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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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가 왜 그렇게 극찬했는지 알 것 같다. 초반부의 지지부진함을 깨끗이 씻어주는 환상적인 전개였다. 이런 사랑, 헛된 사랑을 그려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랑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사랑을 위한 이런 헛된 헌신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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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3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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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등으로 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 문학의 선굵음을 느낄 수 있던 작품. 척박한 자연 환경만큼이나 가혹하고 급변했던 정치환경과 사회제도 속에서 문자그대로 바닥 그 아래 구덩이에 파묻힌 삶의 이야기를 깔깔하고 어두운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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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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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은 연극 무대이며, 인간은 배우라는 말을 한 사람은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다. 어쩌면 현재의 삶 자체가 우연이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의 선택과 외부의 요인들이 나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연만이 모든 생을 좌우하는 건 아니다. 선택 역시 결과의 일부이니까. 그래서 우연에 의해 몰아닥치듯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불행은 그로테스크한 뒷맛을 남긴다. 우리는 그런 역사 속 인물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오이디푸스와 햄릿이 그 대표격이다. 그러나 우연은 삶에서 흔한 것이므로 이야기에서는 절제되어야 하며, 추리나 스릴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식으로 이루어지는 결말은 독자와 관람객을 얼마나 맥빠지게 하는가. 물론 그리스비극을 비롯한 많은 이야기에서, 극적인 요소들은 흥미를 돋우는 역할을 한다. 출생의 비밀이나 삼각관계, 영웅의 귀환, 신데렐라의 탄생, 불세출의 영광, 배신과 복수 이야기가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열광하게 하는가.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고, 이미 보르헤스가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조합은 가능하다. 새 시대는 항상 새 이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이야기가 언제나 탁월한 건 아니다. 탁월한 이야기는 너무나 주관적이면서도 또 객관적이다. 모순적인 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격찬한 고전이라도 내게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있다. 또 엄청난 베스트셀러라도 입맛에 맞지 않는 경우도 태반이다. 시기가 문제인 경우도 있다.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었을 때는 얼마나 따분했던가. 그러나 지금 개츠비의 이야기는 내게 큰 울림을 준다. 개츠비의 화려한 노란 차는 마음을 아리게 한다. 적어도 ‘검증’을 거친 작품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확률이 높다. 반면 최근작일수록 오히려 감동을 줄 가능성은 떨어지는 것이다. 과학적 발견이라면 최신이 가장 훌륭할 수 있겠지만, 문학은 다르다. 과학이 쌓아온 업적 위에 올리는 것이라면, 문학은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탁월함은, 그 이야기가 탄생한 시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끝까지 연기하라’는 제목이 가장 훌륭했다. 제목은 충분히 내용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극적 장면을 강조하는 소설이 보이기 쉬운 단점들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영화화를 목적으로 쓰인 것 같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이 영화의 기법을 흉내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일갈했다. 풍경에 대한 아무리 뛰어난 묘사도, 실제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처럼 아름다울 수 없다. 소설과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장르인 것이다. 소설만으로 가능한 소설, 소설적으로만 ‘기능’하는 소설이 매력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간혹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소설을 접하게 된다. 워낙 헐리우드의 영화 산업이 호황이기 때문일까. 이야기판에서 영화만큼 잘 나가는 영역은 없다. 특히 영미소설에는 그런 경향이 다소 강한 것 같다. 이것이 내 편견일지라도, 앞으로의 선택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되리라. 이 소설도 영화화를 목적으로 쓰인 듯했다. 장면 전환이 자주 일어나고, 사건 해결 방식이 우연적이며 극적이다. 특히 해결방식은 또다른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닐 수 없었다. 신이 아니고서야, 누군가의 운명을 정말로 조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인물들은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고, 변수가 끼어든다. 그 변수 자체가 재미를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사건이 충분히 납득가능해야 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토비 플러드는 책표지를 장식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조정하는 끈에 매달린 마리오네트다. 실제로 토비는 그런 역할을 한다. 데릭 오스윈이 찾아오는 순간부터 토비는 그의 말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의 동기는 아내 제니에 대한 사랑이다. 데릭은 처음에는 아내를 위협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갈수록 데릭은 토비를 여러 가지 황당한 상황 속으로 이끈다. 토비는 의지도 없이 조종되는 자동인형이 아니지만,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합리화하지만, 그건 로저 콜본이 말한 대로,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는 심사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졌다면서, 아내에게 소홀한 것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행동과 말은,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를 되찾는답시고 그가 벌이는 소동들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소설에도 나오듯이, 제니는 토비가 차분하게 자기를 기다렸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소리친다. 그 말이 너무 적절했다. 물론 이 이야기의 조정자는 복수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소기의 목표는 이룬 셈이다. 헐리우드 영화의 공식이 그렇잖은가. 아무 것도 모르는 주인공은 궁금해해야 하고, 함부로 모험해야 하고, 불필요하게 갇히거나 난관에 일부러 부딪혀서 헤어나오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나 그 복수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희생되었다. 또한 지나치게 걸출한 악당들에게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악인의 캐릭터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이제 악당마저도 단순한 악인이어서는 안 될 정도로, 독자들은 영리해져 버렸다. 그래서 악행이 밝혀졌어도 어떤 전율도, 해방감도 없었다. 중요한 건 악행이나 트릭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이며,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반응인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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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2]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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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고 있는 것, 그것이 과연 진짜인가?

