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김종배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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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에 상식이 되어버린 얘기지만, 기사는 절대 공정하지 않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사를 쓰겠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는 역사가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역사가는 수많은 사료 가운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사도 받아쓰기가 아닌 한, 기자와 언론사의 입장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기사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언론사와 기자의 이름을 달고 있는 건, 마치 날것 그대로의 진실인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과거와 달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외신을 접하기 쉬워진 환경 덕에 막강한 힘을 가진 언론사를 견제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과다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분류하기에 어렵기에, 선별된 뉴스만을 보게 된다. 오늘날은 그런 역할을 포털이 대신하고 있다. 실상 나조차 신문사에 직접 들어가기보다, 포털의 뉴스들을 훑는다. 그 편이 내 시간을 절약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러 신문사의 뉴스를 섭렵할 만한 여유는 없다. 그러나 이제 하나의 매체만을 읽기에는, 정보를 바라보는 내 관점이 탐욕스러워졌다. 그렇기에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되어, 늘 기사에 목마르다.

 

 오랫동안 미디어에 종사해온 저자는 기자들과 독자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그는 보수/진보라 분리되는 언론사를 막론하고, 잘못된 기사를 쓰는 관행을 비판한다. 또한 독자들 역시 합리적인 의심을 하여 기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나라가 문맹률은 최저 수준이지만, 고학력자들의 ‘문서 해독 능력’은 매우 낮았다고 한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거나 토론을 하는 습관을 어디에서나 배우지 못하는 환경이, 문서 해독 능력을 낮게 만들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언론에 보도된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뉴스란 우리에게 사교적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소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스의 내용 자체를 사실로 생각하고, 행간의 의미를 추론하는 일은 대개 생략된다. 특히 사생활에 대한 뉴스는 그런 식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이미 뉴스가 퍼진 후에,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뉴스는 저자의 말대로, ‘잘못 먹으면 가시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생선’인 셈이다. 저자는 뉴스를 비판적으로 곱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뉴스가 정치적, 상업적으로 노골화되어가는 지금은 더욱 그런 시선이 필요하다. 부분적 진실과 거짓을 담은 뉴스가 온전한 진실로 호도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저자는 뉴스의 허점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입장의 허점’을 간파하는 능력이다. 즉 자기객관화 능력인 셈이다. 자신의 입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편협한 입장에서 뉴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이성적으로 곱씹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작업은 뉴스를 읽는 과정에서만 행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곧추세우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담금질을 거쳐야만 비로소 나의 신념이라는 게 정립된다.(15)


 저자는 글을 매개로 자신이 세상사에 대해 그릇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조언한다. 자신이 쓰는 글뿐만 아니라 기사나 책을 읽는 것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능동적 읽기가 중요한 건, 고도의 사고과정이기 때문이 아닌가. ‘글은 자신의 오류를 들춰내는 거울이요, 자기 입장의 엄밀성을 재는 잣대다’(16)라는 문장도 마음에 와닿는다.

 

저자는 뉴스는 ‘취사선택된, 구성된, 해석된 현실세계’라 못박는다. 주관적 판단을 하는 것이 어떻게 언론이냐고 따질 필요는 없다. 감시와 비판을 하기 위해서라면, 관점을 통해 구체화된 문제의식을 갖춰야 한다. 관점이 없는, 혹은 관점이 편협한 언론이 문제인 것이다. 그 관점에 동의하느냐는 독자의 선택이지, 기사의 옳고 그름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밝혀야 할 것은, 부적절한 취사 선택과 해석이다. 2008년 4월 2일 중앙일보가 만우절에 내보낸 장난 기사를 그대로 싣는 해프닝을 보면 알 수 있다. 받아쓰기 기사의 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언론은 수사기관이 아니므로 증거 제시에 한계가 있다. 그런데 합리적 의심을 과하게 했을 경우,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경향신문은 2009년 12월 14일에 효성 그룹이 무기명채권 100억을 조성했다고, ‘불법 비자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비자금은 대개 회사 자금을 빼돌리는 것인데, 비실명 채권이 회사 계좌에 입금된 정황을 과도하게 의심한 것이다. 경향신문은 이를 정정보도했다.


