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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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투표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과반수의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 정당에도 투표하지 않았다. 그건 정당한 항의였다. 기권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다.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한 것이다. 수도에서 일어난 이 기이한 투표에서 승리한 정당은 없었다. 정부는 시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대통령과 총리, 장관들은 민주주의가 도마 위에 올랐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건재했다. 시민은 자발적 백지 투표를 함으로서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 권력의 뜻대로 움직이는 민주주의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일 뿐이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투표 내용을 묻는 출구조사에 완강한 침묵으로만 대응한다는 점이었다...이 벽은 모두가 공유하는 비밀, 모두가 지키기로 맹세한 비밀을 둘러싸고 세워진 것 같았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 서로 다른 사회 계급이나 계층에 속한 사람들 수천 명이 이런 행동의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능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놀라운 일이었다.(40)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실은 국민이 뽑아놓은 대표들이다. 그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는 그들 자신이 속한 정치적, 경제적 계급의 복지와 행복이 가장 우선시된다. 이는 국지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모두의 입장에서 행복한 그런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을 이루는 방법은 다양하므로, 완전한 보장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최소한의 국민이 고통을 덜 겪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일심동체가 되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었다. 이 시스템 아래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겨난다.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와 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투표라는 이름의 권리는 피지배자들에게 유일한 카드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지배자들은 자신이 뭔가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심한다. 피지배자들은 연약하고, 의심과 두려움이 많다.

그런데 그러한 피지배자들이 감히, 투표하는 것 외에는 관여할 수 없는 정부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통령와 각료들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에 반기를 든’ 시민, 사실은 ‘지배자들의 체제에 반기를 든’ 시민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책임자를 가려내 범인 또는 음모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한 일이라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다.(46)” 정부를 겨냥한 이러한 테러에는 분명히 주동자가 있으며, 그 범인을 잡아 족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일을 처리하는 손쉬운 수단이다. 모두를 잡아 가둘 수는 없으므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처음 택한 방법은 스파이를 통한 조사였으나, 시민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또 임의로 선택된 몇 백명의 시민들도 쉽게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구도 어떤 구실로도 자신의 투표를 공개하도록 강요받지 아니하며, 이 점과 관련하여 당국으로부터 답변을 강요받지 않습니다.(63)” 시민들은 모두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정부는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해 백지투표를 한 사람을 가려내려고 했다. 거짓말탐지기는 신체를 탐지할 뿐 정신을 탐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무시하려 했다. 용감한 한 여자는 자신을 심문하는 스파이에게 거짓말탐지기를 써보라고 했다. 거짓말탐지기는 스파이가 백지투표를 했다고 ‘증언’했다. 자신이 애국자라고 주장하는 그에게 여자는 말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도 계속 진실을 말한다고요. 내가 댁한테 나하고 같이 자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면 댁은 뭐라고 말했겠어요. 저 거짓말 탐지기는 뭐라고 말했을까요.(74)” 
 
정부는 결국 각료회의를 통해 계엄을 선포할 것을 결정한다.

"
병역을 마친 적도 없는 민간인 국방부장관에게 비상사태 선포는 맥주 한 모금에 불과했다. 그는 전부터 제대로 된 순수한 계엄을 원했다. 말 그대로의 계엄. 소요와 원천을 격리해 단 한 방의 압도적 반격으로 분쇄해버릴 수 있는 움직이는 벽 같은 계엄. (중략) 나 같으면 체재를 겨냥해 수중폭탄을 터뜨린 것에 비유를 하고 싶습니다만.(48)"

‘병역을 마친 적도 없는 국방부장관’이라는 말에 쓴웃음이 났다. 대통령과 총리부터 시작해서 각료들 중에 제대로 병역을 치른 자가 거의 없는 나라가 어디던가? 그러면서도 전쟁과 계엄을 쉽에 입에 담는 그들의 모습이 무참하게도 낯익었다. 그들은 ‘체제를 공격하는 어뢰’라는 은유를 즐겨 사용하면서, 이 상황의 위험성을 확대해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체제가 시민을 버렸을 때, 시민이 곤경에 처하리라 여겼고, 무릎을 꿇고 다시 체제에 속하기를 빌 것이라 여겼다. 정부 요인들뿐 아니라 경찰, 군인, 공무원, 심지어 환경미화원까지도 모두 도시에서 철수했다. 그들은 이제 도시에는 폭동이 일어나고, 무뢰한들이 시민을 공격할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도시는 조용했다. 시민들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질서있었으며, 범죄가 늘지도 않았다. 반면 의기양양하게 도시를 떠났던 그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 계획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들은 “계엄이라는 일반 원칙들만 강조할 뿐 그것을 집행하는 관료적 세부사항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런 부분에서 불가피하게 혼돈이 찾아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89)” 그런데도 시민들은 참을성 있게 그 불편함을 견디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사건을 일으켰다. 지하철에 폭탄을 설치해 시민들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폭도들에 의한 것이라는 루머를 신문에 실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도시에 남아 있던 마지막 관료인 시장은 폭탄이 터질 때 근처에 있었다. 그의 양심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그는 시장이 아니라 시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의 시장이 반정부시위에 가담했는지 알고 싶어할 겁니다. 이건 반정부시위가 아니오. 애도의 시위지. 사람들은 죽은 자들을 묻으러 이 곳에 왔소. (중략) 시장님은 백지 투표를 던진 사람들에게 동조하십니까. 그 사람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투표한 거요, 내가 동조하느냐 아니냐는 상관없소.(182)”

또다시 플래시백. 용산 참사가 떠오른다. 살인이 있었으나 범인이 없었던 그 참사. 폭도들이라 매도당한 시민들의 죽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살인. 유족들의 눈물. 그것은 반정부시위가 아니다. ‘애도의 시위’인 것이다!
 
