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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1.

내가 전기나 자서전을 읽는 이유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익히 알고 있던 인물에 대한 더 세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한 인간의 사고란 것이 그가 자라온 환경이나 경험들과 무관할 수 없기에 그 인물을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전기나 자서전은 그의 생각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다른 하나는 위와 똑같은 이유로 앞으로 알고 싶은 인물에 대한 흥미유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책을 접하기 전에 전기나 자서전을 읽음으로써 대강의 배경지식뿐만 아니라 어려운 책도 더더욱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사상에 대한 흥미가 그 사상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기도 하지만, 한 개인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사상으로 확장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학자의 지적 편력을 펼쳐 보여준다는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 나는 후자의 입장이었다. 오래 전에 <사회학에의 초대>, 작년에 <의심에 대한 옹호>를 읽었을 뿐 그의 사상에 대해 무지했기에 이 책을 통해 현존하는 20세기 사회사상가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는 피터 버거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지루했다. 물론 곳곳에 박혀 있는 유머 코드와 대가의 여유 같은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최소한 나에게 흡입력을 가진 책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읽었던 그의 두 책, <사회학에의 초대><의심에 대한 옹호>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것과 마찬가지였다.

 

2.

왜 그렇게 지루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아마도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두 가치, 종교와 보수주의라는 두 토양에 저자가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와 신학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먼저 미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우연히 사회학 수업을 듣고 사회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사회학자가 되었다고 해서 종교적 신념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기에 종교적 관점이 자신의 사회학 전반에 녹아들어 있다.

 

단지 그가 주전공으로 종교사회학을 선택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학문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책이라 평가하는 <성스러운 천개>에서 저자는 종교를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결정적 요인”(130)으로 제시한다. 또한 이후 세속화에 대한 입장을 수정하면서 현대사회는 세속화된 사회라기보다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사회라고 분석한다. 혹은 동아시아의 발전모델을 검토하며 후기 유교 가설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손꼽는다. 이처럼 피터 버거에게 있어 종교는 한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적 프레임이 된다. 물론 학자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기에 다소 낡아 보이는 종교적 프레임을 가졌다는 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학문적 여정에서 특정 가치가 개입되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신학자이면서도 방법론적 무신론이라는 접근 방식을 취한다든가 사회학적 분석에 있어 가치중립적 입장을 견지해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학을 단지 사회에 대한 객관적 서술의 역할로 한정짓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의 분석적인 부분은 당연히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제 적용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도덕적으로 정당하다”(84~85)거나 사회학은 인간을 환상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100)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좀 더 인간적인 사회라는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학이 사회적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좀 더 인간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가교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3.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좀 더 인간적인 사회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명확한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러저러한 언급들을 통해 추측해보건대, 저자 자신이 미국적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광범위하게 보장된 사회, 그리고 이를 위한 기초로써 절대적 빈곤과 같은 물질적 제약이 극복된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즉 다소 과도한 단정일 수도 있지만 그가 말하는 좀 더 인간적인 사회란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발전해가는 사회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공화당원으로 가입한 사실이나 자본주의적 성장의 신화를 승인하는 부분을 읽다보면 이러한 혐의가 짙어진다.

 

그는 자신의 사회학적 입장이 단지 책상물림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학적 관광이라고 부르는 전세계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상황을 이해한 결과라고 강조한다. 남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저개발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을 실증적으로 추적하며 도출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세계를 몇 바퀴나 돌아다니는데 필요한 경비는 과연 누가 댔을까. 당연히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이나 정부일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회고하는 대부분의 미팅들이 기업의 CEO들이거나 정부기구의 관계자인 것은 그의 연구를 누가 지원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며, 그의 사회에 대한 시선에 어떤 이들의 입장이 녹아들어 있을지 추측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수용할 만한 발전 모델이라면 사회변화가 야기할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또한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통적 가치들을 존중해야 한다”(176)거나 사회학은 모든 제도가 깨지 쉽다는 것을, 그리고 제도가 급격히 해체되면 독재나 무질서라는 이중의 위험에 봉착한다는 것을 알려준다”(242)라며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고 제도적 안정을 추구하며 최소한의 점진적 개혁만을 승인하는 그의 보수주의적 입장이 어디서부터 기원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이 우파와 좌파 양쪽에서 비판받는다는 사실을 계속 언급하며 중도적 입장에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그가 좌파를 언급할 때는 명백히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정치적 좌파를 말하는 반면 우파를 언급할 때는 정치적 우파라기보다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가깝기에 이것이 적절한 범주화를 통한 비교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는 미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일 수도 있다. 수정헌법 1조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분명히 하지만 저자 스스로 인정하듯이 강력한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정치적 우파들이 자신의 동지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손잡는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낙태와 동성애 논쟁이 대선의 주요 이슈이자 민주당과 공화당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라는 사실을 보면 좌우파의 범주가 단순히 자유민주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정치 체제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4.

