴이 주는 멋스러움을.

미애 씨는 내 또래다. 아이를 낳아 키운 비슷한 연배의 어머니의 감성에 공감한다. 물론 걱정이 안되는 건 아니다. 그녀가 돌아와서 어떻게 살까, 가 아니라, 그녀의 아이들, 그렇게 바람처럼 놓아 키운 아이들이 이 대한민국 땅에 와서 과연 적응할 수 있을지, 어머니에게 물려받고 어린 날 후각으로 체득했을 바람의 삶이 그 아이들의 피를 또 얼마나 근지럽게 할 것인지 말이다. 역마살도 예술혼도, 참으로 물려주기 두려운 영적 영역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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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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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보도 없이 읽기 시작했다. 역사도 이념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러나 설마 황석영이 멜로를 썼으리란 생각도 없었다. 그냥 소설이 내 몸에 부족한 영양소 같은 때였기에 집어들었던 것 같다. 거기서 사랑만 읽었다면 나의 촉수는 늘 그것만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까? 난 이 세상에 순일하고 완전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할 사람, 사랑하고픈 사람들 너무나 많고 하나가 전부인 그런 사랑도 없으며 사랑의 맹세는 다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하고 애쓰고 약속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동물인 사람을 극복하고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의 고결한 사랑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책 속의 윤희처럼 온전히 한 남자를 바라고 사는 삶을 나는 예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지고지순해서 그리한 것 같지는 않다. 난 차라리 그녀가 베를린에 가서 '이선생'과 사랑할 때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땅에는 왜 이리 고독한 영혼들이 많은가. 시대를 묻는가, 이 소설은, 나는 황석영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에 찬탄하지만 시대의 그림자보다 윤희의 영혼은 무슨 색깔일까 그녀는 말하지 않은 것들 뒤에서 얼마나 고독했을까를 자꾸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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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5-03-26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그래도 사랑을 믿어주세요... 그런사랑이 없다면 이세상을 살아가는게 너무각박하잖아요..
 
아름다운 밤하늘
쳇 레이모 지음, 김혜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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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자연교과서에 별자리가 나왔다. 밤마다 그 조악한 사진들을 들여다 보다가 결국 친구들이랑 신세계 백화점에 놀러 가서 천체망원경을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엄마에게 망원경을 사달라고 했다. 엄마가 사준 것은 그러나 쌍안경... 하지만 나는 그것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별을 볼 순 없었지만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달의 분화구들..

강원도에서 근무하던 해, 일요일 밤 늦게 서울에서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자취방까지 걷던 길에는 분명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가 있었다. 양손에 바리바리 짐을 들고 고개를 꺾을 대로 꺾어 은하수를 바라보던 26살의 철이 덜 난 어린 선생이 거기 있다.

작은 애가 아직 아기였을 때, 포대기로 업고 집 옆 연립주택에 자주 놀러갔다. 오래된 나무가 많은 지은 지도 오래된 4층짜리 붉은 벽돌 연립주택. 결국 18평짜리 그 집으로 이사가게 되었을 때 엄마는 허름하다고 안타까워했지만 난 그 마당 때문에 너무 행복했다. 연립주택 입구 가로등은 자주 고장이 났지만 그럴 때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딸아기와 별을 보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화가 난다. 누가 나에게 그 사랑하던 별들을 빼앗아 갔는지, 손톱같은 초승달 옆에 슬픈 사랑처럼 밝게 빛나던 목성의 아름다운 초저녁은 왜 만나기 어렵게 되었는지... 내가 오리온이나 카시오페이아 같은 큰 별자리보다 더 좋아하며 '내 별들이야'라고 했던 별무리가 아마도 '플레이아데스' 성단이란 걸 이 책으로 알았다. 이것은 '과학에세이'라고 하지만 서구의 문화인류학이나 고고학 책을 읽으며 학술적 지식을 뛰어넘는 문학적 글쓰기에 찬탄했듯이 이 책은 단지 과학책이 아니었다. 별을 사랑하는 사람은 음악도 시도, 영혼의 울림도 함께 읽으려 애쓴다는 증거이다. 이 안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다. 우주와 별을 '알아라' 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내 첫 제자 중 소문에 천문학과를 갔다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까만 눈동자는 그 명석한 두뇌 너머 슬프고 물기 많은 영혼을 지녔다는 증거였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천문학과는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전공이 아닐까. 보고 싶다. 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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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5-03-26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나에게 그 사랑하던 별들을 빼앗아 갔는지... 선생님 이말이 와 닿아요..
저도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제가 유년기를 보냈던 시절만해도 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있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한개씩 보이더라구요.. 무리지어 반짝이는 별들은 이제 더이상 볼수 없다는게 안타깝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