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대 사회 - 인간과 철학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 이학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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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빈곤과 더러움, 그리고 비열한 안일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은 생존 자체를 정당화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후의 인간(ulitmate man)이다.……
아아, 인간이 더 이상 어떠한 별도 낳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이다.
아아!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멸시할 줄 모르는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의 시대가 오리라."

니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중

예측불가능한 생의 불안

1. 불안의 요인들

나의 삶을 규정짓는 외적 조건들에는 국적과 나이, 성별, 직업, 출신 학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는 이러한 규정이 갖는 공통성을 뛰어넘는 특수성 또한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현실적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 왔으며, 어떤 취향을 지니고, 어떤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고, 인정받는 것은 다분히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사회적 관계는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고, '함의된 것처럼 보이는' 가치 속으로 나를 종속시킨다.

나는 사회라는 직선의 레이스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선수이며, 나와 내 옆의 선수가 도달해야 하는 지점은 확실하게 보인다. 그러나 내가 왜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골인 지점에 도달하면 나의 달리기가 멈출 수 있을지 장담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는 멈추어서는 안 되며,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지상명령'을 듣는다. 나는 마치 달리기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골인 지점이란 사회적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시험이나 세속적인 성공, 안정의 획득, 정상적인 삶의 궤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달리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다른 골인 지점을 정해놓고 달리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상명령'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이므로, 따르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지 않을까, 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결국 나는 어떤 레이스이건, 마음 놓고 달릴 수 없다.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는 이러한 갈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일단 불안의 요인으로 개인주의를 꼽았다. 근대 이후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자유와 평등을 어느 정도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복종해야 할 절대 군주나 사명이 없으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지평은 그 어느 시대보다 존중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우주적 존재의 일원'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할 수 없는 현대인은 실존의 부재감에 시달린다. 거대목표가 없는 현실은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부채질할 수 밖에 없다. 진리와 선악의 절대구분이 사라진 현대에서는 누구나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상대주의란 대부분의 경우 신념을 상실케하며, 눈에 보이는 뚜렷한 현실 문제에 개인을 종속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인간은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비슷하다. 최후의 인간은 더 이상 "어떠한 별도 낳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존재이다. 이들에게 있어 개인의 생존과 쾌락, 안정과 사회적 성취는 뚜렷하고도 결과론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들은 개개인의 삶을 지극히 단조롭고 평준하게 만든다. 일상화되고 반복되는 삶은 더 이상 새롭거나 창조적일 수 없으며, 개인을 권태 속으로 한없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 불안의 요소는 도구적 이성의 지배이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근대 시대의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기계를 만들어내는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발전해야 한다는, 변화해야 한다는, 결과물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은 근대의 '지상명령'이었고, 개별적 인간은 자연을 변형시키며 이런 지상명령을 따르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인간은 그와 같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 있다. 자연은 무한한 재료가 아니며, 한번 훼손된 것은 빠른 시일 내에 결코 재생될 수 없다. 이는 도구적 이성의 성취물인 신제품이 나오기 무섭게 또 다른 업그레이드 제품이 나오는 현상과 대비된다. 교환가치와 물신성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는 인간 또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테일러가 주장하듯이, 현대문명의 놀라운 쾌거를 이룩한 근대의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중세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이성을 자각한 새로운 인간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이러한 "도구적 이성의 원천"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자의 총체적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현상들에만 주목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현대 의학자를 예시로 든 것처럼, 도구적 이성은 마치 삶의 수많은 문제들이 정확하게 산출되는 기계적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또한 결과론적인 효용성을 지닌 존재만이 가치있다고 믿는 사회 속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훼손당할 수 밖에 없다.

세 번째 불안은 자유와 자결권의 상실에 대한 문제이다. 현대의 인간은 제도적인 존재이며, 사회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혹은 사회나 국가, 시장)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은 이런 제도에 수정을 가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식의 결론을 내리기 쉽다. 현실상 정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개인은 이런 현실정치의 결과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과정 속에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낀다. 이러한 개인들은 점차 현실정치와 멀어지며, 최소한으로 행할 수 있는 정치적 행사권마저 포기하게 된다.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에 도취되어 있으면서, 거대조직이나 기관에 대해 아무 것도 행사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테일러는 이러한 불안감들을 분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대안은 "자기진실성의 이상"이다.

