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 에세이
강석기 지음 / Mid(엠아이디)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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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과학 에세이 혹은 과학 칼럼이라 이름 붙은 글이 가져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나는 다음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싶다.

 

첫째, 무엇보다 어렵고 전문적인 내용을 비전문가들도 쉽게 이해하게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은 그 어떤 학분 분과보다도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읽을 수 있는 인문 사회 분야와 달리 과학 논문과 같은 글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쉬운 언어로 번역해주는 번역가가 절실한 분야가 바로 과학이고, 과학 에세이스트들은 이런 번역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둘째,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널리 알려진 상식을 재확인해주거나 잘못된 통념을 정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과학은 인간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는 가장 기초적인 학문이다. 우리가 참이라 믿고 있는 앎의 대부분이 과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믿음을 뒷받침해주거나 정정해주는 일은 과학 에세이가 맡아야 할 중요한 임무이다.

 

셋째,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발견을 소개하고 그것이 우리 혹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지적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때론 몇몇 과학자들의 지적 희열에 불과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과학적 발견은 공공재처럼 널리 활용되고 변형되어 인간과 인간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최신의 과학적 성과들에 대한 이해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미래를 성찰하기 위한 좋은 재료가 된다.

 

이 세 기준에 동의한다면,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는 매우 만족스런 선택이 될 것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50편의 과학 에세이는 이 세 기준을 적절히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첫째와 둘째 기준에선 매우 훌륭하며, 셋째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저자가 한정된 분량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2.

이 책에 실린 50편의 글은 모두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연재된 글이다. 과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신문에 칼럼 형식으로 연재된 글이기에, 보통의 대중 언론이 상정하고 있는 독자의 수준, 즉 중고생 정도의 기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씌어져 있다. 물론 양자역학과 관련된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반물질과 반중력>은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를 제외한다면 누구나 별 무리 없이 글을 읽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톰과 제리> 같은 애니메이션이나 종편의 건강 프로그램과 같이 익숙한 일상의 사례에서부터 천자문의 작자 주흥사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백발이나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비교와 같은 잘 알려진 역사적 이야기, 그리고 모 우유회사에서 비롯된 갑/을 논란과 같은 시사적 문제까지, 흥미를 불러일으킬만한 적절한 도입으로 글을 시작하여 자연스레 과학 논문의 연구 결과로 끌고 들어가는 것에서도 독자에 대한 배려가 느껴진다.

 

3.

그러나 쉽고 친절하게 씌어졌다고 해서 단순히 가벼운 책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상식이나 통념에 대한 지지나 반박을 최신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꼼꼼히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옛말을 인적 네트워크의 한계로 설명하고 있는 <새 친구를 사귀면 옛 친구와 멀어지는 이유>,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가 빨리 센다는 속설을 실험 결과로 보여주고 있는 <스트레스와 백발>, 산책이 머리를 맑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창의력을 높이고 싶다면 걸으세요> 같은 글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던 상식이 과학적 연구를 통해 뒷받침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남녀의 성별 이분법이 그다지 타당성 없다는 <정말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을까?>새대가리가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을 수 있다는 <동물도 미래를 꿈꾸나>, 인간이 직립 보행으로 인해 자유롭게 손을 쓸 수 있었다는 생각에 문제 제기하는 <도구 쓰는 손의 진화는 직립보행의 결과일까?> 같은 글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 중 어떤 것들은 매우 허약한 기반 위에 위태롭게 서 있음을 보여준다.

 

덧붙여 <날씬해야 오래 산다는 과학상식 믿어도 되나>, <비타민 영양제 필요성 논란, 여전히 진행 중>과 같이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는 상식에 대한 균형 있고 신중한 소개도 있다.

 

4.

이 책은 가장 큰 미덕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대부분 5년 이내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빠르면 주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과학 저널들을 하나하나 검색하며 칼럼에 사용하기에 적합한 논문들을 골라내고 꼼꼼히 읽어나가는 저자의 성실한 노력이 무척 고맙게 느껴진다.

