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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뭐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어디에서 어떤 근무를 했던지 간에 자신의 군생활이 가장 힘들었다고 주장하는 전역자들을 보면 알 수 있듯,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당대에 대한 규정은 우리가 몸담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다소 과장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자신의 살고 있는 시대가 전환의 시기, 위기의 시기, 혁명의 시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넘쳐났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유동하는 근대란 무엇인가? 번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제도·풍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14)라고 한다. 바우만이 보기에 이 세계에서 우리들의 모든 것, 아마 거의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변화한다.”(16) 마르크스에 의하면 견고했던 모든 것을 대기 속으로 녹여버리는, 혹은 슘페터가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이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동력을 얻는다. 마치 액체처럼 고정되지 않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자본주의적 양식이 우리 삶의 조건이 되어버렸다고 바우만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유동하는 근대를 특징짓는 현상은 무엇이 있을까? 그는 먼저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적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를 보면 알 수 있듯,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했고, 무슨 물건을 샀는지, 즉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끊임없이 경쟁적으로 전시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 하는 것이다. 실로 전시라는 말이 적절한데, 이 모습이 마치 쇼핑몰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상품의 제원을 지칭하던 스펙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오히려 개인의 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전용되는 현실을 보면 쉬이 동감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상품으로써 전시한 결과는 역설적으로 프라이버시의 소멸이다. 프라이버시란 인권 의식을 바탕으로 성립된 근대 사회 이후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권리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프라이버시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었다.”(74)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을 전시하는 모습, 즉 자신의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에 강제적 혹은 자발적으로 노출함으로써 근대 이후 프라이버시가 가지고 있던 의미는 희석된다. 혹은 오히려 볼거리로 전락한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휴대전화를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끊임없는 접속 가능성과 끊임없는 이용 가능성”(81)의 상태에 놓아둔다.

 

이처럼 타인에게 보여지고 이용되길 바라는 삶은 우리를 유행에 민감하게 만들고, 새로운 상품을 계속 소비하게 만들고, 기업과 병원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기준에 자신을 맞춰가게 만든다. 이는 얼핏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강제적 과정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시장은 노동의 유연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일상화된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해야만 한다. 소비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즉 소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마저도 소비시장에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제공해야만 하는 사회”(325~326)라는 악순환이 우리가 처한 현실인 것이다. 결국 바우만의 진단은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의 삶, 상품이자 볼거리인 삶이 바로 우리 현대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은 결국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소비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소비 능력의 차이는 자연스레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예란 테르보른의 말을 빌려 이러한 물질과 자원의 불평등생명 유지에서의 불평등, 더 나아가 실존적인 불평등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는 도덕이 황폐화되는 현실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지해지거나 무감각해지는 상황, 또 인간의 일반적인 고통뿐 아니라 인간들이 매일 동료 인간들에게 가하는 그 해악에 대해서까지도 습관적인 일로 바라보게 되는 상황”(193), 즉 우리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긍정적 가치들이 점차 침식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점차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잃는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31) 이처럼 이 책에 실린 마흔네 통의 편지를 통해 바우만이 우리에게 전하는 현대 사회의 양상은 대단히 우울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가? 마지막 편지에서 바우만은 카뮈를 인용하며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389)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 새로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싸워나가길 요구하는 것이다. 편지의 제목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이다. 주목할 것은 나의 반항나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나의 반항이 단지 나의 존재만을 보증해 준다면, 이 저항은 그저 무수히 많은 개별적 존재의 자기 확인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된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단순한 자기 확인은 자폐적 위안이나 과시일 뿐이다. 나의 저항이 타인과 연대로 확장될 수 있을 때에만 그 저항은 의미를 획득하고 마침내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우만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사회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에 저항하고 벗어나야 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회복해야 한다. 결국 고독을 위해 연대하라. 이 조언이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귀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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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10-3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nunc 2012-10-31 12: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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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공포는 돈이 된다. 공포 영화나 놀이공원의 각종 기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식의 공포 체험도 돈이 되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보거나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공포를 체험해 봄으로써 느끼는 즐거움때문이지 순수한 공포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진짜 돈이 되는 공포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모든 식품 중에서도 우유는 불순물, 특히 결핵과 장티푸스균이 번식하기에 최적의 장소”(36)

“‘창자의 부패로 인해 유발되는 질병이 사라진다면 인간의 수명은 120-140세까지도 연장될 수 있을 것이다.”(52)

햄버거는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것보다 약간 더 나은 것일 뿐”(89)