에코는 이런 물음에서 소설을 시작한다. 문득 최근에 읽은 다른 소설, 우부메의 여름에서 교고구토의 장광설이 떠올리며 겹쳐졌다. 우리가 가진 상식이란, 지극히 편협하다. 우리는 무언가가 진짜라는 걸 어떻게 인식하는가? 내가 겪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교육 혹은 독서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며 패러다임은 늘 바뀌었다. 지식을 편찬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얼마든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 그 왜곡은 언제 어디서든,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에코의 말마따나, ‘시모니니는 우리 곁에 있다’.


에코는 이 소설에서 유럽의 역사를 종횡무진으로 드나들며 픽션과 역사의 경계를 허문다. 거기다 이전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해박한 종교(비교나 밀교까지 포함해서), 문화적 지식을 자랑하며 혀를 내두르게 한다. 특히 주인공 시모니니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던(즉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흥미를 돋운다. 에코는 실로 보르헤스적인 수법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진짜 사료(책이나 잡지, 떠도는 이야기, 전설, 신화 등)를 가상 인물이 이용하는 사실적 환상주의, 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이 함께 겪는 사건과 가짜 대화, 그들의 얽힘으로 벌어지는 새로운 사건, 실존하는 인물에 대한 가상 서술, 실제 사건에 대한 다른 언급 등등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그 경계 허뭄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제이다. 우리가 픽션이라 부르는 것과 역사는 정말 얼마나 다른가? 어쩌면 ‘역사’는 만들어졌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발화되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믿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사기꾼 탁실의 입을 통해 에코는 말한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주된 특성이죠. 하기야 교회가 거의 2천년동안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너나 할 것없이 그런 맹신의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511)


믿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는, 살아남는 데 오히려 불리하다. 모든 것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자는, 결정을 내리기 못한다. 사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감정적이다. 뇌의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이 다친 환자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많은 가능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선택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도태될 뿐이다.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인과관계가 필요하다. 삶이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우연이나 운명에 순응하는 척 하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종종 희생양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통받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 인해 고통받은 것이다. 그 편이 자신의 무능과 운명을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숱한 음모론은 이를 뒷받침한다. 