 

몇몇 글에서는 보다 깊이 있는 논의로 나아가려 시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 삶의 질을 높이고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네트워크를 더 많이 구축해야 한다.”(25)는 점을 강조하거나, “언젠가는 물고기가 산 채로 회를 떠서는 안 된다는 법률이 제정될지도 모를 일이다.”(110)라며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재조합DNA기술과 인슐린의 탄생 과정을 소개하는 글에서 유전공학이나 DNA조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183)라며 과학기술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 재고를 요청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최신 논문의 소개에 급급한 나머지 그러한 연구 결과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진다. 즉 독자들에게 어떤 고민거리를 던져주지 못하고 성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이는 아마도 인터넷 전문 매체의 특성상 스크롤의 압박에 대한 부담감, 즉 일정한 분량 안에 글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 아닐까. 만일 처음부터 출판을 염두에 두고 긴 호흡을 글을 썼다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과학 에세이가 가져야 할 미덕을 적절히 보유하고 있는,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의 과학 서적이다. 과학에 흥미 있는 이에게 기꺼이 추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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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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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구경은 재밌는 법이어서 간혹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논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보면 일일이 블로그들을 찾아다니며 논쟁글을 읽어보게 된다. 그러다 어떤 이의 글이 재미있거나 흥미로우면 즐겨찾기에 등록하여 새로 올린 글들을 챙겨보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박가분도 그런 식으로 몇 번 찾아보게 된 블로거 중 한명이었지만 굳이 즐겨찾기에 등록하진 않았다. 그의 글이 별로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포스팅된 글들을 몇 개 읽어보며 느낀 인상은 이런 것이었다. 그는 마치 물감을 머금은 스펀지 같다. 다양한 사상가들의 책을 섭렵하며 그들의 여러 가지 생각들을 끊임없이 흡수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흡수된 생각들을 잘 뒤섞어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빨아들인 그대로를 다시 툭툭 내뱉어버린다. 그러다보니 내용이 난삽해지고 글을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저자 소개에 이번 책에서는 문체를 바꾸느라 머리털이 조금 빠짐.”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곤 반가웠다. 이젠 좀 읽기 쉬운 문장이 되었겠구나, 라는 기대도 약간 가졌다. 물론 약속은 어느 정도 지켜져서 예전처럼 어려거나 복잡한 문장은 사라졌고 매우 읽기 쉬워졌다. 그러나 이는 문장뿐이었다. 글을 쓰는 기본적인 태도는 여전히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300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책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상가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러나 여러 사상가들의 관점이 일베라는 현상의 다양한 측면들을 분석하기 위해 동원되지만, 말 그대로 동원되기만 할 뿐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분석을 누더기 분석이라 부르는데, 하나의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다양한 분석틀을 활용하여 짜깁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분석은 저자가 대단한 통찰을 가지고 결론부에서 다양한 분석틀을 하나로 꿰어내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닌 현학에 그치거나 권위에의 오류가 된다. 하나의 대상이나 현상을 꿰뚫는 하나의 이론과 그런 이론들의 경합이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코에는 이 이론, 꼬리에는 저 이론, 다리에는 그 이론이라는 식의 설명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사상가들의 향연이라는 거품을 걷어내고 남는 뼈대는 무엇인가. 저자는 친절하게도 요즘 유행하는 세 줄 요약으로 이를 정리한다.

 

(1) 일베는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여기 인터넷=광장에 모인 우리가 곧 국가이다)을 계승한다. (2) 일베는 현실의 국가, 현실의 시민사회에 대한 요구를 단념하고 인터넷 내에서의 인정투쟁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오는 새로운 유형의 젊은 우파들이다. (3) 이러한 일베의 사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장=인터넷에 모인 사람들이 이후에도 각자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254)

 

먼저 (1)을 보자. 저자는 쌍생아라는 표현으로 일베와 촛불시위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전혀 상반되어 보이는 두 현상이 어떤 점에서 유사한가. 그것은 두 현상 모두 몰이상적 이상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지향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치적 이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상상적인 국가를 향한 강박으로 나타나기 일쑤였다. 그것은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다.”(108) 이렇듯 두 현상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 국가에 대한 요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쌍생아이다.

