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나강의 다리 - 엘리트문고 87
이보 안드리치 지음 / 신원문화사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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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이 되는 드리나 강은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경계선이 되는 강으로, 소설속의 이야기는 이 강을 끼고 있는 비쉐그라드라는 조그만 마을을 무대로 진행된다. 서양과 동양이 이어지고,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를 믿는 이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곳을 배경으로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선 적은 없지만, 그 역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에도 등장하는 드리나 강에 놓여있는 다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리위에 있는 카피아라는 공간으로, 이곳은 다리 한 가운데 있는 쉼터 같은 공간으로 이 다리 주변에 사는 사람이나,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잠시 쉬면서 커피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이다.

이 다리는 1516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드리나 강이 있는 이 지역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자신의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제국 전체로부터 어린이를 공물로 받는 데브쉬름 제도란 것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제도에 의해 드리나강을 건너 이스탄불로 끌려갔던 아이 중 한명인 베지르 메메드 파샤는 훗날 명장으로 자신의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 때 어린시절 자신이 건너간 그 강위에 다리를 짓게 된다.

처음 다리가 세워질때는 원성도 많았으나, 긴 세월 끝에 다리가 완성되고 난 뒤 그 다리는 비쉐그라드 사람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사람들은 일이 끝나면 다리위의 카피아로 몰려들어 이야기 꽃을 피웠으며, 모든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는 이 카피아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카피아의 모습는 곧 그 시대의 모습이었다. 카피아에 사람들의 이야기꽃이 필때는 호시절이라는 뜻이며, 그 위에 반역자들의 목이 걸리고 병영이 세워지는 시기는 수난의 시절이라는 뜻이었다.

이보 안드리치는 이 카피아를 배경으로 그 위에서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리를 만든 장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자살하게되는 아름다운 여인, 전설의 장군 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자신의 삶을 누렸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 사라져간다.

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다리는, 철도가 놓이고 새로운 경제질서가 자리 잡아감에 따라 점점 쇠락해 간다. 그리고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도 쇠락해 간다.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고 그 땅을 지배하게 되고, 마침내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세르비아인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게 되고, 그 전쟁의 포화속에서 다리 주변에 살던 사람들도 모두 죽거나 떠나고 다리마저 그 생명을 다하게 된다.

드리나 강의 다리와 함께 살았던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지는 그들의 운명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 당시의 역사나 사회상에 대한 무지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긴 했지만, 긴 세월 그들의 삶과 함께 했던 드리나 강처럼 그저 유유히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넉넉한 시간이었다. 다소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띄는 번역과 여기저기 보이는 틀린 맞춤법, 오타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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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신부 2
말리 지음 / 세주문화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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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네가 도깨비를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주겠니?
전설 속에서 이제 그만 나오라고.

소문으로만 듣던 도깨비 신부를 드디어 구입했다.

외가쪽 무당내력을 이어받은 선비. 자신에게 있는 영기를 다루지 못하고 죽어버린 엄마. 떠나버린 아버지. 남해에서 할머니 밑에서 자라나는 선비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것을 볼 수 있기에 보통의 또래 친구들로 부터도 외면당하고 외롭고 예민하게 자라게 된다. 그 영기를 다루는 법을 터득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서울에 있는 아버지에게 오게된다. 선비의 몸속으로 들어오려는 잡귀들과 싸우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발버둥치는 가운데 학교 뒷산의 도깨비 이야기를 듣게 되고 어느날 밤, 집에서 학교 뒷산에 출몰한 도깨비 불을 보게 되는데...

<도깨비 신부>의 이야기는 이제 여기까지 진행이되었다. 선비가 도깨비들과 만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본론일텐데.... 2권이 2003년 4월에 발행되었는데 아직 3권 소식이 없다. 3권은 언제쯤 나올까. 연말에 각종 만화 시상식에 후보로도 오르고 입소문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알려지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많이 읽혀지거나 팔리지는 못한듯 싶다. 그동안 한국만화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부분을 새롭게 다루고 있는 개성 있는 만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지.. ^^