한겨레 신문도 학파라치에 대한 기사에서 오보를 냈다. 2010년 1월 25일 ‘학파라치 시행 뒤 개인과외 급증’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우선 학원 폐업 건수를 제시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학파라치가 개인과외라는 풍선효과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가? 더구나 학파라치 제도 자체가 학원과 개인 교습 모두를 포함하는 만큼, 이 기사의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당자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기사도 있었다. 2008년 7월 28일 한국경제신문이 콜트악기라는 기타 제조업체의 억울한 사연을 전했다. 노조의 방해공작으로 회사가 문을 닫았으며, 지부를 옮긴다는 얘기였다. 법원에서 부당 해고를 인정해 전원 복직시키도록 명령했는데, 인과관계가 맞지 않은 얘기였다. 이는 노조의 입장만을 듣고 기사를 쓴 또다른 형태의 받아쓰기였다. 다른 요인들로 인해 회사를 해외로 옮기면서, 이미 직장을 잃은 해고자들에게 이기주의 집단이라는 오명까지 안겨준 셈이다.

 

조선일보는 화물연대파업 시위단이 휘둘렀던 죽봉에 날카로운 죽창이 3% 섞인 것을 ‘계획적인 시위’라고 매도했다. 경찰의 일방적 발표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기에 ‘받아쓰기’한 셈이다. 그러나 받아쓰기나 일반화는 보수 언론만의 관행이 아니다. 경향 신문은 학교운영위 중에 정치인이 1044명이나 되어 영향력을 미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 이 수치는 전체의 0.8%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경향 신문사는 자사의 오보를 스스로 잡아내는 옴부즈맨 칼럼을 운영하고 있다. 정정 기사조차 거의 내지 않는 언론사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생각하면, 훨씬 신뢰가 간다고 볼 수 있다.


 언론사의 힘은 프레임을 만드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 파급력을 갖는다. 혹은 이슈를 만들어 역학관계를 바꾸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 2005년 831 부동산 대책을 언론사들이 ‘세금폭탄’이라는 표현으로 형상화했을 때, 대중의 시선은 따가워졌다. 중앙일보 역시 2011년 7월 12일에 영국이 체벌을 금지하는 ‘노 터치’ 정책을 폐기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영국에서 말하는 ‘적절한 수준의 물리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학생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물리력을 행사하는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마치 회초리 등의 체벌도 가능한 것처럼 호도한 것이다. ‘체벌 허용’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교묘한 기사를 통해 체벌 금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조선일보가 이슈를 만들어내는 방식도 유사하다. 촛불집회 참석자들에 대한 재판에 개입한 신영철 대법원 사건은 법질서를 훼손하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이를 보수와 진보(우리법위원회) 간의 대결으로 프레임을 짜자, 보수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보수 세력이 신영철 대법관에게 힙을 실어주자, 결국 대법원공직자윤리위원회가 주의를 내리고 대법원장이 유감을 표명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된 것이다. 사건의 역학구도를 바꿀 정도의 파급력을 언론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이슈가 형성되는 요인을 저자는 ‘사건의 성격, 당사자들의 역학 관계, 국민 여론’으로 보고 있다. 사건이 국민의 삶에 맞닿아 있고(유명환 장관 딸 특채 사건), 국민이 관심이 집중될 때(김종익 씨 민간인 사찰) 이슈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 삶과 동떨어진 뉴스일수록 화제가 되기 어렵다. 같은 비리 사건도 기업 간에 일어나는 일은 큰 화제가 되지 않으며,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에서 불법 사찰을 하던 기무사 요원에 대해서는 대중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무사 요원이 사찰한 것이 정치인이었고, 파업 현장은 국민들과는 ‘먼’ 장소이기 때문이다.