“놀라운 건 아무런 외침도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세 소리 하나, 타도하라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군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구호 하나 없습니다. 그냥 등뼈까지 떨리게 만드는 이 위협적인 전율뿐입니다.(184)”
“이 자들은 시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네. 돌이라도 몇 개 던져야 하는 거 아냐. 시위는 그들(기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말없이 삼십 분 동안 눈앞의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서 있더니, 이윽고 해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씨 좋아 보이는 낯선 사람에게 차를 얻어타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집에 갔다.(185)”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이었다. 2004년에 쓰인 이 소설에 나타나는 침묵의 시위가, 지금의 정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등뼈까지 떨리게 만드는 이 위협적인 전율’은 침묵이 곧 분노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말하지 않는 것도 말하는 것이다. 국가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정부가 시민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희생’에는, 그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은 없다.

한편 각료회의에서, 문화부장관은 이 사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4년 전의 백색실명 사태다. 이 도시가 바로 눈먼 자들의 도시였던 것이다. 이유없이 실명했다가 다시 이유없이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불문에 부쳤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치욕적인 일은 차라리 묻히는 편이 나았다. 특히 그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정부에게는 도려내고 싶은 상처였다. 문화부장관은 그런 가능성을 들춰낸 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편 법무부장관은 자신도 백지투표를 했다고 고백하고 역시 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백색실명이 백지투표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고무적인 것이었다. 책임을 돌릴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텔레비전이 우리가 시력을 회복한 직후에 찍은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게 합시다. 우리가 견디어야 했던 여러 가지 악을 보여주게 합시다. 사 년 전 그 눈먼 상태가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사 년 전 그 눈먼 상태의 텅빈 시야와 지금 텅 빈 투표용지를 맹목적으로 던지는 사태 사이의 유사성을 보게 하는 겁니다.(230)”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실제 백지투표 사건의 의미와는 달랐다. 원래부터 눈먼 자들이었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눈이 먼 뒤, 역설적으로 ‘진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실명 상태에서 시민들은 정부가 얼마나 무력한지 알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났던 그 도시에서, 시민들은 깨달았다. 정부에게 시민의 생명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진짜 체제를 세워야 한다. 이런 생각은 누군가의 선동으로 일어난 게 아니었다.

맞춤하게, 그들의 음모론을 부추긴 것은, ‘첫 번째로 실명한 남자’의 편지였다. 어쩌면 모든 일의 원인일 수도 있는 그 남자에게 아무도 죄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죄를 물었다. 그것도 생명의 은인에게. 남자는 대통령과 총리에게 같은 편지를 보냈다. 4년 전 실명상태에서,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의 여자, 의사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의 살인을 고발하는 편지를.

그들은 도시로 경정과 경감, 경사를 몰래 파견했다. 경정은 먼저 편지를 보낸 남자를 만났다. 그 파렴치한은 자신의 아내와도 이혼한 상태였다. 자신을 먹이기 위해 아내가 깡패들에게 강간당한 일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백색실명의 재앙에서 벗어난 단 한 사람과 백지투표 현상이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증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일도 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280)” 내무부장관은 한 술 더 떠 음모론을 확실시한다. “아무도 음모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음모가 있다는 증거다. 이 경우에는 침묵이 음모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음모를 확인해주는 증거다.(289)” 경찰들은 남자가 준 사진과 그가 적어준 주소를 가지고 의사 아내가 이끌었던 사람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경찰들은 의사 아내가 숭고한 일을 했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경정은 의사 아내를 찾아가 정부에서 무엇을 조사하고 있는지를 밝혔다 의사 아내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무원이었다. “부인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오. 증거란 필요하면 나타나게 마련이오.(중략) 부인은 이게 그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겠지만, 그 전에 내 한 마디 하리다. 냄비를 만든 사람이 뚜껑도 만드는 거요.(326)”

의사 부부와 그들의 친구들은 이제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민 집단이 되어 있었다. 경정은 의사 아내를 감시하다가 공원에서 그녀와 말을 했다. 정부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하며, 그들이 어떤 나쁜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그는 가감없이 알려줬다. 의사 아내의 이야기는 빠르게 신문에 실렸다. 무죄를 증명하는 방법은 없었다. 경정은 그 더러운 물에서 발을 빼기로 결심했다. 작은 신문사의 편집국에 사실을 알렸다. 신문사의 기지로 시민들은 왜곡된 진실을 알았지만, 경정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총리는 사건을 지휘했던 내무부장관이 오히려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리면 가릴수록 진실은 더욱 크게 부풀어오른다. 시민들은 회수된 신문의 복사본을 수도 없이 돌렸다. 눈이 내리듯 빌딩에서 복사본이 마구 떨어졌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던 시민들은, 이제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다. 총리는 내무부장관을 해고했다.