 

그러나 둘 사이엔 유의미한 차이 또한 존재한다. 2002, 2008년의 촛불시위나 최근의 안녕들 하십니까가 온라인의 논의를 오프라인 즉 거리로 끌고 나왔다면, 일베는 철저하게 온라인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인터넷 안에서만 머무는가. 저자는 일베 유저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는 이유에 대해 길거리에 나서서 자신들의 숭고한 대의를 외치는 순간 자기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감추고 그것을 다소 위선적으로 포장해야만 하기 때문”(224~225)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이상을 철저히 몰이상의 형태로 포장하는 이유는 인터넷=광장에서의 이상을 그 바깥의 현실에서 무리하게 실현시키려 할 때 결과적으로 입게 될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236~237)라고 말한다. (2)에서 말하는 인터넷 내에서의 인정투쟁에 머무는 이유이다.

 

이처럼 촛불시위와 일베에는 유사성과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는 차이 역시도 유사성의 일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나는 차이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다들 인정하듯이 촛불시위의 요구들은 실현되지 않았고 이명박근혜라고 농담 삼아 부르듯 기존 체제는 굳건히 버티고 연장되고 있다. 이러한 좌절이 어떤 이들에게 환멸을 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반동을 불러올 수도 있다. 저자는 (1), (2)에서 보듯이 일베 현상이 이러한 환멸과 반동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촛불의 사상이 일베의 사상으로 굴절된 것 이면에는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대중의 열망이 현실정치에서 좌절된 사정이 있다.”(234)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거리로의 진출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자각하고 그 간극을 줄이려는 노력을 낳기도 하며 함께 거리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생생한 연대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각과 연대감이 바로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지 이를 두려워하여 인터넷에서의 자폐적 유희에 머무는 것은 도피에 다름 아니며, 이 도피는 언젠간 끝날 수밖에 없다. 한 때 열광적으로 빠져들었던 게임이 어느 순간 시들해지듯이 인터넷으로의 도피는 언제나 현실로 끌려나오게 되어 있다. 어쨌건 우리 모두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과 같이 환멸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내버려둬, 저러다 말겠지라는 무관심도 나름 그럴듯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신의 주장을 거리로 끌고 나올 수 없는 부류라고 한다면 결국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의 요구를 하나하나 현실화 할 수 있는, 그래서 온 사회에 팽배한 정치적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촛불이든 일베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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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1-06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꿈꾸던 이상적인 리뷰네요. 게다가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살지 말지도 결정하게 해주시고, 여러 면에서 감사드립니다.

nunc 2014-01-07 01:21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을 좋게 읽어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5-06-19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으로 일베철부지는 사제폭탄을 만들어 투하했다. 정말!! 새롭다.
 
[플루토 크라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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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1 99’ 혹은 ‘0.1 99.9’로 지칭되는 오늘날의 현실을 함정에 빠져 버린 세계라고 부르며,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채 파국으로 치닫는 세계를 음울한 어조로 묘사한 바 있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이 책 역시 바우만과 동일한 세계를 다루고 있고, 둘 다 앞으로 다가오게 될, 혹은 다가올지도 모를 우울한 세상에 대해 카산드라의 예언과 같은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책은 매우 다르다. 바우만의 책이 99퍼센트 혹은 99.9퍼센트들에게 그들이 겪게 될 삶의 파국에 대한 우울한 경고와 대안의 모색을 촉구하고 있다면, 프릴랜드의 책은 1퍼센트 혹은 0.1퍼센트들에게 그들의 자만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의도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는 서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저자는 여기서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자본가들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전제로 깔로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16)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말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시스템이 지금까지 잘 작동해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잘 작동하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최고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에서도 현재의 유력 이론이란 결국 잠정적인 지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듯, 자본주의자들은 과학자들의 겸손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

 

저자의 의도는 그녀의 배경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책날개에 실린 저자 약력은 그녀가 유력 경제지의 기고가이자 편집자로서 성장해왔음을 보여주는데, 당연히 유력 경제지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지는 뻔한 일이다. 더구나 이 두꺼운 책을 채우고 있는 방대한 사례들과 발언들의 출처를 보면 대부분 유력 인사들과의 개인적인 식사 자리나 만찬장에서의 대화, 유력 경제인들이 개최한 회의의 사회자로 참여한 경험이 주를 이루고 있다. 결국 그들에게 비판적인 입장이었다면 절대 가질 수 없었던 경험들이 바로 이 책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책의 대부분은 플루토크라트라고 불리는 이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었는지, 누구는 기술 혁명의 물결을 잘 타고 올랐으며, 누구는 사회 변화의 순간에 어떻게 기회를 잡았는지, 그리고 누구는 과감한 판단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는지와 같은 사례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오히려 상위 1퍼센트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혹시 결론에 언급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저자 자신은 아니었을까? 뉴욕의 한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는, 문학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성공 비결은 기업인들이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려준다고 한다.”(403)