화학 첨가물이 식품의 부패를 막거나 지연시킨다면 분명 소화 시스템에도 유해할 것”(124)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비타민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다.”(147)

신선하거나 자연 그대로의식품을 멀리하고, 저장 식품과 가공식품을 선호하는 트렌드가 미국인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173)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에서 간단히 뽑아본 목록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먹거리를 두고 벌어졌던 다양한 논란들, 즉 대개는 터무니없었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던 사건들과 그 이면에 숨겨져 있던 배경을 폭로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주로 190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와 미국이라는 시간적·공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리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왜일까? 당장 오늘의 신문을 펼쳐 사회면이나 건강, 혹은 과학 지면을 펼쳐보기만 해도 위와 유사한 문장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돈이 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되는 일은 생명력이 길다.

 

공포는 왜 돈이 되는가? 아마 그것은 인간이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 먼 원시시대의 인간은, 아니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이후 모든 생명체들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최상의 목표로 삼았을 테고, 안정적인 생존과 번식을 위해 위험한 것과 마주치면 무조건 도망치도록 본능적으로 학습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유전자 어딘가에 깊이 각인된 위험을 회피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은 생명의 진화를 비롯하여 문명의 발달과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자연을 정복했다고 자부하는 현재에도 그런 성향이 남아 있을까? 당연하다. 수십만 년 혹은 수백만 년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장구한 진화의 역사에서 약 1만 년의 문명의 역사나 겨우 수백 년밖에 되지 않은 과학혁명 이후의 시간은 인간에 내재된 성향을 변화시키기엔 대단히 짧은 시간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와 경계심을 가지고 있고, 잘 알지 못하는 분야나 영역에 선뜻 뛰어들길 주저한다. 오히려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에 문득 비가시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어떤 것이 나타나게 되면 더 큰 불안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광우병 사태를 생각해보자. 미국산 소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자가용을 이용하다 사망할 확률보다 훨씬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국산 소고기를 꺼려했고 수입을 결정한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이는 자동차 운전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기에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반해, 광우병은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로 나에게 침투할지 알기 어렵기에 극미한 확률에도 불구하고 더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위험회피성향의 당연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 즉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투자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생존을 위한 자연스런 반응인 것이다.

 

기업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공포 마케팅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걸 먹지 않으면 이런저런 병에 걸리게 될 거야.’ ‘이걸 먹으면 이렇게 건강해질 거야.’ ‘저런 걸 먹으면 해롭기 때문에 이런 걸 먹어야 해.’ 등의 말들이 전문가의 연구 결과라는 이름표를 달고 미디어에 등장하면 사람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기존의 식습관을 바꾸고 새로운 식품으로 몰려간다. 열기가 한풀 식을 때쯤이면 다른 것이 등장하여 또 한바탕 바람을 일으킨다. 이 주기가 하도 다양한 종류에서 반복되어 일어나다 보니 이번에 몸에 좋다고 판명된 것이 얼마 전에는 몸에 해롭다고 판명되어 끊었던 것이라는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공포마케팅이 음식과 같은 필수품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식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여기는 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경쟁 사회 속에서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아니 적어도 남들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식으로 불안감을 자극하는 마케팅이 점점 확장되어 간다. 성형과 미용 그리고 사교육이 바로 이런 공포마케팅으로 급성장한 대표적 분야일 것이다.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소비. 이를 아는 기업들은 더 많이 팔기 위해 계속 불안감을 자극해야 한다. 일종의 협박의 경제학.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겠지만, 내 개인적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무관심합리적 의심이 꽤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관심이란 건강에 대한 무관심을 말한다. 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건강에 대한 조바심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유발해 더 해롭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먹고 싶은 걸 먹고 먹기 싫은 걸 안 먹었을 때의 심리적 행복감이 억지로 무언가를 먹거나 안 먹을 때의 괴로움보다 더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합리적 의심이란 미디어의 속성과 과학적 발견의 절차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미디어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실제보다 과장된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과학적 발견이란 수많은 반복된 검증 실험을 거쳐 이론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기에 논문 하나로 모든 게 명백하게 밝혀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 학술지에 실린 논문 하나를 근거로 미디어가 호들갑을 떨고 있다면 일단 의심하고 기다려보는 것이다. 반대 주장이 나와 뒤집히든 근거들이 추가되어 확증되든 할 테고, 그때 뭔가 변화를 시도해도 충분하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기다리다보면 무관심(!)해지게 된다. 꽤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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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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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고종석은 한 칼럼 지면을 통해 절필을 선언했다.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는 칼럼의 구절은 시대의 어떤 분위기와 조응하면서 깊은 울림을 줬다. 그러니까 무한 경쟁이 야기한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탓에 더 이상 책 읽을 여유 따위는 가지지 못하는 세태. 뿐만 아니라 정부비판이 상관모독죄가 되고 북한을 조롱하기 위한 리트윗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는, 그리하여 우리가 자신의 말과 생각을 스스로 검열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글의 힘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깨달은 자의 절망감 같은 것이 읽혀졌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절필에 대해 아쉬워하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고백과 달리 그의 복귀를 촉구하는 칼럼이 두 일간지에 나란히 실리기도 했다(박구용, <고종석의 절필, 피로와 배반 사이에서>/오길영, <어느 에세이스트의 절필>). 과연 요즘 시대의 어떤 에세이스트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도 그의 글을 찬찬히 읽어본 이라면 그의 글이 주는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수려한 문체와 단정한 생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억압적인 사회 풍토가 오랫동안 지속된 탓에 진보연하는 것이 지식인 사회에서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져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유주의적 우파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내비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에둘러 말하거나 의뭉스럽게 눙치지도 않는다. 비록 많은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길 꺼려하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평가를 고려하여 짐짓 점잖은 척하는 일이 그가 자주 쓰는 표현처럼 부정직한 짓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글쓰기. 이것이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이다.