“내가 나라에 봉사한 것에 이렇게 이상하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보답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잔인한 해임의 이유를 말입니다.(중략) 경정은 우리 적들이 죽였습니다. 제발 내 앞에서 오페라 아리아 좀 부르지 마시오. 나도 이 게임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 동화는 안 믿는단 말이오. 당신이 말하는 적들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면 만들었지 죽일 이유는 전혀 없소.(중략) 그를 죽인 건 용서할 수 없는 대실수요. 이제 지금까지 벌어진 사태로도 모자라 거리에 시위대까지 나오게 되었지 않소. 이미 주민의 반이 거리로 나왔고, 나머지 반도 곧 합세할 거요. 미래는, 총리님, 미래는 틀림없이 내가 옳았다고 판단할 겁니다. 현재가 당신이 틀렸다고 판단하는데, 미래가 퍽이나 당신한테 도움이 되겠소.”(424)

그렇게 내무부장관은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 어리석인 자가 추진력이 있고, 악하기까지 하면, 그건 최악이다. 내무부장관은 그런 권력자의 전형이다. 그는 시민을 희생시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은 암울하지만, 또 한편 희망을 보여준다. 그것이 희생을 요구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희생의 의미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백지투표가 침묵의 저항이었다면, 이 소설 속의 시민들은 이제 수다스러운 저항을 하게 될 것이므로. 사라마구는 이 소설 어느 부분에서도 구체적으로 혁명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우화 같은 소설에는 분명 혁명이 있다. 여든이 넘는 작가가 여전히 혁명을 말했다는 사실은 존경스럽다. 작가는 기성세대를 이렇게 냉소한다.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할 것이다. 예의를 약간 걷어내고 말을 하자면,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매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143)”

이 소설을 읽어내는 것은 고통이었다. 행간을 조금만이라도 놓치면 앞 부분으로 돌아가야 했고, 대화는 많은 은유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처음 읽었을 때 막연했던 장면들이, 두 번째 읽자 선명해졌다. 다음에 읽을 때는 또 다른 메시지를 줄 것이다. 이 묵시록 같은 소설은 읽기 힘든 만큼 가치가 있다. 생각하면서 읽지 않으면 다음 구절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소설가는, 잘 읽히는 소설은 이미 많이 쓰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익숙한 상황과 인물들은 고심하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라마구의 독창성은 더욱 빛난다. 안타깝게도, 그는 더 이상 작품을 쓸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남겨놓은 이야기들은 또 다른 이야기의 모태가 될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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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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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전히, 그의 말들은 살아숨쉰다. 나는 지금까지 이보다 더 뛰어난 사랑의 단상을 보지 못했다. 보라색 괄호는, 현재진행형.

 1. 사랑의 목소리는 비실제적으로 다루기 힘든 어떤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목소리는 개별적이다.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랑이라면, 상투적인 사랑일 것이다.)

2. 사랑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있는 그 무언가이다.(멈춰 있는 것,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첫사랑이란 말은 엄밀히 말하면 맞지 않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오늘의 '첫' 사랑이므로.)

3. 사랑은 어떤 우연에 의해서 늘 규정된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의 중첩일 뿐이다.(그러므로 그 우연은 얼마나 많은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

4.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바쳐야할 공물. 그것은 주체의 머리 속을 끊임없이 스쳐가는 저 커다란 상상적인 것의 흐름을 단지 고통스런, 병적인, 그래서 반드시 치유되어야만 하는 위기로 주체 자신이 환원시키기를 바라는 그런 일반 여론.(결국 사랑은 일종의 병이 아닐까. 언젠가 치유되어야 하는. 어떤 사랑의 병이든 치료되고 난 뒤엔, 평온함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앓고 난 병을 두 번 앓기 어렵듯.)

5. 부재자 : 떠나는 자는 늘 그이고,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다.(그렇기에 더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패배자일 수밖에 없으며, 덜 사랑하는 자는 떠나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만고의 진리이다.)

6. 나의 상상 속에서 그는 늘 결핍되어 있다. 그는 한번도 충족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 속에서 더욱 결핍된다. 실제 속에서의 그는 나의 세계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그가 충족되는 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다. 결핍이 없는 그, 완벽한 그가 도대체 왜 나와 어울리겠는가?)

7. 그는 근사하다. 그 사람의 전부가 불러일으키는 미학적인 환영. 그는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것에 대해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사랑한 자신을 찬미한다 .(나는 자아도취적으로 사랑한다. 그의 장점은 사실 내가 갖고 싶던 장점이었고, 내가 그를 칭찬하는 순간, 나는 그 덕목을 공유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알아차린 나 자신은 얼마나 위대한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경멸하는 순간, 나 역시 경멸당한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한 모든 사랑을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애쓴다. 어떤 사람이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어떤 면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욕망의 발현이었기에)

8. 모든 것은 텅빈 것이다. 있음이 아니면 없음이다. 사람은 모든 것 때문에 사랑하며, 모든 것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그래서 사실은, 이유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유를 만들어내려는 행동은 본능적인 게 아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해서 결정한 사랑이란 건, 결국 무의미하다.) 
 

