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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대화
마셜 로젠버그 지음, 캐서린 한 옮김 / 바오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비폭력대화’를 읽으면서 나는 살아오면서 나 자신과 상대에게 얼마나 폭력적인 언사를 퍼부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한편 나는 나 스스로의 느낌과 욕구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지 못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나는 상대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분노하고 슬퍼했으나,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또 수없이 많은 말로 스스로를 공격하고 자책해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서 누가 옳고 그른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책임감이 있고 없는지, 똑똑하고 무지한지를 따지는 데(35)”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 방법의 대표적인 유형은 도덕주의적 비판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는 타인의 행동은 나쁘다든지, 부정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기적이다, 게으르다, 편견에 가득찼다 - 비난, 모욕, 비판, 비교, 분석, 낙인을 찍어버리는 말)(35)”을 쉽게 내뱉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욕구의 표현인데, 모든 것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저자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습관이 ‘학습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가를 깨우치기보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비교하고, 요구하고, 비판하는 말을 배우면서 성장해왔다.(..)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 안의 생동감을 차단하도록 배운다.(..)도덕주의적 판단에 맞춰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을수록, 사람들은 외부의 권위자에 의지하게 된다. 가치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것이다.(..)인간으로서 스스로의 느낌과 욕구를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착한 노예나 온순한 부하가 되지 않는다.(45)”
심지어 모든 폭력은 가치관과 욕구의 비극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폭력적인 요구를 했을 때 사람들은 거부감을 갖는다. 만약 그들이 폭력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는 두려움과 죄의식, 수치심, 책임감, 의무감 등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러한 요구를 자신과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악을 근절하기는커녕 확산하는 데 기여한다. “만약 파괴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없어진다면, 이 인류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이나 그에 대한 보복 행동 등이 아니라, 온순하고 책임감을 결여한 현대인들이 각종 야비한 계율에 비열하게 복종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끔찍한 역사, 또 앞으로 일어날 더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반항하고 길들이기 힘든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데 있다.(조르주 베르나노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자신을 비판하고 억압하며, 타인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율적인 동기도, 내적인 욕구에 대한 탐구도 없다.
내력(난 알코올중독자니까 술을 마신다), 다른 사람의 행동, 권위자의 지시, 집단의 압력(친구들이 피워서 담배를 피운다), 제도적 정책, 규칙과 법규(규칙에 어긋나므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 성별, 사회적 지위, 연령에 따른 소임(일하러 가기 싫지만 나는 가장이니까 가야 한다), 억제할 수 없는 충동.(먹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어)(41)
비폭력대화의 법칙은 다음 4가지이다.
1. 구체적 행동을 관찰한다.
2. 관찰한 바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표현한다.
3. 그러한 느낌이 들게 하는 욕구, 가치관, 소망사항을 찾아낸다.
4.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부탁한다.(24)
행동을 관찰하는 것과 평가하는 것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가치 판단을 내리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렸을 적 나는 어머니가 ‘언제나, 결코, 절대로, ~할 때마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소름이 끼치고 지긋지긋했다. 그건 나를 규정하고 평가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방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방을 어지럽혔고, ‘매일’ 늦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주’에 세 번 늦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구별되지 않았으며, 도덕적 판단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게으르고 멍청하고 싸가지없고 못된’ 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또한 그런 태도는 암암리에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가치 판단하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떤 친구에게 ‘이기적이다’라거나 ‘허영심이 많다’라고 규정하면서, 내가 당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그들에게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 평가와 관찰 구별하기( 평가 ⇒ 관찰)
1. ~이다라는 표현 : 인심이 매우 좋은 사람이다. ⇒ 그는 내가 같이 있을 때 걸인을 보면 언제나 적선을 했다.
2. 평가를 내포하는 풀이말을 쓰는 것 : 그는 너무 늑장을 부려. ⇒ 그는 시험 보기 전날 밤에만 공부를 한다.
3. 다른 사람에 대해 자신이 추측한 내용을 사실이라고 암시하는 말. : 그 사람은 그 일을 제 때 못 끝낼 거야. ⇒ 내 생각에는 그가 일을 제 때 못 끝낼 것 같다.
4. 사실과 추측을 혼동 : 균형 잡힌 식사를 하지 않으면 건강을 해칠 거야. ⇒ 네가 균형 잡힌 식사를 하지 않으면 건강을 해칠까봐 걱정돼.
5. 지칭 대상이 구체적이지 않을 때 : 소수민족 사람들은 집 관리를 소홀히 해. ⇒ 나는 그 거리에 사는 소수민족 일가족이 집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걸 본 적이 없어.