 

그렇다고 해서 99퍼센트에 속한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이 의미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미국식 경제 시스템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역시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세계적 금융 위기라는 풍랑에서 캐나다를 지켜줄 수 있었던 강력한 시장 규제 정책이라든지, 갑부들의 시대에서 우리 모두는 엘리트들이 시장에서 부가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파이 전체를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기존의 파이에서 그들의 몫을 늘리는 방식으로 부를 얻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면밀히 감시해야 한다.”(293)에서와 같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룰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면밀한 감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과연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라고 반문한다면 그 대답 또한 어두운 것이 사실이다. 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엄격한 규제와 면밀한 감시를 해야 할 역할을 부여받은 자들이 바로 정치가들일 텐데 저자가 언급한 연구결과처럼 정치가들은 상위 집단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래리 바텔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득 피라미드를 세 단계로 나누었을 때, 상원의원들은 중간 단계 유권자들보다 맨 위 단계 유권자들의 목소리에 50퍼센트나 더 많이 반응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맨 아래 단계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을 전달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현상과 관련하여 바텔스는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 유효한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406~407)

 

저자는 베네치아의 부흥과 몰락의 사례, 그리고 19-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을 언급하며 플루토크라트들의 오만이 초래할 사회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하지만, 금융위기에 대한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무시했던 그들이 이런 경고에 대해 반응할지 의문스럽다. 사람들은 모두 슈퍼스타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승자 독식 시장에서 정상의 자리는 오직 소수에게만 허락되어 있.”(220)음을 강조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수록 오히려 그 소수에 들어가기 위해 더욱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우만의 지적처럼 파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보다 급진적인 변화, 즉 시스템 자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최고의 시스템이 아닐 수도 있음을, 더 나은 시스템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모색을 위해 가장 시급히 갖춰야 할 것 중 하나는 바로 윤리 의식의 변화이다. 저자가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듯이, “99퍼센트가 자신들의 자녀를 위해 바라고 있을 것을 1퍼센트들이 바란다고 해서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424) 승자가 되기 위한 경쟁의 대열에서 이건 아니라고 외치고 스스로 내려올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런 이들의 목소리를 낙오자의 변명이 아닌 용기 있는 외침으로 박수쳐 줄 수 있을 때, 다른 시스템을 고민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김예슬 선언이나 안녕들 하십니까?’와 같은 목소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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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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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의 뒷담화는 재밌다. ‘글쎄 걔가 그랬다더라식의 이야기는 술자리의 흥을 돋는 애피타이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얼마동안은 흥미롭고 재밌을 수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밤새 계속된다면 지겹고 짜증나기 마련이다. 결국 밤샘 술자리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끊임없는 험담보다는 서로간의 진솔한 속내를 고백하는 일이나 서로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프로이트의 험담을 읽는 일은 약간은 고역이었다.

 

물론 방금 말한 험담이란 표현은 근거 없는 비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저자는 프로이트의 모든 저작과 접근 가능한 서간들에 대한 꼼꼼한 검토를 통해 프로이트의 사상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을 통해서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나는 이 책을 빌려 프로이트의 생각을 무효화시키거나 할 생각은 없고, 다만 프로이트의 이론이 철저하게 그 개인의 자전적인 존재론적 경험에 바탕을 둔 것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34)고 말한다. 이는 아마도 정신분석학을 잘 정립된 하나의 과학으로 굳게 믿고 있는 이들에게 정신분석학이란 그런 것이 아님을,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학적 심리학이 아닌 단지 문학적 심리학에 불과함을 알려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를 위해 이와 같은 두꺼운 분량이 필요했을까. 혹시 그에 대한 두꺼운 상찬의 글들과 균형을 맞추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는 피터 게이의 전기 <프로이트>는 우리나라에 출간된 번역본의 경우 1000페이지가 넘는다. 그러나 상찬이든 험담이든 길면 지겨워지는 법이다. 더구나 프로이트 사상의 모순을 지적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군데군데 감정적 혐오의 뉘앙스가 풍기기도 한다. 평소 프로이트를 싫어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저자의 독설과 비꼼에 신나게 맞장구를 치며 읽어나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예를 들어 나와 같은 사람이 이 긴 글을 읽어나가기란 다소 힘든 일이다.