9. 일생을 통해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게 중에서 나는 단 하나만을 욕망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성을 증명한다. 그 선택은 엄격하면서 유일한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그 얼마나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그리고 어쩌면 수많은 탐색이) 필요했던가!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사람을 원하는 걸까. 나는 왜 그를 지속적으로 초췌하게 원하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의 무엇일까. 그의 전부일까, 실루엣 형상 분위기? 그는 근사하다. 그러나 내 욕망을 파고들어가면 갈수록 이름짓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리고 동어반복을 한다. 근사하기 때문에 근사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것은 바로 긍정의 폭발인 것이다.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려 온 유일한 사람. 그 어떤 상투적인 것(타인들의 진실)에도 포함될 수 없는 내 진실의 형상. 나는 그 모든 어려움(불안 의혹 절망 빠져나오고 싶은 욕구 초연해지고 싶은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긍정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어떤 평가도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 중독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는 당황스럽다. 마치 3d 영화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느낌처럼, 나는 생생한 환상을 경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근사하기 때문에 근사했던 그가, 사실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세속적이며 더없이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 순간, 그 당시의 내게 그는 딱 들어맞는 이미지였다. 나는 나의 사랑이 그 무엇보다도 달랐고, 독창적이었다고 주장하려 애쓴다. 하지만 모든 독창성 안에는 위대한 세속이 담겨 있다. 고답적인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0.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즉각적인 긍정의 상태가 된다. 현혹, 열정, 흥분, 충일될 미래에 대한 미친 듯한 상상과 계획들. 나는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과 충동으로 휩싸인다. 모든 것에 대해 그렇다, 라고, 말한다. 세상은 아름다워. 라고. 진정한 긍정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자, 라고 말하는 것이다.(그건 놀랍게도 이 더럽게 절망적인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준다. 그랬다.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그 놀라운 사랑이 깨어진 후에는, 세상도 깨어진다. 깨어진 세상은 파편이 되어 온 몸을 찌른다. 그 깊은 충일감만큼 살이 도려내지고 영혼이 깊이 패인다. 사랑이 여러 번 반복될수록, 영혼은 파이고 또 파인다.)

11. 이미지는 순식간에 변질된다. 아주 작은 오점 하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 완벽한 얼굴-방부제를 연상시키는-에 아주 작은 오점이 나면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는 순식간에 손상된다. 그 사람을 갑자기 비속적인 세계로 비끄러내는 그 무엇! 나는 얼떨떨해지고 하나의 역리듬을 듣는다. 이미지의 변질은 내가 그를 부끄럽게, 가치없게, 매력없에 생각할 때 발생한다. 그는 무엇인가에 조정되고 있다. 그것도 천박하고 비속한 어떤 것에게. 그는 갑자기 변질되어 우리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된다. 그는 욕망에도 예속되어 있다. 그 자신도 모르고 나만이 간파하는 어떤 형태의 욕망. 사랑의 붕괴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점에서 두렵다. (가면은 벗겨진다. 나는 의아해진다. 도대체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 누군가의 진실을 보고 난 뒤에도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건 그의 악덕에도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이다. 과연 그 천박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가족조차도 인정할 수 없는 그 천박함을, 도대체 누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인다는 주장은 다 거짓이다. 눈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악덕을 보기보다는 그냥 눈 감는 것이다. 적당히 감추지 않으면 어떤 사랑도 지속되지 않는다. 마치 거짓 없이는 진실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12. 고행자 : 스스로를 징벌하고 처벌하려 함으로서 그를 감동시키는 행위
나는 이런 저런 일로 죄를 지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고, 그럴만한 이유로 나를 만들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벌하려 하며 나 스스로를 망가뜨리려 한다. 나는 그러면서 아주 인내심 있고 의젓한 사람이 되려 한다. 마치 나 자신의 한의 인간인 것러럼. 나는 나를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모욕한다. 그 모욕의 고통 속에는 어떤 초월적인 것, 어떤 긍정적으로 진실한 것이 있다. 바로 내 사랑은 더 절실하고 가치있는 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13. 나는 그 사람의 아토피아를 발견한다. 위대한 순진함과, 그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는 그만의 독창성을. 나는 그를 그 모든 평가에서 제외시킨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에 관해 말할 수 없다. 모든 수식어는 거짓이며 고통스럽고 잘못된 것이며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 사람은 진실로 무어라 특정지을 수 없다. 그를 평가한다는 것은 너무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 사람의 독창성 앞에서 나는 자신이 그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독창성의 진짜 처소는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우리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독창적인 관계이다. 대부분의 상처는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모든 사람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질투해야 하고, 버림받아야 하고, 또 욕구불만을 느껴야 하는 둥둥. 그러나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 이른바 질투라는 것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는 관계가 된다. 그 관계는 어떤 담론이나 결론도 부재하는 진정으로 독창적인 관계이므로. (이건 가정에 불과하지 않는가. 사랑은 결국 상투적으로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된다. 사르트르와 보부와르는 정말 행복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지 않는 척, 질투하지 않는 척, 버림받지 않은 척, 욕구불만이 아닌 척 하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건가? 그렇다면 그건 거짓이다. 담론이나 결론도 부재하는 독창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건, 철통 같은 이성의 통제 아래 놓인, 교조적인 사랑이다. 변하지 않았다고 몸부림쳐도, 뱀이 계속 허물을 벗듯, 관계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된다. 그렇기에 정답이 없는 문제와도 같은 것이다. 누구나 절반의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