올 한해는 이렇게 개성있는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또 많이 읽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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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나무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161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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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의 이 시집의 주요 테마는 생명과 환경이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는 사람>을 읽고 감동을 받아 쓴 '한 하느님', 에밀리아나 헉슬레이라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구름의 씨앗', 시집의 제목과도 같은 나무를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세상의 나무들', '맑은 물을 얻지 못하면 산다고 할 수 없다'란 소로우의 문장 인용으로 시작하는 '맑은 물' 등 시인은 생명의 숨결과 환경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한편 시를 읽으면서 낯설음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이런 낯설음의 이유중 하나는 소재의 특이성 때문이었다. '구름의 씨앗'에서는 에밀리아나 헉슬레이라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등장하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내 피여'에서는 칼슘과 철분이 전설의 대상이 된다.

시집에서 주의깊게 읽었던 시들은, 페루에 관해 쓴 시들이었다. 마침 신경숙의 <오래전 집을 떠날 때>를 읽고 있던 터이라, 같은 소재를 다룬 시들에 먼저 관심이 갔던 것이다. 마추피추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이미 사라진 한 문명의 흔적들만 남아 있는 그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글을 읽어도 쉽게 상상이 안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 들뿐.. 그렇게 멀다는데 과연 가볼 수 있을까?

'쿠스코의 달'이란 시에서 보여준 보름달의 이미지는 한동안 마추피추의 이미지를 대신할 듯 하다. 시집을 읽고 내린 결론이 '내 인생계획에 '페루여행'을 추가시켜야 겠군..' 이라면 좀 웃긴 걸까. 웃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집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 마추피추에서는 거대한 달이 아래서 떠오른다는 것이었으니까. 페루에 갈때는 꼭 보름을 껴서 가야겠다.

그리고 사실 정리되지 못한 생각의 고리가 있긴 한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능력이나 특성들이 이미 유전자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일 뿐이므로, 형이상학적인 그 어떤 것들은 이제 폐기할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와는 다르지만, 장자나 노자 등은 모든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무위의 도를 이야기한다. 현대사회처럼 환경이 파괴되고 인간성이라 불리우던 것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보면, 일면 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수용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정현종 시인처럼 생명을 노래하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들의 목소리에서도 이런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미 세상은 이 모양을 돌아가고 있는데, '다 헛된 짓이다.'란 말이나 '개인의 마음이 문제이다. 헛된 욕망을 버려라' 라고 한들 세상은 바뀌지 않고 더욱 나빠지는 것만 같은데…..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란 것은 없는 것 같고,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도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문제의 해답은 알지를 못하겠다. 내 삶의 노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헷갈린다.

맑은 물, 공기, 자연과 소통하면서,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 모든 것이 생각처럼 잘 돌아가는 세상은 역시 상상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어차피 이 세계를 이루는 무수한 구성 인자들의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또는 불균형을 이루면서 '완벽하지는' 않게 타협하면서 세상은 돌아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준이 애매하긴 하지만 '되도록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것인가? 아직은 그 답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가장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또 직접 경험하면서 이런 고민들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나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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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전집 - 증보판
백석 지음, 김재용 엮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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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란 시인의 첫느낌은 낯설음이었다. 대학을 오기전까지는 알지도 못하는 시인이었고, 얼마전 우연히 그의 시 중 하나인 여승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시집을 펼치고 시를 읽으려는 순간 느낀 것 또한 이런 낯설음이었다. 시집의 제일 앞머리에 있는 시인 “가즈랑집”에서부터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 때문에 기본적인 독해과정에서조차 애를 먹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세시 풍속들과 전통적인 삶의 모습들은 시의 이해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단 백석이란 시인에 대한 정보와 그의 시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해설에 먼저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시를 읽을 때 내가 가장 경계하는 일이 바로 이것임에도 불구하고.