 

이 책은 긴 글이긴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 한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프로이트는 이전 시대의 혹은 동시대의 여러 사상가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을 지우고 자신만의 독창적 생각인 양 꾸미려 했다. 그의 책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온갖 모순된 이야기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한낱 개인적 경험에 불과한 내용을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과학으로 포장하려 했다. 그리고 이러한 포장을 위해 환자의 사생활을 거침없이 공개하는 비윤리적 행위를 하기도 했고, 치료되지 않은 환자를 완전히 치료한 것처럼 거짓말을 했으며,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동료들을 내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세속적 탐욕, 즉 돈과 명예,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구에 매몰된 인간일 뿐이다.

 

이건 내가 요약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이 단지 저 내용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일한 비판을 반복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을 위해 저자가 주로 참고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여러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저자는 잘 정리된 저작과 달리 그때그때의 감정을 담은 편지가 오히려 프로이트의 진심을 담고 있는 것이라 판단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는 혹시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아닌가. 의식적인 저술과 무의식적인 편지라는 도식, 그리고 무의식적인 편지에서 그의 진실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렇기에 그는 프로이트의 후손과 추종자들이 몇몇 편지들의 열람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상가에 대한 비판이라고 한다면 그의 공식적 생각이 담긴 저작만을 가지고 할 순 없는 것인가. 굳이 그 사생활이 담긴 편지들을 낱낱이 까발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게 최근 자주 논란이 되는 신상털기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저자가 생각하는 프로이트 사상의 문제를 들어보자. 그는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 개인의 몽상에 다름 아니라고 지적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다시 요약해보자. 그가 과학 저서라고 내놓은 두꺼운 책에는 그의 전기적 요소가 바탕이 된 자기 성찰이 주를 이룬다. 꿈과 어린 시절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내용도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험적인 방법론을 적용한 유일한 훈련이 바로 꿈과 어린 시절에 겪은 사건을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기적 요소는 그의 이론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로 쓰였으며 프로이트가 대상을 해석한 방식에 따라 해석이 곧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134)

 

그러나 과연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이 잘못인가? 데카르트는 난롯가에서 꾼 꿈을 바탕으로 <방법서설><성찰>을 썼다. 케큘레는 뱀들이 꼬리를 물고 있는 꿈을 바탕으로 벤젠 구조식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생각을 직접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텔레파시의 가능성을 믿었다고 하지만) 타인의 생각을 직접 알 수 없기에 한 인간의 판단과 행동의 준거는 자신의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유아론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그런 자신의 판단 및 행동이 다른 이들의 판단 및 행동과 충돌하기도 한다는 경험을 얻기도 한다. 즉 인간은 실천 속에서 서로 다른 준거들의 충돌을 경험하게 되고 이 새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준을 수정하게 된다. 이는 과학에서 한 이론이 다른 실험을 통해 동일하게 재연되지 않거나 반대되는 실험 증거가 나타나면 거부되거나 수정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정신분석학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는 중이고 과거에 가지고 있던 절대적 지위가 많이 약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는 프로이트학이 이러한 충돌을 애매하고 은유적인 수사로 교묘히 피해가려 한다고 지적한다.프로이트가 만든 세계에서 우연은 없다. 다만 순수하고 신비로운 필연성이 존재할 따름이다.”(433) “논술을 하듯 작문을 하고 주석을 달고 분석, 객관적인 번역을 하는 것보다 주관적으로 주석을 달 듯 내용을 파악하는 쪽이 일반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더 수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프로이트가 꿈을 분석한 내용을 보면 타인이 말하는 진리보다는 자기만의 독단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경향이 강하다.”(448) 그래서 정신분석학을 하나의 사회에 비유하면 그 사회는 철저하게 폐쇄적인 닫힌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547)

