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전후로 아기는 말을 알아듣고 걷기 시작하며 이전의 발달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눕거나 기어다닐 때는 공간을 한정적이고 단편적으로 느끼다 걷는 순간 자기 신체의 유능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말을 알아듣고 조금씩 정확한 단어를 구사하면서 의사소통의 첫 걸음을 뗀다. 이전에는 기저귀를 가져오라고 손짓발짓 동원해야 기저귀의 기쯤 알아듣는 눈치였다면 지금은 ‘기저귀 가져다줘.’라고 하면 어김없이 기저귀를 갖다준다. 어김없이라니,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배밀이를 하다가 기어다니고 앉은 다음에는 서서 가구를 짚고 한발짝씩 걷다 손을 떼고 조심스럽게 걷는걸로 이어졌다. 지난번 할머니댁에 다녀온 후로는 눈에 띄게 잘 걷는다. 방을 가로질러 쭉쭉 걷고 한 바퀴 돌고난 자기 모습에 흡족해 코를 찡긋하며 웃는다. 지금이 제일 사랑스럽다.

 

  아침에 일어나 야무지게 맘마를 먹고 자기가 좋아하는 애들 의자에 태워서 방을 돈 후 유아 텐트에 들어가서 장난감들이랑 논다. 맛의 호불호가 생겨 고구마랑 무 우린 물은 잘 먹는데 무 익힌거랑 심심한 과자는 잘게 부수며 논다. 밥 먹을 때 수저는 자기가 꼭 집어야하고 맘에 든 물건은 뮐 하든 꼭 들고 있어야 한다. 엉성한 반찬도 잘 먹고 방귀도 잘 뀌고 똥도 잘 싼다. 아기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단 말이 은유인줄만 알았는데 잘 먹는 아기를 보면 정말 배가 부르다. 아기가 걷기 시작하면서 집이 지저분해졌다. 두 손이 자유로우니까 물건을 들고 다니다 흥미가 떨어지면 아무데나 놓고 오기 때문이다. 키가 닿는 선반과 식탁 위에 있는 것도 끄집어내서 물건들은 제자리를 벗어나 아기 손이 안 닿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간식을 먹을 때면 동물 인형들에게 일일이 ‘아’를 해서 주고 노래가 나오면 흥을 어쩌지 못한다.

 

  고집이 세져서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거나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지 않으면 밥먹기나 잠자기 등 일상생활이 올스톱된다. 맘에 안 들거나 자기 요구에 즉각 응하지 않으면 꼬집거나 문다. 드러눕는건 어디서 배운건지 수시로 써먹는다. 밖에서 소리가 나면 아빠라고 했는데 엄마도 외출이 잦아지니 음마음마 한다. 치카치카하면 치치티하면서 내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간다. 어떨 때는 남보다 더 먼 것처럼 나를 대하다 다른 때는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닌다. 외출한다고 옷을 갖고 방에서 나오면 희안한 소리를 내며 웃으면서 신이난다. 볼펜 뚜껑도 열 줄 알고 컵 맞추기도 잘한다. 전화기가 있으면 전화기로, 전화기가 없으면 손등을 귀에 대고 전화를 한다. 손수건이 보이면 방을 닦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볼 일 끝나면 늦게 일어난 엄마 덧신 챙겨다주고 맘맘맘마 한다.

 

  볼살이 통통해서 모찌모찌하고 손을 휘적거리며 웃을 때도 좋았다. 그런데 유독 지금이 더 사랑스럽다. 지금은 아기가 고집을 피우기 시작해서 아기와 협상을 하고 설득도 하고 때로는 내가 권위적으로 굴 때도 있다. 눈물도 잦고 짜증도 잘 피우는데 왜 지금이 더 사랑스러울까. 아기를 좋아하는 맘은 하루하루 업데이트 되니까 하루의 좋아함 총량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걸까. 그런데 내 맘은 왜 이렇게 몽실몽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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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채 비빔밥과 참나무 장작 목살구이를 시켰다. 집에서는 거의 고기를 안 먹는데 나와서는 고기 탄 냄새를 지나치기 어렵다. 가져간 현미차를 한모금 마시자 음식이 나왔다. 잘게 썰린 나물을 큰 대접에 조금씩 덜어 젓가락으로 슬슬 비볐다. 아기는 나물을 덥석덥석 잘 받아먹는다. h는 생마늘을 입에 넣으며 고기를 우겨넣는다. 비빔밥은 끌어당기는 맛이 없고 목살은 그을린 맛이 났다. 