 

그의 정직함은 무엇보다 그의 자유주의에서 기원한다. 그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이라는 근대적 이념과 체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의 신성함에 대한 옹호, 그 중에서도 사상·양심·언론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신념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처럼 억압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이 도저한 자유주의자의 음성은 어떤 쾌감마저 준다.

 

<감염된 언어>는 제목처럼 언어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길게 돌아온 이유는 그의 언어관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는 그 누구보다도 신문과 잡지 같은 공적 지면을 통해 한국어에 대해 숙고하고 음미해보길 권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들, 즉 한국어의 매력을 수려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말들의 풍경>, <모국어의 속살>, <어루만지다> 등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말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된다. 이처럼 언어를 훌륭하게 다룰 줄 아는 이의 언어에 대한 태도, 언어관을 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감염된 언어>.

 

그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언어가 소통의 도구임을 확고히 한다. 소통은 언어가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소통할 수 없을 때 언어는 쇠약해지고 끝내 사멸한다.”(98)언어가 세계관을 규정한다.’와 같은 말들에 익숙한 요즘의 시선에서 보면 구닥다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학자로서의 배움과 기자로서의 경험은 언어가 지닌 도구 이상의 몫이 언어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닐 것”(205)이라는데 무게를 실어주는 듯하다.

 

소통의 도구로써의 언어라는 기둥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하나는 소통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여러 요소들에 대한 긍정이다. 그는 외래어나 한자 교육, 심지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는 통신 언어에 이르기까지 언중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관대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대부분의 경우 한자어의 이해에 한자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자 지식이 한자어의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241) “방언이 박멸해야 할 언어 바이러스가 아니라 한 언어를 풍성하고 아름답데 만드는 꽃잎이요 곁가지들이라면, 채팅 언어도 그럴 것이다.”(103)

 

이런 생각은 복거일의 제안으로 한바탕 논란이 된 적이 있는 영어공용화론의 긍정적 검토에까지 이른다. 그가 보기에 영어는 이미 세계어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 이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영어를 무시하는 일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오늘날 언어의 위계 질서 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영어다. 그리고 앞으로 머지않은 시기에, 영어를 쓰지 않고 민족어를 쓴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추방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196) 인터넷을 오가는 언어의 80%가 영어라는 현실을 떠올려 볼 때 그의 주장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이를 미국의 패권적 현실에 순응하자는 주장으로 읽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개정판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영어공용화론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205~206)

 

그렇다고 그가 영어공용화를 언어 정책의 차원에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언어는 사용자들의 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필요가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진화적 과정일 뿐이다. 굳이 정책적으로 개입해서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부질없는 짓이다. 가장 좋은 문화정책이 문화를 그냥 놓아두는 것, 즉 무책이듯, 가장 좋은 언어정책은 언어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175)

 

그러나 이 부질없는 짓을 열심히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언어순수주의자들이다. 그래서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언어순수주의에 대한 반대로 뻗어나간다. 그가 보기에 언어순수주의자들은 언어의 본질이 소통의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들이다. 순수주의자들 가운데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소통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한 국어사전의 한 구석에 박혀 있을 뿐 실생활에서는 오래 전에 죽어버린 말을 끄집어내 사용하는 경우 말이다. 이런 말들은 그 소통 효과에서 외국어나 다름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런 실천을 해야 하는가.”(99)

