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금융 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제윤경.이헌욱 지음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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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 한도가 줄어드는 바람에 더 이상 카드 대금을 낼 수 없게 되자 그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언니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언니는 온갖 악담 중 순화된 건 동생에게, 강도가 심한 건 카드 회사에 퍼붓고 적금을 깨서 사금융에서 빌린 돈과 카드 연체금을 갚아줬다. 아니, 빌려줬다. 그녀는 다시는 카드를 만들지 않겠으며 자기 소득 범위 내에서만 생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 서울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정규직 전망이 보이지 않는 무한 비정규직의 20대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꿈일지도 모른다.

 

 둘, 이사를 하면서 대출을 받아볼까란 생각을 했다. 어차피 월세로 나가는 돈을 대출금 이자로 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본적인 돈 자체가 말도 못하게 없어서 어마어마한 전세 보증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파트 거품이 빠지면서 시세차익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다들 몇천씩 수익을 올린다는데 끝물에 나도 살짝 발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건 아니다. 뭔가 복잡하고 나랑 맞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나만 가만히 앉아서 손해보는, 전혀 손해가 아닌데도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4퍼센트대 적금과 예금에 가입해 있던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자산 증식 잔치에서 소외된 듯한 억울함에 휩싸였다. 안정적인 재무관리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경쟁에서 낙오한 패자의 몫으로 느껴졌다. 결국 펀드 투자를 계기로 평범한 중산층도 불안정한 노동 소득을 대체할 대박 투자 기회를 얻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전국적으로 부자 열풍, 재테크 열풍이 불었다.

 

 셋,  관리비를 카드로 결재하면 포인트를 쌓아주는 카드가 있다. 이왕 내는 돈이면 포인트까지 받으면 좋을 것 같다. 카드를 신청하려다 조건을 살펴봤다. 최초 3개월은 조건 없이 포인트를 쌓지만 그 후에는 이용실적에 따라 포인트를 차등 적립한다, 포인트는 어디 어디에 쓸 수 있으며 어쩌고 저쩌고. 포인트를 모아서 관리비를 절약하려는 야무진 생각은 복잡한 계산 앞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특정 주유소에서 포인트를 적립하기 위해 포인트를 훨씬 웃도는 기름값을 도로에 뿌리며 다니는 차주도 많을 것이다. 관리비 결재 카드를 쓴다면 포인트를 위해 배보다 배꼽이 큰 배팅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카드는 몇 푼 안 되는 포인트 적립과 할인 혜택에 대한 강박으로 소비의 선택이 제한되는 일이 허다하다.'

 

 약탈적 금융은 소득 수준을 뛰어넘는 신용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회는 높은 신용을 제공하는 금융기관, 빚도 자산이란 프레임을 짜는 언론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더라도 정부 역시 빚에 쪼들린 사람에게 또 다시 빚을 빌려주거나 법개정과 복지로 해결해야할 일을 모조리 빚으로 해결하는 셈이다.  전세자금대출이 아니라 주거 약자를 보호하도록 제도 개선을 검토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가혹한 채권 회수 시스템 자체가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지금까지의 채권 회수 시스템은 채무자들을 고통으로 내모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다시 재기에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해 보려는 의욕마저 꺾는다. 채무상환에 앞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채무자의 품위부터 지켜야 한다'는 말 역시 그런 연속선상에서 나왔다. 채무조정이 지연될수록 범죄와 자살, 가정파탄 등으로 인해 사회적 비용만 증가할 뿐이다. 채권추심에 시달리고 자신들을 도덕적 해이로 보는 사회의 시선이 만들어 내는 죄의식은 채무자들을 이중 삼중의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저소득층에게 더 불리한 채무조정, 개인파산 제도 역시 문제이다.