결국 종교라는 프레임을 통한 사회적 안정과 자본주의라는 프레임을 통한 경제적 발전이 그의 학문적 입장을 지탱하고 있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스스로도 이러한 두 기둥이 전형적인 우파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이중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다. 사회학은 이데올로기의 수단이 되면 안 된다. 사회학자는 반드시 객관적인 관찰자와 사회 구성원의 입장에서 도덕적인 참여자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내야만 한다.”(273) 자신이 바라는 사회상이 있지만 학문 연구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치우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학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러한 모습의 학자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억지스런 중립의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편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다. 복지국가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 극단의 투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듯이, 중도라는 것은 극단적 편향들의 투쟁을 통해 도출되는 결과일 뿐이지 미리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농담을 좋아하는 피터 버거에게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오라는 어떤 이의 말에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우파란 말이오!’라고 답했다는 프랑스의 농담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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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11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도 만원권 수상하시겠는데요? 피터버거 할아버지 책보다 더 재미있는 서평 잘 읽었습니다.

nunc 2012-07-11 13:26   좋아요 0 | URL
지난 달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2-07-28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8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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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 시장 사회에서 과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을까.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와 마찬가지로 샌델은 이 책에서 다양한 사례 제시를 통해 문제제기와 토론을 이끌어 낸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새치기하는 것은 정당한가. 돈을 받고 생명보험을 재판매하거나 자신의 몸에 광고를 새기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할까. 또한 시장지상주의자들의 말처럼 인센티브가 효율을 증대시키는 적절한 요인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시장의 규범이 일생생활의 전반에 침투할 때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까.

 

시장지상주의자들은 시장이란 경제주체들의 상호 합의를 통해 자유로이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이를 통해서만 재화의 생산과 분배가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시장은 제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는 장치일 뿐 아니라 정보를 모으고 미래를 예측하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하다.”(210) 그러므로 경제주체들 간에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에 대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규제하거나 개입해선 안 된다. 물론 때로 어떤 거래 행위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보편적 도덕 감정을 거슬러 불편하고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나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기꺼이 용인되어야 한다.

 

2.

이러한 시장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샌델은 가능한 두 가지 반박을 소개한다. 하나는 그가 공정성에 관한 반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정성에 관한 반박에서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조건이나 경제적 필요성의 긴박한 정도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 때 생겨날 수 있는 불평등을 지적한다.”(157) 즉 시장지상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는 각 경제주체 간의 자발적 합의에 따른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지만, 실제 극단적인 거래를 수용하는 이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로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하게 된 것이고, 이는 결국 암묵적 강요나 강압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샌델이 부패에 관한 반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패에 관한 반박은 () 시장은 가치평가와 교환이 특정 재화와 관행을 변질시킨다고 주장한다.”(157) 이는 특히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과 같은 도덕적·시민적 재화를 사고파는 경우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이처럼 우리가 공공선이라 부를 수 있는 시민적 미덕들에 시장 거래가 개입하면 그 미덕이 가진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재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지급하면 그들의 내재적 흥미나 헌신을 밀어내거나그 가치를 떨어뜨려 동기유발을 악화시킬지 모른다.”(170)

 

3.