 

책의 3장은 실질적인 실전 기사 쓰기에 관한 것이어서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좀 더 많은 신문 기사가 예로 나왔으면 훨씬 좋았으리란 아쉬움이 남는다. 기사를 무턱대고 믿는 습관은, 편한 관성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의 말을 일일이 의심하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가. 그러나 기사 역시 오류와 거짓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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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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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이 책은,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 빌려왔다. 보다 쉬운 욕망의 삼각형의 지도를 보여준다. `다시쓰기`의 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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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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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깊게 본,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내게 '고전'은 두 가지 의미의 저서다. 첫째,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이다. 물론 대부분의 책이 저자와 독자와의 일대일 강의가 아닌 만큼, 재해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은 드물게 발견된다. 현상을 심층적으로 전달하려다 보니 필연적으로 생기는 모호함이다. 인간의 정신 그 자체가 모순투성이이므로 해석의 다양성이 오히려 적절하다. 특히 도덕이나 심리의 영역에서 깊이를 보여주는 저서는,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의문을 더 키울 뿐이다. 둘째, 다시 읽었을 때 의미가 살아나는 책이다. 살면서 다시 읽는 책은 매우 희귀하다. 다시 읽을 때 새로운 점을 발견한다면, 그 작품은 진귀한 보물이다. 다행히도, 그런 보물은 찾기가 어려워서 그 보물을 찾은 기쁨은 더 크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내게 '고전'이다. 수없이 다양한 '다른' 이야기가 떠오르고, 다시 읽을 때 더 생생해진다. 물론 즐겁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풍경이나 인물 묘사가 더없이 길고 세세하고(물론 그 묘사가 작품의 주제나 전개에 필연적인 경우는 제외하고), 인물들의 욕망은 단선적이고, 작가의 서술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거나 등장인물이 저간의 이야기를 통째로 읽어주는 부분은 투박하다. 너무 뚜렷한 상징들은 그래서 오히려 단점으로 보일 정도다. 현대의 독자로서 파악한 이런 낡은 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더없이 생생하다. 무엇보다 감동적이다. 점점 소설을 읽고 울거나 웃는 일이 드물어진다. 물론 소설이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고, 그래야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동과 전율은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다.

이 작품의 에피소드를 간명하게 연결하는 키워드는 사실 '우연' 혹은 '운명'이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시작해 막장드라마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그 요소다. 작년에 충격적으로 보았던 '그을린 사랑'도, 그러한 비극을 다룬 영화다. 이 작품은 근친 상간이나 출생의 비밀을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 간의 관계도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가깝게 닿아 있다. 우리는 그런 일-우연한 만남이나 기시감, 일치의 순간-을 꽤 많이 겪는 편이지만, 이야기에서 그런 요소가 나올 때 실망하기 쉽다. 그건 손쉬운 전개 방식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는 이제 반전 축에도 들지 못한다. 수많은 반전에 단련되어 고도로 영리해진(?) 현대인들에게 웬만한 반전은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반전을 알아맞힌 것이 대단한 능력이라고 과시하는(?) 무리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반전들은 우연적 요소에 기대어 효과가 떨어진다. 하지만 작가가 앞부분에 깔아놓은 수많은 복선을 다시 읽게 되면 묘미가 생긴다. 자연물의 변화, 화자의 예언, 인물의 대사, 인물의 행동이 나중에 일어날 일들의 예고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다시 읽게 된 '두 도시 이야기'는 작가가 빈틈없이 직조한 촘촘한 퍼즐이었다. 다시 읽어야 할, 더없이 좋은 구실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한편 '고통스러운 우연'은 인간을 실험한다. 우연이 단지 사람들의 증오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개체로 쓰일 때, 그건 수준낮은 장치다. 이 작품에서 그 우연은, 혹은 훌륭한 비극에서의 우연은, 인간의 위대한 선택을 보여주는 장치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자신의 밑바닥까지를 드러낸다는 건 서글픈 진실이다. 우리는 대개 그러한 보통의 인간이다. 그러나 그 진실을 넘어서려는 소수의 '예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삶을 망치고 고통을 배가시킨 원수를 용서한다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다. 증오는 가깝고 법은 멀고 도덕은 헛소리다. 희생은 더욱 불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용서와 희생이라는 고전적인 테마가, 인물들의 행동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13)

