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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생은 너무 짧다. 매 순간 죽음으로 향해 가는 인간에게 시간은 영원한 화수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어떤 것으로 채우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삶은 일종의 예술 작품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 생활, 잠을 위한 시간은 배제해야 한다. 그건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니까. 그 다음에 남는 시간은 마치 빈 캔버스나 종이 같다. 창조, 혹은 향유로 채워질 공백. 세상에 즐길 거리는 너무 많다. 예술이 대중의 손에 넘어왔다는 건 곧 자본의 품에 안겼다는 뜻이다. 우리는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적당한 대가를 치르면 어떤 예술이든 향유할 수 있다. 심지어 적당한 수신료만 지불하면, 무한대의 오락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TV를 켜는 것만으로도 공짜 오락거리는 넘쳐난다. 그러나 포탈사이트가 제공하고 TV 채널이 제공하는 오락은 수동적인 것이다. 우리는 남의 편집된 취향을, 그것도 일정한 분류도 없이 마구잡이로 취합한 취향을 접하는 셈이다. 너무 많은 정보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효용이 별로 없다. 일정한 방향이 없는 관람과 서핑은 무취향의 인간을 양산한다. 그러나 ‘선택하고 집중하는’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건 적극적인 행동이다. 독서 역시 매우 능동적인 취미 생활이다.

그러나 출판사의 상찬은 갈수록 화려해지고, 책의 숫자는 늘어난다. 책도 상품이므로 끊임없이 생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정보가 많은 시대일수록 선별작업이 필요하다. 그걸 대신해주는 사람들이 일련의 자발적인 향유자들이다. 그들이 만든 커뮤니티에 있는 글들은 관심사를 다루므로 정교하고 세심한 경우가 많다.(엔하위키 미러가 그런 곳이라고 본다) 인터넷 서점도 일정 수준의 리뷰를 통해 정보를 선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너무 의지해서도 안 된다. 결국, 타인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망한 작품에 대해 ‘굳이’ 리뷰를 남기려는 독자의 수는 찬양하는 독자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뷰가 개수도 결코 믿을 것이 못 된다. 유명세와 취향이 일치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결국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직접 그 책을 찾아보는 발품을 파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는 길이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정보나 애독자의 리뷰만 보고 구매한 뒤 한탄한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아니, 오히려 심하게 실망한 경우에는 책의 처분에 망설임이 없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경우다. 일정 수준은 구가하지만 내 취향이라고는 딱 말할 수 없는 작품. 작가의 노력은 인정하지만, 상찬의 수준을 이해할 수 없는 작품. 더구나 그 작품을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리뷰를 해야 할 때의 난감함. 취향을 심하게 타는 편협한 독서가인 나에게는, 신간평가단이라는 일이 쉬운 게 아니었던 게다. 작가의 최신작이라고 해서 막연히 그 작가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간주할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구나 커리어 하이가 있는 법이니까. 내가 보기엔 미미 여사의 ‘모방범’이 그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그랬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스마일 카다레의 ‘죽은 군대의 장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는 오히려 데뷔작이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물론 전적으로 나의 취향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숭이와 게의 전쟁’이 내겐 난감한 소설이다. 일단 출판사 소개를 읽고 내가 추천한 책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출판사에서는 ‘정의가 무시당하는 이 뒤틀린 세상을 향한 보통 사람들의 통쾌한 복수극이 시작된다’는 문장으로 소설을 소개했다. 교활한 원숭이를 게들이 골탕먹이는 설화에서 따왔다는 제목도 충분히 그러한 소설의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제목이었다. 그러나 복수극에 제대로 완성되려면, 복수의 내용과 주체, 대상이 확실해야 하는 법이다. 그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통쾌한 복수는 할 수가 없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원숭이’와 ‘게’의 위치부터가 모호하다. 남을 괴롭히는 자가 원숭이인가? 아니면 사회적 강자가 원숭이인가? 사회적 약자가 게인가? 그렇다면 남을 괴롭히는 사회적 약자나, 선량한 강자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먼저 원숭이와 게를 대변하는 사람의 설정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이 소설의 치명적 약점이다. 