이 두 가지 반박 중 샌델은 후자를 지지한다. 오늘날 정치적 논쟁이 대부분 시장지상주의자와 공정성을 지적하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공정성에 관한 반박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논쟁은 시장이 야기하는 진정한 문제를 회피한다.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어느 쪽 입장에 서더라도 시장 중심 사고와 시장 중심 관계가 모든 인간 활동을 침해하는 세상이 대체 왜 문제인지 알 수 없다.”(255) 다시 말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조건만을 고려할 뿐 시장이라는 매커니즘 자체를 고려하지는 않기 때문에 핵심적 문제를 흐린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공정한 거래가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장이 야기하는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란 무엇인가. 왜 시장이라는 매커니즘 자체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가. 샌델이 보기에 시장은 가치중립적인 매커니즘이 아니다. 시장은 특정 가치를 구현한다.”(159) 그렇기 때문에 시장 매커니즘의 내적 과정보다는 시장 매커니즘의 외적 효과, 즉 시장의 가치편향성이 야기하는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부패에 관한 반박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변질된 가치에 대해 고민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좋은 삶(the good life)’이 무엇인지 숙고하게 만든다.

 

샌델은 도덕적·시민적 미덕를 한정된 재화, 교환가능한 재화로 여기는 시장주의자들을 반박하며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180)고 주장한다. 이러한 미덕이 더욱 강화되기 위해선 시장의 침식으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시장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시장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275~276)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핵심 주장과 다시 만나게 된다.

 

4.

이제 샌델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샌델이 시장을 문제 삼는 이유는 시장의 확대가 공동체의 미덕과 공공선을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회제도를 지배하는 규범을 시장이 고쳐 쓰기를 원치 않는다면,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공론에 부칠 필요가 없다”(<정의란 무엇인가>, 367)거나 시장을 제자리에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 관행과 재화의 의미에 관해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숙고하는 것이다”(274)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뭔가 이상하게 들린다. 시장의 확대가 공동체의 공공선을 훼손한다는 것은 공공선이란 것이 시장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그 공공선은 무엇인가. 샌델은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과 같은 추상적 가치들을 언급하긴 하지만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사람들 사이에 어떤 규범이 합당한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르다”(274)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요점은 시장과 상업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는 상황을 목격했다면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274)이었다고 짐짓 한발 물러선다.

 

그러나 문제가 됐던 것은 단순히 시장과 상업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는 상황이 아니라 기존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부정적으로 바뀌는 상황이었다. 이는 이미 어떤 기준, 아마 샌델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이전의 소중한 것과 현재의 부정적인 것으로 가치가 구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솔직하게 자신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함께 토론하며 찾아보자는 식으로 얼버무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샌델은 어떤 재화나 행위에 공적으로 합의된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가 내재되어 있고, 이러한 규범이나 가치가 침해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특정한 시기에 합의되었던 가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가치도 후대에 얼마든지 쓸모없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노예제 시대에 살고 있다면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이들을 심각한 공공선 파괴자로 여겼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노예옹호론자를 그렇게 여기듯이. 공공선이란 상대적이며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즉 침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공공선 자체에 대해 질문할 수도 있다. 공공선이란 과연 무엇인가. 샌델은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할 가치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공적인 토론과 합의를 거치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이들의 동의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아니면 다수결로도 충분한가. 혹은 공동선이란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이기에 모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토론하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공공선은 신과 같은 어떤 절대자가 부여한 것인가. 공공선은 어떻게 현실화되는가. 합의한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공공선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인가. 어쩌다 공공선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과 형벌 같은 제도를 통해 강제해야 하는가.

 

5.

이처럼 샌델의 책은 쉽게 읽히면서도 또한 쉽게 답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들을 풀어놓는다. 어쩌면 이것이 샌델의 책이 가진 매력일 수도 있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된 각각의 입장을 비교하는 참고서가 될 수도 있으며, 여러 입장들을 비교하며 은근슬쩍 드러나는 샌델의 주장을 찾아보는 책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샌델의 한계와 반론을 고민하며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어떤 방식으로 읽건 샌델을 읽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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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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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전에 저자의 다른 책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 대한 감상을 적으며 다작하는 철학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편견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또 다른 편견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감상적인 철학자 또한 신뢰하지 않는다. 감상주의는 이성적 판단을 방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객관적 시선을 가지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감상주의 철학의 대표적 사례가 흔히 인생철학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물론 인생철학에도 분명 주목할 만한 삶에 대한 지침이나 어떤 통찰들이 담겨있고, 또한 이것이 우리 삶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만 그러한 사유와 통찰이 도출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버려진 채 인생철학이 보여주는 아포리즘이나 경구의 감동에만 매몰되어 여기저기 맥락 없이 적용되는 현실을 경계하는 것이다. 철학과와 철학관에 대한 사람들의 혼동이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철학이란, 하나의 학문으로서 철학이란, 그것이 설령 인생에 대한 지침이나 통찰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감탄/느낌표의 학문이 아니라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물음표의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거칠게 말하자면, 모든 철학자는 회의주의자다. 나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