 

저자의 지적처럼 이러한 폐쇄성은 종교의 영역에서는 허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엄격한 의미의 과학의 영역에서는 용납되기 힘들다. 정신분석학의 지위가 약화되고 있는 데는 바로 이런 폐쇄성이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정신분석학을 다룬 책인 <광기>에 대한 감상에서도 말한 적 있듯이,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정신분석학이 엄밀한 과학 혹은 의학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엄밀한 과학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상담-분석에 치중하기보다는 뇌신경학 같은 학문들과 긴밀히 연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그렇다고 해서 정신분석학이 어떤 현실적 유용성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신의학이란 일종의 문학과 같은 것이어서 현실에 대한 정밀화는 아니지만 인간 삶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고,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어떤 통찰을 보여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저자가 정리한 다음과 같은 글을 보자.

 

프로이트는 이렇듯 인간 존재를 피할 수 없는 비극으로 보았다. 행복은 원래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기본 전제다. 다만 일시적인 쾌락, 나중에 환멸감을 주는 쾌락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을 뿐이다. 행복과 건강한 삶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설이 제기되지만 결과는 허망하게 실패로 끝날 뿐이다. () 전체가 힘을 합쳐 공동체 정신을 발휘하고 극한의 이타주의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결과는 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위험 요소를 가중시키는 감정이며, 부부나 가족의 결함은 결국 나중에 당사자에게 큰 고통을 더해줄 위험이 높다. 그리고 정치는 인류의 환희에 찬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582~583)

 

비극적 진단이긴 하지만 현실의 어떤 장벽 앞에서 좌절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 문구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 공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프로이트의 사상에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또는 문학이나 영화 혹은 사회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려오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비아냥거리듯 정신분석학자들은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완전한 세상의 허무주의를 견뎌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침대를 제공했다.”(679)고 말하지만, 나는 저런 침대가 있다면 언제든 기꺼이 눕고 싶다.

 

요는 이런 것이다. 간혹 블로그 등을 돌아다니다 보면 정신분석학에 대해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굳이 저런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연금술에 빠져있던 뉴턴을 그 누구도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듯이 최면술에 빠져있던 프로이트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과학 이론이든 철학 이론이든 현실과의 접점 속에서 자연스레 도태되거나 수정되거나 안착하게 될 것이다. 굳이 지위를 끌어내리기 위한 험담에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역자는 대체로 읽기 쉬운 문장을 쓰려고 노력한 것 같다. 방대한 분량이고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음에도 쉽게 읽힌다. 그런데 간혹 문맥에 맞지 않는 문장이 눈에 띈다.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다시 읽어보게 되는, 그래도 여전히 애매한 문장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다지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또 내가 프로이트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것도 아니기에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음을 밝혀둬야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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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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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는 항상 국내 유일혹은 국내 최고라는 수식어를 앞에 달고 다니지만, 나는 그의 인터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인터뷰이의 섭외 능력이나 인터뷰이들이 간혹 칭찬하곤 하는 치밀한 자료조사, 그리고 꾸준히 책을 출간하는 직업적 성실함은 인정받아야 하겠지만, 그 결과물들은 그다지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그렇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다.

 

