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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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아닌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오랜만의 신간이라 반갑고 어떤 메모로 감질나게 읽던 글들을 한꺼번에 읽어서 더 반갑다. 지금 정희진이 중요한 이유는 식상한 얘기도 자기 말로 풀어낼줄 알고 그런 글들로 독자들에게 묵직한 자극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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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행복한 마을은 가능한가 - 마을과 행정 사이를 오가며 짱가가 들려주는 마을살이의 모든 것 유창복의 마을 시리즈
유창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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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책은 성미산 마을 이야기라서 부럽지만 내가 할 수 없는, 멋진 마을이 있구나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서울시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민관협력, 행정과 일하기 등 딱히 정말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하는 일을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좀 더 흥미로웠다. 2장 진도가 안 나가는 건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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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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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다닐 때 나는 착한 아이였다. 좋게 말해 평범한거지 삐딱하게 말하면 존재감 없는, 특색 없는 아이였다. 시골학교에서는 그럭저럭 성적이 나왔지만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러던 중 운 좋게 반에서 10등 안에 든 적이 있다. 사람 좋아보이던 담임은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브라보콘을 사주셨다. 담임이 무섭지 않아 반 아이들이 제멋대로였던 반이어서 10등 안에 든 10명은 영웅처럼 반을 구할 책임을 맡았다. 그 후로 10등 안에 든 적이 없어 다시 브라보콘을 먹지는 못했다. 다음 시험에서 성적이 잘 나온 아이들은 또 브라보콘을 먹었을까.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성적, 스펙, 입시’가 지금처럼 살벌할 정도로 강조되지 않았던 그때에도 성적에 따라 어떤 대우를 받아야할지 짐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마 잠깐 성적이 좋지 않았다면 ‘그런 세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경험 외에는 학교에서 난 대체로 평범한 축에 속했다. 10시까지 명목 뿐인 자율학습을 하기 싫어 ‘튀었다’가 손가락이 가느다란 물리 선생에게 손바닥을 맞은 게 유일한 일탈이었다. 대놓고 자고 대놓고 소란스러워서 애들이 살짝 밀어둔 아이가 있었고 잔다고 선생에게 분필로 맞았던 내가 있었다. 교실 붕괴 전이었지만 따로 과외를 받는 아이들 사이에선 대놓고 무시당하는 선생이 있었고, 과외를 안 받아 ‘그 선생’의 수업이라도 열심히 들어야 했던 아이들도 있었다.

 

  청춘의 입을 통해 청춘 담론의 새로운 시각뿐 아니라 세대론에 대한 질문을 던진 엄기호가 이번에는 교사를 통해 학교를 들여다봤다. 사람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교육문제를 지탄하면서 정작 학교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없다. 우리는 학교에 무엇을 바라는걸까. 엄기호는 <우리 교육>과 하자센터, <오늘의 교육>을 오가며 만난 학교가 끔찍했다고 한다. 이 사회 전체가 더 이상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는 교육이 불가능한 상태란 진단까지 내릴 정도였다. 교육이란 낯선 것, 새로운 것을 만나 경이로움을 느끼는 연속적 과정이지만 지금은 낯선걸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 됐다는거다.

 

  저자는 ‘냉소와 비난 사이의 교육은 사회의 무능에 대한 알리바이로 갇혀 있다. 교육과 학생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교육현장에 뛰어드는 교사들이 어떻게 소진되며 고립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 책은 교사들의 움직임만으로는 학교의 위기, 수업붕괴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인문학적으로 찾아나선다.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해결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다. 다만 현재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학교는 그동안 사람들을 계몽하고 신분을 상승 시키는 역할을 상실했다. 배울수록 무지해지고 맹목적이 된다. 학교는 국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국민’과 시장논리에 충실한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관이 됐다. 이제는 신분상승 도구가 아니라 중산층 이상이 자신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곳으로서의 의미도 잃어버렸다. 학교는 동질적으로 똘똘 뭉친 배타적인 공간이며 타자성을 적대하는 공간이라 왕따와 자살 같은 학교 폭력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는 진단마저 나온다.