 

 이 책은 자칫 일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채무자에 대한 도덕적 해이를 희석하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내가 이 책을 읽는다며 은행에서 일하는 분과 얘기를 하다가 나온 이야기도 그와 같았다. 전문적으로 빚을 지고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려주는 학원까지 있다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의 잘못된 속성을 지적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하고 '선의의' 채무자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수익률이 높은 곳에 투자한다면 빚도 자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경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돈을 더 벌 수 있는데 너무 방어적인건 아닐까란 의문은 남는다. 하지만 한번 어긋나면 도저히 회생불가능한 현금융체계에서 더 큰 돈을 바라고 투자라기보다는 투기를 한다면 쪽박 차는건 순식간일 것이다. 게다가 거품 낀 집세와 가게세 덕분에 생기는 사회적 비용(청년층이 자립할 수 없고 내 집 마련은 점점 요원해지는 일)은 어쩌고. 이런 위험 대신 대박행진이니 누가 얼마 벌었단 식의 소문들에 일희일비하며 소극적 금융이용자의 자격지심만 덩달아 키운다면 약탈적 금융의 좋은 먹잇감이 될 확률이 높다.

 

  타협의 시대에는 큰 부자가 된 사람은 없었지만, 절대 다수의 미국인이 전보다 더 잘 살게 되었습니다. 비록 혁신은 덜됐지만 개개인의 삶의 스케줄은 대개 예측 가능했고, 지금과 같은 절박감이나 불안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성공에 이르는 비밀이 어디 붙어 있는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를 필요도 없고, 언제 뱀사다리를 밟고 미끄러져 내려올지 몰라 가슴을 졸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죽음의 계곡>의 저자 유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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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2-1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서점에서 <부채인간>이라는 책을 봤는데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채를 만들지 않는 것은 매우 힘들고, 부채는 결국 개인의 모든 것을 통제하여 지배한다는 이야기인데, 뭐 그것을 '약탈적 금융사회'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제 아는 분도 개인파산을 하신 분이 있고, 하우스 푸어들의 이야기도 들리고, 무엇인가가 상당히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있어요. (그 무엇은 파국일수도,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겠죠.)저도 최근에 가지고 있던 카드 몇 장을 없앴어요. 근데 도저히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겠더라구요. 이게 약탈적 금융사회의 자발적인 노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rch 2013-02-21 11:41   좋아요 0 | URL
저는 신용카드를 하나 갖고 있어요. 자동이체용으로. 몇달 전에 아예 없앴는데 처음엔 삼성꺼라 없애고 그 다음엔 너무 높은 한도가 부담된달까. 아니다, 이게 아니라 월급 받으면 고스란히 카드 대금으로 나가니까 허탈했어요. 카드 긁으면서 불안했거든요. 엄마랑 고스톱 치다가 제가 가리?하니까 '은행 돈 없어도 니 주머니에 돈 없는 일 없다'고 하시긴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이 얘기는 왜 나온건지.

숲노래 2013-02-19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가 어려워도 즐겁게 즐겁게 써서 좋은 생각 나누어 주셔요~

Arch 2013-02-21 11:41   좋아요 0 | URL
즐겁게 안 써지네요. 잘 정리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요.
 
레알 청춘 - 일하고 꿈꾸고 저항하는 청년들의 고군분투 생존기
청년유니온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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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초, 다시 연장 근무 얘기가 나왔다. 그 동안은 1시간 내외의 초과 근무에 대해서 수당을 받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오는 게 관행이었다. 같이 근무하는 아해랑 힘을 합쳐 연장 근무 수당에 대해 의견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 아해는 당연한걸 왜 묻냐는 식으로 나온다. 당직 서는 분에게 부탁하면 된다는 둥, 매번 이럴 수는 없다는 둥 꼼수를 부렸지만 소용없었다. 꼼수가 더 나올수록 '이기적으로' 근무하는 직원이란 딱지가 이마에서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잠자코 있었다. 부당한데 전에 사람들도, 지금 옆에 있는 아해도 다 하는걸 왜 나만 못하냐는 암묵적인 비난.