14. 검은 안경 : 이것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지 아닐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정념을 어느 정도로 감추어야 할지를 자문하는 문형이다. 바로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을 감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얼버무린다. 내 정념을 조금만 보여준다.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거기에 진짜 영웅적인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트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완전히 꾸민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뭔가 감추고 있다는 것을 좀 아세요.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다. 정념은 동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그것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가면을 가리키며 걷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내가 울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하여 그것을 안보이려고 나는 검은 안경을 쓴다. 이 의도는 계산된 것이다. 그는 금욕적으로 의젓함을 보임으로서 도덕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가련하고도 감탄할 만한, 어른이자 아이이고자 하는 일종의 도박을 하는 것이다. 그가 무슨 일이 있나요, 라는 질문을 하도록. (귀엽지만 동시에 역겨운 가장. 하지만 가장 인간다운 가장. 숨기면서 드러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보이는 눈물겨운 노력. )

15. 아아, 그의 주위에는 왜 그토록 사람들이 많을까? :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안착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어떤 계약상의 실제적이고도 감정적인 시스템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자신만이 거기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며, 부러움과 비웃음이 섞인 모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여기 한 놀이가 있다. 아이들 숫자보다 의자가 하나 모자르다. 부인이 피아노를 치는 동안 아이들은 빙빙 돌다 피아노를 멈추면 각자 의자에 앉는다. 가장 서투르고 덜 난폭한, 혹은 재수없는 아이만이 홀로 멍청하게 여분인 채로 서 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구조. 내가 끼어들지 못하는 그 특수한 구조는 때로 가소로워 보인다. 그는 판에 박힌 삶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 구조보다도, 구조의 힘인 것이다.
그가 괴로워할 때 나는 괴로워한다. 나는 그 사람을 아파한다. 내가 아픈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아프고, 내가 그것에 무관하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나는 그 사람을 아파한다. 전율을 느꼈던 이 문장. 나는 시시각각 그에게서 버려진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순간, 그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아니면 환영에 예속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의자에 앉지 못하기에 의자를 열망한다. 그 의자가 내 것이 된다면, 더는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버려져 있는 순간 나는 가장 그를 강하게 욕망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의자에 앉으면, 욕망은 이성적인 칼날을 심장에 겨눈다. 나는 의자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이 의자는 내 것인가? 내가 앉아야 할 의자인 것인가?) 

16. 이해받고 싶어한다는 것. 나는 이해하고 싶어! 라는 나의 말은 실상 사랑의 외침이다.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나를 알리고 싶고, 포옹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 이것이 나의 외침이 말하는 진짜 내용이다. (때때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원하게 되는 아이러니. 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에게 나는 사랑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내가 들어가기를 허용받은 파티에는 가고 싶지 않다. 이해하는 사람에게 이해받는 건 너무 단순하다. 그래서 어리석을 정도로 낯선 이에서 위험할 정도로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일회용의, 24시간도 가지 못할 매력을. )

17. 어떻게 해야 할까?-처신 :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는 아주 하찮은 문제에 대해,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서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 등등의 처신의 물음을 고통스럽게 제기한다.(그 고민의 시간들은 사랑의 불투명함에 정비례한다. 확실하지 않은 근거들은 부정확한 추측을 낳는다.)

18. 계속해야만 할까? 가장 흔하고도 많이 쓰이는 물음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만약 내가 이것을 택한다면, 다시 두 가지 이상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연속은 사랑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넌 희망이 있어, 그러니 잘해봐, 또는 희망이 없어, 그러니 단념해,라는. 그러나 베르테르는 말한다. 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완강하게 선택한다네. 난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 칼을 든 자와 겨누어지는 자는 똑같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 한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 있다. 칼을 든 자는 상대를 찌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겨누어진 자는 찔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은 유예된다. 하지만 사랑은, 참지 못하고, 겨누고 있는 자를 향해 스스로 몸을 던진다. 찔릴 것을 알면서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선다. 그의 사랑이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만큼 또 끝난다. 그는 찔리고 또 찔린다. 칼을 든 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다. 그는 선택하지 않았으므로 책임지지 않는다. 사랑은 스스로 찔렸기에, 죽더라도, 그건 자살일 뿐이다.)
 

