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 (풀꽃선생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nuribyul</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이 생에서 모든 것을 가질 순 없지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살았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랑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19 Apr 2026 02:13:26 +0900</lastBuildDate><image><title>풀꽃선생</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8432513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nuribyul</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풀꽃선생</description></image><item><author>풀꽃선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결말이 충격적이다.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title><link>https://blog.aladin.co.kr/nuribyul/17155880</link><pubDate>Tue, 17 Mar 2026 15: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nuribyul/171558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9120771&TPaperId=171558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4/61/coveroff/89491207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9120771&TPaperId=171558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a><br/>존 보인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07년 07월<br/></td></tr></table><br/>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nbsp;  부유한 독일인 가족이 통째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이야기의 시작에서 이들이 독일군 장교 가족이려니 했다.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황량한 풍경은, 그래 수용소일 테고, 그렇다면 최근에 우연히 광고로 본 무슨 영화의 원작인가 싶었다. 그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수영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행복하게 사는 독일인들 이야기랬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검색해 보니 그 영화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동명의 다른 원작을 둔 영화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독일인들이 실제로 거주했던 지역이다. 영화도 그렇겠지만 내가 읽은 &lt;줄무늬&gt; 소설 속 이야기도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단다.  &nbsp;  이 소설은 독일 장교의 아들인 아홉 살 소년 부르노가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밖에 나가 놀 수도 없는 낯선 곳에 이주한 소년은 무료해서 우연히 집 바로 뒤에 있는 철조망을 따라 걷다가 생일마저 같은 날인 친구 하나를 사귄다. 친구는 수용소에 가두어진 폴란드 아이다. 나이도 같고 생일마저 같은 두 아이는 각각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철조망을 사시에 두고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다. 하지만 어쩌면 하늘과 땅 사이일지도 모르는 두 아이의 삶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어느 날 행복했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점,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놀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친구가 없다는 것까지도.  주인공 부루노 역시 친구와 자연을 잃고 갇힌 삶, 억압된 삶을 살아야 한다. 전쟁은 그 누구도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고통 받아야 하는 두 어린이는 서로 닮았고, 그렇게 사랑하는 친구가 된다.   &nbsp;  소설이 뒤쪽으로 가면서 결말이 어떻게 날지 궁금했다. 아마도 주인공은 친구를 잃겠지. 부르노가 슬퍼하면서 어른이 되고 어린 날을 아프게 회상하려나. 우리에게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생생하고 아픈 문학작품이 많지만 가해자 입장에서 그 때를 돌아보는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로 수용소를 감시했던 이의 아들 눈에는 이 참상이 어떻게 비춰질까. 그리고 어른이 된다면 더더욱, 그것을 부끄러워 참회할까 혹은 최소한의 자기변명을 하려들까.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된 부루노는 어른이 된 후 이 일을 어떻게 가슴 아프게 회상하려나.  &nbsp;  하지만 그런 상상은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nbsp;  내겐 이 소설의 결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끝을 맺을지는 몰랐다. 마치 부모의 잘못을 자식이 대속하는 것 같은 결말은 너무 충격적이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대속이든 뭐든,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용서될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새삼 한다. 