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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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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가오는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지는 해이다. 벌써부터 내년에 벌어질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선제적 이슈들이 정당 혹은 정치인을 중심으로 하나씩 제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차기 대권주자로 누가 유력한지에 대한 하마평과 그에 따른 갈등과 줄서기가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정권을 유지 혹은 탈환하기 위해 각종 정치 세력 및 정당 간의 연합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예측과 논쟁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아무리 정치 혐오증이 만연해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2년 동안 좋건 싫건, 혹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우리 사회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소용돌이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정치의 발견>의 저자는 책 제목 그대로 정치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재발견’도 아니고 ‘발견’이라니,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껏 정치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인가.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주지하다시피 자생적 갈등과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정착시킨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국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별다른 갈등 없이 민주주의가 이식되었고, 그로 인해 “분명 제도로는 민주주의인데 그 안에 아무런 사회적 내용도 정치적 갈등의 흔적도 각인되지 않았다.” 이 위에 분단과 전쟁의 효과가 덧붙여지면서 남한과 북한은 자연스럽게 권위주의 사회로 퇴행하게 되었고,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내용을 이념의 틀 안에서 발전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이 실천”되면서 바람직한 정치적 가치들은 모두 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여지는 일종의 “신화로서의 민주주의”가 성립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를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듣기 좋은 공허한 담론 내지 우리를 잘못된 실천으로 이끄는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이는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상화된 민주주의가 곧잘 얘기하곤 하는 직접 민주주의와 같은 체제는 극히 제한된 조건, 즉 고대 아테네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소규모 지역이나 타인의 잉여 노동력이 충분히 제공될 때에야 비로소 성립 가능한 체제이지 현대 사회에 적합한 체제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스위스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접 민주주의의 가치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항상 바람직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도 아니다. 현대 국가와 같은 대규모 사회 하에서 민주주의란 ‘인민의 직접 지배’ 체제가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 체제, 즉 대의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인식한다면, “대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가 영향력 있는 정치과정으로 자리 잡는 것이며, 그때의 핵심은 좋은 정당을 만드는 문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정당이 필요하고, 좋은 정당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를 인용하며 정당이란 사회 갈등을 적절히 사회화하는 역할의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입만 열면 화해와 통합을 부르짖는 우리 정치사를 생각한다면 다소 낯선 얘기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건 지역·종교·소득·직업·성·고용형태 등에서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차이가 자연스럽게 갈등을 형성하게 된다. “갈등 없이는 그 누구도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 자체가 이러한 갈등 때문에 성립된 정치체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의 전개와 해소가 직접적인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다시 말해 갈등이 개별적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갈등을 야기하는 사회적 제도에 영향력을 끼치기 힘들고, 더 나아가 이미 기득권을 가진 상층에 유리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할 수 있도록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정당이다. 사회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환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그래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 정당이 바로 좋은 정당이다.

그렇다면 좋은 정당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저자는 무엇보다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저자가 보기에 현재 우리의 정치가들, 특히 진보적 정치가들은 두 가지 오류에 빠져 있다. 하나는 정치에 고고한 도덕적 이상만을 투영하는 있는 경우다. 베버가 지적했듯이 “선한 목적과 도덕적으로 의심될 만한 수단을 결합”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운명이다. 정치가란 이러한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고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을 통해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정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정치가로서의 책임 윤리를 방기하는 일일 뿐이다.

