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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의 바람은 일년 중 가장 근사하다. 해는 터질 듯 내리쬐고, 초록은 위험할 정도로 반짝이는데 아, 이 바람은 무엇일까. 몸에 남은 마지막 수분기마저 남김없이 앗아가고 기분을 정신없이 들뜨게 하는 이 바람은. 자전거를 타고 월명동 작은 도서관에 들러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 정이현의 풍선, 옥찌들 책으로는 명화로 보는 미술을 빌렸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월명산길로 왔는데 전에 학원 다니면서 다녔던 길이건만 오르막길에선 예상했던대로 마지막 숨처럼 헐떡이고, 내리막길에선 첫웃음처럼 웃어제끼기 시작하는데, 정말 여름인가, 여름의 바람이 이토록 청량해서 어쩌나 싶을 정도로 시원했다.
연두색이 고와보이기 시작하면 늙었다는거라는데 난 이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연두가 정말 곱게 느껴졌다. 애늙은이의 징후보다 친근한 연두, 누군가의 이름처럼 다정한 연두. 역시 초록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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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끼리 모여서 술을 먹다가 아빠 어렸을 때 얘기가 나왔다. 전에는 아빠의 단독 진술만으로 사실을 추정했는데 고모의 추임새와 적확한 기억력이 한몫해서 미화된 아빠만의 추억으로 남을 일이 없어졌다. 아빠는 평소에 민이 너무 장난을 친다고 말씀하셨지만 장난꾸러기는 따로 있었다. 고모 말씀으로는 아빠가 어렸을 때 당신보다 여섯살이나 어린 동생보고 산길을 지나 당도하는 친구집에 데려다주라고 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어렸던 고모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빠를 바래다 주고 돌아서서 다시 집으로 가려고 하니, 아빠가 각시 귀신, 몽당 귀신, 우물 귀신 등등 생활 주변의 온갖 잡귀신들을 다 만들어내서 자긴 쏙 빠진 무서움을 고모에게 한아름 선사해줬다는 얘기. 아빠는 얼굴이 빨개지셔서 웃으시고, 고모는 좀 더 실감나는 느낌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재현을 해주시는데. 으흠, 모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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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집에서 설겆이를 가장 더럽게 하는 사람 일순위로 날 지목했다. 두번째는 엄마. 둘째의 증언에 따르면 그래도 엄마는 세제를 사용하니 양반이라고 하는데 엄마는 여전히 이순위라는게 믿기지 않는 눈치다. 아빠 말씀을 들은 아치의 반응이야 당연히,
- 더럽게 해도 하긴 하잖아.
술자리를 치우다가 남은 반찬을 통에 담고 있는데 젓가락을 이용해서 (도구 사용을 까먹은드끼) 담기 귀찮아 뚜껑으로 어줍잖게 음식물을 담고 있으니 고모왈,
- 네가 여자냐, 남자냐.
- 고모, 그건 여자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술을 먹고 얼마나 손과 발이 마비됐는지 정도의 문제야.
고모는 웃었지만 웃음 끝에서 씁쓸이 툭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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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민은 약간의 긴장 관계. 평소에는 집안에 둘 뿐인 남자라고 챙겨주는게 예사롭지 않지만, 민의 장난기가 도를 지나치거나 삐지거나 떼를 쓸때면 둘의 아슬한 긴장관계는 깨지고 바로 적대적으로 돌변한다. 내일 순천으로 매실 따러가는데 민이 말썽을 피울 것 같다며 옥찌만 데리고 간다고 공표를 하시길래 내가 냉큼
- 그럼 민이랑 자전거 타고 다녀야겠다
라고 했더니 둘째 녀석이
- 언니, 전에 자전거 타다가 바퀴에 민 발 꼈잖아.
라고 했고, 이것을 들은 적대관계의 여진이 남았던 울 아빤,
- 그럼 내꺼 안전화 빌려줄게. 못이 박혀도 망치가 떨어져도 문제없어.
아,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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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뭔가 벽에 쿵! 부딪힌 느낌이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끈기가 부족한 나로선 꽤 오랫동안 서재활동을 했다고 생각했는데(오래하신 분들 죄송해요, 고작 1년인데.) 이제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전처럼 모임 얘기나 옥찌들 얘기만으로는 갈증이 난다. 더군다나 아치의 이중 생활을 친히 점검하는 가족의 눈이 있어 옥찌들 얘기 할때는 자기검열을 거쳐야만 한다. 알라딘 배포가 이 정도 밖에 안 돼서 한심스럽지만 나 혼자만 달아오르고 흥분되는 이야기들 말고 너에게도 즐거운 일, 너에게도 닿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혹은 이왕 달아오를거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용어와 긴밀한 논리 구조를 갖고 싶기도 하다. 요새도 일기를 쓰다가 이거 페이퍼에 어떻게 올릴까 생각해볼 정도로 꾸준히 달아올라있는 아치지만 전처럼 '톡톡 나를 건드려줘요.'식의 글은 지양하고 싶다. 하고 싶다고 다 되는건 아니겠지만.
매실 따러 갔다가 온갖 벌레들한테 물려서 '긁어줘, 긁어줘.'란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몸이 간지럽다. 뭘 그토록 원하는지, 어떤 글쓰기를 나에게 바라는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긁느라 전보다 더 어먼 소리만 뱉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