 

2.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김수영을 떠나보내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다. 저자에 의하면 젊은 시절, 타인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된 고독감에 힘겨워할 때 저자를 위로해준 이가, 그래서 스스로 정신적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가 바로 김수영이었다고 한다. 그런 김수영을 왜 떠나보내야 하는가. 이제는 더 이상 위로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김수영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겨낼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홀로 설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의 표출. 그러니까 결국 이 책은 저자 강신주의 독립선언인 셈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독립의 조건을 제시한다. 바로 대상에 대한 거리두기다. “사실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다. 아니면 누구든 김수영에게 거리를 두었을 때에만,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해도 좋다.”(34) 거리두기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후광 안에 있을 땐 눈부심으로 인해 대상을 분명하게 쳐다볼 수 없다. 거리두기란 그와 같은 후광에서 벗어나 이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거리두기란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해보겠다는 결심이며, 나아가 그 이해를 토대로 대상을 넘어서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기도 하다.

 

과연 이 시도는 성공했을까.

 

3.

저자가 보기에 김수영은 진정한 인문정신의 구현자이다. 진정한 인문정신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인문정신이란 바로 단독성의 추구.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이다”(18)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문정신이란 단순히 일반성에 포섭된 특수성, 다른 것과 얼마든지 교환 가능한 특수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성을 확보하는 일, 즉 자기 스스로 우뚝 서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김수영은 그 누구보다도 단독성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단독성이란 다른 그 무엇과도 교환될 수 없으며,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고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독성은 남과 비슷해지라는 내적, 외적 압력이나 강요, 혹은 스스로 서려는 자에게 가해지는 온갖 억압에 저항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결국 단독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외적 억압과 내적 태만에 끊임없이 온몸으로 저항한다는 것(자유)이고, 이러한 저항을 통해서만 스스로 도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저자가 김수영에서 읽은 것, 저자가 김수영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오해와 갈등, 고독감에 힘겨워할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게 바른 길이라고 큰 소리로 격려해 주니 말이다. 저자가 김수영을 정신적 아버지라고까지 부르며 열광했던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4.

그렇다면 김수영의 시와 산문 그리고 그의 삶이 단독성의 추구라는 말로 모두 해명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온전히 이러한 해명으로 채워져 있다. 저자에겐 단독성과 이로부터 파생된 자유’, ‘스스로 도는 힘’, ‘온몸으로 밀고 나가기등의 키워드가 김수영의 글과 삶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실제로 4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 중 무작위로 아무 페이지나 펼친다고 해도 바로 저 단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철학적 시 읽기에서 보여준 모습, 즉 문득 건져 올린 하나의 통찰 혹은 직관으로 철학자나 시인의 모든 것을 해명하려는 시도와 매우 유사하다. 전작에서 그것이 하나의 강의로 압축되었다면, 이 책에서는 열 개의 강의로 넓게 펼쳐놓은 느낌이다. 물론 단독성이라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열 개의 다양한 변주의 형식으로.

 

김수영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적절한가? 즉 저자는 자신이 목표한 거리두기의 첫 번째 목표를 이루었는가? 나로선 이에 답할 능력이 없기에 수많은 김수영 연구자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싶다. 다만 개인적으로 하나의 개념이나 용어로 한 사람 혹은 한 사상을 관통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풀어내는 김수영을 보면서도 그의 시와 그의 현실이 매우 모순됨을 느낀다. 예를 들어 아내를 때린 날을 언급한 시인 <죄와 벌>을 다루는 부분을 보자. 이 시를 통해 저자는 김수영에게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약함과 아내보다 우산을 아까워하는 이기심을 극복하려는 의지”(303)를 읽어낸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아내에 대한 사랑과 용서도 결국 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왜 그 즉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았는가. 왜 아내와 헤어지지 못한 채 복수하듯 오입질(<>)을 하거나 술집 여급과의 사랑(<김영태에게 보내는 편지>)에 애타하는가. 나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혹시 김수영에게는 시가 현실에서 살지 못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한없이 나약한 삶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토록 시에서는 엄격하려했던 게 아닐까. 모르겠다. 어쨌건 애매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5.