소설의 '두 도시'는 프랑스 혁명 직전과 직후의 런던과 파리다. 이 유명한 시작 부분은 소설의 주제를 관통한다. 미덕과 악덕, 사랑과 증오, 풍요와 가난이 잔인하게 뒤섞인 이 시기에 더욱 돋보이는 건 인간의 선택이다. 흙바닥에 떨어진 포도주를 머릿수건에 적셔 아이에게 짜먹이는 엄마와 초콜릿을 먹기 위해 다섯 명의 시종의 시중을 받는 높으신 나리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포도주를 받아먹는 장면. 소설에서 지극히 충격적이었다.

악인인 후작은 "나는 내가 살아온 이 체제를 영속화시키며 죽어갈 것이다."(179)라고 선언한다. 수많은 죄없는 이가 바스티유를 포함한 감옥에 갇혀 기약없이 살았고, 가난한 이들은 늘 그렇듯이 그들의 힘으로만 역경을 헤쳐내야 했다. 이 소설은 그런 혁명의 시기를 살아온 한 가족의 이야기다.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에서는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 특히 삼각관계라고 강조했다. 루시 마네트와 찰스 다네이, 시드니 칼튼의 사랑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사실 결말을 보면 주제가 사랑이라는 설명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랑보다는 인간의 탐구에, 주인공보다는 다양한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지루하지만 백 페이지만 참고 넘기다보면 디킨스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어떤 정보도 없이 책을 읽는 편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바스티유에서 인생을 빼앗긴 채 살아온 마네트 박사의 사연과 찰스와의 관계는 어쩌면 매우 상투적이지만, 그렇기에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묘미는 아슬아슬하다. 

한편 칼을 쥐면 휘두른다는 점에서, 인간은 대개 비슷하다. 혁명 이후 대중이 그들이 그토록 증오했던 귀족들과 가까워졌다는 것은 끔찍한 변화다. 작가는 인간의 그러한 면모를, 대중들의 모습을 통해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일어날 끔찍한 일이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만큼 매력도 줄어들 것이다. 잔인하게 토막난 운명에 처한 몸뚱이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도살되고 갈기갈기 찢길 운명에 처한 유한한 존재에 사람들의 감각이 굴복한 것이다. 그 뿌리에 있는 호기심은 실로 '악마적'인 것이었다.(93)

귀족들을 처형하는 대중의 분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새로운 압제자들이 보복적인 도구 사용으로 사멸'한다는 마지막 전언이 처음과 통한다. 기요틴은 '말끔하게 면도하는 면도날'이라는 유쾌한 별명으로 불렸다. 사람들은 피에 젖은 몸으로 카르마뇰이란 춤을 추었다. 피의 축제는 그동안 귀족들이 저질러온 악덕에 뒤지지 않는다. 


"폭력에는 중단도, 동정도, 평화도 없었으며 약해진 마음으로 휴식하는 기간도 없고, 일정 시간만 휘두르는 일도 없었다. 시간이 처음 생겼을 때처럼 낮과 밤이 정기적으로 순환할 뿐이었다.(392)" 또한 그들은 귀족이 그들에게 베풀던 아량도, 죄수에게 베푸는 유사점을 보인다."청중이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고 싶었고, 자기들의 변덕 혹은 바람직한 충동을 흐뭇하게 여겼으며, 자신들이 마구 내뱉었던 분노에 찬 잔인한 말을 상쇄하려다 보니 펼쳐진 것이었다.(411)"

디킨스는 그러나 무능하고 악랄한 귀족이 혁명의 원인이었다는 점은 잊지 않고 기록한다."애초에 모든 법과 형식, 정부의 행사를 무분별하게 남용하지 않았으면 이런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자멸로 일어난 혁명의 복수심은 그 모든 것을 바람에 날려버렸다.(454)"