적이란 결국 민중의 벗입니다. 자기가 가난하고 불행한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 어디가 다른 데에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느끼려면 언제나 증오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증오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열정입니다. 사랑이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감정이죠.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죠. 누군가를 평생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건 이룰 수 없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간통이며 모친 살해며 친구를 배신하는 일 따위가 생겨나는 겁니다. 반면 누군가를 평생토록 미워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자가 우리곁에서 계속 증오심을 부추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증오는 심장을 뜨겁게 하죠.(600)


이 작품의 큰 줄기는 ‘프로토콜’, 일명 ‘시온의정서’가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허구적 재구성이다. 에코는 지극히 편협하고 비인간적인 반유대주의에 의해 ‘프로토콜’이 탄생하는 과정을 시모니 시모니니라는 망측한 주인공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주인공의 이름 자체가 유대인을 증오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성 시모니노’는 유대인에게 납치되어 토막난 아기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을 지은 것은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인 그의 할아버지이며, 실존 인물이다. 이름에 각인된 증오, 누군가가 주입한 증오가 그를 평생에 걸친 유대인 혐오자로 만든 셈일지도 모른다. 이 뿌리깊은 증오는 그로 하여금 어떤 문서를 위조하더라도 유대인의 은밀한 음모가 숨어 있다는 단서를 심게 했다. 그 철저한 증오는, 사랑보다 증오가 더 위대하고 깊은 감정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시모니니라는 이 인물은 사이코패스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위인이다. 그러므로 증오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의 결론을 이끌 필요는 없다. 시모니니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유럽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묘지 논쟁에서, 시모니니의 논리를 수긍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 에코가 ‘변태적’이라며 일갈한 것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시모니니는 쾌감과 증오를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가 사랑하는 건 미식과 그를 지불하기 위한 돈뿐이다. 여자와 권력도 그에겐 추구 대상이 아니다. ‘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의 선언에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시모니니에게 여러 수사를 붙여보자. 이탈리아,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의 첩보원이자 이중간첩, 문서위조꾼, 협잡꾼, 거짓말쟁이, 살인자, 사기꾼, 공갈협박꾼. 무엇이 더 필요한가? 기막히게 머리가 좋고 위조 재주가 뛰어난 그는 친구든 은인이든 가리지 않고 처단한다. 방해자를 자신의 계획에 도구로 쓰고, 버린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서로 적대적인 양쪽 모두에게서 이익을 보기도 한다. 프리메이슨을 고발하는 사람과, 그 고발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려는 사람. 프리메이슨과 유대인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도 쏠쏠한 돈벌이가 되었다. 더구나 반유대주의는 ‘공인된 광맥’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열광적으로 조작에 끼어들었다. 어쩌면 ‘프로토콜’에서 주장하는 유대인의 음모는, 이런 자들의 음모라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프로토콜’이 한 미친 독재자에 의해 세계를 광기로 몰아넣은 요인 중 하나였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에코는 소설로 또 하나의 음모론을 창출한 셈이다. 유대인의 음모를 밝히는 문서를 쓴 자의 음모를 밝힌 소설이라. 이 얼마나 보르헤스적이며 메타소설적인가! 


한편 시모니니가 밝힌 가짜 문서의 원칙도 매우 흥미로웠다. 이는 평소에 위서에 많은 연구를 쏟은 에코의 결과물이리라. ‘흑과 백, 선과 악이 분명해야 하며, 악당은 딱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182)이다. 또한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아귀가 맞고 사실임직하게 보이면 오히려 거짓’(184)이라고 믿게 마련이다. 적절하게 거짓을 섞어야 한다. 또한 원본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해야 한다. 에코는 그런 유명한 증거로 동방 박사 이야기를 든다.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살짝 언급된 동방 박사 이야기는 비기독교인에게도 유명한 이야기다. 이름도 명수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풍문이 많은 이들에 의해 덧붙여져 결국 설득력을 얻은 셈이다. 전승되는 상식의 유래 따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어떤 위험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면, 천의 얼굴을 가진 위험을 찾으면 절대로 안 된다. 위험은 단 하나의 얼굴을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이 흐트러진다. 한 불에 고기를 너무 많이 올려놓으면 안 되는 법’(387)이라는 원칙도 밝힌다. 시모니니는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자신의 숙적을 결국 세계를 지배하려는 간악한 무리들로 탁월하게 묘사해낸다.