시인 백석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아무래도 그가 재북 작가라는 점이었다. 해방 이후 북쪽에 적을 두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연구가 미비했다는 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 게다가 내가 멋모르고 백석이라는 이름만 보고 구입한 “백석전집”이란 책은 말 그대로 전집. 그의 시 뿐만 아니라 수필, 소설, 동화시, 평문이나 정론 등 그의 모든 분야의 글이 실려있는 것이었다. 물론 책의 뒷 부분의 평문이나 정론등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대략적으로나마 그의 사상과 작품의 매력을 느껴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남한과는 또다른 모습으로 억압적 사회체제를 구축한 북한에서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방법이었던 시 쓰기를 포기당하고 절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상황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북한 뿐만 아니라 남한 또한 그에게는 대안이 될 수 없었다는 부분에서는 그의 사상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방언과 전통적인 세시풍속 등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이러한 백석 시의 특징 때문에 그의 시에 대해 향토주의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고 한다.

그가 시를 쓰던 그 시대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풍습들과 언어들을 왜 그는 힘들게 시로 형상화시킨 것일까?

우선은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민족적인 것을 살리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근대로 넘어오면서 발생하는 고독과 외로움, 공동체의 파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백석은 전근대적 삶의 조건에서 발견하였으며, 당연하게 그의 시의 뿌리도 그 시대를 닮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삼천포”라는 시의 마지막 연인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란 부분은 이러한 시인의 지향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부분인거 같다. 물질적, 외양적으로 부유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실제로는 꽉차고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로 따사로운 가난이라고 했을 것이다.

백석의 시가 보여주는 현실세계의 모습과 그가 꿈 꾼 세상은, 그저 막연하게 전원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것이 아닌, 그가 살던 시대의 구체적인 문제에서 출발해 확실한 지향점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힘을 가질 수 있으며,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시인의 시 한편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부분으로, 시집 한권을 전체적으로 읽는 작업에서만이 발견할 수 있는 줄거움일 것이다.)

내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이 하루에서 몇 천명이 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고독을 느끼고 외로워한다. 그러한 근대인의 소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찾으려고 했던 백석의 시는 오늘날에도 많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랐던 전근대적 삶의 조걱에 기반한 민중적 공동체가 지금의 현실사회에서 구체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꿈꾸었던 세상에 대한 기본 생각은 충분히 따뜻하고 언제나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백석의 시는 나에게 이제 낯설음의 대상에서 그리워할 수 있는 하나의 세상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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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서재란 걸 만들어 놓고,리뷰를 쓰고, 그리고 페이퍼를 늘어놓고....
이래저래 님들과 만나고 엮이고~
"느림"님을 알게 된 건, 바로 이 리뷰때문이었죠.
백석이 누구인지도, 그런 사람이 살았다는 것도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생각하게 돼 버린 어처구니 없응 상황에서...님의 이 리뷰를 만난 건 정말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오랜만에 읽어 보니 그 느낌이 또 다르군요...^^ 내 사랑 백석입니다~

nrim 2004-04-0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다닐 때 과제로 백석전집을 읽게되고, 감상문으로 위의 글을 써내었지요.. 학교 과제물 내는 것이 늘 그러하듯 제대로 읽고 느껴보지 못하고 쓴다는 것 그 자체에 쫓기어서 썼던 글인데 이 글이 냉열사 님과의 인연의 고리가 되어주었군요..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청목 스테디북스 24
윤동주 지음 / 청목(청목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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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노력해서 이루면 되고, 꿈은 내가 열심히 한다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 별 어려움없이 자랐기에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방해 혹은 고난이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자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현실 앞에 어떻게 굴복할 수 있는지를 하나 둘 깨닫기 시작한 지금, 다시 읽는 윤동주의 시들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윤동주는 일제치하의 그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나아갈 길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방황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떨치고 양심의 명령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놓지 않았다. 버거운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살아가는 시대와 자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서야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더욱더 그의 시들을 한편 한편 읽어나가면서 그렇게 가슴이 떨렸나 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지기도 했다. 먼 훗날 내가 더 나이 들어서 다시 윤동주의 시를 읽게 되었을 때, 아무 감동도 느낄 수 없게 된다면 그의 부끄러움이 그저 젊은날의 치기로 여겨지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그저 현실에 순응하고 꿈을 잃어버린채 고민도 없이 그저 그렇게 하루를 살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결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정말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려고 노력은 하는,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한다. 적어도 부끄러움조차 못 느낀다거나 부끄러움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치는 않으며, 반성하고 고민하고 끝까지 실천하려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럴 수 있기를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다시 한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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