 

그래서 그는 순수한 한국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허구적인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져왔다고 해도 수백 년 전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얼마나 다른지 논증한 후, 순수한 한국어를 복원하려는 시도들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혐의를 읽어낸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30)

 

결국 한국어에 담긴 아름다움에 천착하면서도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깊이 몸담고 있는 자유에의 갈망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들이 서로 어울려 빚어내는 다양성의 무늬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아름다움은 섞임과 스밈 속에, 불순함 속에 있다.”(104) 물론 이 결론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던 감염된 언어에 대한 시선이 어느새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종석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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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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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칼 포퍼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는 자는 바보요,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포퍼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가 나중에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 얘기를 볼 때마다 (물론 그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스스로 나는 결코 바보였던 적이 없어.’라고 거만하게 말하는 듯해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쨌든 마르크스주의를 닫힌 사회의 전형이라 맹렬히 비판했던 포퍼조차도 마르크스주의에 젊은 열정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사실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 중 단 한순간도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된 적이 없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전 세계의 3분의 1에 가까운 이들이 거의 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는 사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지금도 여전히 현실의 위기가 심각해질 때마다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이름이 끊임없이 다시 호출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히 철지난 사상으로 치부하고 무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공산주의 프로젝트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1917년 이후의 세계 전반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거나 쓸 수 없”(19)는 것이다.

 

도대체 마르크스주의에 무엇이 있기에 그토록 젊은 열정들을 사로잡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경험을 밝히자면, <공산주의당 선언>에 실려 있던 한 구절,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라는 표현이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나라처럼 각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교육 체계에 몸서리쳤던 나에게, ‘가족을 위해, 학교를 위해, 국가를 위해와 같은 말들이 끔찍하게 싫었던 나에게,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사회, 그리고 그것이 서로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은 마치 천국에 대한 묘사처럼 들렸던 것이다.

 

나는 무슨무슨 주의자가 되기에는 대단히 게으른 인간이기에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청할 깜냥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이상과 마주한 후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여러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저술들을 찾아 읽게 되었고, 그들이 설명하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모순, 그리고 극복 방향에 대해 많은 부분 공감을 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들의 사상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는지도 알고 있고, 현실의 조건에 비추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는 나에게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코뮤니스트>는 매우 반가운 책이다. 여기저기서 단편적으로 습득했던 공산주의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적 토대와 소련이라는 현실적 구현물, 이 두 중심을 양 극으로 하여 초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부터 최근의 사파티스타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지리적으로 넓게 퍼져있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적·현실적 자기장의 세밀한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기원-실험-도약-확산-변형-종언으로 이어지는 각 부의 제목은 공산주의 역사의 흥망성쇠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시종일관 비판적인 자세로 공산주의의 역사를 검토한다. 물론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폐기해야할 철지난 사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기초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수행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역사가로서 그 사상이 현실에 이루어 놓은 구현물들인 여러 현실적 공산주의 국가들의 모습을 차근차근 파헤침으로써, 어떻게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기획이 실패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의 사멸을 예측했다. 공산주의 역사는 그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국가 권력은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노동수용소는 확산되었다.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개인과 집단을 억압하는 일은 현상 유지를 위해 계속 필요했다. 시민 사회는 분쇄되었다.”(23)

 

이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뼈아픈 지적이다. 물론 현대의 어떤 공산주의 옹호자들은 역사상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현한 국가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식으로 이러한 지적을 회피하기도 한다. 레닌이나 스탈린과 같은 독단적 인물의 문제로, 혹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파상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로 현실 사회주의가 보여준 전체주의적 모습을 애써 평가절하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유명한 한 논객의 말을 잠시 비틀어 인용하자면, 하나의 사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현실 속에서 만들어 놓은 사태이지 그 사상의 내심이 아니다. 하나의 사상이나 이념은 그 자체의 내적 정합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실과의 적합성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한 사상을 현실적으로 구현해 보려는 다양한 시도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무시하고 외면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역사적 실패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저자는 결론에서 한 가지 딜레마를 지적한다. 공산주의 정부들은 레닌과 스탈린이 개발한 소련식 모델을 시행할수록 점점 강력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소련식 모델의 근본적인 특징들을 복제할 수 없었거나 복제하려 하지 않았던 국가들은 내부의 해체나 외부의 개입에 취약했다.”(741)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은 직면한 내적 외적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체제를 수립해야 했고, 이를 위해 전체주의적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은 더 큰 반발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강력한 체제를 위해 도입한 전체주의가 결국 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선택이 일종의 조급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조급증. 그러한 조급증이 다양한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로부터 귀를 막게 만들고, 현실적 문제들에 눈감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현실적 급박성을 볼모로 삼아 비판과 성찰의 여지를 무시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했던 태도가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 더 많은 비판과 토론, 더 많은 실험과 성찰, 결국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도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급증을 버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랬을 때 더 많은 의견들이 서로 조율을 이루면서 하나의 안정된 지향점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 나는 그 과정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했던 말도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성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止揚)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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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온갖 탈근대 담론들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근대, 아니 전근대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러저러한 사건 사고나 혹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합리한 일처리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근대적 사고는 도대체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많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군대와 가족에 그 혐의를 두고 있다.