현대의 이상이란 무엇일까. "부러워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영웅호걸담이 아니라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성공일 뿐"이라고 역설하는 블룸의 말처럼, 현대인의 이상은 더 이상 고결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앞에서 예를 든 레이스의 경우처럼, 나는 보다 빨리 골인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탈락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타인에 대해 비윤리적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출발 지점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가 대두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평등하지 못한 출발점을 '어쩔 수 없는 악조건'으로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또한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식의 말이 통용되기도 한다. 이는 성공과 생존이라는 지상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식의 비윤리적인 수단도 가능하다는 식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어떠한 개인이 제도의 허점이나 우연성으로 큰 부나 권력을 쥐게 된다 해도, 이는 개인의 명백한 탓이라기 보다 사회 제도의 모순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식으로 드러난 현실 문제들은 이러한 '현대적 의미의 이상'을 더욱 왜곡시킨다. 그러나 개인에게 있어 제도의 모순을 파헤치는 것보다는, 현실논리에 순응하는 것이 훨씬 손쉬워 보인다. 또한 앞에서 말한 세 번째 불안 요인에 의하면, 제도 앞의 인간은 스스로를 더욱 무기력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는 사회전반에 팽배한 패배주의를 더욱 심화시키며, 제도적 모순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진실성의 추구'란 개념은 의미심장하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시대에나 합의된 사회적 윤리가 반드시 존재한다. 이는 수많은 철학가와 사상가가 인간의 존엄과 인권, 자유과 평등, 정의에 대해 논하고 행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만 봐도 명백하다. 그러나 현실논리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사회적 윤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명확한 불평등이나 부조리 앞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면 이를 외면해버릴 가능성이 많다. 인간적 동기란 그렇게 "도덕적 이상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도 인간들을 행위하게 만드는 비도덕적인 것들일 뿐"인 것이다.

자기 진실성은 일단 사회와 도덕 문제에 눈감지 않으며, 부당함을 느낄 때 거부감을 표할 수 있는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적 연대가 지원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진실성을 갖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또한 자기 진실성이라는 것은 테일러가 말하고 있는 세 가지가 일단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입장과 관점을 상대주의적인 것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기 진실성이란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일 것이다. 자기 진실성이란 규정된 가치의 추구나 증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타인의 삶에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의미지을 수 있다. 문제는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며, 그것이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속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삶의 행로를 따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사회라는 거대의 바퀴의 살에 지나지 않다고 규정짓는 것이 문제다. 요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결국 내가 택해 일생을 영위하는 일에 회의감만 느끼고, 일상의 무력감 속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삶은 진실하지 못한 삶이다.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이란 정서와 느낌이라고 말한다. 이는 "내면의 목소리"이며, "내적 본성과의 접촉"인 것이다. 자신의 삶과 본연적인 독자성에 진실하다는 것이 나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가치들을 끊임없이 논의하여, 진실성을 발굴해야 한다. 테일러는 이를 "투쟁"이라고 표현한다. 이 투쟁은 전투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다양한 지평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다양한 가치를 위하여 투쟁은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자기진실성을 보여주는 한 방법에 속한다. 근세 이후, 예술은 더 이상 미메시스가 아니라 독자성을 표출하는 총체적 창조품이 되었다. 세계를 표현한다는 말은, 세계 안에 숨어 있는 총체성을 발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은 꼭 예술작품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인 삶도 있으며, 예술적인 일상도 있을 수 있다. 예술가란 일상과 삶 속에서 총체적으로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그다지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치열한 경쟁과 생존의 투쟁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자기 진실성을 갖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다. 나의 존엄을 지키고, 나의 독자성을 발현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 내가 원하는 여가 생활을 즐기는 일 등은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전제되어야 한다. 눈앞에 닥친 생존의 문제는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된다. 일상적 삶 속에서 이러한 충돌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결국 현실은 꿈과 조화시킬 수 없으며, 생존 문제는 이상과 조화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식의 대안을 찾아야만 하는가.

