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쉽게 상상이 가지는 않겠지만 머릿속에 한번 그려보자. 높이 2,408m, 674층으로 인구50만 명이 살고 있는 거대한 타워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63빌딩이 높이 249m(해발264m)로 남산보다 1m가 낮은 높이라고 하니 거의 그 10배의 높이를 가진 셈이다. 63빌딩보다 10배가 높은 곳? 에이~ 그런 곳이 어디있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말해둔다. 여기 있다. 바로 빈스토크!

독서가 가진 미덕이 자신이 가보지 못한 어떤 세계를 탐험하게 해주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책은 그 미덕을 200%이상 달성한 것 같다. 작가의 엄청난 상상력과 통찰력에 연신 감탄하며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 신비의 세계,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빈스토크에 다녀온 작가가 장편의 기행문을 남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빈스토크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미지의 곳, 상상의 세계, 그러나 그곳이 멀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곳이 우리 사는 곳이랑 참 많이도 닮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공간은 다르지만 공유하는 시간은 같았던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공간 또한 같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미 빈스토크의 주민이었으므로. 이렇게 나와 시공간을 함께하는 그곳의 주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덧 이 책은 마지막 장으로 가있다. 미세연구소의 박사들 이야기, 작가 K이야기, 어떤 이의 첫사랑 이야기(그 첫사랑을 꼭 구했기를 바라며...), 경비대 교통과에 들어간 어떤 이의 이야기, 코끼리 아미타브를 돌보는 사람 이야기, 비밀 요원 세흐리반 이야기, 도란도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 나도 모르게 끼어들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기 층 집값은 얼마에요? 여기 가장 큰 서점이 어디죠? 여기 제일 맛있는 음식은 뭔가요? 여기 작가 중에 K씨가 유명하다고 하는데,『곰신의 오후』읽어 봤어요? 이런 것들을 마구 물어보고 싶은 충동 말이다. 여기로 이사 오면 몇 층이 좋을까나, 하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다. 농구장이 있는 77층이 좋겠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내가 농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님을 밟힌다. 단지, 멋진 농구 선수들을 보고 싶으므로.) 아, 리조트가 있는 410층도 괜찮을 텐데...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곳 주민들의 특성이었다. 흔히 들어본 고소공포증 말고 저소공포증 말이다. 1층에를 못가 해외도 못나가는 작가 K도 그렇고 50층 아래로 내려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최신학이 그렇다. 병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것이 빈스토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증거라고 한다. 그들은 빈스토크가 붕괴되는 것보다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더 무서워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빈스토크를 떠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점에서 맞는 말 같다. 이곳의 토박이 개는 땅 냄새를 킁킁 거리며 맡아서 집을 찾아오지는 않지만, 엘리베이터를 얻어 타고 집으로 찾아온다.(위에 이곳 주민들의 특성이라고 했는데, 이 개도 엄연히 주민이다. 돈도 아주 많은^^) 매일 좌파니 우파니 무조건 나눠놓으려고 하는 우리시대를 그곳은 직파(수직주의)니 평파(수평주의)니 하며 나누는 것으로 갈음한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회피해버리는 세태,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제일 먼저 달아나버릴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을 때만 애국자 인척 하는 모습이 어느 곳의 정치인들과 참 비슷하다. 그럼에도 빈스토크가 바벨탑이 아닌 이유는 희망과, 신뢰와, 정의 상징! 파란 우편함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엘리베이터 이용자들이 자신이 내릴 위치의 우편을 가지고 내려 자발적으로 집배원이 되는 훈훈한 시스템.(내가 빈스토크에 가면 제일 먼저 해보고 싶은게 파란 우편함을 통해 편지를 보내보는 것이다.)

 어디서나 사람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에너지 얼마쯤은 존재하나보다. 빈스토크의 파란 우편함처럼 말이다. 독자들의 간지러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상처 난 부위에는 약을 발라주는 배명훈 작가 같은 작가들이 이 시기에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배명훈 작가의 좋은 에너지에 감사한다.^-^ 유쾌! 상쾌! 통쾌한 빈스토크 타워에 많이들 놀러 가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쾌한마녀 2009-07-07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약간 베르나르베르베르 작품같은 느낌도 드는데요?? 엄청난 상상력^^ㅎㅎㅎ

어느멋진날 2009-07-10 13:55   좋아요 0 | URL
ㅎㅎ 한국의 베르나르베르베르 인가요?^^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작가네요.
 