두 번째 목표는 어떨까. 저자는 김수영을 넘어서고 있는가. 이 점은 아쉽다. 책 곳곳에서 짙게 느껴지는 정서는 김수영이라는 거대한 존재 혹은 김수영으로 표상되는 어떤 인문정신에 대한 극복이라기보다는 재확인과 추종이다. 물론 거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속속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앉기 위해선 거인의 발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기어올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저자는 김수영의 어깨를 딛고 서기보다는 품에 안겨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김수영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하기보다는 단독성이라는 통찰을 반복해서 곱씹고만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으로부터 단독자가 돼라는 일갈을 들었다면 그 다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단독성을 지향해야만 하는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단독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와 같은 구체적 물음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이유와 방법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혹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라거나 모든 억압에 저항하라와 같은 추상적 답변만 제시할 뿐이다. 어쩌면 그 대답 역시 누구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일까.

 

또한 김수영의 외침은 자기 성찰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가르침을 줄지 모르지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혹은 김수영에게 타자란 단지 자기 성찰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김수영이나 저자나 모두가 시인이어서 시가 필요 없는 세상’,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꿈꾸지만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자기 성찰뿐이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타인과의 관계를 버려둔 채 자신에 몰두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일종의 자폐적 철학이 아닐까.

 

6.

물론 저자의 의도는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대에 김수영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는 것일 테다. 저자가 느끼기에 김수영 이후 반세기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김일성 만세>를 외치며 지적했던 현실에서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기에 김수영 정신의 회복은 더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저자의 독립선언임에도 불구하고 <강신주를 위하여>가 아니라 <김수영을 위하여>인지도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가 김수영 철학의 추종자나 아류로 남지 않고 마침내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질문되지 않는 철학은 단지 종교일 뿐이다. 김수영 정신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김수영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저자의 다음 책이 그러한 질문과 대답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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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6-07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주곡이라는 단어 이번 서평에 꼭 넣고 싶었는데 먼저 사용하셨군요...솔찍히 이렇게 길게 쓸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동어반복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편으로는 우상을 대치한 그 자리에 또 다른 우상이 자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뭐 비평하자면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진정성이랄까 뭐랄까 독립된 개인으로 열심히 살아보려는 저자의 노력이 엿보여서 아쉬운대로 긍정적인 평가로 리뷰를 마무리 하고 있는데...(다들) 너무 잘 써놓으셔서 부담되네요ㅋ 여튼 훌륭한 리뷰 잘보고, 감탄하고 갑니다.

nunc 2012-06-07 05:04   좋아요 0 | URL
앞에서 밝혔듯이 다소 편견을 가진 데다 호평 일색이라 이런 감상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올렸네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얘기가 더 많았지만 정리도 잘 안 되고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이 정도에서 멈췄지만, 다시 읽어보니 여기저기 고치고 싶은 부분이 많네요. 부족한 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개미님께서 쓰실 좋은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 - 안철수에 대한 발칙한 보고서
한윤형.이재훈.김완.김민하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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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총선은 많은 이들의 예상 혹은 기대와 달리 여당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야권 단일화 열풍으로 인해 지난 18대보다 약간 줄긴 했지만 여전히 단독 과반수를 확보함으로써 기존 야권이 현 여권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의미한 대안이 되기 어려움을 확인했다. 이와 더불어 다소 잠잠해지고 있던 박근혜 대세론도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권 지지자들이 작년 9월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20119월은 한국 정치의 역동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한 달이었다. 비유하자면 안철수라는 소행성이 한국의 정치판에 충돌하여 대규모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한 달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이후 4년 내내 철옹성처럼 지켜오던 박근혜 대세론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무상급식 시행 여부를 둘러싸고 촉발된 논쟁이 이러한 거대한 충격을 야기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20119월에 벌어진 대규모 지각변동을 네 명의 젊은 논객들이 분석한 책이다.