6. 능력을 의미하는 표현을 쓰는 것 : 그는 형편없는 축구선수야. ⇒ 그는 20차례 경기에 나갔는데 한 골도 넣지 못했다.
7. ‘어떠어떠하다’는 말로 평가하는 것 : 그는 못생겼어. ⇒ 나는 그의 외모에 끌리지 않아.
상대방의 행동을 관찰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정확하게 판단한 뒤, 그 느낌에 숨어 있는 동기와 욕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상대에게 구체적인 부탁으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비폭력 대화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건 실제로 적용하기가 무척 어렵다. “나는 36년간 내가 원하는 것을 네 아버지가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났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네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한 부인의 말은 아주 일반적이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직접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며, 부탁을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 주저하며, 결국 침묵한다. 그리고 상대가 그걸 알아주지 않는 것에 고통스러워하며, 분노하고, 원망한다. 사실 한 번도 부탁한 적이 없으면서도! 한 교장선생의 엄청나게 긴 훈화에 짜증이 날대로 난 선생님들이, 저자의 조언대로, “당신의 말은 너무 지루하고 반복적이어서 듣기 힘들다”라는 그들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교장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난, 몰랐습니다. 왜 당신 중 누구도 그런 말을 내게 해 주지 않았습니까?” 만약 당신이 어떤 사교모임에서, 지루하고 설명적인 얘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을 때, 상대가 중간에 그걸 멈춰주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행동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아니라 도움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180)”
한편 부탁과 강요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남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제발 그 양말을 바닥에 막 던져놓지 말아요!)은 잘 부탁하지만 ‘실제로 원하는 것’(나는 당신이 양말을 벗으면 바로 세탁기에 넣었으면 좋겠어요)은 잘 부탁하지 않는다. 한편 ‘막연하고 추상적인 말’을 사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당신이 집을 더럽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상대가 자기 마음대로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분노를 느끼는데, 그 원인을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면 좌절감과 우울증을 느낀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오는 길에 사오라고 한 걸 또 안 사왔어요? 정말 짜증나네.” 이런 말을 들은 남편은, 짜증난다는 기분의 표현에 불과한 건지, 다시 나가서 사오기를 바라는 건지 알 수 없게 되고, 그냥 감정적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느려처진 열차는 내 평생 처음 본단 말이오!”라고 외치고 있는 남편에게,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요? 나가서 열차를 밀란 말이에요?”라고 부인이 대꾸한다면, 두 사람은 전혀 소통을 할 수 없는 셈이 된다. 남편이 원하는 건 공감이었다. “제 시간에 가지 못할 것 같아서 화가 나는 거군요?”라는 대답이 공감하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세요”라는 말도, “이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방해 요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119)라고 바꾸면, 훨씬 정확한 전달이 된다. 부탁을 할 때는 진심으로, 자기의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해야 한다. 그리고 부탁이 받아들여졌을 때만 부탁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그건 강요가 되는 셈이다. “그는~ 해야 한다, 그는 ~하기로 되어 있다. 나는 ~할 자격이 있다. 내가 ~한 것은 정당하다. 내게는 ~할 권리가 있다.(128)”라는 표현들은 부탁이 아니라 강요가 되는 것이다.
한편, ‘공감하기’ 파트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공감은, “누군가가 비판하려 하지 않고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딸이 어느 날 “난 너무 못생겼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렇지 않아. 네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멋져!”라고 대꾸했다. 딸은 아빠를 쏘아보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딸이 원하는 것은 공감이었다. “오늘 네 모습에 실망한 일이 있었니?”라는 대답이 공감이었다는 거다. 나는 이제껏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그런 적 있어”라는 말이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다르다. 공감은 일단 ‘선입견과 판단’을 떨쳐버린 후에 가능하다. 우리는 “공감하는 대신에 조언을 하거나 상대를 안심시키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며, 우리의 견해나 느낌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공감이란 우리의 모든 관심을 상대방이 말하는 것 그 자체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고, 이해받았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급한 반응이 오히려 공감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좌절감을 안겨줄 수 있다. 우리는 남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따라, 상대가 듣기 좋아한다고 추측하는 말을 골라 한다. 아들이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위로 삼아 하는 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도 똑같이 남을 위로해왔다는 사실이 더욱 그를 가슴아프게 했다.(140) 심지어 심리치료상담가들도, 공감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니었다. 상담자들은 오히려 도와주려는 이유 때문에 공감을 하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다. “살기 싫다”라고 토로하는 환자에게 상담가들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이런 증상이 언제 시작되었나요”라는 거였다. 전문가는 문제를 분석하고 치료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려는 것인데, 이건 공감이 아니라는 거다. “그 사람이 겪는 고통에 온전히 함께 있어 주는 것. 이 점이 지적인 이해, 혹은 동정과 공감이 다른 점이다. (142)” 우리가 공감이라고 착각하며 하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조언 : 내 생각에 넌 ~해야 돼.