한편 이 소설은 세 명의 화자를 등장시키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문체가 상이한(그러니까 폰트가 다른) 세 화자는 각각 시모니니, 달라 피콜라 신부, 전지적 화자이다. 기억을 잃은 시모니니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일기를 써내려간다. 회상을 하는 시점에서 그는 자신과 피콜라 신부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앞부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피콜라 신부는 그의 분신이다.(이건 목차만 봐도 짐작할 수 있으므로 스포일러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그는 모종의 사건 때문에 기억을 잃었고, 기억은 두 명의 인격에게 흩어져 혼재한다. 이 분신 모티브는 소설을 읽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 두 명의 화자가 가리거나 미처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을, 전지적 화자가 다시 정리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사건은 시모니니가 임의적으로 이용하던 인격으로 분화된 클라이맥스의 날을 향해 달려간다. 그토록 괴물 같은 시모니니에게도, 역린이 있었던 셈이다.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한 유대인 의사 프로이트의 발언은 퍽 유머러스하다. 프로이트가 ‘모든 것을 성으로 귀결시키는 정신분석학의 경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모니니는 그런 프로이트의 내심을 의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프로이트는 끔찍하게 충격적인 일을 겪은 사람은 너무 깊은 곳에 있어 최면을 걸어도 도달하지 않는 곳에 기억을 숨긴다고 말한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대화 혹은 기록이 필요하다. 시모니니의 기록이 바로 그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다. 사건의 정체가 밝혀진 후에도, 시모니니의 엽기행각은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더욱 뻔뻔해지기까지 한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태연할 수 있는 것 역시 사이코패스의 특성 중 하나이리라. 에코가 시모니니를 징벌하지 않은 건, 아마도 현실 세계에서 그런 진짜 악당들이 여전히 활개치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간접적으로 시모니니가 창조한 문서의 내용을 통해, 현실 정치를 풍자하고 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그 유명한 괴벨스를 포함해 언론을 대중 장악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는 수없이 많다. 이러한 점 때문에 에코가 이탈리아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베를루스쿠니 전 총리도 언론 장악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이 이 세상의 으뜸가는 원력이라면 버금가는 권력은 언론이오.(...)언론을 지배하면 우리는 명예와 미덕과 공정함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가족제도에 대한 공격에 나설 수 있을 것이오. 필요한 경우에는 사회의 주요의 주요 현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축구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해야 하고, 사회운동단체에 우리 선동가들을 침투시켜 우리가 원하는 때에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때로는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아 혁명의 대오를 짓게 해야 하오.(371)