 '사람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기적이다, 힘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사회가 정말 힘든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사회일까. (젊은 사람들을 비난하기 전에)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레알청춘'에는 88만원 세대, 20대 위로론, 20대 개새끼론까지 20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벗어나 20대 본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격려 혹은 충고라는 이름으로 기대어린 말들'로 젊은 사람들의 입이 되어준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년 유니온이 인터뷰한 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작 그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나 역시 그 말에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들을 뒤집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가는 청년들이 왜 매도되어야 할까. 오히려 적성에 잘 맞지 않음에도 그런 직장을 찾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더 먼저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시각도 제시한다. ' 경험할 기회, 자기의 적성에 맞는 길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지원해줘야 한다는 의식이 없다.' 


어떤 교사가 되고 싶냐고 묻기 전에 우리 사회가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교사를 바라는가.’

‘우리 사회가 바라는 아이들의 미래는 무엇일까’


 20대의 태반을 '돈'과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그 고민을 일거에 뒤집는 얘기도 나온다.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조화되지 못하고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 인류는 비극을 맞이한다. 일과 사랑, 생계와 예술, 밥과 꿈... 전자는 생존이요, 후자는 실존이다. 생존을 잃은 상태가 죽음이라면 실존을 잃은 상태 또한 인류에게는 죽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는 탁월한 행운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실존을 빼앗거나 생존을 빼앗는다.'


 사실 '프리랜서라는 고상한 이름을 가진 비정규직 공장이자,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에게 이 책은 암울한 자화상으로 보일 것이다. 20대의 문제를 개인의 노력 여하로 환원하는 것 만큼 사회나 구조탓을 하는 것도 맥빠지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게 시작이라고 본다.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문제를 고치고 나아지게 하는 방법도 멀리 있지 않을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런거야.', '사회생활 경험이 없어서 뭘 잘 모르나본데.'란 관행에 치인다면 20대에게 불리한 판을 뒤집을 수는 없다.


 앞서 한 얘기는 싱겁게 끝났다. 누군가 이 상황을 우호적으로 보고해줬고 과장님은 흔쾌히 초과 근무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라고 했다. 누군가의 선의로 노동의 대가를 받는건 썩 좋은 경험이 아니다. 응당 그래야하는걸 사람들 눈치보고, 이기적인건 아닐까 자책하고, 퇴직과 암울한 재취업까지 생각한 면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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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힘 - 2012 시대정신은 '증오의 종언'이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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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의 생각'이 아니라 '안철수의 힘'이다. 안철수가 자신의 생각을 밝힌 내용만큼 강준만의 시선으로 안철수를 바라보는건 어떨지 궁금했다. 안철수가 대권주자의 행보를 걷는건 안철수 개인의 저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추구하는 가치를 열망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도 한 몫할 것이다. 강준만은 안철수에 대한 우려와 비난 등에 대해 그가 오랫동안 해온 글쓰기 방식을 통해 변호하고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안철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이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공감하거나 반박할 근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에서 인상적으로 본 것은 1960년대 미국 운동권 학생들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기상 나팔>-'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다'- 부분이었다.  알린스키는 그 당시 급진주의자에 대해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 관심이 없다. 아직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계시(revelation)일 뿐 혁명(revolution)이 아니다.'라며 한쪽으로 편향된 사고를 문제 삼았다. 원하는 세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봐야 한다는 말은 '알린스키의 법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라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시각이 아닐까 싶다.


 알린스키의 말은 어떤 사안이든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치고 받고 싸우는 정치에 시민들이 거리두기를 주문한다. 정치는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네이버 사전) 나쁜 FTA와 더 나쁜 FTA는 없다. 어느 정권이 무상급식을 하든 결과적으로 무상급식을 추진하는건 아이들에게 유익하다. 그런데 왜 그런 문제마다 서로 힘을 합쳐서 추진하는 대신 서로  말다툼을 하느라 '국민들의 인간다운 삶'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걸까. 보수든 진보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할 수 있는 정치집단은 요원한 일일까.