한술 더 뜨기 :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더한 경험도 있었는데...
가르치려 들기 : 이건 네게 정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위로하기 :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최선을 다 했어.
다른 이야기 꺼내기 : 그 이야기 들으니 생각나는데.
단정해버리기 : 기운내.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동정하기 : 참 안 됐다.
심문하기 : 언제부터 그랬어?
설명하기 : 내가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정하기 : 그건 그렇게 일어난 게 아니야.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어떤 환자가 “죽어버려야지”라고 말할 때, 간호사가 “그런 말씀 마세요.”라고 대답하지 않고 “돌아가시고 싶을 정도로 힘드세요?”라고 물었을 때 그 환자는 마음을 열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음의 지문을 보고, 공감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구별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공감하며 듣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구별하기
1. 내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 완벽한 사람은 없어. 너무 자신을 닦달하지 마!
2. 외국인 이주자들은 모두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야 해. / 정말 그렇게 하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니?
3. 너는 신이 아니야! / 너는 내가 이 문제를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를 바라서 짜증이 나는 거니?
4. 너는 나라는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해. 나 없이 네가 어떻게 살지 궁금하구나. / 그렇지 않아! 나는 네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
5.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 내가 그런 말을 해서 마음이 상했니?
6. 남편을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나요. 내가 필요할 때는 결코 옆에 없어요. / 남편이 지금보다 더 오랫동안 당신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7. 내 몸무게가 점점 늘어나서 아주 짜증나. / 달리기를 하면 도움이 될 거야.
8. 나는 딸아이 결혼 준비 때문에 걱정돼. 신랑 쪽 집안 사람들은 결혼식 계획을 자꾸 바꿔. / 신랑 쪽 사람들이 계획을 바꿀 때마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그 사람들이 좀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서 아주 속상하구나?
9. 나는 사전에 아무 연락없이 친척들이 방문하면 사생활을 침해받은 기분이 들어.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예전에 부모님이 내 생각을 무시하면서 당신들 마음대로 내 일을 결정하던 게 떠올라. / 네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어. 나도 그런 기분이 들곤 했어.
10. 당신은 내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아. / 나는 당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어.
저자가 제시한 답과 예시 대답.
1. 공감하지 않고 안심하시키려 한다. “ 그 일에 대해 다른 결과를 원했기 때문에 실망스러운 거니?”
2. 가르치려 든다.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 방안을 찾고 싶은 거구나?”
3. 공감.
4. 반대하고 방어하려 한다. “네가 하는 일에 대해 감사와 인정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실망스럽니?”
5. 책임감을 느낀다. “네 부탁에 내가 따라주었으면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마음 상했니?”
6. 부분적 공감.
7. 공감이 아니라 조언. “네가 원하는 몸무게를 유지하기 원하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거니?”
8. 공감.
9. 자신이 말을 이해했다고 가정하고, 그의 말에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려 한다.
10.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한다. 당신은 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 좀 더 가까운 느낌이 들기를 원하기 때문에 불만스러운건가?