비극은 꼬리를 물고 되풀이된다. 복수의 원한을 끊을 수 있는 건 용서 뿐이다. 비극에 비해 희생은 너무 무력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한 인물의 남다른 선택이 더 빛난다. 우리는 누구나 별같이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별은 너무 높다. 대개 우리는 별이 바라보는 위치에서 살 수 있을 뿐이다.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한 죄수가 '숭고한 예언자' 같은 얼굴을 한 이유는, 그가 생의 어둠을 견디다 마침내 가장 뚜렷한 한 점의 빛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강렬하게, 열정적으로 사는 건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 고통은 숭고하면서 동시에 쾌락적이다. 그가 살면서 가장 가치있는 일을 한 순간, 그는 별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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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회장의 그림창고
이은 지음 / 고즈넉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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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의 그림창고’는 풍자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워낙 어렵기도 하고, 드물게 쓰이는 장르라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라는 관습을 깨고 ‘이 소설엔 의외로 사실인 게 더 많다’고 호언하며 시작하는 서문이 몹시 흥미로웠다. 작가는 미대 출신인 경력을 십분 이용해 미술계의 한 ‘현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미술계와 정치계의 만남이 어떠한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내는가? ‘수표 바꿔치기, 대포통장, 차명계좌, 양도성 예금증서, 박스떼기, 불법 해외 부동산 매입, 유령회사 설립’ 등으로도 꼬리가 밟히던 자금 세탁의 새로운 창고, 바로 고가의 미술품 구입이다. 거기다 10대 기업의 총매출이 국내총생산의 80%를 차지하는 기형적인 경제 구조에서 재벌의 비자금 세탁은 흥미로운 소재다. 거기다 미술품 구입으로 재벌 부인들은 ‘계급적 차원으로 품격을 부상’한다. 미술품은 ‘속물 이미지를 고상하게 바꿔주는 정신적 명품’이며 ‘최종적인 코팅의 산물’인 것이다. 

10대 기업 중 하나의 총수인 박 회장은 다음 대권에 유력한 후보인 한민족당 총수인 서민왕에게 ‘불타는 꽃밭’이란 그림을 뇌물로 주기로 한다. 그림은 은밀한 뇌물로도 적절한 상품인 셈이다. 박 회장의 후처나 다름없는 미술관장 이사벨은 그 그림과 편지를 총수에게 가져가는 길에 차치기를 당한다. 남자친구와 남동생이 공모한 도둑질로 인해 여주인공 소미는 위기에 처한다. 인생에게 늘 약자였던 소미는 차라리 박 회장을 협박하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불타는 꽃밭’이 이동하는 중에 그림을 훔치려던 ‘피카소파’ 역시 난관에 부딪힌다. 이야기는 소미와 박 회장, 박 회장이 고용한 건달들과 피카소파 간의 좌충우돌하는 에피소드로 속도감 있게 재현된다. 경매장 에피소드나 마지막 장면의 활극 등도 작가의 서사적 능력을 보여준다.

한편 이자벨의 예술관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자벨에게 예술은 자신의 인격을 높이는 도구이며, 자산을 불리는 수단이다. 그녀는 철저히 예술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예술은 현실이다. 예술만큼 현실적인 것이 없다. 돈과 권력과 항상 가깝다. 후원자, 예술의 기호는 후원자들이 쥐락펴락했다. 예술가의 재능은 후원가의 환심을 사는 천재적인 정치성과도 닿아 있다. 예술은 순수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살아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는 현실적이지 못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예술에 대한 더한 고찰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박 회장 부인의 입장을 참고할 만하다.