 나조차도 어떤 기사가 뜨면 저게 어느 당에 소속된 사람이 저지른 일인지를 먼저 본다. 사안의 호불호가 어느 당에 따라 달라지는거다. 진보쪽에 있다고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을테고 보수쪽이라고 모두 도덕성에 문제있는게 아닌데도 말이다. 이성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개별적인 사안에서 반응하는건 다를 수 밖에 없다. 물론 어떤 정치집단이 일을 추진하는가에 따라서 사안의 성격과 결이 달라질 수 있다. 복지 개념이 없는 주체의 예산 처리 방식이 오랫동안 복지 분야를 연구한 정치 집단과 다를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다시 알린스키의 말에 귀기울여보자. 


 '알린스키는 사회규범과 법질서라는 체제 안에서 사람들이 자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회개혁이며 개혁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믿었다. 그는 시민들 스스로가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사회질서의 변화에 참여할 때, 많은 사회문제가 느리긴 하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해결되어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활동가들에게 평범한 시민에 대한 믿음과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시민운동을 해 나가라고 부탁했다.' (알라딘 책 소개) 

 
 믿음 가는 정치 집단을 뽑아놓고 알아서 잘 하라고 하는 대신 그들의 정책을 비판하고 옹호하면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내기, 언론과 사법의 공정하지 못한 태도에 대해 문제 제기하기, 어느 진영에 대한 편견으로 그들을 싸잡아 나쁘다거나 좋다고 생각하지 않기.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 실천법인데 두리뭉실한 감이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진영 논리로만 풀어가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물론 예쁜 놈은 울어도 예쁘다지만 그들의 소모적인 다툼이 우리 삶을 휘두르도록 앞으로도 놔두기만 할 것인가. 지나치게 뻔하고 시계추처럼 반복적이다. 


 진보측에선 신자유주의 경쟁을 저주하는 것이겠지만 진보가 기존의 경쟁관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 사회를 약육강식형 경쟁관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겨주는 비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공정한 경쟁, 진정한 경쟁으로 경쟁을 선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진보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안티 보수가 아니라 프레임을 선점하는 것이다. 그 프레임에 따라 사람들의 맘을 얻는 것이다. 혹여 보수쪽에서 그 프레임을 건드리면 그들의 지향하는 바가 단순히 선거용에 그치더라도 누가 먼저 선점했느냐를 놓고 싸우는 대신 프레임의 공정한 실천을 협력해야 한다. 어떤 열망을 등에 업은 것만으로 그 열망을 바라는 사람들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면 반열망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그 열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게 맞다. 선후가 그렇다. 진보 진영은 '안철수 현상'에 편승해 대선 레이스에 이용할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의 열망의 맥을 잡을 수 있을지 감을 잡았으면 좋겠다. 그게 비록 더디고 표 안 나는 일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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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1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임을 만들어도 언론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개인이 알기는 퍽 어렵기도 해요.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은 ㅁㅈ당 같은 정당이 진보인 줄 잘못 알기도 하고,
선거 때가 아니면, 진보정당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기도 해요.

한국사회는 늘 인기투표로 모든 것을 갈무리하잖아요.
대통령이든... 가수이든...
 
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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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통해 글을 잘 쓰는 법보다는 작가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나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셈이다. 글을 잘 쓴다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작가수업'은 문장은 어떻고 소재는 어떻게 찾아내고 글의 구조는 어떻게 잡는지에 대한 책이 아니다. 지금까지 글쓰기 책이 세부적인 각론 퍼레이드였다면 이 책은 그동안 작법 책이 말하지 않는 비밀, 즉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를 밝힌다. 짐작했겠지만 그 비밀, '시크릿'을 안다고 작가가 되는건 아니다. 다만 자기계발서의 온갖 맹점에도 불구하고 그 책들이 꾸준히 팔리는 이유를 추측할 따름이다. 세미나를 듣고, 이 책을 읽고,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쓴다면 어쩌면 나도 작가가 되지 않을까란 막연한 희망. 그렇다고 이 책을 작가의 자기계발서라고 보기엔 좀 그런 것 같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보면 왠지 불끈거리지 않는가. 어젯밤 내가 복분자주를 먹어서 그러는게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작가의 근본 문제는 자신감, 자존감, 자유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수호정령은 무의식 속의 이런저런 유령들에게 붙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쓰기 교사와 글쓰기 교본들은 유난히 비관적이다. 브랜디는 유독 글쓰기 분야에서만 이런 잘못된 비관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를 파헤친다. 문제를 헤쳐나가는 데 다른 사람은 도움이 되지 않더라는 경험을 내세워 미리부터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학생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은연중에 학생의 문제를 더욱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내가 그 동안 글을 못쓴건 다 자책감을 건드리는 작법책들 때문이었어! 이 얼마나 신속하고 약삭빠른 책임전가란 말인가. 글을 못쓴건 예능을 죄다 섭렵하고 시험 전날도 아닌데 안 하던 책상 정리를 하고 싶고 그도 아니면 책 속에 더 의미있는 이야기가 씌어질 것 같아 책을 읽어서라고 말하는 것보다 내 문제를 더 심화시킨 작법책 때문이라고 하는건 얼마나 터무니없으면서 그럴 듯 한가. 

