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른한 이불에서 썼 듯 누군가 맹렬하게 부러운 날이 있다. 나는 그럴만한 능력과 배짱과 용기가 없는데 내가 원하는걸 쉽게 얻고 쿨한 태도까지 겸비한 누군가.

 

 그런데 며칠 내가 좋아하는 언니와 부러운 누군가를 비교해봤더니 부러움의 정체가 좀 더 선명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언니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는 언니를 좋아하고 부럽지만 부러움이 좋아함을 압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니의 약함과 한계, 나와 비슷한 면모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부러웠던 건 부정의 기운이 하나도 비치지 않는 평온하고 신나는 일상을 전시해서인건 아닐까. 세련된 포장방식이 나같은 사람을 낚는건 아닐까. 아, 이런식으로 정신승리하는걸까.

 

 * 연기 수업을 받고 있다. 나는 집안일을 안 하는 남편역을 맡았다. 내가 주로 맡는 역은 누군가를 구박하거나 삐딱선을 타는건데 이런건 즉흥으로도 곧잘 한다. 내가 어려워하는 연기는 예쁘거나 순진한 사람, 아무 의심없이 다른 사람을 믿는 역할이다. 이건 고도로 의식적인 집중력을 보여야 한다. 암튼 남편 역을 하는데 즉흥으로 하는거라 연기할 때랑 실제 다른 친구들 앞에서 하는게 조금 바뀌었다. 원래는 (집안일 안 하는 남편과 갈등-> 아내의 고민-> 6년 후 남편에게 아기 맡기고 쿨하게 외출하는 아내) 이런 식이었는데 아내 역할을 맡은 분이 다른 대사를 날렸다.

 

 '나 갔다올게' 이러고 가면 되는데 '여보, 당신 집안일 좀 해.' 이렇게 돼버린거다.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남편이라 되는대로 말을 했는데 '여보, 당신은 6년째 어떻게 한결같냐'였다. 순간 빵터져서 상황이 그게 아닌데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6년째 참으로 끈질긴 남편이구나, 어떻게 6년째 지치지도 않고 비슷한 주제로 싸우나. 집안일은 정해져있는데 아직 남자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하고 어느 정도 해야할지는 공식적인 기준이 없다. 대개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의 가사, 육아 기여도를 듣고 상대방의 노동 수준을 가늠하는 정도.

 

 연기를 하면서 느낀게 와, 그 눈치와 염치없는 순간을 계속 당하면서 꿋꿋하게 집안일을 안 하고 TV를 보는 남성의 정신력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주변 엄마 중 다시 돌아갈 일자리가 있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대부분 전업이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한다. 나는 다시 돌아갈 곳이 있는 엄마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게다가 육아휴직을 3년이나 할 수 있어 아기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일년 정도 아기를 본다고 하는 순간 다시 샘이나서 어쩔줄 몰랐다. 그런데 일하면서 아기를 돌보는 엄마의 고충은 말해 무엇하나. 맞벌이인데도 여전히 육아,가사노동의 남성 기여율은 차이가 없고 엄마들은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전업주부가 편한 건 아니다. 끊임없이 자기존재를 증명해야만하는 기로에 섰다. 얼마 전에 엄마들이랑  아이스브레이킹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나눈적이 있다. 대부분 하고 싶은 일로 무슨 자격증 따기, 집안 정리 잘하기, 다이어트가 들어가 있다. 나는 남자인 a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세상에, 세계여행이라고 한다. 꿈조차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해졌다. 어렸을 때 나를 설명하는 명함 하나가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다시 명함 없는 삶으로 돌아왔다. 나는 전보다 잘 지내고 있는걸까.

 

* 하, 아기 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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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집 차에 아이를 태워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윗층 엄마를 만났다. 집에서 차 한잔 하자며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윗층 엄마는 여전히 아이 돌보는게 어렵다고 했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를 어떻게 보는지 다들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아이를 너무 일찍 어린이집에 보낸 건 아닌지, 아이 편식이 심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을 했다. 나는 윗층 엄마가 잘하고 있고 좀 더 확신을 갖고 아이를 대하면 좋겠다고 얘기해줬다. 아이는 엄마 뿐 아니라 자기 기질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성장하는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윗층 엄마한테 한 얘기지만 실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아빠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양가감정과 죄책감을 느낀다. 육아로 감정과 정신, 육체가 닳을대로 소모되지만 ‘좀 더 잘해야하는데, 좀 더 잘할걸’ 같은 내면의 다그침을 듣는다.