결국 프라하의 묘지라는 이 길고 장황한, 복잡하고 매력적인 소설에서 에코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런 게 아닐까. 깨어 있으라, 의심하라,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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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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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유독 환상적인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다. 혹시 나도 ‘소공녀’가 아닐까, 하고 꿈꿔보지 않은 아이가 있을까. 어딘가 나의 진짜 부모가 나를 위해 기적 같은 미래를 준비해두었을 것이라는 상상. 그 상상은 마치 장래 희망이 연계도 없이 여러 개로 바뀔 때처럼 매력적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아마도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우리는 현실에 대해 배운다. 우리가 속한 우주는, 그저 세계 속에 이름도 없는 작은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더는 존재 자체만으로 환영받던 아기가 아니다. 웃고 걷고 말하는 것으로는 어른들의 찬사를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뭔가를, 더 많은 것을 해내야 한다. 결정적인 깨달음은, 소공녀가 되는 건 아주 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라는 거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에 더는 전처럼 열광하지 않게 된다. 불가능하거나 환상적인 기적보다는 차라리 로또 같은 현실적인 기적을 꿈꾸는 ‘속물’이 된다. 항상 위를 동경하면서, 나란히 걷는 사람들을 질시하며,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우리, 속물들. 그러나 어쩌면 위를 향한 동경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소공녀를 꿈꾸듯이, 기적을 꿈꾼 건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러나 어떤 인간도 온전히 극악하거나 극선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는 경계를 산다. 어쩌면 진짜 기적이라는 건, 그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사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은 아니다. 히가시고 게이고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사상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사실 ‘미소 시리즈’의 냉소가 더 좋았다. 휴머니즘은 그저 착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으로만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실 선함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많은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선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우리가 악하지 않은 건 악한 일을 할 만한 절묘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거나, 악을 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살을 하는 것보다 남을 죽이는 것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어떤 영화의 대사도 떠오른다. 우리는 무위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의를 정당화한다. 그건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꿀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며, 우리 대신 누군가가 공적 의무를 대신해도 이 사회가 충분히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본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충분히 위로와 공감이 된다고 해도, 누군가는 다른 이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물론 이건 적선의 딜레마와도 같다. 걸인에게 당장 몇 푼을 적선해서 그가 술을 사먹는 꼴을 보더라도, 내가 그를 도울 사회적 위치에 오를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그게 더 인간적인 게 아닐까. 답은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주었다면, 그 의미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대가를 바라지 않은 자발적인 도움, 심지어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도 아닌 선행을 비아냥거리지는 못한다.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은 경험은 우리에게도 한번쯤은 있으니. 어쩌면 그것이 소공녀의 기적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진짜 기적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은 그런 ‘작은 도움’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퍼즐처럼 끼워맞추고 있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너무 가깝지 않나 싶다가도, 소도시의 작은 잡화점에서의 일이니 크게 개연성이 떨어지지는 않아 보인다. 나미야 잡화점은 이미 33년 전에 문을 닫은 곳이다. 주인인 나미야 유지가 별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상심에 젖어 있다가, 우연히 장난스런 질문을 받는 상담을 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뜬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농담 같은 질문에 재치 있는 답을 써서 가게의 벽에 붙이는 것에서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질문도 무시하지 않고, 답을 주었다.

이런 장난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근본적으로 똑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 거야.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러 찾아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159)

그렇게 인간은 모두 외롭고, 답을 모르고,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정답’을 알고 있으며, 자기가 정한 답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의탁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비료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소리’들은 늘 절박하고, 내밀하고, 거칠다. 익명 게시판 같은 데를 구경해보거나 글을 남겨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우리의 내면은 아주 약한 살갗으로 되어 외부의 약한 자극에도 금방 피가 맺히고 멍이 든다는 것을. 우리는 그걸 숨기기 위해 가면 위에 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을. 
 
‘폴 레논’이란 피상담자에게 내밀한 상담을 받은 후부터, 나미야 할아버지는 편지함과 우유상자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상담자 역할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잡화점의 적자는 쌓이고, 어느날 문득 할아버지는 의문에 휩싸인다. 편지가 끊긴 피상담자들의 현실이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과연 제대로 상담을 해준 걸까? 내가 한 상담 때문에 오히려 누군가는 피해를 보지 않았을까? 한편으로 할아버지는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여기서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 나미야 잡화점의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미래에서 편지를 받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한 편의 판타지가 된다. 할아버지는 기괴한 유언을 남긴다. 바로 33년 뒤에, 자신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해달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영감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미래의 어느날, 아들도 아니고 손자가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글은 다음과 같았다.