재는 남다른 기질이나 훈련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 작용과 상관없이 자신의 합리적인 의도에 완전히 이바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재능이라는 자원은 그 양이 아무리 미미하다 하더라도 평생을 가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충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을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위대한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한 재능을 타고나기라도 한 듯 너무나 위대해서 편의상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삶과 예술 작업에서 나머지 인간들보다 그러한 기능을 좀 더 자유롭게 발휘했을 뿐이다.
 나도 어딘가에 숨어있을지 모를 재능을 활용하는 법만 배우면 된단 말이지. 얼쑤! 이것저것 뜸 들이는 법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작가가 되기 위해선 우선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글을 써야 한다. 정해진 시간 동안 글 쓰는게 가능해지면 그때부터는 시간을 바꿔가며 써본다. 즉 자리에 앉아서 정해진 시간 동안은 글이 술술 나오게 하는 훈련. 그 다음에는 

 몸을 가만히 놔두듯 마음을 가만히 놔두는 법을 익히라.
책을 덮고 눈을 감은 상태로 잠시만 마음을 가만히 놔두라. 단 한순간이라도 성공했는가? 전에 한 번도 그렇게 해본적이 없다면 마음이 얼마나 쉴 새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지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인도의 옛 현인은 자신의 마음을 반은 자조투로 반은 변명투로 '재잘대는 원숭이'에 비유했다. 성다시시 프란체스코(1182~1226, 이탈리아의 수도사)는 자신의 몸을 가리켜 '나의 바보 형제'라고 일컬었다. 어느 실험자는 이렇게 한탄했다.
"마음이 소금쟁이처럼 수면을 내달린다."
 하지만 조금만 훈련하면 마음의 부산스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적어도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은 네온사인 같았다. 도저히 가만히 있질 않는다. 번쩍번쩍, 휙휙, 뭘 좀 더 먹은 다음에 이를 닦을까, 아냐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눈을 감아볼까, 아 잠이 오려고해. 그럼 앞에 있는 무형의 점에 집중해보자. 오마이갓! 점이 춤을 추고 깜빡이고 난리도 아니다. 소금쟁이처럼 간질이는 맘은 도저히 가만히 있질 않는다. 마음 가만히 내버려두기 훈련이 끝나면 저자는 드디어 신묘한 비법을 알려준다. 바로 '예술적 혼수 상태' 불러내기!

  이제 이야기를 여전히 되는 대로 생각하면서 목욕을 한 다음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등을 대고 똑바로 누우라. 그런 자세가 너무 졸린다 싶으면 나지막하고 큼직한 의자에 앉아 적당히 긴장을 풀라. 편안하게 자세를 취했으며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 몸을 가만히 놔두라. 그런 다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라. 완전히 잠든 상태도,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도 아닌 채로 그저 누워 있으라.
 잠시 후, 20분이 될 수도 한 시간이 될 수도 두 시간이 될 수도 있는데, 일어나고픈 욕구가 일면서 활력이 마구 샘솟을 것이다. 즉각 그런 욕구에 응하라. 쓰려고 하는 글을 제외하면 세상 어느 것에도 관심이 가지 않는 일종의 경미한 몽유병 상태에 빠질 것이다. 상상의 세계만 생생하게 와닿을 뿐 바깥세상은 그저 따분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나 타자기 앞으로 다가가 글을 쓰기 시작하라. 그 순간 그대의 상태는 예술가가 작업할 때 빠져드는 상태가 된다.