 

 한떼의 사람들이 옆자리에 앉는다. 군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 둘, 나이든 여자 남자. 부산스럽게 이곳이 맛집이라며 열심히 주문을 한다. 다섯이 먹기에는 많은 양을 시킨 후 군복을 입은 남자에게 근황을 묻는다. 군대 버거를 먹어봤느냐는 여자들의 질문. 우리 때는 3년이나 있었는데 지금은 갈만하지란 늙은 남자의 거드름. 늙은 남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활달하게 이야기를 했다. '즐거운 나의 집'에 어울릴만한 요소들이 말과 태도, 표정에서 자연스레 묻어나왔다. 

 

산을 오르며 '그런 날에는'을 불렀다. h는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져(도망)갔다. 밥을 먹은 아기는 유모차에서 잠들었다. 겨울치고는 조금 포근한 날씨라 안심했더니 아기는 그날 저녁부터 콧물을 흘렸다. 산에서 내려오며 포장마차에서 직접 농사 지은 호박과 팥으로 만든 호떡과 국화빵을 먹었다. 오뎅국물을 호호 부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유명한 산이라 외부 관광객만 스쳐지나갔었는데 처음으로 이 지방 사람을 만났다. 평소에 눈인사만 하며 지나치던 사이였는데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언니네는 둘 다 성적이 좋아야 들어갈 수 있는 학교를 나왔다. 언니는 평생 서울에서 살 줄 알았는데 남편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전향적으로 시골에 내려왔다. 요즘은 몸이 안 좋아 남편이 집안일을 많이 '도와'준다고 했다. 남편은 농사를 짓지만 일자리를 구해야할 것 같다고 했다. 처음 농사를 지어서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기반이 안 잡히니 삶이 불안정해진다. 검은 패팅 점퍼를 입은 언니 얼굴이 까칠하다.

 

 차에 태우자 아기는 잠이 깼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내 품에 좀 더 깊이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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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7-01-2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떠올렸는데, 글을 보니 그 노래가 맞았군요. :) 헤, 아치 님 새해 복 많이, 아기랑 건강하시길.

Arch 2017-01-31 22:05   좋아요 0 | URL
치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노래 별거 없는데 참 좋아요.
 

햇살이 머리 위에 꼿꼿이 박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술처럼 풍경이 색을 입는다.

밤길을 산책하며 부드러운 공기 속을 거닐다 갑자기 진공 상태로 던져진 것처럼 눈이 뻑뻑하다.

서울 하늘엔 스모그만 가득하단 얘기가 무색할 정도로 하늘은 맑고 전날 내린 비로 나무들은 싱그럽게 반짝인다.

싱그러움은 내 몸까지 전염시켜 나도 덩달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연못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자 무릎이 당겼다.

녹색 타일이 깔린 인라인 운동장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제법 서늘해진 바람

손바닥한 나무 그늘 아래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고 모든 것과 상관없어진 기분

눈을 뜨자 세상은 다시금 환해졌다.

느닷없이 밝아진 세상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이 있었다.

분홍색 옷차림에 분홍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소녀와 아빠

여자 아인 몇번 인라인을 타봤는지 제법 자세가 나왔지만 영 불안한지 제 체중을 아빠에게 실었다.

허리를 굽히고 딸의 손을 잡아주는 아빠.

격려를 하다 약 올리다 한발짝 움직일 때면 칭찬을 해주다,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내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쉬던 꼬마가 날 힐끔거리며 쳐다보다 절대로 나 때문에 그런건 아니란 포즈로 엉거주춤 일어나 자리를 떴다.

 

여자 아이는 덥석 아빠를 끌어안고 더는 못하겠다며 투정을 부린다.

가끔 나도 덥석 네 시선을 붙잡고 투정을 부리고 싶다.

 

2008년 가을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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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수첩에 귀여운 그림 잔뜩 그려서 아기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헌데 나는 그림치인걸.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고 아기자기 귀여운 그림책이 필요해.