먼저 미나토의 가족에게 사기를 친 에노모토 요스케가 원숭이인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복수는, 미나토가 이룬 셈이 된다. 그를 차로 쳐서 죽였지만 살인이 아니라 사고로 처리되었고, 처벌도 형이 대신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일정 수준의 사회적 인망과 부를 얻었고, 소노 요코라는 유능한 비서까지 데리고 있다. 그가 약자인 것인가? 이런 식으로 시작부터 어긋난다. ‘정리된 플롯도 없이 '무모하게' 시작되었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작가 특유의 섬세한 디테일을 뿜어내는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실은 정리된 플롯이 없기에 한 초점으로 모이지 않고 순발력으로만 이야기가 이끌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도쿠다가 원숭이인가? 그가 지방에서 계속 당선되며 아랫사람에게 뇌물수술죄를 뒤집어 씌운 게 잘못이라면, 미나토의 결정도 비슷한 도덕적 혐의를 지게 된다. 미나토의 사고는 엄연한 ‘살인’이다. 살인에는 꼭 엄벌이 따라야 한다는 현실 세계의 도덕률을 적용하려는 게 아니다.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하려면, 그가 꼭 그래야 할 결정적인 이유와 그가 견뎌야 할 업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미나토는 중간에 준페이에게 협박당하고 유코에게 끌려다니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인간적인 결단이나 고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의 정의는, 독자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우발적인 범죄일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기본적인 원숭이 VS 게 구도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중간에 요스케의 차에 ‘일본 정계를 흔들게 할 정도의 비밀문서’ 같은 게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기에, 당연히 그 문서와 관련해서 진짜 ‘원숭이’가 등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문서는 그냥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 문서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것이 진짜 작가의 역량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구성해놓지 않고, 그걸 준페이의 당선으로 적당히 타협하려고 든다니, 플롯이 엉성해질 수밖에 없다.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개성이 느껴지는 건 소노 요코와 ‘란’의 마담인 미키다. 그들은 남성들을 압도하며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한다. 물론 소노 요코의 정의 역시 그저 ‘자신의 입맛대로 설정된 정의’다. 그녀는 자신의 고용인인 미나토의 범죄에 대해 별다른 자각이 없다. 그저 그건 입막음해야 할 일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언젠가 유명 정치인을 키워낸다는 점쟁이의 예언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마침 그 기회가 다가왔을 때, 그걸 붙잡는다. 중요한 건 기회가 왔기 때문이지, 그녀가 매력적인 인물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준페이는 술집에서 일하는 바텐더이고, 사는 걸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인물로 보인다. 그는 미나토의 사고를 목격하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호스티스 도모키와 함께 미나토를 협박하자고 제안한다. 도모키 역시 루저로서, 인생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아내 미쓰키가 무작정 도쿄로 상경했을 때도 그저 부담스러워할 뿐이다. 미쓰키를 도와주고 아이를 돌봐준 건 란의 마담인 미키지, 아버지인 그가 아니다. 물론 ‘루저’ 캐릭터가 꼭 소설에서 무얼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매력적인 어떤 면은 보여줘야 한다. 이들은 상황이 만들어놓은 대로 그저 따라다니는 허수아비다. 요코가 시키는 대로 지역 공천에 나가는 준페이, 우연히 유명해져서 졸지에 아내의 매니저 역할을 한 도모키에게서 열정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소설의 어떤 인물에게도 별로 공감하지 못했기에, 준페이가 당선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카피에 걸맞지 않은, 그저 우연이 빚어낸 성공으로 보였을 따름이다.

다음 신간평가단 도서를 추천할 때는 좀 더 세심하게 책을 살펴야겠다. 엉성한 플롯이나 순간적인 착상보다, 보다 꿰맞춰진 제대로 된 이야기를 읽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의 출판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요시다 슈이치의 새 책에 기대를 한 미지의 독자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원래 당신이 그의 애독자라면 모를까, 연재 소설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안타까운 소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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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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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무라카미 류의 ‘노래하는 고래’라는 소설을 읽었다. 27세기를 배경으로 한 야심한 SF 장편이었다. 노화를 방지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상류층 사람들은 죽지 않고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그대로 간직하며 사는 디스토피아 얘기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독자 입장에서 매우 고통스러웠다. 새로운 기술이나 과학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작가는 꼼꼼하게 그걸 설명했다. 기술적 상상력에 대한 과시인지, 소설적 장치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지옥설계도를 읽을 때 느낌도 비슷했다. 과학이나 게임에 대한 지식이 소설을 읽을 때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그 기술을 소설적 장치로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소설의 흐름을 끊으면서 필요한 정보를 하나하나 풀어 설명해준다면, 독자는 이야기에서 급속도로 빠져나온다. 이 소설은 이야기보다 지식을 풀어내는 데에 더 열심인 것처럼 보였다. 다양한 등장인물들도 서로 끈적끈적하게 얽히지 않고 그저 물 위에 뜬 기름들처럼 둥둥 떠다녔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심인물이 이끌어나가는 구성은 독자가 따라가기 편하다. 꼭 주인공이 하나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해서 각자의 이야기를 조금씩만 들려주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엑스트라처럼 느껴졌다. 즉 인물들 중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범인과 다른 ‘강화인간’이어서인가?