 나는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글을 쓰는걸 가까스로 삼일 하고(장하다), 마음을 가만히 내버리기 훈련은 시작도 못하고 끝내고 말았다. 맘이 자꾸 간지럽다고만 해서 '예술적 혼수 상태'를 불러내지 못했다. 결국 작가가 되지 못한거다, 라고 말하는건 너무 가볍지만 어쨌든 그렇다. 영적이라던가, 은유에 대해 감도 못잡고 있는 나로선 이 책을 읽으면 나의 무의식을 소환해 뭔가 나답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가 있었다. 의식하고 또 의식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내가 상상하지 못했는데 글로 나와버리는 어떤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대로 실천도 안 했을뿐더러 맘이 네온사인 같아서 무의식은 커녕 의식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적는 것도 힘에 부쳤다. 흔한 계단 이론에 따르면 이런 부침을 겪으며 열심히 하면 한 계단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치인지라 어찌 글쓰기며 사는 게 계단처럼 오르고 말고의 문제일 수 있겠는가, 라며 적당히 타협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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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0-13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어려운데요. '마음의 부산스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적어도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차원은 거의 보리수나무의 석가모니가 되는 수준인 것 같은데..근데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면 굳이 작가라는 거 안해도 되는 거 아닌가..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이런 잘못된 비관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일단 앉아서 아무거라도 쓰세요,라는 식보다는 훨씬 좋은 충고인 것 같음.)

Arch 2012-10-14 09:35   좋아요 0 | URL
ㅋㅋ 인용이 이렇게 걸맞다니~ 댓글 보고 엄마 미소를 지었어요.

저는 네온사인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 내 맘이 문제려니 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 경지야말로 도달하기 힘들겠단 생각이 드네요. 다시 뭔지 모를 의욕이 막 샘솟는, 기분만, 느낌만 그래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책은 무책임하고 '의지여, 타올라라'적인 면이 있긴 해요.


saint236 2012-10-1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구매하고 기다리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어제 복분자주를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왜 자꾸 눈에 들어올까요? ㅎㅎ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내 손을 잡아 놀이 장터로 데려가고, 놀이 기구들은 날 오싹하게 만들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는 덫을 떨치듯이 빠져나온다.


 이야기는 하나의 일화로 시작한다. (요새 서서비행을 읽는 중인거 티냄) 여자 아이는 동네에서 술을 드시는 아빠를 찾아나선 참이다. 남자는 머리 꼭대기까지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고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는 어렸지만 '뭐든 심각해' 체질이라 남자가 술을 마시는건 의지가 없고 취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술에 취해 잠들 수 밖에 없는, 의지와 돈과 몰취미의 문제가 아니라 몸이 쉬이 잠들지 않아 술이라도 먹어야 간신히 잠들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는걸 그때의 아이가 알 리 없었다. 남자는 여자애의 조그만 어깨를 짚고 불안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아이는 술에 취한 아빠의 자전거 뒷자리에 탔다. 아이는 남자가 술을 많이 먹는 것 말고는 모든 일을 척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불안할리가 없었다. 한아름 안기지 않는 남자 등에 매미처럼 붙어있었다. 비틀대며 움직이던 자전거는 아이를 떨어트린 것도 모르고 한참동안 앞으로 간다. 남자가 자전거를 멈췄을 때 아이는 울어야할지 떼를 써야할지 몰랐다. 90점짜리 시험지를 가져오면 '에게'였고, 100점짜리 시험지에는 '당연히'였던 남자라 아프다고 하면 '에게'할까봐 지레 겁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아이 쪽으로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아이를 자전거에 태운다.