먼저 내용 얘기를 해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interview’‘in-taboo’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짤막한 인터뷰라면 관심 사안이나 쟁점에 대한 의견 피력으로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명의 인터뷰로 온전히 한 권을 채우고 있는 책이라면, 인터뷰이의 의견을 듣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이가 인터뷰이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발언을 많이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런 사람의 인터뷰집을 새로 사서 읽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전 발언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뷰집이라고 한다면 이미 공개된 내용 이외의 내밀한 속내를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사생활을 파헤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도 인간인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여러 모순들, 즉 그의 말과 말 사이, 말과 삶 사이, 삶과 삶 사이에 놓인 간극을 끄집어내고 들춰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 인물에 대한 심층적 탐구라는 인터뷰집의 목적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게 없다면 굳이 인터뷰집을 새로 사서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가 직접 쓴 책을 읽는 것이 더 효율적일 테니 말이다. 인터뷰집이라고 한다면 독자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궁금증들, 다소 불순하고 공격적일 수 있는 질문들까지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대문을 열지 못하는 한국 경찰이란 부분에서 표창원은 경찰들이 책임 있게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의 부재를 지적한다. 즉 폭력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한다고 해도 신고받고 갔을 때 문을 부수질 못합니다. ‘열어주세요하고 기다려야죠. 부수고 들어가면 경찰관에게 책임을 묻게 돼요. 손실보상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으니까 경찰관이 형사민사상의 소송을 당해요. 그러니까 안 들어가는 거예요.”(113)라고 개탄한다. 그러나 조금 뒤에선 이러한 제도적 면책의 필요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용산 참사와 같은 사건의 경우, 결과가 나빴지만 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지휘관들에 대해서 면책을 해줘야 된다, 이건 또 아니거든요.”(159)라고 말하면서 지휘관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대답은 단순히 지위가 가지는 책임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넓게 보면 공적 업무에 있어서 제도적 책임과 개인의 책임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공무 집행의 결과에 대한 책임의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정당한 법 집행과 시민의 인권 사이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비로소 표창원이라는 인물이 가진 법과 사회 그리고 정치에 대한 철학에 한층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승호의 인터뷰집에선 이런 기대를 하기 어렵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승호의 인터뷰를 맞장구 인터뷰라고 부르는데, 그의 책에서 그의 역할은 그저 대화의 방향을 잡아주고 인터뷰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데 머물기 때문이다. 인터뷰이가 신나서 떠들 수 있게 추임새만 넣어주는 것이다. 인터뷰이가 평소에 책이나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역할도 의미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표창원과 같이 책도 여러 권 쓰고, 신문 칼럼이나 트위터를 통해 활발하게 발언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같은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읽기 전에 예상했던 대로 이 책에 담긴 내용 역시 표창원이 평소 칼럼 등을 통해 했던 말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정의의 부재에 대한 일침들, 즉 사회적 불신을 야기하는 경찰, 검찰, 법원 등의 행태, 사회적 반성 능력의 부재, 뒤떨어지고 체계적이지 못한 범죄 대응 시스템의 문제, 여러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의견 등이 그것이다. 물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들어도 지나치지 않을 이야기지만 신선함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왜 이 책을 사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덧붙이고 싶다. 인터뷰집도 한 권의 책이다. 한 권의 책이라는 말은 계획된 목차에 맞게 내용들이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주제를 구분하고 이에 맞게 논의를 이끌어가는 것도 인터뷰어의 능력이긴 하겠지만 글이 아닌 대화라는 형식의 특성상 이러 저리 튀고 곁가지로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터뷰는 사후작업이 중요하다. 불필요한 이야기들을 과감히 잘라내고 한정된 주제에 맞게 대화들을 재정돈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어쩌면 정리 작업이 인터뷰보다 더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될 수 있고, 정리 후 눈에 띄는 부족한 내용은 추가 인터뷰를 통해 채워 넣어야 하는 수고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수고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 책은 다소 실망스럽다. 400여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곳곳에서 동일한 주제, 사례, 주장들이 반복된다. 날 것의 생생함을 전하고 싶다면 그냥 녹취된 내용을 오디오북으로 내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적절한 편집을 통해 대화를 정리 정돈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절반 분량으로도 훌륭한 인터뷰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불만을 늘어놓긴 했지만, 이 책은 표창원이란 사람의 이름을 얼핏 들어본 이들에게는 훌륭한 표창원 입문서역할을 할 것이다. 나아가 이 책에서 표창원이 우리 사회에 제기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선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정부 일각에서 자꾸 오판을 하고, 시민들을 자극하고, 둘로 나누고, 국론 분열을 하고, 자꾸 북한 문제를 들먹이면서 안보 내세우고, 색깔론 들이밀고. 이렇게 나가면 그건 비극입니다.”(410)라는 지적은 지금 우리 사회가 비극으로 치닫고 있다는 암담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해서 과거의 실패로부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실패학이라는 학문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 개선책을 찾고, 더 나아가는가가 중요하거든요. 또 하나는 위기관리 능력이라는 거죠. 위기관리 시스템.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없어요.”(19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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