물론 지옥설계도의 구성이나 착상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서구 SF작가 소설에 비견해서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기술이나 과학에 대한 상상력이 놀라웠다. 미국과 중국이 인간 이상의 인간인 강화인간을 만들었다. 아무나 강화인간이 될 수는 없다. 약물과 훈련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맞는다. 각 거대정부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강화인간을 써먹으려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영리해진 그들이 보통인간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순진했다. 그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의 어떤 약점을 잡고 있지 않는 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극대화된 강화인간들을 통제할 수 없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어떤 인간적 무기도 그리 효용이 없다. 그들은 고통에서도 해방된 존재들이다. 뇌 기능 강화로 질병과 신체장애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의 호르몬 분비나 신체대사를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미래 인간일 것이었다.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건 총탄보다는 의식적인 교란이다. 이 소설의 주요한 테마이자 게임의 무대이기도 한 ‘인페르노 나인’에서 벌어지는 최면 공격이다. 강화인간은 메타포에 약하다. 보통 사람의 수십배에 달하는 이해능력 때문에 교묘한 최면 어구에 걸려 그만 의식의 평형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면의 세계는 게임의 세계와도 같았다. 최면을 거는 사람(형성자)이 자신이 만든 최면의 세계로 유도하면, 최면에 걸린 사람(유도자)가 스스로 형성자가 되어 최면 세계의 상상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한편 강화인간들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뇌가 극도로 발달한 인간들은 자기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인류’를 꿈꾸었다. 그들이 꿈꾸는 지구의 스케일은 참으로 방대했다. 지식에 특화된 강화인간들이 보기에 지구의 체제는 썩을대로 썩었고, 지구는 ‘자본의 완벽한 독재가 이루어진 세상, 자본은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지만 개인은 어디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세상, 절대다수가 실업과 가난과 고통의 집단적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디스토피아(181)’였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압제와 가난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지구 그 자체의 생태계도 인간이 파괴했다. 이대로 간다면, 지구는 쓰레기별이 될 터였다. 그러나 이 주제가 너무 방대하기에 누구도 언뜻 손을 대려 하지 못한다. 작가는 이 주제를 강화인간이라는 소재와 기묘하게 엮어넣었다. 그들은 공생당을 만들어 전 세계 평화주의자들을 끌어모아서 지하운동을 벌인다. 그들의 모토는 ‘세계 연방, 세계 문화, 완전 고용, 양성 평등, 지구 부활’이다. 이 어찌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닌가. 그리고 이걸 위해 필요한 돈은, ‘단돈 1조 달러’다.


그러나 지구의 실제적 지배자들이 그런 구상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지구를 지배하는 건 정치인들이 아니라 거대한 부를 소유한 극소수의 부자였다. 강화인간 1호인 자오얼은 심문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원리’에 대해 말한다. 실물 팽창, 금융 팽창 다음에는 전쟁이 따른다고. 전쟁은 미국과 유럽의 제조업을 부흥시키기에 그들에게 나쁜 결과가 될 수 없다고. 금융이 추락하여 전쟁이 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건, 바로 금융을 조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공생당은 전쟁을 해야만 했고, 강화인간을 파괴하더라도 그들의 계획을 막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진보주의자보다 보수주의자가 더 힘을 갖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지키려는 자는 훨씬 강하고 악착같고 악독하다. 반면 바꾸려는 자는 유연하고 온화하다. 그런 차이는 결국 대개의 혁명이 왜 실패로 끝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계획과 저지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했다. 개연성 없는 장면도 많았다. 기획관은 왜 김호에게 그 모든 강화인간에 관한 기밀을 알려준 것인가? 새라 역시 그랬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살아남은 강화인간이 김호에게 그간의 사정을 모두 말해준다. 그건 독자가 알도록 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여 어색했다. 인물들이 그간의 개요를 줄줄 나열하면서 사건을 설명하는 건 액션 장면이 이어지는 장면만큼이나 몰입이 어려웠다. 더구나 작가는 전문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스토리와 이어지도록 에둘러 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강화인간 간의 사랑도, 그들의 숭고한 패배도, 주인공 김호의 인생역정도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소설 속의 소설인 오징어먹물리조트에 등장하는 연인 이야기가 가장 감동적이었을 정도로.