 빨래하는 엄마를 쫓아 아이가 북북 기어나오면 엉덩이를 톡 때려서 방으로 데려가는건 남자였다. 사우디에 있을 때 아내보다 첫딸 사진을 더 보내달라고 편지에 썼지만 그런 딸이 막상 아빠를 보고 앙하고 울어버리자 바로 엄마에게 떠민 것도 남자였다. 남자는 서툰 아빠였고 그 시대의 여느 남자처럼 서툰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를 대하는 기술도 없었고 감정을 다스리지도 않았다. 부부 관계는 좋지 못했고 둘은 빈번하게 싸움을 했다. 아이들은 둘의 싸움을 무서워했지만 그 역시 티를 내지 않았다. 여자 아이는 그런 상황을 벗어날 용기도 없는 주제라 자기연민에 빠지기 일쑤였다.


 사우디에서 돌아온 남자는 직장 대신 사업을 택했다. 김양식은 쫄딱 망했고 군부대에서 일을 할때는 제법 돈을 만졌다. 아파트로 이사간 것도 침대와 침대보, 새 책상을 산 것도 그즈음이었다. 건축붐이 있었고 서랍에 얼마인지 모를 돈을 보관할 정도로 돈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 후로는 지속적인 침체기였다. 남자로선 이게 사는건가 싶을 정도로 야박하고 심심한 일상이 지속됐다. 빚은 줄지 않고 벌이는 시원찮았다. 머리가 커진 딸들에게 들어갈 돈은 많았는데 항상 마이너스였다. 아이는 그가 호기롭게 사줬던 빨간색 차를 팔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좀 더 자란 아이와 남자는 비슷한 성향답게 날을 세울 때가 많았다. 외박을 하거나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로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얘기를 안 할 때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몇달간 대화를 안 하다 대학합격 소식을 전하며, 아차 우린 말 안하고 있었는데 싶었던 적도 있었다. 서로를 대하는 방법을, 존중하는 방법을, 감정을 조금 누르고 마주하는 방법을 몰랐다. 남자는 답답한 아파트보다 시골이 좋다고 하지만 귀농하기 위해서 알아보는건 '6시 내 고향'을 보는게 다였다. 항상 텔레비전을 보고 일이 없는 날은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든다.


 친구들과 관계도 넓어지고 삶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는 엄마에 비해 남자는 술이 없을땐 별로 말이 없다. 요새는 그마저도 피부병 때문에 못마신다. 남자가 술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술을 먹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예전에 남자가 아이를 좋아하지만 겁냈다면 요즘은 손주들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비록 1시간을 못넘기는 애정이지만 어찌나 살뜰한지 여자 아이는 자신도 그런 관심을 받았다면 좀 나은 여자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남자는 추석에 뭐 먹고 싶냐고 묻다가 이것저것 말하는 딸들에게 '재료는 알아서 하는걸로'라고 농을 친다.


 난 런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아버지는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추상적인 애정으로 환원되었다.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편지로 보고해 주었다. 여기는 추운데, 우리는 이런 날씨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요번 일요일에는 그방빌에 사는 친구들을 보러 갔었다. X 어멈은 예순 살에 죽었는데, 그렇게 늙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는 글로는 제대로 농담을 하지 못했다. 사실, 편지에서 사용한 언어와 표현들로부터가 그녀에겐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듯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것은 한층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는 법을 한 번도 배운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서명을 했다. 나 역시 진술서 같은 어조로 그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만일 공들여 다듬은 문체를 사용했다면, 그들은 내가 자신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고 느꼈으리라. 


 '남자의 자리'는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로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을 읽는건 독특한 경험이었다. 내가 언젠가 쓰려고 했던 누군가의 생애를 그리는 작업이란 점에서, 한번도 담담한 어조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래서 나도 그 '남자의 자리'를 짧게나마 적어보았다. 쉽게 읽히고 간결한 글을 읽는다고 해서 쉽게 읽히고 간결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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