정치가들이 보이고 있는 다른 오류는 시민들의 의식 수준을 탓하며 ‘깨어있는 시민’이 되길 요구하거나 자신을 그들과 다르게 여기며 진보적 이론에 자족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태도는 정치가들이 자신의 무기력 혹은 소극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잘못은 현 체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다”는 알린스키의 지적을 깊이 새기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기초해 사회 갈등을 조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려 노력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 가치를 수혈하거나 계몽하려 하지 말고 보통 사람들의 경험의 세계에 기초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야만 대중들이 자존감을 가지고 정치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의 발견”이란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에서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로의 회복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정당 정치 체제의 정착과 정치가들의 각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강연으로 진행된 내용을 담은 짧은 책이기에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밀한 논증이나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에 대한 꼼꼼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저자의 출판 의도 또한 앞으로 벌어질 정치적 소용돌이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키잡이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를 위한 고민과 논쟁을 촉발하는 역할로 한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식의 정치 팜플렛이 대개 그러하듯이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논의는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이러한 원론을 구체적 차원에 접목할 때 생겨난다. 저자는 무엇보다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이라는 정치적 책임 윤리를 자각하고 이를 담대하게 이끌어나갈 리더십의 출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단순히 일종의 엘리트주의로 치부해버리고 무시하는 것은 저자가 비판하는 관념론이나 추상론에 머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가로서의 책임 윤리를 자각하고 있는 정치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 뛰어난 개인이 혜성같이 등장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당원이 지도부에게, 시민들이 정치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해야 하는가? 전자라면 (저자 스스로 비판했던) 혁명의 상황이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상황의 악화를 방기하는 무책임한 혁명가들의 상황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후자라고 한다면 구성원들이 이미 바람직한 정치의 상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저자가 지적하듯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충분히 정착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결국 바람직한 정치가가 등장하기 위해선 시민의 의식이 성숙해야 하고, 시민의 의식이 성숙하기 위해선 바람직한 정치가가 필요한 일종의 순환 논법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며 발전해 나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것이 바로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정치를 하려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기에 상대적으로 정치가의 역할이 강조된 것이리다. 그러나 대중 서적으로 출판을 할 땐 이에 대한 충분한 부연 설명이 덧붙여졌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삼김시대 같은 카리스마 있는 명망가 중심의 권위주의적 정당 정치와는 다른 저자가 바라는 바람직한 정당 정치의 변별력이 어디에서 생겨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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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 - 자연의 패턴 속으로 떠나는 여행 승산의 대칭 시리즈 4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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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구나 한번쯤은 방의 벽지나 욕실의 타일, 거리의 보도 블럭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무늬들에 정신을 빼앗긴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현대 미학을 다루고 있는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에셔의 판화를 보고 기묘한 감정을 느껴봤을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대칭을 탐구하는 수학과 수학자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대체로 수학책이란 쳐다보기도 싫은 숫자와 기호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공식들이 조그마한 글씨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책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숫자와 기호, 공식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수학적 훈련을 받은 이들이 아니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고차원(무려 196,883차원)에서 만들어지는 대칭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수학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다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모든 내용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교양 과학서로 손색이 없는 이유는 이처럼 어려운 내용을 설명해 내는 저자의 능력에 있다. 저자는 일상의 사례에서 시작해 점차 전문적인 내용으로 독자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다. 지루해질듯 싶으면 익살스런 경험담이나 농담을 끼워 넣어 킥킥거리게 만드는가 하면, 천재 수학자들의 생애와 에피소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흥미를 돋우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상을 각 장의 앞머리와 말미에 배치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저자의 탐구여정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동행인처럼 느끼게 만든다. 마치 수학자 친구가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은?’을 연발하고 있는 모습이랄까. 장담컨대 450여 페이지의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재미있는 교양 과학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왜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재밌는 교양 과학서를 찾기 어려운 것일까, 하는 점이다. 물론 내가 과문한 탓에 훌륭한 책들을 알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가 선정한 “2010년 올해의 과학도서” 목록을 봐도 열 권 중 단 한 권만이 국내 저작물이라는 점은 내 생각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는 좋은 교양 과학서들이 없을까? 이는 아마 어렸을 때부터 엄격하게 문과와 이과가 분리되는 교육환경 탓일 가능성이 크다. 어린 오귀스탱루이 코시의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라그랑주가 코시의 아버지에게 했다는 조언을 들어보자. “저 아이가 문학 공부를 마치기 전까지는 수학책을 건드리거나 숫자 하나라도 쓰게 해서는 안 되네.”(214)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의 평생을 좌우할) 자신의 계열이 결정된다. 그 결정은 또 어떠한가. 대체로 수학을 잘하면 이과, 수학을 못하면 문과라는 식이다. 수학 때문에 수능성적의 격차가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계열이 결정되고 나면, 문과생들은 과학 과목과, 이과생들은 사회 과목과 담을 쌓게 된다. 그 담은 대학에 올라가면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견고해진다. 상황이 이러하니 문학이나 영화와 같이 사람들에게 익숙한 내용을 활용하여 자신의 연구 내용을 설명하는 과학 서적이나, 반대로 최신의 과학적 연구 성과들에 기초한 인문학 서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온갖 곳에서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통섭’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겉보기 결합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통섭, 즉 인문학적 사유와 자연과학적 사유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위해선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성찰이 선행되지 않는 한, 마커스 드 사토이 같은 저자의 탄생을 기대하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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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 화석연료에 중독된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
리처드 하인버그 지음, 송광섭.송기원 옮김 / 부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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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4월 20일, 해상 석유 시추시설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하루 5,000 배럴(몇몇 전문가들은 하루 10만 배럴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에 달하는 원유가 멕시코 만 바다 속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한다. 사고가 발생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도록 아직 구멍 뚫린 채취관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고, 그 사이 기름은 계속 바다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2007년 태안반도의 참혹함을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한 달이 다 되도록 채취관을 막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손상된 채취관이 심해 1,500미터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고로 인해 우리 국민이 알게 된 지식 중 하나는, 수심 40미터 정도만 되어도 인간이 직접 작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다 속 1,500미터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보수 작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난 7일에도 한 차례 보수를 위한 기술적 시도가 있었으나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실패했다고 한다. 실패 후 해당 석유회사의 최고경영자는 "심해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게 아직도 엄청나게 많다"며 "위험 상황과 실제로 맞닥뜨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결국 발생 가능한 위험 요인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적절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심해 채굴을 시작했다는 고백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성급한 석유 채굴이 진행되고 있는가? 이는 아마 이 책의 저자가 심각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석유정점’(Peak Oil) 때문일 것이다. 석유정점이란 “세계의 석유 채취가 정점에 달하는 시기를 지적하는 용어”로,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정통한 분석가들은 이 시점이 20~30년 안에 닥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한다. 몇몇 보수적인 분석가들은 그 시기를 2010년으로 잡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찌됐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석유 생산이 감소하리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석유 생산의 감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에너지의 석유 의존도가 45% 정도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생활의 거의 절반이 석유를 활용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이 유지된다면 석유가 고갈되었을 때 닥칠 불편이란 대단할 것이다. 일상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현존하는 운송 수단인 자동차, 배, 비행기 모두 석유를 사용하는 기기이므로 지역 혹은 국제간 무역은 파탄날 것이다. 석유 의존도가 높은 산업화된 농업이 타격을 입어 식량 위기가 심각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이라크 전쟁과 같은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점점 희소해지는 석유자원을 쟁취하기 위한 국제적 분쟁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100년 후의 가상의 인물이 보내는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이 과정, 즉 석유 감소로 우리가 처하게 될 예측가능한 미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후변화와 석유정점의 해결책은 대체에너지원의 발견이라는 대체 전략과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거나 에너지 없이 견디는 보존 전략 두 가지뿐이다.”(210)