 

 ‘부모로 산다는 것’에 보면 아이와 놀 때 아이의 세계에 빠져서 함께해야만 진정으로 놀았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나온다. 그녀는 탈진할 정도로 아기에게 맘을 쏟지만 이내 다 마치지 못한 집안일과 아기를 낳기 전 누릴 수 있었던 작은 일상을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맘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아이 입장에서 야속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육아의 전형에 빠지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내 시간을 갖으려고 a와 싸웠고 사회가 압박하는 ‘좋은 엄마’상을 거부했다. 육아의 굴레에 틀어박혀 나를 소진하며 유일한 희망으로 ‘자식의 성공이나 행복’ 같은걸 바라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고비가 있었다. ‘그 어린애를 어린이집에 맡겨? 엄마가 노는데 좀 더 보면 되잖아.’ ‘ 요즘 엄마들은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거저 본다니까.’ 란 공격적 말에 웃으며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 근력을 키웠지만 마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아기가 침대로 올라와 부스럭거리며 내가 전날 밤 읽던 책을 뒤적였다. 언제 이렇게 커서 침대 위까지 올라오니, 너무 작아서 안는 것만으로 아스라했는데 언제 이렇게 컸니.

 

 아이는 금세 자랐다. 하루는 길고 길었는데 아이의 성장은 눈깜짝할새 이뤄졌다.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놀아줬어야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손목이 아프고 어깨가 빠질 것 같아도 더 안아줄걸. 나는 좋은 엄마였을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평온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맘이 미어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엉엉 우니까 a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쳤다. 아이 보고 엄마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물으니 아이는 내 얼굴을 쓱 만지며 배시시 웃는다.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는 차에서 내려 나를 덥석 안는다. 조금 더 안아주고 싶은데 야옹이를 보겠다며 나를 밀어낸다. 지금부터라도 두려움 없이 장난처럼 아이를 많이 안아줘야지. 그리고 계속 나는 잘하고 있고 괜찮다고 얘기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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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7-06-23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잘 하고 계시는 것 맞아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해요.^^
아이는 정말 쑥쑥 잘 커가요.^^ 걱정 안 하셔도 되고 정말 괜찮아요. 많이 안아주는 것 정말 필요하죠.^^

Arch 2017-06-24 00:05   좋아요 0 | URL
아기를 돌보며 자아가 분열되는 느낌이... ㅋㅋ 페이퍼가 혼란해도 이해해주세요.
 

 3주간의 적응 기간이 거의 끝나간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음을 그치고 먹먹하지만 감정을 추스린 얼굴로 어린이집 차에 탔다. 처음 몇번 울 때 걱정됐지만 가슴이 찢어지진 않았다. 아이가 잘 할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울고 울어서 어린이집을 못다니면 어쩌나란 걱정은 했다. 나는 이기적이고 손뼘만한 내 시간이 중요한 엄마였다. 20개월 동안 옆에 끼고서 아이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일에서 잠시 벗어났다. 그리고 닥치는 적막. 이제 뭘하지.

 

 어제 저녁부터 느긋하게 쌓아놓은 설겆이와 빨래, 마늘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바닐라라떼를 한잔 만들어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정새난슬의 '다 큰 여자'를 읽는다. 넘치는 열정과 분노, 혼란스러움이 나와 닮은 사람. 모순된 자신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사람. 그의 모습에서 나를 보며 조용한 아침을 보냈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다 SNS에 댓글을 남긴 a의 타래를 타고 그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아기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이내 생협 위원장이 되었단다. 로망이었던 취미를 하고 역량개발 워크숍을 다니는 a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조용한 아침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자기소개란에 누군가를 부러워한적이 없다고 적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선망할만한 삶을 사는 누군가. 나처럼 흔들리지 않고 무엇으로든 성공하고 어떤 순간에도 빛나는 사람.

