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를 안 좋아한다. 그렇다고 커피를 아주 싫어한다는건 아니다. 커피가 내 취향이라고 말할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는건 아니란 뜻이다. 물론 한때는 커피믹스에 빠졌던적이 있다. 큰 잔에 얼음을 몽땅 넣고 커피를 홀랑 마신 다음 아그작 오도독 얼음을 씹는 맛을 좋아했다. 진한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키는걸 좋아할 때도 있었고,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녹인 다음 단번에 들이켜댄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옆에서 마치 <커피와 담배>의 스티비 부세미가 커다란 원두커피 주전자를 들고 옆에서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대는 것처럼 묘하게 흥분됐다.
중독까지는 아니었지만 먹으면 살짝 기분이 좋았던 커피를 안 먹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전부터였다. 직장 옆에 커피집 두 곳을 번갈아 다니면서 카페모카를 먹어대던 어느 날이었다. 카페 모카 위에 아슬하게 얹혀있던 휘핑크림이 다 녹아 조금만 더 달라고 직원분에게 말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내 약점을 잘 알고 있는 A가 쏜살같이 내게 말했다.
- 커피는 커피를 먹지도 않는 사람들이 재배한 원두로 만드는거 알고 있죠?
주사약이 떨어져 마약 상인에게 뭐든지 팔 것처럼 애틋한 눈빛을 보내며 휘핑크림을 받아오던 내게 A는 다시 말해줬다.
- 휘핑 크림은 오만가지가 다 들어간 가공용품이에요. 내가 만들어봐서 다 알아(이 사람 지민이 말투를 흉내낸다) 팩에 든 휘핑크림을 짜서 설탕을 넣고 정신없이 휘저어 휘핑크림?(그게 지금 유머?)
- 그럼 휘핑크림은 생크림이랑 다른거네. 그럼 여기에도 액상과당이 들어있는거네. 어쩐지 과하게 달다했어.
그 후부터 커피 전문점에 가서 뉴요커처럼 (아, 유행 지났지. 요새 자꾸 혼잣말이 많아진다) 커피를 먹는 일이 참 껄쩍지근하게 되고 말았다. 물론 커피값도 무시 못하겠고, 일회용 용기를 재활용하기엔 우리집이 지나치게 인테리어적이지 않은 문제도 간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꾸 뭔가 땡긴다. 과자를 먹자니 늙어서 이가 부실하고, 율무차를 먹자니 너무 달다.
해서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사면서(아, 포장 박스가 참 야무졌다) 무더기로 아름다운 가게의 커피를 샀다.
요놈 안데스의 선물은 첫향이 고소하고, 반쯤 남은 커피는 약간 신맛이 난다. 요놈들 말고 드립백으로 나온건 티백보다 훨씬 진하고 커피전문점에서 먹는 아메리카노보다 다양한 향과 맛을 갖고 있다. 다만 애매한 쓰레기가 문제.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자니 아닌 것 같고, 종이를 뜯어서 원두 찌꺼기를 탈취용으로 쓰자니 미덥지 못한 손이 번번히 원두 찌꺼기를 구석구석 날려보내 치우려면 반나절이나 걸린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가루로 된 커피도 나오면 좋을 것 같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커피를 나눠줬더니 쾌쾌한 냄새만 나던 공간에서 그윽한 커피향이 난다. 아마 당분간 커피를 좋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