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김훈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 언제일까. 아마도 그를 세상에 높게 내보내준 작품 「칼의 노래」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그 작품에 나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빠졌었고, 그것이 그의 에세이집을 만나게 해준 중매쟁이가 되었다.「칼의 노래」라는 중매쟁이를 통해 만난 「바다의 기별」. 설렘 가득한 그와의 첫 대면에 나는 그만 경악을 하고 말았다. 자신을 소개하는 「바다의 기별」표지 첫 마디가 “자전거레이서” 김훈이었기 때문이다. 아차, 싶었다. 내가 아는 김훈이 아니라 동명이인인 김훈인 것인가. 지은 책으로...「칼의노래」... 이 대목에 가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작가 소개란 첫 번째가 자전거레이서라니. 문단의 늦깎이라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에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 근사하고 화려한 경력을 뒤로 하고, 자전거레이서로 자신을 표현한 이 작가의 발칙함과 기발함에 첫 장부터 한방 먹었다. 그의 다음 작품엔, 어떤 말로 그를 표현할지 은근한 기대를 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예상은 했지만, 다른 작가들의 에세이와는 달리 가볍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하루 종일 끼고 있었던 이유는, 그의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의 내면, 그의 생각들을 훔쳐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김훈이라는 나무가 새긴 나이테를 맘껏 볼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가 언젠가 끼적여 놓았던 메모장을 소개해주기도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말해주기도하고, 달릴 곳 없는 시대의 황무지에서 외로운 길을 걸었던 아버지를 회상하여 그 기억을 나눠 주기도하고, 딸아이가 첫 월급으로 핸드폰을 사준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작지만 벅찬 행복에 관한 단상을 깨워 주기도하고, 생명의 개별성(이 대목에서 특히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에 관해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고 늘 편식을 하는 나에게 이것도 한번 먹어보고, 저것도 한번 먹어보라며 홍명희의「임꺽정」을 설명해 주기도하고, 시인 최하림의 시도 읽어주고, 화가 오치균의 그림도 보여준다. 책의 페이지수로 치자면 다른 책의 절반 정도로 얇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헤아릴 수 없는 만큼 거대하다. 두껍진 않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이 책을 음식으로 치자면 고단백 저지방 식품인 닭 가슴살쯤 될까. 그가 내준 음식이 모두 맛있었지만 한 번 더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가 했던 강연을 기초로 쓴 회상, 말과 사물(이 책 part3)이라고 할 것이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는 우리 언어의 현실과, 인간의 소통에 기여할 수 있는 말에 대한 그의 깊은 사유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동안의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책의 마지막엔 그동안 그가 썼던 책의 서문들과 수상소감들을 수록해 놓았는데, 이 책과 참 잘 어울리는 양념이라 생각한다. 그가 남긴 나이테와 발자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음식을 대접받고 가는 기분으로 이 책을 덮는다. 씹어도 씹어도 단물이 빠지지 않는 풍선껌 같은 그의 문장들을 나는 오래도록 곱씹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시클 다이어리 - 누구에게나 심장이 터지도록 페달을 밟고 싶은 순간이 온다
정태일 지음 / 지식노마드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혈혈단신으로 달랑 자전거 하나만 가지고 유럽을 횡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얼마나 될까? 여기 두 달 동안 유럽 대륙을 자전거로 약 2500킬로미터를 달린 용감하다 못해 무모한 청춘이 있었으니 바로 이 책의 저자가 되겠다. 어느 날 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일상이 지루하고 답답할 때 읽으면 가슴이 뻥~뚫릴 만한 책 없니? 하고 물었더니 이 책을 추천해 주었다. 추천 받아 읽긴 했지만, 제목을 듣곤 자전거 이야기가 나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저자가 “빨간비닐”이라는 자신의 애마(자전거 말이다^^)를 가지고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그 대목이 나오자 ‘아, 장난이 아니 구나, 미쳤어~미쳤어!’ 라는 말이 내 맘속에서 아우성치고 말았다. 그가 이토록 무모한 여행을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스무 살의 열정을 찾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그가 자전거 하나를 가지고 파리에 입성했을 때 나는 그의 친구들이 그랬듯이 걱정부터 앞섰다. 저자를 말리고 싶었다. 자전거로 어떻게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밟고 또 밟자”라고 외치며 자전거로 유럽횡단을 시작한다. 스물아홉 청춘이 그를 불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오르막길을, 쳐다만 봐도 엄두가 나지 않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었겠는가. 넘어지고 깨지고 다쳐도 그는 말한다. “갈 길이 멀다 하되, 페달 아래 길일 뿐!” 이제 나도 더는 어찌할 재간이 없다. 이 무모한 청춘을 응원하는 수밖에... 그가 달리는 길을 조용히 따라 가보며, 그가 자전거 여행에서 발견하는 인생의 묘미를 함께 즐기는 것 밖에... 그가 길을 가다 생맥주로 목을 축일 때면, 나도 함께 건배를 외치는 수밖에 이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스물아홉. 끝없는 취업난의 길에 허덕일 때로 허덕이다, 내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인지, 직업이 나를 선택하는 것이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그가 나의 모습과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가 찾고 있는 스무 살의 열정이 나 또한 끊임없이 찾고 갈구해야 할 그 어떤 것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자 좀 전부터 그의 자전거 여행을 조용히 따라가고 있던 나는 그가 발견해 내는 자전거와 인생의 공통점들을 같이 나눌 수 있었다. 두 달간의 자전거여행에서도 계획표를 짜고, 수정도 하고 해야 하는데, 하물며 인생의 긴 여정을, 계획표도 짜지 않고 갈 수 있겠냐고 말이다. 그는 “오늘 이만큼 자전거를 타고 가야겠다.” 하여 놓고 가지 못하면 다음날 그 값을 치러야 하는 것도 발견한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면 내일이 더 힘들어지는구나. 간단하지만 뼈저리게 느낄 기회는 별로 없는 그 일은 그는 온 몸으로 체험한다. 달리다 보면 수없이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이번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성과일 것 같다.