 

 a가 누군가의 애타는 러브콜을 받으며 일을 시작한 것과 다르게 내가 구직을 하기 위해선 엄청 애를 써야한다. 그가 하는 활동들은 나 역시 하고 싶었던 것이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활동들을 통해 배우지 않고 경험을 쌓지 못했다. 일이 되거가는건 더디고 관계는 어렵다. 실력은 한참 지나도 도돌이표다. 으쌰으쌰 새로운걸 만들고 기획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걸 꿈꾸지만 다른 사람을 포용할만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 그럼 다른 사람이 내미는 손에 감동하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데 이내 삐딱선을 탄다.

 

 여전히 '인기 많고 싶은' 바람이 맘 저편에서 미약하게 팔랑이는데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는다. 진짜 이율배반. 남을 배려하거나 의식적으로 듣기 좋은 말을 하지 못한다. 얼마 전 역할극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낸 아이디어인데 나는 서브 악역을 맡으려고 했다. 누군가 '아치는 왜 누굴 때리고 구박하는 역할만 해?'라고 묻지 않았으면 생각해보지 못했을 빈틈. 나는 악역이나 서브가 편하지 주인공을 하는 건 어색하다. '못할 것도 없지 뭐.'란 생각으로 어색한 역을 맡아했는데 역시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난 막 나서고 주목받는 것 좋아하는데 숨고만 싶었다.

 

 긍정적인 기운, 밝고 명랑한 것, 또랑또랑한 건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혹은 나는 그런걸 안 좋아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아한다. 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삐딱선을 타고 트집을 잡아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건 신문사설로 충분하다. 누군가 관계를 맺는데 그런 점들은 마이너스이다. 그런데 이게 난걸. 여전히 인정욕구에 허덕이고 남들의 말 한마디에 팔랑이는 사람이 나인걸 어쩐담. 시크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누군가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비판 대신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창밖으로 뒷동 베란다에 널린 이불이 보였다. 초여름 햇살에 바짝 말라가는 두툼한 이불이 나른해보였다. 나른하고 더없이 충분한 표정으로 당신을 응원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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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막한 밤에 위로가 되지만 계속 보기에는 좀 수다스럽고 자의식 과잉인데 애정결핍인 언니가 있다. 마침 언니랑 내 컨디션과 제반상황과 여건, 에너지가 기가 막히게 잘 맞으면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데 어쩌다 오늘이 그랬다.

 

 난 언니가 주변상황을 의식해서 큰소리로 말한다거나 전화통화를 크게 하는걸 안 좋아했다. 자기 과시 같고 내 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놈이(이야기의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 놈을 붙일 수 밖에 없다.) 머리 아파서 상태가 메롱인데 언니는 계속 그 놈을 걱정하고 챙겼다. 마치 '자상한 아내' 역할에 빠져있는 듯 보였다. 평소에는 참깨 볶는 것처럼 달달달 볶았는데 말이다. 사실 조금 떨어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늘은 그녀가 무려 2주만에 쉬는 날이었다. 남편과 꽃놀이를 가던가 같이 콧바람을 쐴 기대를 했을 것이다. 헌데 남편놈은 전날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오늘 몸이 안 좋다며 아침부터 뻗대고 있는거다. 내 성질 같아선 바로 무시하고 차를 갖고 어딘가로 휙 떠나버리거나 대판 싸우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게할텐데 언니는 걱정만 하고 있는거다.

 

 언니는 모처럼 쉬는 날을 어영부영 보내고 말았다. 저녁을 먹는데 남편놈이 술을 시켰다. 한나절 지나 좀 살만해지니 다시 술이 생각난 모양. 언니는 참았던 화를 쏟아내는 대신 침묵했다. 무덤 옆에서 밥을 먹는 것처럼, 젖가락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확인해야할 정도로 어색한 자리였다.

 

 전조는 여러 번 있었다. 남편놈은 상태가 멜롱이 아니어도 언니 말을 잘 안 듣는다. 한번은 언니가 정색을 하며 남편놈에게 말을 하길래 내가 물었다.

 

- 남편놈, 당신이 왜 언니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지 알아?

- 글쎄, 술에 취해 있어서.

- 아니. 그래도 되니까.

- 응?