19. 내 처신의 고뇌는 하찮은 것이다. 그것의 하찮음은 끝이 없다. 만일 그가 그의 새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을 때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전화를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지금 전화하라는 뜻일까, 나중에 전화하라는 뜻일까. 그러나 내가 그에게 전화할 수 있다, 라는 것이 이 메시지의 객관적인 의미이다. 나를 정말 미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럴 수도 있다>라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바로 이 허용 때문인 것이다. (그 하찮은 결정들. 우스꽝스러운 고민들. 나는 실수하지 않으려 한다. 지난 사랑에 너무 실수가 많았기에, 실수하지 않으려 고심한다. 하지만 실수는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 죽는 순간까지, 나는, 실수로 유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는 실수를 반복하게 하는 원흉이다.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은 실수를 적게 한다. 많은 종류의 실수는, 너무 많이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20. 대수롭지 않은 어떤 현상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해석해야만 하는 어떤 기호로 분류된다. 작은 몸짓과 말, 눈빛, 혹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의 행동과 자연현상 등이 모두 해석해야만 하는 과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던져진다. 아무 것도 아닌 일 때문에 심사숙고하던 나는 곧 기진맥진해진다. 그러다가 나는 곧, 물에 빠진 사람이 즉각적으로 물밑을 치듯이, 어떤 자발적인(자발적인 것은 위대한 꿈이며 천국 권력 쾌락이다)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네가 그토록 그것을 열망하니, 그에게 지금 즉시 전화를 걸어보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해석되지 않은 기호는 미지수로 남는다. 기호를 해석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기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모호해질 뿐이다. 그리고 결국 흑백논리로 끝을 맺게 된다. 그랬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21. 어쩌다 내 손가락이 스칠 때 : 어쩌다 그 사람의 손이 내 손에 스친다. 그러면 나는 이 우연한 의미에는 초연한 채, 다만 그 접촉된 미세한 육체의 부분에만 몰두하여, 마치 성도착자처럼 그것이 대답할지 어떨지를 결정하지 않고, 그 무기력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즐길 수도 있다. 나는 도처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 의미는 나를 전율케 한다. 손을 꽉 잡는다는 것. 수많은 소설의 얘깃거리가 되어온, 손바닥 안에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 비키지 않는 무릎,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늘어뜨린 팔, 그 위로 차츰차츰 다가와 기대는 그의 머리, 그것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기호들의 천국이다. 감각의 축제가 아닌, 의미의 축제와도 같은 그 어떤 것. (그건 축복된 순간이다. 드물고 희귀하고 놀라운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광휘. 꼼짝없이 사로잡히는 마술. 그러나 유효기간이 존재하는 약. 몇 개의 커트로 기억될 뿐인, 휘발된 순간들.)

22. 대담.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한 채, 그의 사랑, 그, 자기 자신, 그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나의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어떤 미묘한 말이 달려있는 것처럼.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한편으로 모든 담론 행위는 나는 너를 욕망한다, 라는 유일한 시니피에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양분을 주고, 가지를 치며, 폭발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그 사람을 내 말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이 만짐을 얘기하며, 우리 관계에 대한 논평을 지속하고자 온힘을 소모한다.
사랑스럽게 말한다는 것은, 끝이 없는 미적지근한 소모를 의미한다.  논평하고 싶은 충동이 방향을 바꿔 대체의 길을 따른다. 처음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우리 관계에 대한 담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속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타자 앞에서도 가능하다. 나는 너에게서 그로 넘어가며, 다시 그에게서 누군가로 넘어간다. 나는 결국, 일반적인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사랑에 대한 추상적인 담론을, 사랑의 철학을 늘어놓는 셈이다. 그리하여 다시 온 길을 거꾸로 가보면, 사랑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이야기는(그 초연한 태도가 어떠하든간에) 필연적으로 어떤 은밀한 대화 상대자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그러나 내 격언의 끝 저기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으리라. (수없이 말하고 또 말한다. 우리에 대한 말은 끊임없이 다르게 규정된다. 가능성이 넘친다. 우리는 사랑 얘기를 한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지나간 사랑에 대해, 엇나간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사랑 이야기의 속살은 은밀하게 공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던가.)

23.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천국에서 내쫓는다. 사랑을 하는 나는 어느 순간, 내게 상처를 주는 이미지들(질투 버려짐 수치심) 등을 연신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자해하려 하고, 천국에서 추방하려 한다. 절망 지루 체념 명예 욕망 불확실한 처신 체면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거품들이 일정한 순서 없이 하나씩 터져나간다. 그것은 자연의 무질서 그 자체이다. 그렇게 생겨진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해 싸워진다. 나는 악마 같은 그 말들을 좀더 온화하고 완곡한 말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다시 그에 대한 상념 욕망 회한 비난 등으로 복잡해진 내 마음을 느끼면서, 다시 그 병이 재발되었음을 느낀다.(자학과 감상주의는 인간을 황홀하게 한다. 죽음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강렬하다. 나는 슬픈 나를 열망하고, 버려진 나를 꿈꾼다. 버려진 이미지가 비극적일수록, 나는 쾌락을 느낀다. 왜 하나님의 한쪽 팔 위에 악마가 앉아 있겠는가. 고통이 쾌락을 준다는 아이러니.)