 처음엔 그토록 무모해 보이던 그가 어느새 한 뼘 두 뼘 커져있다. 처음에 막막하게 보이는 길이라도 막상 그곳에 가면 달리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쉽지 않은 여행도 일단 저지르고 보면 만만해진다고 한다. 이토록 용기에 가득 찬 그에게 이제 이 세상도 만만해지지 않았을까. 자전거가 고장 나 넘어진 자리에서 자전거에게 응급처치 해주고 점심도 먹는 그의 여유에, 세상은 더 이상 그를 삼키는 파도가 되지 못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동안 그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자신이 갈 길을 자신의 손으로 방향을 정하며, 온전히 그의 마음과 생각대로 목적지를 향해 달린 그가 주인공이 아니었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 같다. 주인공을 따라 그의 자전거(빨간비닐)에 무임승차한 나는 어느 덧 그가 밟는 페달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설사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이라도 할지라도.'어? 이 길이 아니네~'하고 유턴할 수 있는 청춘이니까! 스무 살의 열정을 가슴에 품은 ‘그’니까 말이다.

p49 당신이 아직 젊다면, 일단은 제멋대로 상상해도 좋다. 일단 저질러라.
p121 열정으로 페달을 밟는 한 실패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저질러 볼까나. 자전거를 한번 타 볼까나? 아차, 우리 집 자전거는 바퀴가 바람 빠져서 한쪽에 쳐 박아 놨었지ㅠ 바람 빠진 바퀴 자전거가 내 모습이나 다름없다. 이제 젊음이라는.. 열정이라는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신나게 달려 볼까나? 그런데 난 저자처럼 유럽대륙을 자전거로 달릴 용기는 없다. 다행히 저자도 반드시 자신처럼 자전거를 타고 유럽으로 달려가라는 건 아니라고 한다. 모두의 가슴 속에는 열정의 자전거가 한 대씩은 있다고, 마음 속 자전거를 꺼내라고 한다. 뭐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내 가슴의 열정의 자전거를 꺼내 씽씽 달리는 것! 그것쯤이야~ 신나게 달려야 겠다. 고고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쾌한마녀 2009-06-2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어느멋진날님께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 같아서 보람찬데요???ㅎㅎㅎ