어떤 범죄자나 테러리스트 집단이 폭력을 표현하는 이유는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에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한 여자가 자신을 공격하려 했던 약물중독자와 대화를 시도한 일화가 있다. 그는 약물중독센터에 방이 있는지를 요구했고, 여자는 방이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다른 곳을 안내하려 했다. 남자는 화를 내며 여자를 바닥에 쓰러뜨린 뒤 목에 칼을 들이댔다. “거짓말하지 마, 나쁜 년! 방 있는 거 다 알아!” 순간 여자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네가 ‘하지만’이라고 말대꾸할 때마다 죽여버리고 싶어!” 여자는 “하지만 방이 없는 걸요!”라고 말하는 대신, “정말 방을 받고 싶기 때문에 아주 화가 나신 것 같군요!”라도 대답했다. “내가 중독자일지는 몰라도 사람 대접을 받을 자격은 있어. 모두가 나를 깔보는 데에 이제 신물이 나. 부모도 나를 사람 취급해주지 않아. 나는 사람 대접을 받고 말 테다!”“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시군요.” 이런 식의 대화가 한참 이어지자 그는 칼을 집어넣게 되었다. “그는 괴물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극악무도해보이는 사람도 그저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들의 말과 행동 때문에 인간적인 면을 보기 어렵지만, 그 남자의 욕구에 주의를 집중하니, 절망에 빠진 한 인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죠.” 한 범죄자의 말도 기억에 남는다. “당신이 오늘 아침에 내게 가르쳐준 것을 2년 전에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나와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이지 않았을 거예요.(214)”
한편 <우리 자신과 연민으로 연결되기> 챕터에서는 자신의 욕구와 느낌에 귀기울일 것을 조언한다. 우리는 우리를 깎아내리는 데에 익숙하다. 내가 가진 자아상은 수많은 요구와 의무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일의 목록은 나를 억압하고 있었다. “해야 한다”는 말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율성의 욕구가 위협받으면 인간은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나는 지금 못난이 짓을 하고 있어! 무슨 조취를 취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감을 느낀다. 우리 인간은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숱하게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로 인해 고통받는다. 나는 나를 질책하고, 무시하고, 깔본다. “이것 봐, 너는 또 실패했어. 그럴 줄 알았지”라는 자조적인 표현으로 스스로를 괴롭힌다. 하지만 저자는 “내가 지금 후회하는 그 행동을 했을 때, 그때 나는 어떤 욕구를 충족하려고 했는가?”라고 질문하라고 조언한다. “과거의 행동을 뉘우치는 자신과 또 애초에 그 행동을 선택한 자신을 같이 연민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애도와 자기 용서를 거치는 과정은 배우고 자랄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를 해방해준다. 우리는 그 욕구들과 조화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역량을 키우게 되기 때문이다.(195)”
사실 내가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 중에는 사실 내 욕구와 부합하지 않는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 억지로 하면서 해야 한다고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단호하게, “즐겁지 않은 일은 그만두라”고 말한다. 이건 이기적이거나 무책임한 태도가 아니다. “행동을 선택하는 동기가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 의무 등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싶은 마음(197)”으로 바뀌면 나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순간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의 동기가 “돈과 인정, 수치심, 죄책감, 의무감”이라면, 이는 재고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 좋은 부모, 착한 시민, 성실한 노동자, 좋은 친구라는 평가를 받는 데 중독되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도록 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우리에게 벌을 줄 것 같은 일은 기피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 힘을 들이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도록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믿는 태도로 사는 것은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201)
또한 저자는 분노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네가 오지 않아서 실망했어, 너는 나를 화나게 해, 네가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이 아파!”라고 우리는 주장하지만, 저자는 “다른 사람의 행동은 결코 우리 느낌이 원인이 아니다.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분노한 것이다. 우리 느낌의 원인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그때의 자기 욕구(210)”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생각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이러한 생각에는 저항을 느낀다. 나는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악인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절대적인 악인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도덕이나 다수의 불우한 이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악인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는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과감하게도, “무책임한 행동, 의식적인 행동, 탐욕스런 사람, 도덕적인 사람, 같은 것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얼마나 지지하느냐에 따라, 그만큼 이 지구상의 폭력을 북돋우는 셈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211)”라고 말한다. 범죄와 테러, 전쟁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의분’에 동참하는 대신, 나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욕구에 공감으로 귀 기울이기를 권한다. 그렇게 하려면 다음과 같은 연습을 거듭해야 할지도 모른다. 곧 나는 ‘그 사람들이 ~했기 때문에 화가 난다’를, ‘나는 ~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가 난다’로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211)”을 권하고 있다.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내가 상대방이 악하다고 규정하고 상대를 비난할 때, 상대는 견고한 자기 보호의 틀로 나에게 맞설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내가 정부, 조중동, 대기업, 기독교 집단을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비난하는 것이, 그들의 태도를 바꾸게 할 수 있는 걸까?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들의 폭력을 줄어들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비폭력대화’는 유효할까? 사실은 절망적이다. 그들은 애초에 대화를 할 생각 자체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간디의 비폭력 정신은 위대할지 모르지만, 비폭력이 현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할 때 나는 절망감을 느낀다. 수많은 사람들이 ‘높으신 분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망루 위에 올라가고, 단식을 하고, 분신을 하는데도, 끄떡도 하지 않는 사람들과 비폭력대화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해결할 수 없었던 의문은, 이런 거였다. ‘비폭력대화’는 적어도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아무런 연고 없는 타인과도 가능하고, 심지어 범죄자와도 가능하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소통불능이라는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집단’과 ‘비폭력대화’가 가능하냐는 거다.
너무 넓은 의미로 흘러가버린 감이 있지만, 어쨌든 ‘비폭력대화’는 내 말하기 방식뿐만 아니라 사고 체계 자체를 되돌아보게 해 준 좋은 책이었다.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얼마나 실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