- 그래도 되니까. 말 안 하고 상대방 답답하게 만들어도 언니가 풀어주고 다시 얘기할걸 아니까 그러는거라고.

 

 언니 이야기만은 아니다. 결혼 전에는 너스레라도 떨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결혼 후 일상적으로 필요한 말을 하거나 듣는데도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다. 상대방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체념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전략을 선택하는건 대개 생물학적으로 남성일 경우가 많다. 왜? 그래도 되니까. 여성이 더 소통을 잘하니까?

 

 아니.

 

 경청과 대꾸도 일종의 감정노동이다. 나는 내 얘기를 더 많이 하고 싶은 욕구가 많기도 하지만 체질적으로 누군가의 얘기를 잘 못듣는다. 좀이 쑤시고 흥미가 떨어진다. 일방적인 얘기를 들을 때는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하지만 최대한 들으려고 노력한다. 왜?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하니까. 소통 능력 운운하면서 무슨 화성에서 온 남자 찾고 하는데 간단한 예가 있지 않은가. 말대꾸조차 귀찮아하는 남자들이 상사한테도 그러느냐고. 상사에게는 감정이입과 요란한 리액션은 기본, 언제든 웃을 준비까지 되어있지 않나.

 

 언니의 남편놈이 언니를 상사처럼 대하란 얘기는 아니다. 적어도 성의는 갖고 있었음 좋겠다는거다. 그건 너무 기본 중 기본이라 설명하기도 입 아픈거니까. 미운 언닌데 오늘은 안쓰러워보였다.

 

 

 

 

 

* 비밀댓글 남겨준 분.

적어준 내용을 읽는데 맘이 훈훈해졌습니다.

대댓글이 안 달아지고 혹시나해서 방명록에 갔는데 자판이 영어로 나와서 (빌어먹을 알땡땡) 여기에 남겨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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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서 계단을 오를 때면 가방이나 손으로 엉덩이 부근을 가린다. 행여 속옷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요즘이야 짧은 속바지를 입어서 괜찮지만 그래도 ‘왠지’ 가려야할 것 같다. 왠지 가려야할 이유에 대해선 생각해본적이 없지만 가리는 행위의 근저에는 ‘내가 짧은 치마를 입었지만, 그렇게 헤프게 속옷을 보여주는 여자는 아니야.’란 생각이 깔려있다. 그렇게 불편하고, 귀찮으면 안 입으면 될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난 짧은 치마를 입고, 치맛자락을 팔랑거리거나 조금쯤은 섹시해 보이는게 좋다. 내가 좋아하는걸 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불편한 점을 감수하는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그걸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가리는건 여자 맘인데, 지나친 배려라거나 불쾌한 친절로 보인다고 하는건 약과다. 자신을 잠재적 치한으로 몰았다고 억울해하니 말이다. 가리는걸 왜 치한으로부터 자신을 가리기 위한 행위로 연결하는걸까? 여자들이 그렇게 오지랖은 아닐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내 옷 내가 가리고, 내 몸 내가 안 보여준다는건데. 입는 것도 내 맘, 보여주는 것도 가리는 것도 다 내 맘인걸.

  예를 들어 지하철에 서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움직이면서 건든다고 가정을 해보자. 뭐지, 하고 뒤돌아볼 수 있다. 이건 일반적인 일. 하지만 여기에 성별이 개입되면 다르게 해석된다. 남자는 자신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여자한테 오해받고 있다고, 치한으로 몰렸다고 지레짐작 겁을 먹는다. 불편한 기분이 든다고, 아무 짓도 안 한 선량한 자신을 오해했다고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가해 망상 뺨친다.

  얼마 전 G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똥꼬치마’-지금은 삭제되었다.-와 관련된 글을 올렸다. 누가 볼 것도 아니고, 관심도 없는데, 여자들이 계단을 오르며 자기를 흘끗 쳐다보는게 불쾌하다 등등의 이야기를 적은 글이었다. 정말 남자들은 그렇게 느낄까?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무엇을 입든 여자 맘이지만 속옷이 보일 때는 눈이 갈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걔중 평소에 기분이 나쁜걸 생리하는 것 같아 등등으로 표현해 내게 질문 공격을 당한 Ch는, 만약에 여자가 봤냐고 추궁하면 안 봤다고 우길거라고 얼굴이 벌개지며 덧붙이기까지 했다. 노출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외로 한다고 해도 난 정말 궁금했다. 내 속옷, 내가 가리는거야를 넘어서 그토록 은밀하고 완고한 입장은 뭘지.

