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자리에 정원을 넣으면 책 이름, 패러디는 아니고 문득 그 제목이 생각나서 적어봤다.
승주나무님 말대로 F/A(free agency)가 아닌 그저 청년백수가 된지 5일 정도 됐다. 날백수가 됐으니 남들과 다른 패턴으로 살아보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여행을 생각해봤는데 딱히 가고 싶은데가 없었다. 여행, 여행하지만 실은 가라고하면 괜히 발을 빼게되는 여행이랄까. 워밍업 차원에서 경춘선을 생각해냈고, 전에 대성리와 춘천은 가봤으니 가평이나 청평을 가볼까하고 이리저리 검색을 해봤다. 당연히 재기발랄하며, 맘을 동하게 하는, 꼭 가보고싶게 만드는 내용의 블로깅이나 글은 없었다. 죄다 애인과 펜션에 가려는데 어디가 좋냐, 뭐가 맛있냐, 뭐하고 놀지 등등.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단 열차 시간표만 보고선 어떻게 되겠지란 심정으로 길을 떠났다. 애인없이 펜션이 우글거리는 동네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부아가 치민게 절대로 아니다. 절대로에 방점이 찍힐거란거 아는데도 절대로 아니랜다.
길을 떠난다, 떠난다란 말, 참 좋다. 내 맘엔 어쩌면 나그네가 되고 싶은, 길 위에서 정처없이 걷고싶은 로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산객 할머니 할아버지 틈바구니에서 '한 아이'를 읽다 졸다 덜컹거리다보니 어느새 청평이다. 역은 모름지기 이래야한달까, 청평역은 소박하고 정겹운 모양새로 나를 맞아주었다. 휘둥그레하게 크기만한 역보다 작고, 낡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역이 좋다. 고속철 사업으로 몇몇 역들이 헐린다는데, 그런거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물론 매일 그 길을 지나는 통근자의 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주자의 입장이 아니니 내가 사는 곳은 편리하게, 남이 사는 곳은 보존이란 식은 아니다. 역사니, 유적이니 이런 차원이 아니라 내가 예전에 갔던 그 곳, 누군가의 숨결이 스민 곳이 한두개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밀고 새로'보다는 아취가 느껴지게 보존하는 방법도 있으니 말이다.
밀리오레와 영화관의 틈바구니에서 애닮프게 끼어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신촌역. 그곳에서 어느 여름 날, 선풍기 바람을 쐬며 지린내가 나는 역사에서 머물던 기억은 여전히 애잔하다. 더위를 달랜다며 입에 대었던 폴라포의 달짝지근한 맛과 끈적거리는 여름의 냄새, 내 옆에서 한발짝 멀리 앉아있던 상대방의 표정까지. 깨끗하고, 정숙한 요즘의 건물에선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청평역을 나와보니, 옳거니, 청평 관광안내 표지판이 있다. 호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호명산 가는 길을 자세히 안내를 해놨다. 600m남짓. 만만해보였다. 정상을 지나, 호수까지 가서 다른 역으로 내려오는데 5시간까지 걸린다는데 그 정도까지야 싶었다.(대체 이런 섣부른 판단력은 어디서 주워온건지.) 그래, 여기로 가야겠군.
호명산은 옛날 산림이 우거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을 때 호랑이들이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는데서 명명되었다. 산의 남쪽 아래로는 청평 호반, 서쪽 아래로는 조종천이 흐르고 있어 정산에 올라서면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듯한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다. 국내 최초로 건설된 양수식 발전소의 상부 저수지로 호명산의 수려한 산세화 더불어 저수지는 백두산 천지를 연상시킨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600m남짓. 콧방귀를 뀐게 나중에 얼마나 큰 실수인지 깨닫긴 했지만 처음엔 문제 없었다. 잠도 푹 잤겠다, 돌도 씹어먹을 것처럼 의욕도 넘쳤으니까.
주위에 동네분들이 쌀쌀한 봄볕을 맞으며 역사 근처에 앉아 계시길래 여쭤보았다. 일종의 확인 차원.
- 저기, 호명산에 가려고 하는데 갈만 하겠죠?
- 으응,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작년인가 거기서 어떤 남자가 죽어가지고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난리도 아니었지.
- 네? 저, 가고 싶은데.
- 그럼,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시체를 사람이 못 들고 나오니까 헬리콥터가 끌어내리더라고.
- ......
아주머니가 호명산과 원수 졌거나 헬리콥터 이미지가 너무 박혀서 그러려니 싶어 그 옆에 분에게 다시 여쭤봤다.
- 괜찮겠죠?
- 응, 그럼 좀 힘들어서 그렇지.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요새 멧돼지들이 배가 고프니까 자꾸 나오나봐.
- 네? 멧돼지가 있어요?
- 있지.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낮이라 괜찮을거야. 낮에는 멧돼지가 보이니까 도망가면 되잖아.
- 아, 네. (정말, 내가 도망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겠지?)
가지말까? 그래, 다른 곳에 청평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있을거야. 너 산도 못타잖아, 날도 추운데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거나 갑작스런 산타기로 숨차면 어떻게해. 게다가 거기엔 사람도 없다는데. 머릿 속에선 오만가지 생각이 튀어나오려고 난리인데 나는 태연하게 호사모(호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분들이 안내해준 약도를 보며 산을 향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내가 어리버리해보이니까 괜히 놀리는걸 수도 있겠다 싶었고, 정상에 올라서서 청평과 인근 지역을 내려다보고 싶기도 했다. 사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호명산 말고는 이곳, 청평에서 딱히 가볼만한데, 겪을만한데가 없었다. 골목길을 돌고, 아이들이 노는 운동장을 구경하는건 산에 갔다와서 해야지. 그리고 크게는 아니었지만 뭔가 해내보고 싶다란 생각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겨울이라 인적 드문 을씨년스러운 유원지를 지나 산의 초입에 들어섰다. 경사가 만만치 않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면 꼭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수직이다. 그냥 돌아갈까? 바람도 너무 차갑고, 가다가 포기하느니 지금 그만두는게 낮지 않을까? 아예 없었던 일처럼 말야.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산을 인생살이와 비유한 예시들이 떠오르자 더더욱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한발 내딛고, 다시 다음 발을 내딛었다. 15계단 정도였는데 계단 위에 오르자, 벌써부터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쿵쾅쿵쾅댔다.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고, 무릎 부근이 땡기기도 했다. 저질 몸이 실력발휘를 하는 중이었다.
어, 그런데 넌 누구니?
옥찌들과 월명산을 오를 때 가끔 청솔모를 보긴 했지만, 얘는 다람쥐였다.
털이 민들레 홑씨처럼 보들거리고 책에서 본것처럼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 작고 귀여운 녀석이 인기척을 느끼고 산 위쪽으로 물결치듯이 튀어오르는데, 민들레 홑씨 꼬리가 바람에 흩어지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다람쥐라니.
잠깐, 평소에 못보던 다람쥐가 사는 산이라면 정말 멧돼지도 있는거 아냐? 그런데 쉴데는 없는거야? 심장이 계속 뛰는데, (심장은 원래 계속 뛰고 있었다고.) 호사모 전화번호라도 저장해놔야하는거 아냐? 죽어서 헬리콥터 타면 그래도 헬리콥터 타봤으니 괜찮게 죽었네라고 자위해야하는거야?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리 있나, 아냐아냐.
바람이 솨하며 불자, 호명산이 금세라도 호랑이 소리를 들려줄 것처럼 들썩였다. 이봐,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