물론 정점이 곧 고갈은 아니므로 석유가 완전히 고갈되기 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실용화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진행되어온 대체에너지원 개발을 떠올려 보자. 원자력은 체르노빌 사태로 알 수 있듯이 그 안전성에 대해 안심할 수 없다. 또한 안전성이 충분히 확보된다고 해도 우라늄이라는 물질 역시 한정되어 있는 자원이라는 점에서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다. 태양에너지는 석유에 비해 에너지 효율성이 대단히 떨어져 보조수단은 될 수 있어도 대체제가 되긴 어려워 보인다. 곡물을 활용한 바이오디젤은 대규모 식량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결국 현재 상황에서 파국으로 치닫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유지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거나 에너지 없이 견디는 보존 전략”, 즉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체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이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소련의 붕괴로 값싼 석유의 사용이 불가능해졌던 쿠바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주장한다. 물론 지금과 같은 편리함은 다소 감소하겠지만, 농촌 문화의 부활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꾸준한 노력만이 우리 사회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강조한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라는 마을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삶의 모습이 이미 과거에 있었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삶의 모습은 석유가 고갈됐을 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그 삶의 방식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톡톡한 대가를 치루고 떠밀려 갈 것인가, 선택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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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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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혜경이를 업은 혜경 엄마가 어두운 골목에서 나에게 했던 말은 ‘할 만하겠니?’였다. 내 손에는 그때 만 원이 쥐여 있었다. 까슬한 지폐의 감촉이 생생하다. 손에 땀이 찼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자꾸 살 만하겠니,로 떠올리곤 했다.”(오늘처럼 고요히) 

작가에 의하면 원래 제목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소설집의 경우 대표적인 단편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뽑곤 하는데,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중 그런 제목을 가진 소설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란 여기에 실린 소설들을 통해서, 그리고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작가가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냐는 물음에 스스로 찾은 답이었다.”(작가의 말)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먼저 ‘누구나 아는 것들’은 무엇일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 서로 다른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누구나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게 있기나 한 걸까? ‘있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바로 이런 것이다. 만일 엄마와 함께 지하철 노숙하는 여자아이에게 누군가 호의를 베풀어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자신의 방에 재워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세상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앞으로 나에게 벌어질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열세 살) 혹은 이제 막 가슴에 멍울이 지기 시작한 여자아이가 고속도로 휴게소에다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아가기 위해 고속도로 갓길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차를 세워 태워주고 허기를 달래라고 만두를 건넨다면? “나는 다 먹기도 전에 내가 먹은 만두 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 선의도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순애보)