나는 짧은 치마를 입는다. 약간 불편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좋고 내가 예뻐보여서 좋다. 남들이 나를 예쁘게 보는 것도 좋다. 좋은 와중에도 내 체형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많은 비난거리가 말풍선 모양으로 내 주위를 떠돈다. 신경쓰며 위축되거나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보다 좋은건 무시하기다. 무시면 간단하지만, 어찌나 견고한 조직처럼 일사분란하게 재단하는지.

 가끔씩은 그저, 내 몸이고, 그 사람의 입장이고, 그 사람의 취향일 뿐이니까 너 하던대로 그냥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2009년 아치 페이퍼

 

 캐치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언젠가 쓴 것 같아서 찾아보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요즘처럼 여성혐오가 본격적이기 전에 쓴 글인데 요즘 읽어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지금은 편한 바지, 편한 바지만 찾는데 그땐 그랬구나. 짧은 치마 입고 섹시한 느낌을 좋아했구나. 섹시한 느낌은 내 느낌인걸까, 누군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걸까. 지금은 생각이 복잡한데 글이 단조롭다면 예전엔 생각은 단순했지만 글은 촘촘했달까. 이게 다 출산의 영향인걸까.

 

 제시카 발렌티의 성적 대상을 읽고 있는데 번역 문제인지 작가가 은유적으로 글을 써선지 잘 읽히지 않는다.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큰 코를 혐오했다고 한다. 작가에게 큰 코가 있었다면 나는 큰 엉덩이가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정말 엉덩이가 크다고 인식을 했을까.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아치는 엉덩이가 커서 아기를 잘 낳겠네'라고 했던가. 그때 나는 중학생인가 그랬을 땐데 다른 때 같으면 촌철살인? 같은 말을 곧잘 내뱉어서 발화 당사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는데 그때는 얼굴이 빨개져서 황급하게 윗도리를 내려 엉덩이를 가렸다.

 

 세상에나, 아직 중학생 밖에 안 된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 어른의 정신 상태는 대체 어떤걸까. 게다가 내가 아기를 낳을지 엉덩이로 이름을 쓸지 지가 무슨 상관이람. 하지만 나는 어렸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라 '아, 내 엉덩이가 정말 크구나.'라고 수긍하고 말았다. 얼마동안 엉덩이를 숨기고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엉덩이 좌절감은 다른 신체부위? 칭찬으로 상쇄하다 유야무야 없어졌다.

 

 생각없는 말 한마디에 내 몸을 미워하고 내 존재를 부정했던 경험, 여자들은 한번씩 있지 않을까. 오십이 다 된 언니들도 살을 빼고 피부를 좋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걸 보면 끊임없는 성적대상으로 본인 스스로를 자리매김한건 아닐까. 남자 꼬마들의 바지 앞섶을 보며 장차 섹시한 남자가 되겠네라던가의 훈수를 두지 않을걸 보면 말이다. 남자는 그냥 인간인데 여성은 대상화 된다.

 

 작가는 본인이 겪은걸 되물림 하기 싫어 간절하게 아들을 바랐다고 하는데 나는 딸을 바랐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충분히 걱정되고 염려됐지만 그럼에도 딸이었으면 했다. 내가 여자로 살면서 느끼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이 때때로 비참하지만 나 자신의 인식론적 자산이 되는 것처럼 내 딸 역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기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 딸이 성적 위험과 자존감의 위협을 최대한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페미니즘을 확장하고 혐오 발언을 하면 땅속을 파고 들어가서 자책할 정도로 창피함을 느끼게 만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기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런 다음 괜찮다고 말해줄 것이다. 이것은 여자들의 슬픈 역사라고 회한을 섞어 말하는 대신 같이 싸우며 성장할 것이다. 반성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하는거지 네가 하는게 아니라고, 스스로 자책감을 갖거나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널 사랑한다고, 꼭 얘기해줄거다.

 

 간만에 고양됐네.

페이퍼 재활용까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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