24.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얼어붙은 세상이 보인다. 그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날, 그의 제안이 없는 날, 그와 안 좋았던 날, 세상은 갑자기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 나는 수족관을 바라보는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은 히스테릭한 물건으로 가득차 있으며, 내가 바라보거나 만지는 모든 것들은 나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졌을 때,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하루가 죽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조용한 편지함. 답장이 없는 새벽.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 달콤한 슬픔은, 이 세상에 온전히 나 하나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얼어붙은 진실, 잠시 망각하고 있던 진실이 고개를 드는 순간, 사랑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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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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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먼다. 단 한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 그 끔찍한 가정을 들었을 때, 상상력 있는 사람들은 일단 구역질부터 나왔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경악했다. 도대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것을, 눈으로 보는 영상으로 옮겨놓겠다니? 영화는 소설이 그리는 현실의 십분지일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은, 영상이 아니라 문자가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지옥을 형상화하고 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영화화할 수 없는, 소설로서 전부인 그런 소설인 것이다. 이 지극히 우울하고 사변적이며 퇴폐적이기까지 한 소설의 분위기는 행간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인류에게 닥칠 디스토피아의 그림은 수도 없이 많다.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결핍이나 과잉으로 인해 고통받게 될 것이다. 언젠가 석유와 식량, 물이 고갈된다. 에너지가 없으면 전기가 끊기고, 인터넷이 마비된다. 인류는 손발을 묶인 채로 절규하며 죽어갈 것이다.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 외에는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권력의 극대화로 인해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부활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과학의 발전이 왜곡되어 인간의 영혼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사이보그까지 생각하는 건 오버겠지만, 어쩌면 지금 현재도, 기계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알고 나면,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지식이나 진실이 그렇듯, 편리함도 그렇다. 편리함은 수족과 같은 도구를 제공한다. 과학은 인간의 몸에 새로운 감각기관을 심어놓은 셈이다. 그런 인간에게 문명과 과학을 제거하고 연약한 피부와 커다란 두개골만을 통해 살아가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죽어갈 것이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인간은 그 상황에 적응하리라. 앎이 부재한 상황에서 오히려 잘 적응한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러한 공포스러운 미래 중에서도 압권은, 바로 눈을 잃은 세계이다. 동물의 영역에도 머무를 수 없는, 괴물들의 세계. “사람 몸에서 그래도 영혼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게 바로 눈(190)”일 것이다. 그런데 그 눈을 잃은 사람들의 세상은? 다만 죽는 방법을 몰라 죽지 못하는 존재가 되리라. “어쩌면 눈 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180)” 인용문처럼, 눈 먼 세상의 진실은 추악하고 고통스럽다. 이성은 힘을 잃고 본능이 세상을 지배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부활한다. 숨겨져 있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나라한 얼굴을 드러낸다.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짐승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실명이라는 통증을 해소하기 전에는 그 어떤 도덕도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원래부터 눈 먼 자들은 오히려 강자가 되기도 한다. 눈 먼 자들 사이에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 구조는 여전하다. “나는 불행이나 악에 한계라는 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204)” 어느 무명맹인이 말하듯, 불행은 더 깊어지고, 악은 더 잔혹해진다.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354)” 인용문처럼 세상은 재정의된다. 우리는 얼굴이나 몸을 볼 수 없기에, 미추의 구분이 사라진다. 누가 옳은지 알 수 없기에 선악의 개념도 사라진다. 시각을 잃은 인간은 다른 감각에 의존해 더듬더듬 살아간다. 원래 세계에서 맹인이 된 사람들은 그래도 돌봐줄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눈은 없다. 불투명한 백색 공포 속에서, 눈 먼 자들은 진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지금 말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의사가 물었다. 눈 먼 사람이오.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그냥 눈 먼 사람. 여기에는 그런 사람밖에 없으니까. (185)”

마지막까지, 인간적인 유대를 나누었던 집단은 사실 ‘아직 눈이 멀지 않은’ 의사 아내가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의 품위를 유지시켜 준 것은, 두 개의 눈동자였다. 실명이 만약 심판이라면, 의사의 아내가 가장 가혹한 벌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진심으로, 여러 번, 다른 사람들처럼 눈이 멀기를 바랐다. 눈이 멀지 않았기에 그녀는 지옥을 목격해야 했고, 눈 먼 자들을 인도해야 했으며, 파렴치한 강간범과 약탈범을 살해해야 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어야 했던 예수처럼, 인류의 죄를 대신해 그녀가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처럼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다만 치욕적으로 살아남아, 지옥을 그대로 보고해야 하는 증인인 것이다. 진실을 똑바로 마주본 대가는 무겁다. 그녀는 눈 먼 자들 사이에서 눈 뜨고 있다는 중죄를 지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눈 뜬 자들의 도시>로 이어진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작품에서, 인류의 문명과 과학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실명이 아니더라도,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치명적인 전염병일지, 전쟁일지, 환경 오염일지, 아니면 운석 충돌일지, 누구도 알 수 없을 뿐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인류가 마치 멸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인간들은, 마치 지금의 부와 행복과 풍요가 영원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들만이 근심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위기가 코 앞에 다가와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다. 사소한 어긋남만으로도 붕괴할 수 있는, 문명이라는 바벨탑을 지키기 위해서, 인류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준비 없이 눈 먼 인류에게 닥칠 건, 다만 멸망일 뿐. 전지자인 작가는 소설 속의 눈 먼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지만, 과연 우리에게는 그런 자비가 기다리고 있을까?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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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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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불온한 책을 구매한 사람입니다. 빨리 없애려면 누군가에게 선물이라도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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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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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나는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 사건이 터진다. 의뢰자가 홈즈를 찾는다. 홈즈는 여러 가지 고난에 부딪히지만 결국은 사건을 해결한다. 늘상 이런 구조로 이루어져 마치 디즈니 만화의 해피엔딩을 예상하는 것처럼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홈즈의 이야기 속으로 끊임없이 빠져들어갔다. 어느날 코난 도일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홈즈 시리즈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태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 속의 인물들이 끔찍한 사건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이 위급해지고, 음모를 꾸미고, 오래된 복수를 하고는 동안 작가는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범죄들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결국 코난 도일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만, 생계가 너무도 어려워서 탄생했다는 그 계기만큼은 내게 의미심장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가의 생계는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었나. 물론 문학이 최고의 학문으로 대접을 받고, 동시에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엔터테인이었던 시절은 조금 다르긴 하겠다. 또한 치사한 대접을 받았겠지만, 궁중 시인 제도라는 것이 존재하던 시절만큼은 글쟁이=가난이라는 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물론 얼치기 글쟁이들(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일단 왈가왈부하지 말고), 시대가 문학을 외면할수록 더욱 더 문학으로 돈을 벌겠다는 환상을 품는 황당한 사람들은 일단 이런 수식에서 열외로 하는 것이 좋겠다.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는 가난한 글쟁이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글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는 선언한다.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예닐곱 살 때 이미 그것을 알았고,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허황된 생각에 빠진 적도 없었다. 의사나 정치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는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거기에만 매달려살아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 작가들은 대부분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생계에 필요한 돈은 본업에서 벌고, 남는 시간을 최대한 쪼개어 글을 쓴다.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 주말이나 휴가 때. 윌리엄 칼러스 윌리엄스와 루이 페르디낭 셀린은 의사였다. 윌리스 스티븐스는 보험회사에 다녔다. T.S. 엘리어트는 한때 은행원이었고, 나중에는 출판업에 종사했다.'