그렇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살아간다는 건 항상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귀찮고 하기 싫고 당장 때려 치고 싶더라도, 매일 아침 꾸역꾸역 학교로 일터로 지친 몸을 이끌고 기어나가는 것이다. “아니, 힘들었어. 하지만 힘들 수 없는 일 년이었다. 성과물을 받기 위해 소비된 시간이었으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평하다.”(엄마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를, 일 년을, 그리하여 마침내 평생을.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이 삶의 비참함과 고통을 누구나 알면서도,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거꾸로 삶이 원래 그런 것이라면 굳이 말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오히려 “일상의 너저분함을 고스란히 보이는 걸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이 비루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섬처럼 외롭더라도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었다. 그들에게 동정을 받거나 충고를 들을 바에야, 오해를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았다.”(하루)라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누구나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기에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억울한 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굳이 말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고통이란 오로지 그 자신만의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말하고들 하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과 공감하는 이의 고통이 같은 것일 수 없다.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기에 인간의 언어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선험자들이 초산모에게 산고의 절대적 고통에 함묵하듯이, “그것은 경험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엄마들) 설령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줄 적절한 언어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도 적절한 것인지 확신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우리는 삶의 비참과 고통 앞에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고 자조하면서.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저 ‘살 만하겠니?’라고 묻는다.

당신은 살 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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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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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모순된 면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순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앎과 삶의 불일치, 앎과 앎의 불일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텔리들이 특목고 비판하지만 자기 아이가 특목고 들어가면 좋아들 해요. 아이가 여상이라도 가 봐요.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어요.”(p.34)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경우는 앎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신념과 평소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가령 “시장주의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한테는 시장 경쟁력을 알뜰하게 챙겨주는 그런 모습”(p.64)을 보이거나 “껍질이 주는 기득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만날 지배계급들을 욕하는”(p.305) 경우, 그의 앎과 삶은 모순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우리는 보통 ‘위선’이라고 부르죠.

또한 앎과 앎의 불일치도 있습니다. 이는 한 영역의 앎과 다른 영역의 앎이 서로 상충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하는 분들이 집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p.121)이거나 “평소엔 좌파연 하다가 선거 때만 되면 고심 끝에 비판적 지지”(p.198)를 한다면, 그는 사회 진보와 가정 진보, 바람직한 정치 전략과 현실적 정치 전략 사이의 상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보통 ‘지적 불성실’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러한 모순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가진 모순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모순을 인식했을 때 나오는 반응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모순을 교정하거나 아니면 회피하거나.

“변한 건 자신인데 세상이 변했다고 말하면서 변화한 세상에서 자신은 여전히 가장 현실적인 진보다, 이런 주장들을 한단 말이에요.”(p.151)

자신의 모순을 교정하려는 노력, 즉 문제가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나하나 되짚어 고치려는 시도를 우리는 ‘자기 성찰’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자신의 모순을 이러저러한 외적 조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회피해 버릴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를 ‘자기 합리화’라고 부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쉽게 자기 합리화에 빠져듭니다. 성찰보다는 합리화가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이죠. 성찰은 앎이든 삶이든 혹은 둘 모두든 무언가를 바꾸어야 하는데, 앎과 삶 모두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돼 온 것이기에 이를 바꾸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합리화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서도, 다시 말해 아무런 괴로움 없이도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 것처럼 느껴지죠.

김규항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그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은 우리들이 가진 위선과 지적 불성실을 지적하며,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터뷰어인 지승호의 지적처럼, 많은 이들이 그에게 “만날 그 얘기 지겹지 않아? 뒤에서 힘 빼는 거야, 뭐야? 자기 혼자 1등급 한우마냥 명품 진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p.9) 등등의 불평을 터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 역시 겸연쩍음을 모면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한 방식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오늘은 없어요. 만날 미래만 있죠. 보다 나은 내년, 보다 풍요로운 3년 후, 보다 안정적인 5년 후, 그리고 또 내 아이의 10년 후, 늘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입니다. 그게 평생 동안이에요.”(p.302)

아테네의 등에 역할을 자처했던 소크라테스처럼, 김규항은 '돈'과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해져 버린, 또한 그렇게 자기합리화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유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잘사는 게 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에만 주변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즉 바로 '지금 여기'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주었던 아테네인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주는 불편함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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