어느멋진날 2009-06-23 10:16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책 추천해 주셔서 고마워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어느멋진날 2009-06-2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월 4주 이주의 다음 블로거뉴스 특종으로 선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ㅡ^

유쾌한마녀 2009-06-27 13:11   좋아요 0 | URL
우와~~ 선정됐구낭 *^^* 축하행 ^^ 내가 더 기분이 좋당ㅎㅎ//

순오기 2009-07-02 10:04   좋아요 0 | URL
블로거뉴스 특종 축하해요.
이젠 베스트 특종으로 오르는 날까지 아자아자!!^^

어느멋진날 2009-07-02 10:18   좋아요 0 | URL
와~ 순오기님이시다^^ 몰래 들어가서 사진이랑 다 봤어요~ㅋㅋ 저도 언제 초청해주셔요^^ ㅋㅋ 베스트 특종까지? 굉장한 알라디너 분들이 많아서,, 바라지도 않아요 ㅎㅎ
 
게이샤의 추억 - Memoirs of a Geish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요즘 날씨 태세를 보아하니 드디어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려나 보다. 이런 날에는 시원한 물로 샤워한 다음, 선풍기 틀어 놓고 cf 속 한가인처럼 아아~하는 소리도 내보고, 수박 한 덩어리 예쁘게 잘라다가(대충 잘라서 수저 하나 들고 퍼 먹는 게 원래의 나지만ㅋ), 소파에 대자로 드리 누워 책을 보든지, TV를 보든지 하면 아주 딱이다. 나는 나의 이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소파에 대자로 누워 TV를 틀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신문을 훑어보는 일인데, 그 과정에서 오늘 오후 3시에 OCN에서 게이샤의 추억을 방송해 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선풍기도 틀어놓고 수박도 잘라놓고 만발(?)의 준비를 하곤 소파에 앉아 게이샤들을 만나러 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들어 봤을 테지만, 게이샤는 일본의 기녀이다. 우리나라의 기생도 그렇지만 게이샤 역시 화려한 꽃을 생각나게 한다. 여자들은 청각적으로 약하고, 남자들은 시각적으로 약하다고 하는 말이 굳이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기녀들은 누구보다 예뻐야 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쁘지 않은 꽃을 탐하는 나비는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인 사유리 역엔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여배우인 장쯔이가, 오키야 최고의 게시야 역인 하츠모모 역엔 공리가 캐스팅 되었다. 이 두 여배우의 아우라 대결이 이 영화의 영상미를 더해주었다고 하면 지나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더없는 볼거리였다. 거기다 화려한 옷과 아름다운 색감, 눈부신 배경들까지 어우러져 영화의 영상미를 한껏 뽐냈다.  







 

  

 

 

 

 

 

 줄거리를 살짝 얘기하자면(스포일러가 아닌 선까지^^) 집이 가난하여 어느 곳으로 팔려가게 된 주인공 치요(사유리)는 팔려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오키야 최고의 게이샤인 하츠모모의 괴롭힘과, 가족인 언니와 생이별을 해야 하는 아픔들을 겪으며 성장해 간다. 아직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어쩌면 너무나 벅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 드라마 속 많은 여주인공들이 그렇듯, 아니 예전부터 읽히던 영웅담에서의 주인공 또한 그렇듯, 은인을 만나게 된다. 노예나 다름없던 신분이 된 그녀에게 “슬픈 얼굴을 하기엔 날씨가 너무 좋지 않니?” 하며 친절을 베푼 회장에게 그녀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때부터 그녀는 줄곧 회장을 만났던 그 날을 기억하며 멋진 게이샤가 되어 그의 앞에 서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하염없는 그리움을 남겨,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자리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에게 회장은 운명이 되어, 훗날 그녀가 하는 말처럼, 그를 처음 본 그 후로 자신이 걷는 한걸음 한걸음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한 길이 된 것이다. 게이샤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하게 된 그녀의 그 길이 쉽지 않을 것임은 어쩌면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 되었다면, 또한 그 사랑이, 선택이 없는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살아갈 목표를 준 것이라면, 그녀의 추억은 슬프지 만은 않은 것이라 생각된다. 한 여자로 태어나 한 남자를 후회 없이 사랑한 것이, 그녀가 추억하는 게이샤의 추억이라면, 그것은 슬프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괜히 슬픈 운명이지만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한 주인공이 부러워진다.ㅠ) 비록 때가 되면 흩날려버리는 벚꽃처럼 아스라 질 꿈이라지만, 후회 없이 많은 향기를 품고 나서 흩날리는 벚꽃은, 흩날린 그때조차 아름답지 않은가. 게이샤는 남자에게 아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의 결실이라 하는 혼인까지는 못하겠지만, 그녀의 사랑이 실패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게이샤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의 삶의 모습이 그려진 영화 같았다. 그녀도 그냥 여자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던 것일까. 아름답지만 슬플 수밖에 없는 그러나 온전히 슬프지만은 않은 게이샤 또한 평범한 여자의 삶의 모습을 온전히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여자로 태어나 겪어야 하는 아픔을 좀 더 아프게 겪는 것뿐이라고, 누구나 겪는 홍역을 좀 더 심하게 치른 것뿐이라고 그렇게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길이라면 말이다. 사유리 파이팅! 어느멋진날도 파이팅이다^^