그의 선언은 적나라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그는 가난한 글쟁이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글쓰기는 돈이 되지 않는다. 글만 써서 살 수는 없다.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잡문이라도 미친 듯이 써야 한다. 돈으로 바꿀 수 있다면 번역이든, 기사든, 에세이든, 닥치는 대로 써야지 푼돈이라도 얻을 수 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돈으로 바꾸어야 한다. 간혹 운이 좋아서 무슨무슨 예술기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금방 탕진한다. 글쟁이 기질을 가진 인간들은 뻔하다. 그런데 생활력은 없는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반골 기질 때문에 타협하는 글은 못쓴다. 일례로 포르노 따위를 써서 좀 큰 돈을 버느니 서푼짜리 서평을 기고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돈을 주기야 하지만 고깝게 구는 문화예술 후원자(?)에게는 쩔쩔매고 싶지 않다. 가끔 글쓰기에 지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그조차 오래 할 수 없다. 당연히 하루 종일 투자해야 하는 일 따위는 적성이 맞지 않아 못한다! 그래도 정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여기저기에 또 미친 듯이 이력서를 넣어본다…… 그러다가 또 살만하면 일은 집어치우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 글을 이력서를 넣듯이 여기저기에다 찔러본다. 어쩌다 작품이 편집자의 눈에 들어 판권이 팔린다고 해도, 그 돈 또한 푼돈에 불과하다……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단돈 900달러에 판권을 넘기고 나서 작가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다.


이 책은 글쟁이 이력을 가진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까운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소설다운 소설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의 영적 고뇌(?), 소재의 빈곤, 글쓰기의 고통 같이 소설가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생활이 너무 절박하다. 나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글쓰기 자체의 고통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는가. 위에 열거한 대로 순수한(?) 글쟁이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막힌 소설 아닌가.


하여튼 그의 이력이야말로 정말 기상천외하다. 여기서 문화적 차이를 어느 정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나이브한 태도를 취하고[부모의 불화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장편소설을 너끈히 써낼 수 있는 국내 소설풍토(?)에 비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는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외국으로 떠나서 이것저것을 경험하고, 유조선을 타고 뱃사람(?)이 되거나 할렘 문화에 편입되고, 예술을 다룬 책이 아니라 책 자체가 예술인 책을 파는 일을 하고, 함께 글을 쓰기로 한 부인과 멕시코에 가는 등---한 글쟁이가 이토록 다양한 이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의 능청스러움은 글쓰기를 예술로 비유하지 않는다. 때로는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굽는 것이 차라리 더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비생산적인(?) 일을 줄기차게도 해댄다. 왜일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들도 널려 있다. 그런데 유독 글쓰기에 목을 매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직업을 가질 테야, 라는 식의 선언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 뿐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라고 묻지조차 않는 글쟁이라니! 그 솔직담백한 고백들과 우스꽝스러운 사건들,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겪고 느낀 일들은 모처럼 만의 독서에 통쾌함을 안겨다주었다. 소설을 읽으며 킥킥대고 웃어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던지.

어쨌든 간에, 폴 오스터는 결국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막히게 나타나서 그를 구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해주거나, 방 하나를 잡아주거나, 글쓸 거리를 제공해주는 사람을 연결해주거나, 희곡을 무대에 올려준다고 열의를 보이거나, 문예기금을 주어 한동안 그의 생을 유예시켜주는 행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입에 풀칠은 못해도 주머니에 담배는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의 글쓸 거리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지면조차 없이 살아가는 글쟁이 아닌 글쟁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인 것 같다. 말하자면, 잡문조차도 담배 한 개피와 바꿀 수 없는, 어떠한 글도 쉽사리 생산성을 가질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처럼 사는 것에 허덕허덕하면서도 결국에는 바퀴벌레처럼 끝까지 살아남는 글쟁이는 너무도 드물다! 애초에 잡문 기고와 알바 인생 따위는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남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서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더 일반적인 글쟁이의 삶이 아닌가.


내가 지나치게 회의적인 것일까. 폴 오스터가 가장 힘들었던 이삽십대는 아직까지는 문학의 죽음이라는 화두가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런데 2000년대의 한국은 문학의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1%의 예외의 공간은 있다. 그리고 그 1%의 공간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글쟁이들이 빵굽는 타자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폴 오스터의 비극적이지만 희극적인 이 자전적 소설은, 내게 있어 지극히, 소설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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