하지만 이 소설을 지인에게 선뜻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소위 문장 페티시즘(?)에 경도된 소설이 서사나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주지 못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문장을 읽는 맛은 소설을 읽는 기쁨 중 하나다. 문장은 이야기 속에 녹아 이야기와 일체가 되어야 할뿐 아니라 동시에 아름다워야 한다. 적절한 단어 사용과 독창적인 은유,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거나 사건을 전개하는 필수적인 대화나 행동, 사건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관점 등이 소설의 부분이자 전체다. 이 소설은 마치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둔 것처럼 서사 위주로 경쾌하게 진행되었지만, 문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 비어의 남발이나 거칠고 세태적인 표현이 곧 풍자가 되는 건 아니다. 고급한 풍자는 오히려 숨기고 가리면서 세상을 비웃지 않던가. 직설적인 화법으로 쏘아붙이는 건, 시사 고발프로그램이 아닌 창작품에서는 미덕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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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그 1 펭귄클래식 116
솔 벨로우 지음, 이태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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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그’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순차적으로 사건이 전개되긴 하지만 자유자재로 과거 회상과 자유 연상이 끼어든다. 무엇보다 그가 끊임없이 써대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편지’가 가독을 방해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야, 왜 허조그가 그토록 ‘지독한 글쓰기’를 해야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정말 내가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다’(9)라고 주인공 허조그는 첫 운을 뗀다. 그는 ‘신문사와 저명인사, 친구와 친척과 이미 죽은 사람들, 자신의 초라한 시신에게, 그리고 마침내는 고인이 된 위인들에게까지’(9) 이상야릇한 편지를 끊임없이 써댔다. 이 ‘편지’는 허조그의 심리 상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입장과 철학자와의 토론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사실상 편지가 아니라 독백에 가까운, 일그러진 파편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는 답장을 받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적는 글에 어떤 질서도 양식도 없었다. 단편적인 말-무의미한 횡설수설, 감탄사, 억지로 갖다 붙인 격언과 인용문,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쓰시던 이디시어……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죽음-죽다-다시 살다-다시 죽다-삶. 사람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 어리석은 자를 닮지 않으려면 어리석은 자에게 답을 하지 말라.’(12)


두 권짜리 소설에서 편지가 거의 반 정도의 분량을 차지한다. 물론 뒤로 갈수록 편지는 더 장황해지고 논지는 복잡해진다. 그가 이토록 엄청난 편지를 쏟아낸 까닭은 무엇인가? 편지를 씀으로써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내가 보기에 답은 이렇다. 그는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다. 편지를 쓰는 것이야말로 그가 끔찍한 절망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식이자 죽지 않기 위한 항거인 것이다. 


허조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한 전형에 들어갈 수도 있다. ‘자기도취적, 마조히스트, 시대착오적인 성격, 임상적으로는 대체로 우울증이나 중증은 아니’(13)라는 간단한 수사는 그를 제대로 보여주기엔 역부족이다. 많은 남자들-특히 허조그가 대표하는 중산층 백인 남자-이 이러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정상적이고 모호한 성격이지만, 가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통찰력을 보인다. 그의 근육은 여전히 건재하고, 피부도 미끈하다. 그러나 그는 늙어가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심히 의기소침해진다. 그는 학자로서 꽤 인정받고 촉망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연구비만 받아낸 논문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려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더구나 그는 재정적으로 파산 상태이며, 그 원인 제공을 한 여자가 오히려 지금 그를 증오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농락당하고, 돈을 빼앗기고, 빚을 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아내와 친구, 의사에게 배신당했는지를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 했다’(247)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것이 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말 대신 ‘편지’를 쓴다.


그가 맞딱뜨린 ‘배신과 기만’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한 인간을 통째로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매들린이 그에게 이혼을 통보하면서 그의 자아를 무너뜨렸다. 더구나 그녀가 사랑에 빠진 건 그와 가장 친한 데다 종종 매들린과의 일을 상담했고 거취까지 마련해주었던 밸런타인이었다. 그의 정신과 의사마저 매들린에게 빠져 그 일을 부추겼다. 그 의사에게 허조그는 조롱의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때때로 그들은 남의 잠자리에도 드나듭니다. 당신은 어떤 남자와 철학적 대화를 나누고 그 부인과는 잠자리를 함께 하지요. 또 불쌍한 남편의 눈을 바라보고 위로하며 그의 일생을 다시 정리해주지요. 당신은 몇 해 동안의 예산까지 세워주고 그의 딸마저도 빼앗지요.’(106) 