 

 아, 어느멋진날(그러니까, 본인 말이다ㅋ)의 어느 더운 여름날은 이렇게 감성에 젖어, 벚꽃타령을 하며, 사랑 타령을 하며 보내고 있다. 이 또한 슬프지 만은 않은 일이라 위로해 줄 누군가가 있길 바라며, 게이샤의 추억 리뷰를 마쳐볼까 한다.(주인공의 사랑의 결말은 강력한 스포일러라 패스^^:: )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쾌한마녀 2009-06-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봤어요~^^ 전에 게이샤가 쓴 책을 봤는데 게이샤는 기생이라는 개념보다는 예술인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되어있더라구요 ^^

어느멋진날 2009-06-21 16:05   좋아요 0 | URL
그런 대사도 있었어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예술이라구,,,책으로도 인기가 많았었다고 하던데,, 이거이거 책도 봐봐야 겠어요 ㅎㅎ

2009-06-20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6-2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번에 티비에서 하길래 조금 보다가 말았는데;;;

어느멋진날 2009-06-21 16:04   좋아요 0 | URL
해이님 남자신데도 별로 끌리지 않으셨나봐요? 정말 이쁜 배우들 많이 나오는데 ㅎㅎㅎ

[해이] 2009-06-2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장쯔이 싫어해요 못생겼어요

어느멋진날 2009-06-22 11:14   좋아요 0 | URL
어머! 진짜요?? 해이님 눈이 정말 높으시구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To: 장영희 선생님
 장영희 선생님, 제가 장영희란 꽃을 알게 되고 선생님이 저에게 와 꽃이 되었을 때, 너무나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아름다운 향기만을 남기 신채 먼 곳으로 떠나, 이미 이곳에 계시지 않네요. 장영희 꽃을 너무 늦게 발견한 것 같아 아쉬워요.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께선 잊히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떠난 사람의 믿음 속에서, 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삶과 죽음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아주 가시진 않은 것이라 믿어도 되는 것인지요.

 제가 장영희 꽃을 처음 발견 한 것이, 그 꽃이 남긴 마지막 향기인,「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길가네요. 저는 이 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마냥 아름답고 즐겁게 사는 꽃인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그 꽃은 아주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목발을 짚고 걸어야 했고, 많은 시간을 암 투병을 하며 보내야 했어요. 그러나 그 꽃은 슬퍼 보이지 않네요. 경험을 통해서 절망과 희망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넘어져서 주저앉기 보다는 차라리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기에 꽃은 끝없이 희망을 노래하네요.