“오전 0시부터 새벽까지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창구가 부활합니다. 예전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상담 편지를 받으셨던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아들이 그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고 다짐한 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편지함에는, 미래로부터 도달한 편지들이 수없이 도착해 있었다. 장난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부터 진지한 편지에 대한 답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공부하지 않고도 시험에 백점 맞는 법을 물은 아이에게 '당신에 대한 시험'을 치라는 조언을 했다. 당신에 관한 문제니까 당신이 쓴 답이 정답이니까. 아이는 자라서 선생이 되어, 아이들과 친해지는 데 그 조언을 활용했다. 또한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피상담자의 딸이 뭉클한 사연을 전해주기도 했다. 나를 버린 세상이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의 상담은, 옳았던 걸까. 상담은 사실 누구에게나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결국 하나의 선택뿐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두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힘껏 책임을 질 뿐이다. 따라서 할아버지는 무죄다. ‘폴 레논’의 먼 미래의 답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할아버지는 운명과 우연의 힘을 좌우할 수 없다. 그저 그들의 무거운 삶을 함께, 잠시라도 들어줬을 뿐이다. 마치 세상을 짊어진 아틀라스 같은 피상담자 각자의 삶을.

할아버지는 일 년 동안 ‘죽은 듯한 잠’에 빠져든다. 그 일 년 동안 나미아 잡화점은 일종의 타임슬립이 가능한 초공간이 된다. 33년 후에, 그 집에 도착한 세 도둑 쇼타, 아쓰야, 고헤이가 할아버지가 미처 답을 하지 못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아예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누군가, 어딘가에서 자기가 쓰지 못하는 답장을 써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할아버지가 생명을 다한 9월 13일이 바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날이며, 마지막 상담을 해준 날인 것이다. 

쇼타, 고헤이, 아쓰야는 환광원이란 고아원 출신으로 좀도둑이다. 그들은 빈집을 털다 실패하고 몸을 숨기기 위해 나미야 잡화점을 찾았다. 거기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 편지를 편지함에 넣었고, 그들이 토론 끝에 답장을 써서 우유상자에 넣자, 다시 답장이 신비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공간의 왜곡을 깨달았다. 그런데 좀도둑이며, 루저이며, 삶에 의미를 두지 못한 그들은 왜 상담을 해주는가. 가장 냉소적인 아쓰야는, 필요 이상으로 타인과 엮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경찰에게 걸릴 만한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이유는 그랬다. 

“누가 우리한테 그런 상담을 하겠어. 아마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남을 위로하는 건 특별한 일이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의 상담을 하겠다는 건 우스운 노릇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편지의 답장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아마도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들은 나미야 할아버지와 같은 연륜이나 지혜, 삶의 깊이도 없다. 그들의 상담은 거칠고, 직선적이며, 비아냥거리며, 냉정하다. 하지만 그들은 33년 전의 인물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보다 더 유리한 위치인지도 모른다. 달 토끼, 생선 가게 뮤지션, 길 잃은 강아지와 상담을 나누면서 그들은 미래의 지식을 통해 그들에게 용기를 준다. 특히 달 토끼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달토끼는 상담을 하면서도 진짜 자신의 마음은 드러내지 않았다. 즉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숨겼던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강하게 반응하는 삼인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발견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뒤에는, 정말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모든 환자처럼, 피상담자는 상담자를 속인다. 때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조차 진실하지 않다. 그것을 좀도둑 삼인방의 ‘거친 조언’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그 결과 달토끼는 자신의 결정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나미야 할아버지의 피상담자들과 삼인방의 피상담자들의 이야기를 병렬식으로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들은 ‘환광원’과 연결된다. 추리소설가인 작가는 휴머니즘을 이렇게 직조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환광원 출신이다. 그러나 마지막 상담자인 ‘길 잃은 강아지’에 이르러서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소공녀’스럽지 않나 싶었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한 가난한 여자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이야기는, 손쉬운 발상이었다. 물론 부자가 된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그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이었다. 타임슬립의 장치를 좀 더 교묘한 일과 연관시킬 수 없었을까. 사변소설은 아니지만, 미래와 과거 사이의 틈이라는 소재를 너무 쉽게 다룬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소원이 있다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좀 과작을 해서(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도 간절히 바라건대) 정말 공들인 추리소설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모든 예술가가 바라는 ‘불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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