그리고 홀로코스트와 다를 바 없는 일들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게 너무나 가슴 아프다. 가해자들은 왜 모르나, 그런 일들이 결국 너희들 자녀에게도 상처가 되고 결국 그들도 다치게 한다는 것을. 하긴, 그 ‘가해자’는 손톱만큼도 자기 재산, 권력, 양심에 상처를 입지 않는 높은 곳에 앉아 있겠지. 끝끝내 후회도 반성도 하지 않겠지. 그의 명령에 따르고 그와 뜻을 같이 한 그 아랫것들, 그리고 그와 같은 국민들이 대신 욕 먹고 반성하고 자괴감을 느끼고 복수를 당하겠지. 이 거악의 철저한 악함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으려나. 과거의 일 같지 않고 남의 일 같지 않다.  &nbsp;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94/61/cover150/89491207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46101</link></image></item><item><author>풀꽃선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산다 -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 프란시스코 고야부터 나오미 클라인까지, 세상과 맞서 싸운 이단아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nuribyul/17105204</link><pubDate>Sat, 21 Feb 2026 17: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nuribyul/1710520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06632X&TPaperId=171052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462/89/coveroff/895906632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06632X&TPaperId=1710520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 프란시스코 고야부터 나오미 클라인까지, 세상과 맞서 싸운 이단아들</a><br/>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05월<br/></td></tr></table><br/>  &nbsp;  스무 살 가을에 스물한 살의 남자아이를 만났다. 그가 날 사랑한다고 느낀 즈음에 나는 수줍게 헤르만 헤세의 &lt;데미안&gt;을 빌려주었고 그는 그 대가로 내게 빅터 프랭클의 &lt;수용소에서&gt;를 권했다. &lt;데미안&gt;이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젊은이들 이야기라면 빅터 프랭클은 사람들과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었다. 자기로의 침잠은 타고난 나의 기질일지라도 남편(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다)이 그때 권했던 책이 준 충격은 또한 나의 가치관과 사회성, 정치성에 영향을 미쳤다. 빅터 프랭클의 책에서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죽음을 눈앞에 둔 수용소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타성은 얼마든지 발현될 수 있다는 증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조금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타고 났으되 이타적이고 공동체적 가치관을 머리에 담으면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양심이 아픈 사람으로 평생을 살게 되었다. 그 두 가지는 자주 부딪치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기질이 이길 때가 많았으지만 그래도 나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는 살지 않게 해주었다.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때가 떠올랐던 것은 제르맨 틸리옹이라는 레지스탕스 이야기를 읽을 때 그와 함께 수용소를 경험했다 하는 드골의 조카 앙토니오즈 이야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용소에서 굶주린 포로들이 동료에게 먹을 것을 양보하던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다”면서 평생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일했단다. 최근의 몇 날 새벽의 불면을 내내 이 책으로 견디면서, 세상엔 치열하게 살다간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롭게 깨닫는다.  &nbsp;  박홍규의 글과 책을 좋아한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일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나아가 때로는 이단아적인 참신하고 독특한 시각들이 좋다. 최근에 우연히 ‘내 친구 아나키스트 예수’라는 책을 발견하고 박홍규의 책을 쭉 몰아서 보다가 이 책, &lt;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gt;도 읽게 되었다. 세상 곳곳의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의 족적을 모아놓은 책이다.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주의자로서 국가와 법의 체계가 잘 정비된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박홍규의 가치관에 모두 동의하지 않으며 이 책 속에 소개되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도 않다. 그들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 소개된 이들의 그 치열한 삶에는 진심 어린 존경을 보낸다. 책에 소개된 이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1/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너무나 많은 활동을 접하고 뇌가 지쳐 “그런 뛰어난 사람이 기득권을 버리고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며,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공통점만 머리에 남으면서도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숙연한 마음이다. 