 저는 부끄럽게도, 가끔씩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제 운명을 탓하곤 했어요. 크게 힘든 일이 아닌데도 심하게 엄살피고, 선생님 표현대로 마음 속 도깨비가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날 말이에요. 괜히 짜증도 나고, 왜 내게만 이럴까 하는 그런 날이요. 인생은 새옹지마라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그게 좋은 일로 연결 된다는 그런 말은 제게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했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이 말씀은 이상하리만큼 제 맘속으로 비집고 들어왔어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메고 다니는 운명자루가 있고, 그 속에는 저마다 각기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어 있다더구나. 검은 돌은 불운, 흰 돌은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이 돌들을 하나씩 꺼내는 과정이란다." 바로 이 말씀이요. 제 마음속 뿔난 도깨비도 이 말에는 방망이질을 하지 못했어요. 운이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난다면, 가지고 있는 운명자루의 검은 돌들을 먼저 빼낸 것이니 앞으론 흰 돌이 더 많이 나올 거라는 그 말씀이, 사무치게 위로가 될 어떤 날이 분명 있을 것 같아요. 장영희 꽃을 발견한 많은 사람들의 그 어떤 날들이 모이면, 이 책이 오롯이 기적의 책이 되었으면 했던 선생님의 바람은 더없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선생님께선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고 하셨죠. 어쩌면, 운명을 탓하고 절망할 수도 있었던 그런 많은 일들을 선생님께선 기적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얼마나 많은 기적을 기적인 줄 모르고 지나쳤을까요? 인생의 길에 발자국 하나하나 남기며 걷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을요. 기적을 기적인 줄 아셨기에 선생님의 삶은 정말 천형(天刑)이 아닌 천혜(天惠)의 삶이었을 거예요. 천형은커녕 당당히 슈퍼맨의 바통을 이어받은 선생님이시잖아요. 진짜 슈퍼맨이 되기 위해 용감한 싸움을 하신 선생님이시잖아요. 이제 선생님의 그 슈퍼맨 바통을, 장영희 꽃을 본 사람들이 이어받아 날아야 할 차례겠죠? 그런데 선생님, 저도 제가 앞으로 살면서 얼마나 높이 날 수 있을지는 몰라요. 날다가 고꾸라 질까봐 무서울 때도 있을 것 같고, 가야 할 길인데도 지레 겁먹고 돌아가려 할지도 몰라요. 그럴 때면 암 치료를 받고, 중단 했던 월간지에 ‘홀연히’ 나타나 다시 글을 연재하셨던 그 언젠 가처럼, 제 마음에도 그렇게 홀연히 나타나 주세요. 언제까지나 제가 선생님께 이어받은 바통 들고 용감하게 날 수 있도록 그렇게요.

 장영희 선생님, 선생님께선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겁 속에서 하루는, 1년은, 아니 한 사람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데, 그런데도 우리는 왜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내일 봐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냐고 하셨죠.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우리들의 그 몫을 잊지 않고, 용감하게 살아가겠습니다.
떠난 사람을 보내는 아픔을 달래기 위해 하는 그 말을 저도 해봅니다. 
내일 뵈어요, 장영희 선생님.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09-06-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녀가 모두 영문학을 공부했는데 이제 두 분 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네요.

어느멋진날 2009-06-18 00:02   좋아요 0 | URL
그게 너무 아쉬워요. 아, 역시 노이에자이트님은 모르시는게 없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6-18 15:28   좋아요 0 | URL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어느멋진날 2009-06-18 16:34   좋아요 0 | URL
장영희 선생님 책 또한 읽으셨다는 뜻이겠죠? 너무 늦게 알아서 후회가 되요,, 내 생애 단 한번도 곧 읽어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6-18 22:27   좋아요 0 | URL
장영희 번역 중 제일 많이 팔린 게 앤 타일러 <종이시계>일 거에요.이거 정말 재밌어요.가족끼리 지지리 궁상떠는 이야기.

어느멋진날 2009-06-19 10:12   좋아요 0 | URL
종이시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노이에자이트님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09-06-1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뵙자는 말이 따뜻하고 친근하게 들려요.
이 책 참 조용조용한 위로가 되더군요.

어느멋진날 2009-06-19 10:04   좋아요 0 | URL
그렇죠? 내일 뵙자하면 조금은 슬픔이 위로가 될 것 같아요.
읽으면서 킥킥 웃기는 대목도 있고, 눈물도 찔끔 나게 되는 대목도 있고 그랬네요. 희망, 힘을 주는 책이었어요^^

2009-06-19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9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6-19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구해서 읽어봐야 겠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어느멋진날 2009-06-21 13:06   좋아요 0 | URL
감사하긴요^^ 제가 해이님한테 어느 작가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해 주실거잖아요ㅎㅎ

유쾌한마녀 2009-06-20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보고싶었었는데~!!ㅎ

어느멋진날 2009-06-21 13:06   좋아요 0 | URL
한번 읽어보세요^^ 저한테 빌려가셔두 되구용~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