그는 이미 한 번의 결혼을 끝냈다. 엄격하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데이지를 떠나 화려하고 열정적인 매들린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매들린의 외도에 그토록 큰 상처를 받은 허조그가 수시로 혼외정사를 벌였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런 종류의 모순은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허조그는 매들린을 위해 교수직을 버리고 유산 2만 달러로 지방의 고택을 산다. 시골에서 논문을 완성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아내는 이내 시골 생활에 대한 욕구 불만에 시달린다. ‘자신이 너무 젊고 지적이며 사교적’(17)이라고 생각하는 아내는 자신의 몸을 왜 당신에게 모두 낭비해야 하느냐고 일갈하기도 한다. 결국 시카고로 이사를 가지만, 거기서 아내는 이혼을 요구한다.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한 적 없다고 고백하는 건 참 고통스럽네요. 앞으로도 당신을 사랑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이 결혼 생활을 계속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우리 결혼이 실패한 걸 인정하는 건 나로서도 참기 어려운 굴욕이란 걸 알아줘요. 나도 이 결혼에 모든 것을 걸었으니까요. 아주 타격이 커요.”(21) 


 그는 ‘오쟁이 진 남자’였고,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린 후에도 끝내 스스로 그걸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경악할 만한 사실은 허조그에게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심연은 얄팍한 웅덩이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배신당한 인간이 내세우는 온갖 철학적 발언은, 고통스러운 진심을 숨기고 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조와, 어떻게 감히 나를 배신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갈마들며 마음을 괴롭힌다. 지난 날을 하나씩 돌아보며, 기억의 단면들을 뼈아프게 회상한다. 그러나 온갖 인간의 부도덕에 대해 지탄하는 허조그가 초반에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은 거의 하지 않는다. 무언가 어긋났고, 그것이 서로의 문제인 건 인식한다. 그러나 매들린이 지적한 ‘폭군, 정신병자, 이기적이고 전제적인 남자’라는 발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인 애인 소노가 한 말이기도 했지만, 매들린은 ‘눈이 너무 차가운 여자’였고, 허영에 가득찬 삶을 추구하는 사이코패스라고 매도한다. ‘예쁘고 영리한 데다 정신도 온전치 못하고 종교적(87)’인 여자라는 수사도 덧붙인다. 매들린이 불 같은 성미는 여러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그녀는 허조그가 사립탐정을 고용했다며 펄펄 뛴 적이 있었다. 사치를 감당하기 어려워 물건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의 균열은 갈수록 커졌고, 잠자리도 원만하지 않았다. 허조그는 “어떤 남자도 자기를 원하지 않는 여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67)라고 변명하기도 한다. 매들린은 결국 그에게 의문부호였다.


‘여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영원히 모를 것입니다 여자들이 원하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들은 녹색 샐러드를 먹고 사람 피를 마십니다.’(70)


많은 사람이 그에게 안정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유럽여행을 떠나 돌아왔지만,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매들린은 그가 자신과 아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했다. 그는 매들린에 대해 나쁘게 말해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과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다. 어떠한 위로의 말도 배신으로 흘리는 피를 멈출 수는 없다. 허조그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형과 누나, 사촌들에게도 사랑받았고, 여자들도 그를 사랑했다. 더구나 비참한 처지가 된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매력적인 라모나도 있었다. 


“당신은 여자와 다투면서 지내야,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에요.”(249)


라모나의 통찰력은 훌륭하다. 허조그는 라모나가 사랑스러운 여성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녀를 피하려 한다. 자신도 신산한 삶을 살아온 라모나가 그에게 끊임없이 지혜를 퍼부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정을 거절하지 않는다면서, 그녀의 말을 듣기 싫어한다. 라모나는 그의 장점을 알아보는 사람, 그의 살에서 나는 ‘향기’를 맡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그는 다정하고 현명하며 사랑스러운 마초인 것이다. 허조그는 단지 위로를 받고 싶어 찾아왔으면서 보고 싶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라모나에게 매들린과 밸런타인을 험담하고, 그녀는 그 이야기를 너그럽게 듣는다. 그는 라모나와 함께 하는 시간에도 계속 머릿속에서 편지를 써댄다. 그러나 그 날 밤, 매들린과 달리 그가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던 밤을 보낸 후, 그는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중요한 발견을 깨닫지 못한 채 허조그는 다시 라모나에게서 떠난다.