그렇게 3분의 2쯤 읽을 시점에서 이제 남은 부분은 적당히 발췌독을 하고 말리라 생각하던 중 마리 퀴리를 읽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녀들까지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천재 집안이지만 모두들 부와 권력을 탐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기여했다. 특리 마리는 전장터에서 부상자를 위해 직접 운전을 하는 등 현장에서 뛰었다. 과학자로서 기여하고 특허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한데도.. 그런 사람들의 삶을 평범한 한 사람의 몫과 비교할 수 있을까. 새벽에 정신에 찬물을 끼얹힌 듯한 느낌으로 책을 읽다가 우루과이의 무히카 대통령 이야기를 읽고 체 게바라를 만났을 때처럼 매료되었다.   &nbsp;  뛰어난 사람들의 무게를 실감할 때가 있다. 하지만 유능함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올바름과 결합될 때, 그리고 만약 아름다움과 함께 한다면, 도대체 인간이라는 하찮은 동물이 어디까지 드넓어질 수 있는지 감탄한다. 평범한 삶은 얼마나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가. 게다가 그들이 그 누구보다 스스로 권력과 명성을 멀리한, 단지 멀리한 게 아니라 세상에서 그런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 아나키스트라면. 그래서 저자인 박홍규도 수도 없이 말하듯,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건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우리나라에 그들의 책이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하는 아나키스트라면 더욱, 그 겸허함 앞에 마음이 아릴 수밖에. 그리고 나처럼 아나키스트는 아니지만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nbsp;  그리고 덧붙일 이야기 하나, 책 뒤에 매겨진 값이 7200원이다. 이 겸손한 가격 책정 역시 아나키스트답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462/89/cover150/895906632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4628965</link></image></item><item><author>풀꽃선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우리를 이어주고 살게 해주는 그 여름 - [첫 여름, 완주]</title><link>https://blog.aladin.co.kr/nuribyul/17098752</link><pubDate>Wed, 18 Feb 2026 13: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nuribyul/1709875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038832&TPaperId=170987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75/58/coveroff/k692038832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038832&TPaperId=1709875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첫 여름, 완주</a><br/>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05월<br/></td></tr></table><br/><br>그래,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의미든 철학이든 메시지든 논해야 할 것이다. 그걸 내가 잊고 살다가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90년대 이후 어른들의 한국 소설을 거의 읽지 않고 살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도 가끔씩 소설을 읽으면 잊었던, 놓고 왔던 고향마을에 다녀온 기분이 들곤 하는 걸 보면 어쨌든 내 영혼의 고향은 문학이 맞다.  &nbsp;  학생들에게 읽힐 청소년 소설을 열심히 탐색한다. 대부분은 다 읽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마구 쏟아지는 청소년 소설들을 감당할 수 없다. 문제는, 내가 가르치는 남자 중학생을 위한 소설은 거의 없다는 것. 대부분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거나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욱더 적절한 책들을 고르려 열심히 읽는 수밖에 없다.   &nbsp;  호평이 쏟아진 &lt;첫 여름, 완주&gt;도 그런 청소년 소설이거나 하고 읽었다.처음부터 너무 재미있다. 주인공 ‘손열매’가 어렸을 때 (아마도?) 충청도 아니면 전라도의 것일 사투리를 구사하는 장면부터 그렇다. 그런 말맛을 좋아하나 보다, 내가. 그런 유머 코드는 곳곳에서 독자인 나를 즐겁게 하면서 ‘손열매’의 캐릭터를 만든다. 고난과 시련과 그리움과 상실을 다 가지면서도 열매가 꿋꿋한 것은 기질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라서일까, 사람 귀한 줄 아는 사람이라서일까.하긴 사람 귀한 줄 아는 사람은 이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사실상 손열매의 인생에 큰 스크래치를 낸 고수미의 어머니도 그렇고 열매의 남자 어저귀는 말할 것도 없으며 동네 사람들 중 이장이며 잘난 체 끝판왕인 줄 알았던 배우 정애리까지, 불의를 그냥 넘기지 않고 이웃을 나몰라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중학생들마저도.   &nbsp;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도 헷갈리는 게 있다. 세상은 각박하고 다들 도둑놈들이니까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아야 한다, 가 맞는 건지,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가 맞는 건지... 물론 나는 후자의 가치관을 갖고 산다. 그건 내 친구 말대로 “네가 나쁜 사람을 안 만나봤구나.”