초반에 매우 기대하며 읽었기에 뒷부분의 독서가 어려워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특히 게임 세계가 판타지소설과 유사해서 읽는 데 더 방해가 되었다. 추리와 판타지, 액션과 과학 소설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관련 지식을 매우 잘 소화하는 사람이 아니면 읽기가 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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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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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세기 말의 백과사전식 소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 임오군란 등의 시대적 배경 속을 살아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세태와 풍속을 그리고 있다. 시대 연구를 위한 작가의 자료 수집이 끈질기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옛것을 이만큼 잘 살려낼 수 있는 작가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만큼 시대에 천착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건, 인물보다 시대가 더 부각됐다는 점이다. 인물이 이끌어가는 다음 이야기는 역사적 맥락에 닿아 있어 예측 가능했으며, 이신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는 형식의 구성은 판이했다. 이신의 여정을 쫓는 연옥의 시점은 너무 과도하게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들었다. 듣는 형식이 아니라 ‘고하는’ 형식이 되어버린 형국이었다. 차라리 다양한 사람들이 직접 1인칭으로 서술하는 자신과 이신의 삶 이야기가 더 다채롭지 않았을까. 화자를 고정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신의 삶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귀기가 서려 있다. 어디 그 하나뿐이겠는가. 평생 그를 그리워하며 쫓은 연옥과 또다른 여인 백화, 그의 정신적 스승 격인 서일도, 박도희 형제, 김만복의 삶도 그랬다. 오히려 철저하게 구획된 중세의 질서 속에 살았더라면, 그들은 덜 고통받았으리라. 서양에서 이미 혼란스러운 근대를 겪던 시대, 우리는 아직도 구체제 속에서 병들어 신음하고 있었다. 유교적 질서란 체제를 뒤엎기엔 너무 견고했고, 탐관오리 몇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왕으로 대변되는 질서 앞에서 평민들은 한없이 작아질 뿐이었다. 일본이 개입하기 전에 봉기한 농민들이 왕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한양으로 향했다면, 시대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미 외세의 압박과 탐관오리의 폭정으로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왕을 여전히 믿은 죄. 그것이 그들이 시대에게 버림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인 이신은 작가인 황석영을 떠올리게 한다. 황석영 자신도 이야기꾼이면서 시대의 증인으로 전 세계를 떠돌고, 수감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야기꾼이면서 동시에 혁명가, 활동가이자 지식인이었던 이신은 황석영의 분신처럼도 보인다. 그들의 삶은 항상 그늘에 가려져 있다. 숱한 독립운동가 뒤에는 그들의 가족이 고통스럽게 도사리고 있다. 혁명과 이상의 조화는 불가능하니까. 연옥이 한 아이를 잃고, 또 한 아이를 아비에게 보이지조차 못했다는 그 사실은 혁명가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증언한다. 지아비의 뜻을 따르면서 자기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생활이란 짐을 고스란히 떠맡는 그 여인들은 혁명의 어두운 단면이다.


격랑의 역사를 사는 개인의 존재 가치는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 목숨이 마구 뜯어내는 휴짓조각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구질서에 완전히 몸담지도 못하지만,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은 목숨을 건 과업이다. 이신은 애초에 서자 아버지의 서자 아들로 태어나 출셋길에 대한 꿈을 접었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형 이준과 대비되는 이신의 성품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형에게는 미움을 샀다. 이 비극적 갈등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이준은 구체제를 엄혹하게 지키는 관료로, 이신은 그걸 깨트리려는 혁명세력으로 갈리는 것이다. 이신이 동학(소설 내에서는 천지도)에 빠지는 건 엉망진창인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 ‘욕망’은 얼마나 새로운 것이었던가. 이전 시대에는 차마 존재조차 발설하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주어진 세계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타락했는지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 ‘앎’이란 모든 근대인의 숙명이었다. 그러나 많은 체제가 그렇듯 조선도 타락보다 무능이 더 문제였다. 청와 왜에 낀 조선왕실은 외교를 할 능력도, 국권을 지킬 의지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나온 농민들을 일본군을 끌여들어 잔인하게 몰살한다. 전략도, 무기도 변변치 않았던 혁명군은 우금치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 걸음이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을, 4.19와 5.18을 이끌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다. 보다 평등한 역사는 피의 제물 없이는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으로 시작해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가 되었다가 결국 죽게 된 이신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인물상이다. 작가 황석영의 초상이 그렇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큰 이야기가 꼭 작은 이야기보다 의미있는 건 아니다. 역사 그 자체도 이야기이지만, 이야기의 결이 더 세심해야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는 다소 아쉬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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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각하
배명훈 지음, 이강훈 그림 / 북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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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재밌다. 첫 단편은 모골이 송연. 아, 나도 오 년 간 동면하고 싶어. 배 작가님은 이 사태를 예언한 걸까. 하지만 오 년이 또 지나도, 이백 년이 지나도, 우리는 이 땅에 산다는 걸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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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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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서 태어나 계급화된 전체주의 시대. 단체오락과 해없는 마약, 무제한의 파트너교환은 행복을 보장한다. 자동인형이 된 인간에게 존엄은 있는가? 경제력은 우리를 그 계급사회로 이끄는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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