그는 죽은 아버지의 집에서 권총과 달러를 챙겨 나온다. 그러다 우연히 재판을 목격하게 된다. 매춘을 한 소년이 판사에게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본다.


‘소년은 나쁜 현실에는 나쁜 환상으로 저항하며, 판사에게 암묵적으로 “당신 권위나 나의 타락이나 따지고보면 마찬가지잖아”라고 주장하고 있었다.’(2권 42)


한편, 세 살짜리 아이를 죽인 엄마의 재판에서 충격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딸인 준을 떠올린다. ‘어떤 사람들은 살인하고 운다. 어떤 사람들은 그조차도 하지 않는다.’(2권 57) 두 범죄자(?)의 손에서 준을 구해야겠다는 계획으로 그는 의욕이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권총을 들고 간 매들린의 집에서, 그는 준이 밸런타인과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다. 세 사람의 보금자리에, 방해자는 오히려 총을 들고 덤불에 숨어 있는 자신이었다.

 

‘단지 준이 허조그가 사람들을 닮았다고 그 애가 둘보다 나하고 더 가깝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애의 삶에 아무런 역할을 못 해낸다면 어떻게 닮았다고 할 수 있을까?(2권 82)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그는 준을 포기하지 못한다. 밸런타인의 아내에게 가서 간통죄로 그를 고소하자고 제안한다. 현실을 부정하는 피비는, 남편은 언제나 밤에 돌아온다면서 허조그의 제안을 묵살한다. 친구의 집에서 허조그는 복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후 딸과 조우한 허조그는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경미한 교통사고를 내서 조사를 받게 된다. 탄환이 든 권총을 소지한 문제로 경찰과 대립한다. 형의 도움으로 간신히 유치장에서 풀려나온 허조그는 고택으로 돌아간다. 오래 방치된 그 고택에서 자연의 세례를 받는다. 허조그의 정신을 지배하던 비정한 니힐리즘이 사라지고,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는 처음으로 안락한 기분에 젖는다. 그는 드디어 라모나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한다. 그는 편지쓰기를 그만두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지금 이 순간 누구에게도 전할 말이 없다. 단 한 마디도 없다.’(2권 208)


참으로 고통스러운 화해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소설의 첫 부분과 대칭을 이루는 이 지점에서야, 허조그는 일그러진 자신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긴 이야기 속에서 작가가 쏟아낸 철학적 담론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는 도시의 빈민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아름다운 빈곤이, 도덕적인 빈곤이 미국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체제 전복적일 것이다. 빈곤은 추잡해야 한다.’(78) 그리고 그 빈곤을 지탱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어떤 공동체든 간에 타인에게 대단히 위험한 계급의 인간들이 존재합니다. 범죄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응징과 형벌 제도가 있습니다. 저는 지도자를 말하는 겁니다. 항상 가장 위험한 인물들은 권력을 탐하는 자들입니다.’(84)


한편으로 인간답게 사는 방식에 대해서도 숙고한다. 그는 그레셤의 법칙을 변형하여 ‘공적 생활이 사적생활을 구축한다’(255)고 쓴다. 사회가 정치적이 될수록 개인의 개성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생활의 영역은 넓어졌지만 오히려 단조로워진다. 그래서 그는 ‘영감을 받은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를 알고, 자유의 몸이 되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존재를 완성한다는 것, 맑은 의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없이는 제 아무리 죽음을 피해 달아나고 외면해도 영혼은 이미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259)’


결국 긴 여정의 끝에서 그가 선택한 건, 복수가 아닌 관용, 파괴가 아닌 창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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