 

먼저 군대란 일상적 폭력을 체험하고 체화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상명하복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에 자신을 끼워 맞춤으로써 사회적 서열체계와 나이주의(ageism)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 윗사람의 권위와 폭력, 아랫사람의 충성과 복종이 자연스레 체화되는 것이다. 물론 군대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에 유교적 가부장문화가 뿌리깊이 퍼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굴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가족이란 대개 구성원들이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주고 독립성을 인정해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절대적 책임과 의무를 가진 존재로 여기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합리한 처사들, 즉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 자식에 대한 부모의 폭력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진로 등 개개인의 미래에 대한 간섭과 같은 일들이 가족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이다.

 

결국 가족-군대로 이어지는 시스템, 아니 보다 세분화하자면 가족의 연장인 학교, 군대의 연장인 직장까지 포함하여, 가족-학교-군대-직장-다시 가족으로 이어지는 순환체계는 급격히 발전된 물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근대적 시스템이 유지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최근 등장하고 있는 1인 가족이나 무자녀 가족 혹은 비혈연 가족과 같은 탈가족의 풍경들이 단지 경제적 여건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 완고한 가부장 시스템을 벗어나고자하는 힘겨운 몸부림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사회에 탄탄하게 뿌리내린 전근대의 흔적을 우리 고전에서 찾아낸다. <가족 기담>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그림동화와 같은 서구 전래 동화의 원본, 즉 어린이용으로 순화되기 이전의 잔혹한 내용들을 재발굴해서 보여주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에 새로운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고전들이 내용 그대로 다뤄지고 있다.

 

그런데 왜 기담인가? <장화홍련전>이나 <여우누이>, <쥐 변신 설화> 등을 제외한다면 다들 평범한 내용들이 담긴 고전들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그저 우리가 얼핏 읽고 지나갔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고 다시 생각해보자고 권한다. 그러면 평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내용 밑으로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현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조리를 건져올릴 수 있다. 그렇게 가족을 둘러싼 뒤숭숭하고 불온하고 끔찍한 것들이 우글우글한 우리 옛이야기들”(7)에서 건져 올린 날 것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오싹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라고 묻고 싶은 것이다.

 

물론 오싹하진 않다. 저자는 짐짓 과장된 어투로 옛날에는 이렇게 살았었다니까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지 옛이야기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근대적 요소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족체계 안에서 나고 자라왔기에 새삼스러울 게 없는 것이다. 저자는 평범한 것에서 오는 공포가 그 무엇보다 무섭다고 말한다. 타자화시킬 수 없는 영역에 속한 자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것은 본원적 공포다.”(203) 즉 타자화시킬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가족이 주는 공포. 그러나 일상화된 공포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그건 그저 현실일 뿐이다.

 

때문에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러한 체계를 벗어나려는 일탈의 시도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깊이 있게 다루질 않는다. 아마도 그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일탈의 모습을 보여준 홍길동 역시 저 먼 섬나라 율도국에 가서 비슷한 나라를 세우지 않았던가. 불합리한 체계 속에 갇혀 있음을 알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순응해버리는 모습, 혹은 강자가 되었을 때 오히려 부조리한 시스템을 적극 이용하는 모습. 나는 이것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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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9-28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학교-군대-직장-가족의 순환고리에 대한 관점이 좋네요. 다행이 저는 군대를 대신한 공익근무여서 이 사슬을 조금은 끊은 듯ㅋㅋ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nunc 2012-09-29 15:53   좋아요 0 | URL
어떤 식으로든 순환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고정된 직장이나 새로운 가족을 안 만드는 쪽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추석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