 

  입시교육은 수업붕괴를 초래했다. 공부하는 애들은 전략적으로 챙겨 들을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을 판단한다. 널브러진 애들은 그동안 편한 학생들이었다. 예전에 나처럼 착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몸과 교실과 수업이 요구하는 몸이 불일치 되면서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어졌다. ‘착한 학생’은 알려면 많은 수고로움을 끼치는 존재이자 안전관리의 대상으로 전환돼 관리가 필요한 존재로 전환됐다.

 

  자살과 학교폭력이 심해질수록 학교는 학생을 교육하거나 성장시키고 훈육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역할을 떠맡게 됐다. 이제 학교에서 학생들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은 ‘성적’만이 아니라 ‘마음’이 되었다. 대다수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관리자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게 됐다. 학교폭력 담론 이후 제기되는 안전에 대한 강박은 이른바 ‘착한 학생’에 대해서 학교를 그저 ‘육체적 생명’을 돌보는 공간으로 전환시켰다. 그렇다면 이런 학교의 역할 변화는 교사와 교무실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교실이 아수라장이 되는 동안 그 문제에 관해 가장 열심히 토론하고 대책을 숙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할 교실은 왜 침묵에 빠졌을까. 예전에 부당하거나 반교육적인 요구를 교무회의 시간에 벌떡 일어나 거부했던 ‘벌떡 교사’들은 요새는 자신의 벌떡이 다른 교사에게 민폐가 될까봐 부담감을 느낀다. 비정규직이나 초임교사에게 그 일이 돌아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론의 장은 진리가 아니라 의견이 존중될 때 살아있는데 벌떡 교사들은 교무실을 토론과 협력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들 자신의 소신을 진리화함으로써 토론 자체를 봉쇄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하며 느끼는 무력감은 학생들이 겪고 있는 일이 교사 자신의 경험세계와 동떨어진 것일수록 심해진다. 완전히 낯선 존재에게서 느끼는 무력감인 것이다. 이럴 경우 그 교사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은 동료교사들 뿐이다. 이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함께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사들의 대화 주제는 잡무나 성적 같은 기술적인 일들 뿐이다.

 

  수업을 하는 자로서 교사 정체성도 흔들리긴 마찬가지다. 근대의 기획인 자아실현은 ‘내’가 그 어떤 것에도 통제되거나 억압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내 삶을 기회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실험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전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다음 경험을 해석하고 그 새로운 경험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것이 경험의 갱신이자 성장이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맡은 업무의 기계적인 분담은 교사의 성장을 방해하고 경험을 단절적인 것으로 만든다.

 

  민주화 이후에도 교사가 자기 수업을 기획하지 못하게 된데에는 역설적으로 교사 개개인의 전문성을 중시하면서 책무성을 강조하는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고 한다. 책무성의 강조는 교사의 다양성과 창조성 보장이 아닌 획일성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책무성은 곧 평가로 연결되고 책임추궁을 당할 개연성을 열어놓기 때문에 누구든 책임질 일을 안 하려는 경향이 팽배해진다.

 