 

먼저 책 제목을 살펴보자. 아이폰 사용자에게 익숙한 용어인 밀어서 잠금해제란 대기 상태에 있는 시스템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 새롭게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작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작동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출발선에서 긴장하며 자세를 갖춰 기다리는 주자들에게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란 우리 사회의 기저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고, 안철수가 가진 무엇으로 인해 그 긴장이 활성화되어 표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흐르고 있던 긴장이란 무엇인가? 한 가지는 아마도 갑자기 등장한 안철수에 대한 높은 지지와 이를 받아 안고 시장에 당선된 박원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 정치권에 대한 높은 불신과 혐오일 것이다. 사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여 왔던 사람들이라면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실망과 좌절을 느낀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망과 좌절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의미한 정치 세력이 부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이지지를 보내거나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끊게 되었다. 각종 미디어에서 자주 회자되는 비판적 지지’, ‘선거란 차악을 고르는 일’, ‘정치적 무관심같은 말들을 떠올려 보자.

 

이러한 현실에서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이미지에, 안정적인 기반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결단력과 그 도전을 결국 성공으로 이끌어 내는 현실적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엄친아안철수가 서울시장 출마의사를 밝히며 정치에 관심을 표명하자 많은 이들이 열광하고 지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네 저자는 이 열광과 지지의 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길 권한다. 무엇보다 저자들은 안철수 개인에 대한 단순한 지지와 반대를 넘어 안철수 현상을 하나의 사회적 징후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했듯 안철수 이전에 흐르고 있던 긴장과 안철수가 가진 무엇이 그 긴장을 활성화시켜 표출되도록 만들었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네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대중의 욕망(이재훈), SNS의 등장으로 인한 매체 지형의 변화(김완), 정치공학적 관점에서의 안철수와 같은 존재가 할 수 있는 역할(한윤형, 김민하) 등 다양한 분야로 역할을 분담하여 분석을 시도한다.

 

먼저 한윤형의 글은 안철수 현상에 대한 각종 비평들을 재비평하는 메타비평의 형식을 취한다. 특히 안철수의 등장에 대한 부정적 시선, 즉 정당 정치를 파괴한다거나 신자유주의적 성공 신화의 다른 일면이라는 지적에 반대하며 안철수 현상이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활용방안을 모색할 것을 주문한다.

 

이재훈은 각종 매체에 나타난 안철수의 발언들을 심층 해부함으로써 안철수의 열광하는 대중이 안철수를 통해 무엇을 욕망하고 있었는지를 역으로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안철수에 대한 열광은 결국 중간계급의 엄친아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성찰을 통해 거꾸로 그동안 배제되어왔던 다수 노동자의 정치를 복원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완은 안철수 현상이 한국 사회 매체 지형의 변화를 예고하는 전조라고 진단한다. 그는 그간 대선에 있어서 언론의 역할을 꼼꼼하게 짚어보고 이러한 언론이 안철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또한 역으로 SNS라는 새로운 언론 환경으로 대변되는 안철수가 기존 언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김민하는 정치권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 안철수를 대입해 봄으로써 대선에 이르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6개월 전의 예측임에도 불구하고 총선 이후 정치지형에 커다란 변화가 없는 현실에서 이 시나리오는 여전히 흥미롭게 읽힌다.

 