이것저것 찾다가 전에 한번 보고 여러가지 그림을 쉽게 그려본 게 생각난 '그려봐, 볼펜으로'

 

 

 

 

 

 

 

 

 

 

 

 

 

그래, 이거야. 사자 사자. 근 몇년만에 온라인에서 책을 사려고 폼을 잡는데 중고책이 보인다.

배송비가 있으니 판매자의 다른 물품을 보고 다시 돌아와 새 책이 좋다며 합리화하길 한시간 넘게.

혹시 몰라 근처 중고매장을 검색했더니 있다! 그럼 이번 주말에 서점에 가서 사는거야, 까지 정리를 한 게 어제 12시 즈음.

책이 꽂혀있는 곳까지 메모를 하고 절판된 김영하의 여행자 도쿄까지 챙기는 센스를 장착했는데

오늘 무심코 들은 이랑의 노래가 너무너무 좋은거다. 이랑의 노래는 CD가 아니라 음원으로 나왔는데 그게 하필 책이다. 그럼 가만 보자. 이것까지 사려면 결국 온리인으로 주문해야하네. 에잇! 자꾸 5만원이 걸려 도서관에 신청하려던 책들까지 장바구니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다. 내일 아기 데리고 외출도 하고 이제 곧 자야하는데 한번 당겨진 불은 꺼질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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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들은 다른 사람을 보면 낯을 가리고 엄마를 찾는데 우리 아기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덥석 안긴다. 사람들은 아기보고 순하고 낯을 안 가리나보다란 말을 한다. 왠지 애가 탄다. 아기는 자신을 안은 새로운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적응이 됐는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려고 한다. 옆에 있던 내가 일어나서 자리를 비웠는데 신경도 안 쓴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 아기를 안고 다른 곳으로 갈 때가 있다. 아기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가면 아기는 되려 내게 무슨 일 있었냐고 반문하듯 말끔한 얼굴로 방실방실 웃는다.

 

 

  아기는 생후 6개월부터 낯가림을 시작하고 주양육자와 애착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아기는 낯가림은 커녕 주양육자인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 한번은 이모랑 놀다가 헤어질 때가 되니까 문 앞까지 쫓아가 서럽게 울기도 했다. 나와 아이 사이의 애착이 문제란 생각이 든 건 그때쯤이었다. 다른 주양육자들이 아기가 자신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곤혹스러울 때 나는 정반대 고민을 했다. 처절한 인정투쟁의 시작이었다. 일부러 아기를 떨쳐놓고 밖에 나가는 척 하거나 다른 사람이 안으려고 하면 엄마 품이 좋았지란 의뭉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아기는 엄마의 절실한 바람과 다르게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잘 지냈다.

 

 

  그렇게 붕 뜬 애착을 유지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사람과 노는 아기 곁에 무심코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가 있는걸 확인하고 안심하는 아기를 봤다. 자세히 보니 내가 없는 곳에서는 ‘진짜 웃음’을 짓지 않고 행동도 조금 어색한게 눈에 띄었다. 엄마를 애타게 찾는 것만 애착이 아니라 어렴풋한 필요도 애착이란걸 조금씩 알게 됐다. 암,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만 애착이면 내가 너무 한스럽지. 발달의 시기는 있지만 아기마다 차이가 있다는걸 매번 되새김해야만 한다. 뒤집기 시기가 늦다고 신경쓰다 때가 되니 아기 스스로 뒤집던게 얼마나 됐나고 말이다.

 

 

  이렇게만 끝나면 기승전이 되는데 아직 결이 남았다. 앞에 글을 쓴 게 9월 즈음인데 돌이 다 되면서 조금씩 인지능력이 생기고 품안에 폭 안기기 시작한 아이는 맹렬하게 엄마를 찾는다. 놀다가 심심하면 음마음마, 조금 발을 삐끗해도 음마, 엄마가 안 보여도 음마, 계속 엄마를 찾는다. 화장실 문을 열고 소변을 보고 있어도 엄마를 찾는다. 숨바꼭질도 아닌데 계속 나를 찾고 아무것도 못하고 자기 옆에만 있으라고 한다. 자기 혼자 놀 때는 나를 껴주지도 않으면서 필요할 때는 곧 죽어도 꼭 옆에 있으란다. 흥칫뿡. 비로소? 애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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