  학생의 성장과 미래에 대해 공동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공동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식으로 책무가 강조되면서 무책임한 사회가 돼버렸다. 전시 행정과 책임회피식 책임구성을 학교폭력과 학생의 죽음으로 적나라하게 오점을 드러냈다. 학교는 책무를 안 지려고 사건이 학교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고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상담 등의 모든 일을 했다는 증거를 서류로써 보여준다. 학생들에 대해 책임지려는 교사들은 점점 더 바쁘게 되고 바쁜 만큼 ‘독박’을 쓰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흔히들 교사를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직업의 객관적 안정성과는 상관없이 평가를 잘 받지 못하면 교사들도 퇴출될지 모른다는 탈락에 대한 공포가 팽배하다. 이전에 교사의 능력은 오랜시간 축적되는 경험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얼마나 유연하게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가에 따라 측정된다. 평가기준을 내면화시켜 주체들의 개인 역량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성과사회는 모든 것이 대상화되고 개인이 노력한 결과물로 이해된다. 노동의 성과가 개별화되면서 성과는 돈이 아니라 한 사회로부터 존재감을 인정받는 방식이 됐다. 성과로 개성이나 자아가 드러나며 성과가 공공성을 대체한다. 성과로 평가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열심히 하려고 나서지 않으며 이는 교사들의 순응으로 나타난다.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신할 때, 안전을 위해 자기가 자신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단속으로 귀결된다. 개인들은 침묵함으로써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취향만 남게 된다.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집착한다. 교육에 대한 견해 차이는 명백히 정치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문화적 차이나 취향의 문제로 순치되어야 한다. 정치적 차이는 토론과 논쟁으로 조정되지만 문화적 차이는 관용과 개성의 존중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한국의 교실에서는 자신이 하는 질문이 질문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아는 학생만 질문할 수 있다. 교실에서 질문이란 자신이 아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이지, 모르는 것을 드러내는 기회가 아니다. 교실에서 모르는 자, 즉 ‘타자’로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타자성에 근거한다. “선생님, 하나도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을 환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교사들은 다시금 둥그렇게 모여앉아 토론하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냉소주의 사회를 살고 있지만 다름/차이를 만남과 부딪힘의 상대로 바라봐야 한다. 학생들은 교사를 개별 교사가 아닌 교사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교사 전체를 통해서 만난다. 교사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에 의해 어떤 학생들을 대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그런 학생들을 배제하는 공간임이 보여야 비로소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할 수 있다.

 

  교육현장은 지금 진퇴양난의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하던대로 해서는 해결되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 위험해질 뿐이다. 따라서 내재적으로 생산되는 위험을 언어화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압력이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학교와 교육의 위기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그런 전체 환경의 한 부분으로 위기를 경험하고 위험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학교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가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의 운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유대감을 형성할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유대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찰을 통해 위험을 감지해야 한다. 위험이 새로운 결속과 연대의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적극적인 자각과 소통이 필요하다. 위기관리 능력의 회복이란 소통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성과사회에서는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시간과 속도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토론과 숙의의 과정을 반기지 않는다. 성과사회로 변모한 학교가 새로운 제도나 대책을 도입할 때마다 위기에 대한 정책 혹은 대안이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킨다. 교사들은 이런 위험이 초래하는 고통을 개인 차원에서 공유하는 것을 넘어 위험에 대해 성찰하고 결속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통의 세계를 창조하는 우정이 정치를 가능하게 하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 삶의, 경험의, 이야기의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진행된 소위 교육개혁은 교사들을 개별화하고 단절과 자기단속을 심화시켜왔다. 학교는 직급별로 분할되고 신분제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다. 교육개혁은 끊임없이 교단을 ‘진정한 교사의 일’과 ‘그를 보조하는 업무’로 분할하면서 노동을 위계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전교조와 교육운동이 ‘진정한 교사의 일’이라는 진정성 정치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진정성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려면 ‘함께 거부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비정규직 교사들은 관리자에게 인격 전체가 구속되고 통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교사에게 잡무가 전가되면서 정치적 결속의 기초가 되는 평등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아렌트가 플라톤의 초기 저작을 거론하며 말한 것처럼 “어떤 것에 대해 철저히 논했다는 것,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자체가 충분한 결과”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결론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대화가 아닌 이런 대화”가 우정의 대화이며, 우정은 “그들이 공통으로 가진 것에 대한 이런 대화로 구축” 된다. 취향을 고유하는 사적인 친밀감으로서의 우정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는 평등한 이들의 우정이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 저자는 학교가 망하더라도 가르치는 교사가 아직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본다.

 

   ‘닥쳐라, 세계화’에서 세계화는 그 진의와 성찰과는 별개로 삶이 글로벌하지 않아 여전히 피부로 와닿지 않고 청춘 담론도 청춘에서 살짝 비껴나 실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취향과 문화적 차이가 아닌 정치를 살리는 것, 이야기부터 시작하라는 말에선 현재 상황과 오버랩되는 지점이 있었다.