물론 이 책에 실린 네 저자의 분석이 안철수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를 판단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며, 저자들 역시 그럴 의도로 저술한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열광과 분노로 대변되는 무조건적 지지와 비판이 횡행하는 정치 과잉의 분위기에 매몰되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사태를 차근차근 읽어보려는 시도로서 자신의 역할을 한정짓고 있으며,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편집의 실수가 자주 눈에 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안철수라는 충격파의 진앙이 채 식기도 전인 1025일 초판이 인쇄되었다. ‘안철수 현상이 가져온 첫 가시적 결과물인 서울시장 선거 결과를 채 보기도 전에 출판된 것이다. 이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포착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성에 너무 치중한 미처 잡아내지 못한 편집의 실수가 독서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 이후 선거 결과에 실망하여 안철수를 다시 호출하는 대중의 요구가 거세질 이 시점에서 저자들이 건네는 충고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 여기에 이번 총선을 통해 드러난 대중들의 요구, SNS의 영향력, 정당들 사이의 정치 역학의 변화 등 지난 6개월 동안 추가된 사실들을 덧붙여가며 책을 읽는다면 그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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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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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문화방송 노조의 파업 탓에 <무한도전>이 예전에 방송되었던 내용으로 다시 방송되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타인의 삶이라는 내용으로 여기서 박명수는 의사의 삶을 대신 살아본다. 박명수가 겪는 의사의 삶 가운데 의사들의 아침모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모임에서 온갖 영어로 된 병이름이 쏟아져 나오자 박명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제작진은 이를 안드로메다에 온 그림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사정은 오후의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의사들이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된 병이름을 사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공부하는 책들이 대부분 영어로 씌어 있어 영어 이름이 익숙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말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 테다. 그러나 가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데도 영어를 섞어가며 말을 하는 이들을 볼 때면 볼썽사납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꼬치꼬치 따지고 있다. 왜 좋은 우리 말을 놔두고 굳이 영어나 한자어를 써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좋은 물음이고 되새겨보아야 할 물음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지은이의 물음을 내내 마음속에 두고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영어나 한자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언어쓰임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말로 순화해 사용하는 일이 마치 또 다른 번역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한편으론 이렇게 어려운 일을 굳이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언어란 결국 소통의 도구이고 서로가 그 뜻을 잘 보내고 받을 수 있다면 영어건 한자어건 우리 말이건 편한 말을 쓰면 되는 게 아닌가. 지은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말을 올바르게 써야 생각이 올바르게 되고, 생각이 올바른 이만이 삶을 올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말을 올바르고 알맞춤하며 제대로 배우는 일이란, 스스로 내 생각을 올바르고 알맞춤하며 제대로 가눌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생각을 올바르고 알맞춤하며 제대로 가누도록 하는 일이란, 내 삶을 올바르고 알맞춤하면서 제대로 꾸리도록 다스리는 일입니다.”(150~151)

 

지은이는 말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삶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말을 써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욕이나 비속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바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좋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말을 사용하는 모습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좋은 지표일 수 있다. 그러나 겉 다르고 속 다르다라는 속담도 있듯,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지은이는 말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만 거꾸로 삶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말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가 그 사람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자연스레 언어사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말과 생각, 그리고 삶은 서로 되먹임을 주고받는 사이이지 한쪽으로만 영향을 주는 사이는 아니다. 그래서 말을 올바르게 써야만 좋은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지은이의 아래와 같은 결론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 제 삶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면, 알맞춤하게 꾸린다면, 제대로 북돋운다면 어찌 될까 생각해 봅시다. 아마, 삶터와 마을과 나라가 한껏 거듭날 테지요. 달라질 테지요. 온갖 검은 셈속이 사라지고 갖가지 더러운 짓이 쫓겨나며 돈벌레 짓거리는 자리잡을 수 없을 테고요. 거짓말 일삼는 정치꾼은 뿌리내릴 수 없고, 뒷돈 챙기는 쇠밥그릇 공무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151)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이 단지 말을 바로 쓰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은 아닐 테다. 올바른 말의 사용은 좋은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또한 우리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다고 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나는 존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말에 있는 존댓말과 같은 표현은 서로 존중하기 위해 쓰이기보다는 나이 많은 이가 적은 이를 짓누르는데 쓰이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대화를 가로막는 큰 담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이란 세월에 따라 변해간다. 사람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변화를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울림도 좋고 뜻도 좋은 우리 말이 있는데 나라밖 말을 쓸 까닭은 없을 테다. 그러나 쉽게 사용하기 어렵고 뜻도 잘 전달되지 않은데 굳이 우리 말만을 고집하는 일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적절한 말을 쓰는 일이란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진다. 이 글을 쓰면서도 지은이의 꾸짖음을 계속 떠올렸다. 역시 어렵다.

 

삶을 가꾸는 사람만이 말을 가꿉니다. 삶을 고치는 사람만이 말을 고칩니다. 삶을 올바르게 가다듬는 사람만이 말을 올바르게 가다듬습니다. 삶과 말이 동떨어진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으며, 어느 한 사람도 두 가지가 나란한금으로 나아간 적 또한 없습니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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