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한편 나쁜 사람들에게 숱하게 돈을 뜯기고도 하염없이 긍정적이던 나의 아버지를 닮은 낙관주의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니, 교사인 내가 세상과 사람에 긍적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겠는가. 교육이란 건 ‘희망이 없다’는 자세로는 행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여간 나는, 세상에는 치명적으로 나쁜 사람도 꽤 많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 살아간다고 믿는다.   &nbsp;  이 소설은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 이야기를 한다. 어저귀가 열매를 구덩이 속으로 불러들여 나무 뿌리에 얽힌 균사체들의 네트워크를 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서로 얽혀 있으면서 고난이 닥쳤을 때 서로를 돕는다. 죽은 어미의 살아남은 어린 자식을 이웃이 함께 키우듯이 그렇게. 나무뿌리를 잘라내기도 하고 어린 나무싹을 살려내기도 하고, 그러기 위해 땅속 균사체가 소식을 적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낸다.암투병 중인 수미의 어머니에게 열매는 빚을 받으러 온 빚쟁이가 아니라 딸의 흔적을 전하는 균사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무뿌리에 얽혀 이사람 저사람 만나면서 그 자신 치유되고, 사랑하고, 믿음을 회복하기도 한다. 이것은 일방적이지 않다. 심지어 다른 이들보다 초월적 존재로 보이는 어저귀마저 남들을 일방적으로 돕기만 하지 않는다. 그 자신 사랑으로 생기 있어지는 걸 보면 그는 외계인보다 자연 그 자체의 비유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오랜 세월 살아가며 인간과 늘 함께하며, 때로는 죽거나 사라진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을 뿐 어딘가에 우리 곁에 있을 게 분명하다는 믿음을 주는, ‘자연’......  &nbsp;  재미있었고 웃겼는데 범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철학까지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게다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듣는 소설’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신형철이며 아이유, 가장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유명인들의 추천사도 화려한데 요즘 가장 핫한 배우 박정민의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뭐 이런 사기캐가 다 있나 싶은, 그런 소설을 만났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75/58/cover150/k69203883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2755853</link></image></item><item><author>풀꽃선생</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피케티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책 - [기울어진 평등 - 부와 권력은 왜 불평등을 허락하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nuribyul/17053438</link><pubDate>Wed, 28 Jan 2026 21: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nuribyul/170534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62038835&TPaperId=170534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76/30/coveroff/k36203883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62038835&TPaperId=170534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울어진 평등 - 부와 권력은 왜 불평등을 허락하는가</a><br/>토마 피케티.마이클 샌델 지음, 장경덕 옮김 / 와이즈베리 / 2025년 05월<br/></td></tr></table><br/>피케티가 한참 부상할 때 &lt;21세기 자본&gt;을 구입했지만 앞부분만 읽고 미뤄두었다. 책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자료와 통계로 글을 이어가는 방식이 낯설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화제가 된 신간은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읽어야 할 것 같다. 급변하는 세상에 그때의 통계자료는 벌써 낡은 것이 되어 있을 텐데 말이다. 하여간 그렇게 진정한 독서가 아닌 남이 쓴 리뷰나 기사로만 접한 피케티, 이번에 &lt;기울어진 평등&gt;을 통해 알고 보니 이렇게까지 진보적일 줄이야. 그는 스스로를 ‘민주 사회주의와 연방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사회주의를 옹호’한다고 소개한다. &lt;정의란 무엇인가&gt;를 재미있게 읽어 이미 알고 있던 마이클 샌델보다 토마 피케티의 발견이 즐거웠던 책이다.  &nbsp;  이 책은 마이클 샌델과 토마 피케티의 경제학 대담집이다. 짧고 간결하지만 ‘공정한 경제’의 방향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두 학자는 유럽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1/3 이상을 소유(미국은 더 함)하는 등 지금 전세계적으로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고 분석하면서도 과거의 역사와 비교해 본다면 세계는 더 평등한 쪽으로 움직여 왔다고 본다. 유발 하라리가 20세기 이후 세상은 전에 비해 더 안전해졌다고 주장했던 것이 떠오르면서, 어쨌거나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세계보다는 그나마 세상은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희망을 가져본다(물론 트럼프가 전횡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식으로 희망을 이야기할지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다).  &nbsp;  두 학자는 불평등의 세 가지 문제점(이슈)을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한 접근권(교육, 의료 등), 정치적 평등, 인간적 존엄성으로 본다. 그러면서 이런 기본적인 평등권에 대해 탈상품화냐 급진적 재분배냐에 대해 논의한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모든 기본권들이 ‘상품화’되어 있는 현실을 벗어나는 게 중요한데, 아예 근본적으로 ‘이것은 상품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고 선언하고 주장하고 쟁취하는 것이 탈상품화인 듯하다. 의료보험을 민간자본이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도록 하는 것, 교육을 공적 영역으로 두는 것 같은 것이리라. 급진적 재분배는 조세 정책을 통해 더 많은 세금을 걷고 더 많은 복지를 행하는 것이겠다. 뭐 이게 딱 이분화될 수 있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정치는 섬세하게 탈상품화와 재분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으니까. 물론 두 사람은 학자들이니까 좀 더 이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리라. 그들의 책이 많이 팔리고 강연이나 주장이 널리 퍼지고 영향력을 가질수록 세상이 달라질 테니까.   &nbsp;  피케티는 말한다, ‘평등’이야말로 현대사회가 더 높은 번영을 이룬 핵심이라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새로운 지구적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샌델은 전체 경제의 25% 가까이 되는 교육과 의료에서의 평등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사회적 국가 - 스웨덴, 독일, 프랑스, 영국 - 에서뿐 아니라 20세기 몇십 년 동안 소득세 최고세율이 8, 90%까지 올랐던 한때의 미국에서도 이때 노동 시간당 국민소득이 높았었다고 입증한다. 지금의 미국이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불평등이 심한 나라가 된 이유는 보수정권의 반평등 정책 때문도 있겠지만 민주당의 탈노동자화, 친자본주의화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한다.  &nbsp;  지금 세상의 불평등을 부추기는 능력주의는 이제 미국 공화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주당은 진보라기보다 중도 보수에 가깝다고 말하는데(진보/보수를 선악 개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당이 미국 민주당(미국 민주당, 유럽 사민당, 영국 노동당 등 원래는 노동 계급과 중하위 계층을 옹호하는 정당. 미국 민주당 집권 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정당화함(클린턴, 오바마 등) 금융위기 때 오바마는 금융과 자본의 관계를 개조할지 복원할지 선택해야 했는데 그는 후자를 택했음.)처럼 보수화하지 않으면서 건강한 진보 정당이 출현하기를 기대해 봐야 할 것 같다. 미국에서 샌더스가 열풍을 일으킬 때 응원하는 마음을 가져보았지만 결국 세력이 흐지부지돼 버리는 것을 보면서 1930년대에 불같이 일어났다가 억압 속에 사그라들었던 미국의 진보적 노동운동이 떠올랐다. 급진적인 진보는 늘 기득권 세력의 억압에 취약하지만 어떻게 시민들 속에 스며들어 함께 하느냐에 따라 소수의 한계를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미국에서는 실패한 이유가 뭘까? 아니, 그게 성공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지 않은 걸까? 그러고 보면 시민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경우가 흔치 않구나. 한때는 왜 우리에게는 프랑스와 같은 혁명의 역사가 없는가, 우리는 왜 늘 실패하는 민중의 역사만을 가져왔는가 안타까워했던 적이 있다. 조선 시대의 모든 민란이 그랬고 동학혁명이 그랬고 일제 강점기의 투쟁, 해방공간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투쟁들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돌아보면 그때의 실패들이 밑거름이 되어 현대사에서 비민주, 반민주의 현장마다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 맞서는 경험으로 계속 업그레이드되었다. 심지어 1987년 이후에는 그런 민중의 봉기(시민의 저항)이 성취감을 맛본다. 직선제를 쟁취하고 소고기 수입을 막아내고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시켰다. 지구상에는 그런 역사를 경험한 나라들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우리가 실패의 역사를 가졌다고 슬퍼했던 내가 틀렸던 거다.   &nbsp;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샌델이 대입에서 추첨제를 주장하는 장면이다. 스탠포드 등에서는 한 해 소득이 9, 10만 달러 못 미치는 가정 학생들이 수업료나 기숙사비, 식비, 책값 등을 내지 않게 하고 있지만 문제는 소득 하위 50% 가정 출신 학생들 다 합친 것보다 상위 1% 가정 학생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계급 계층이 교육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은 전세계적 현상이겠지만 미국이나 우리나라는 더 심하다. 이런 미국 대학에서 저소득층에 대해 특례 입학 등 공개적 압력과 도덕적 압력이 필요하다면서 센델은 대입 추첨제를 제안한다. 하버드나 스탠퍼드 대학의 한 해 응시자가 6만 정도이고 입학 정원은 2천 명 정도인데 응시자 모두를 대상으로 입학사정위원회가 3만 명 정도를 추리고 그들 중 2천 명을 추첨해서 뽑자는 것이다. 예일대 대니얼 마코비츠 역시 대학들이 입학 설계할 때 저소득층 자녀가 전체 정원 2/3가 되도록 설계하라고 주장한다. 이 제한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받는 것으로 하자면서.   &nbsp;  얼핏 허황돼 보이는 이 제도의 장점은 ‘당신의 입학에 많은 행운이 따랐다는 사실을 일깨울 것이고 떨어진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란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경쟁이 과열되는 것은 아마도 인재들이 많이 입학하고, 졸업하면 좋은 곳에 취업이 잘 되고, 뭐 이런 것들이 계속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의 높이를 낮추면 경쟁도 낮아질 것이다. 이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하는 제도가 추첨제라는 것이다. 물론 극강의 경쟁과 성취로 자본주의 세상의 성장을 최고조로 올려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늘 그랬다. 이게 옳지 않겠냐고 설득하는 과정은 필요하지만 그런 주장에 설득되어 가만히 앉아서 기득권을 내주는 왕, 귀족, 부르부아, 부자들은 없었다. 그걸 얻어내는 과정에는 설득, 여론의 형성, 개혁뿐 아니라 부단한 투쟁, 때로는 혁명이 필요했다. 자본주의의 긴장을 낮출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nbsp;  대입 추첨제가 실현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신박한 주장이긴 하다. 우리나라도 오직 시험 성적만이 대입이든 취업이든 입문의 기준이 되고 있는데 성적(능력)은 부족할지라도 인성이나 적응력에서 아쉬운 인재들 – 그들은 또한 출발선부터 불공평하게 경제적으로 뒤처진 집안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 –을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무엇보다 센델의 말처럼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그것을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문제로 여기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만약 그의 주장대로 입구를 넓히고, 그러니까 기준점을 하향하여 성적이 좀 낮더라도 다른 장점을 가진 젊은이들이 아예 좁은 경쟁률에 희생되지 않도록 다음 단계에서는 추첨을 통해 대입을 결정한다면, 대학의 몸값 자체가 그렇게 높을 이유도 없다. 과장된 긴장을(말하자면 ‘어깨뽕’을) 빼는 데 유용한 제도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렇게 우수한 대학의 희소성을 희석하면서 서로 다른 계층이 무심코 어울리게 하는 것은 공유성을 되새기게 하는 효과도 따라온단다. 최상위층 자녀들과 빈곤층 자녀까지, 빈부격차를 넘어 젊은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는 학교가 최적의 장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공간의 차별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군대와 학교만큼은 겉으로라도 공평하고 공정해야 하고 모든 계급 계층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또한 이 공간에서의 경험이 공정과 공평에 대한 사회적 의식을 확고히 하는 데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nbsp;  미국과 유럽의 퇴행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진보적인 목소리의 학자들이 중심을 잡고 있는 서구 세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의 학계와 대학가는, 가장 가난하고 허약하던 80, 90년대야말로 가장 진보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어떨지라도 적어도 학계에서는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을 논할 수 있던 그 시절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군부독재에 의한 탄압으로 진보적 목소리가 소멸한 것이 아니다. 취업과 돈과 연구비 경쟁, 기업의 노예가 된 대학, 경쟁적 취업에 젊음의 열정도 학구열도 말라 죽어버린 젊은 대학생들의 무관심 속에 대학은 더 이상 이상을 논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여러 논의들은 허공에 둥둥 뜬 이야기,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우리나라야 말로 불평등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곳 중 하나일 텐데 말이다.그렇다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니다. 정치적 현실은 불안하긴 해도 지금 2026년 대한민국 정치의 방향이 아주 불길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한계가 있을지라도 ‘평등과 공정’의 길로 나아가려는 노력들이 있으리라. 그걸 막으려는 세력들이 아직 준동하지만 이제는 그 세력들에 그저 굴복만 하지 않는 시민의 힘이 수십 년 축적되어 대한민국을 지탱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진보적인 목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러니까 진보적인 학자들이여,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도 용서할 테니, 조금은 땅에서 너무 발이 동동 떠 있는 것 같아도 들어줄 테니 힘을 내서 더 나은 세상, 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희망을 잃지 말라고, 통계든 역사든 경험이든 주장이든 모아서 이론으로 만들고 책으로 쓰고 강연을 하고 대담을 하며 학자의 역할을 다해 달라. 우리 세대는 이제 늙고 있지만 내 자식 세대, 더 어린 제자들의 세대,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더 어린 세대의 아이들이 아직 누리고 살아야 할 시대는 제발 덜 아프고 덜 불공정하기를, 자괴감과 열패감의 상처를 덜 받는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라니까.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76/30/cover150/k36203883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2763088</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