 

  지금 일하는 곳에는 늘 맛있는 곳, 좋은 곳에 대한 얘기만 하는 분이 있다.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여기에 왜 있는지 정도는 공유하고 각자의 고민을 털어놨으면 하는데 그분과 얘기 할 때면 그게 쉽지 않다. 분위기를 무겁게 한다거나 사적인 영역을 털어놓는게 익숙하지 않다며 배척한달까. 이분은 그렇다치고 다른 분과는 전혀 소통할 맘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전 조직의 경험을 통해 의례적인 관계라도 지속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놓고 몇 번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반응을 접하자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한 사람을 가르치는 정도의 중대함까진 아니지만 주민주도의 활동을 도모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곳에서도 소통이 안 되고 우정을 나누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모니터 속 페이스북 친구들과는 소통하지만 모니터 밖, 전혀 다른 타자들과는 대화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소비와 문화, 취향을 통해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다음에 정치적인걸 얘기하고 싶은걸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사적 친밀감보다 일을 통한 관계가 더 편하고 취향보다 조직의 목적과 자발적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편견일 수도 있겠다 싶다.

 

 엄기호의 책은 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준다. 안개로 꽉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성큼성큼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가 안개에 가려진 사물들을 대면하는 일. 그의 책이 쉽지 않지만 늘 반가운 건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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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맞서다 - 사례·담론·전망
이미경 외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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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원하는 몸 되지 않기, 몸을 다르게 쓰기. 그동안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쩌다 생긴 일이야`로 벌어진 일을 수습하고 위로하는데 그쳤다면 이 책은 성폭력이 일어나는 판을 바꾸기를, 성폭력 피해자에게 생존자로서 살아가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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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기생충 열전 -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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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일하는 곳에 학습문고처럼 책을 빌려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희망도서도 신청할 수 있는데 이용하다 보면 공공 도서관과 다르게 살뜰하고 정겹다. 그곳에서 서민의 ‘기생충 열전’을 읽게 됐다.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에서는 살짝 아쉬웠던 부분이 이 책을 통해서 좀 더 깊어진 것 같아  반가웠다.  알고 있는 기생충이래야 고작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이 다인데 '기생충 교양서'를 표방하는 책이라니. 기생충 사진이 징그러우면 어쩌나 싶은 우려가 있었지만 한장 한장 읽어나갈 때마다 기생충 얘기에 푹 빠졌다. 책을 다 읽을 때쯤엔 몇몇 기생충이 예뻐보였다.

 

 이 책은 사람과 관련된 기생충을 소개하고 기생충의 생애를 그림으로 설명한다. 그림만 봐도 기생충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이 그림에 공이 많이 든 것 같아, 사실 이 그림 때문에 드디어 기생충 관련 교양서가 나왔구나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딱딱함이 아닌 말랑말랑함을 지향하는 교양서답게 행간에 숨겨둔 유머가 다정하다.

 

-숙소와 먹을 것만 제공한다면 건드리지 않겠소.

면역세포가 답했다.

-좋소. 그 대신 다른 곳에 가지 말고, 꼼짝 말고 거기 있으시오.

대타협이 이루어졌다. 기생충은 숙주를 괴롭히지 않았고, 숙주도 면역을 작동시키기보단 오히려 면역을 억제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이게 점점 일반화되면서 인간과 오래 같이 산 기생충들은 사람 몸에 들어오면서 신호를 보냈다.

-어이! 나야 나. 십이지장충. 나 알지?

숙주도 화답했다

- 어, 너구나. 난 또 누구라고. 방 따뜻하게 해 놨으니 편히 쉬다 가.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 된 인간의 회충 알이 3만 년 전의 것이니, 적어도 그 이전부터 몸 안에서는 저런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생충은 자신이 기생하는 숙주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자신이 살게 될 종숙주가 아니라 거쳐지나가는 중간숙주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기생충에 대한 오해는 이 책을 통해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왠일인지 배가 살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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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1-06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을 읽다보니 똥구멍이 막 근지러워지더라고요. ㅎㅎ

Arch 2013-11-06 11:17   좋아요 0 | URL
그 내용은 좀 다른 사람 똥구멍도 근지러울 것 같아 차마 쓰지 못했어요.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