정치의식을 함양하는 것은 자기 진실성의 추구에 동반한다. 테일러는 특히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경계한다. 제도에 대한 개인의 무력감은 종종 '공동체적 이상'을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공동체적 이상'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의 수정에 참여하고, 보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즉각 반영할 수 있는 사회이다. 테일러는 "올바른 형태의 민주적인 자발적 행동"만이 도구적 이성의 지배 권력을 되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테일러의 두 번째 대안이 곧 "자발적 정치운동"이다. 이 정치운동은 소규모 집단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야 하지만, 거대 집단 안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전자는 다원화된 가치를 서로 인정하고 조율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보다 투명한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함이다. 근본적인 사회 구조가 평등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지 않으면, 개인의 자기진실성 추구는 매우 곤란해진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 내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 자신의 이상과 다르고, 이상을 추구하는 일이 현실을 배반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목표란 살아남는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삶의 목표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서로의 목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능동적인 개인들의 몫이다. 결국 이러한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제도적 규정이 아니라 개개인의 정치적 의식인 것이다.

3. 창조적이고 다원화된 개인주의를 위하여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이 책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언급되기도 하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는 파편화된 생의 추구가 아니다. 인간관계가 분절되기 쉽고 미래가 불확실한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개인주의를 추구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어떤 개인주의를 추구하냐는 것이다. 타인이라는 이름의 개인을 존중할 때 자신의 개인성도 존중된다. 개인주의는 보다 넓은 의미의 관용성이 함의된 개념이다. '똘레랑스'라고 흔히 표현되는 관용은 공동체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이다.

또한 각각의 개인들은 보다 넓은 의미의 정체성을 획득해야 한다. 앞에서 논의된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일은, 곧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속해 있는 집단이나 외적 조건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개인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총체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나아가 창조적인 개인들은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지평을 더욱 넓혀가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 복지국가 같은 경우에 소득차이에 따른 세금규정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평균 복지 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느 정도의 평균적 합의하에 자유경쟁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개인의 경제적 성취욕이 감소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지만, 전반적인 문화 수준은 당연히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높은 문화 수준이라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여가를 충분히 누릴 시간이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어느 정도의 경제적 평등이 이러한 문화적 상승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국가에서 추구되는 개인주의는 다원화된 개인주의일 수 밖에 없다. 개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동일한 이상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상을 성취하는 데 있어 심각한 장애가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개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창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적 이상이 아닌 사회적 이상 또한 궁극적으로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갖추었을 때, 불안하고 예측불가능한 이 현대사회에서 보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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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갇힌 사람들 - 불안과 강박을 치유하는 몸의 심리학
수지 오바크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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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린 시절 형성된 몸 관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풍부한 상담 사례를 통해 지적한다. 울어도 부모가 반응하지 않으면 아이는 '뭔가 옳지 않다'고 느끼며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해 방어 기제를 작동한다. 즉'거짓된 자기'를 만든다.

2.우리는 하루에 평균600개 정도의 조작된 이미지를 접한다. 우리의 거울뉴런은 그 모습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임에도 불구하고, 모방하려 애쓴다. 결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이미지를 위한 거대한 산업이 미용,다이어트,성형인 셈이다.

3.있는 그대로의 몸은 절대 아름답지 않다. 몸은 어디까지나 개선하고 발전시켜야 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몸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 심지어 아기 사진도 포토샵으로 조작하여 아이는 커서 자신이 아닌 '원하는 아기'를 보게 된다.

4.우리는 아름다움에 열광할 때 상처받은 피해자가 아닌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주체적인 사람처럼 환영받는다. 갖지 못한 이미지를 스스로의 잘못으로 돌리는 시선에 익숙해져있다.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아름다움의 기준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5.다이어트 산업은 고객의 실패에 승배가 달려 있다. 그러니까 다이어트 프로그램은 대개 실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너무 성공적이라면 고객들이 다시는 구매하지 않는다. 그 결과 대부분의 여성들은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자신은 상상하지조차 못한다.

끝. 병과 비만에 대한 증오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다.몸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인데도 서구화된 한 이미지만이 축복받는다. 몸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통렬한 문제제기가 빛나는 책. 그러나 여전한 건 그 감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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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눈 마음을 여는 따뜻한 이야기 1
위베르 멩가렐리 지음, 김문영 옮김 / 샘터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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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리내어 울지 않는 아이가 있다. 눈물은 언제나 그저 줄줄 흘러내린다. 아이의 아버지는 죽어가고 있다. 아이는 감정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느날 갑자기 솔개를 희망한다. 새장에 갇힌 솔개를 집에 데려오고 싶어한다. 그 솔개는 아버지와 아이를 연결해준다. 아이는 있지도 않은 솔개 사냥 이야기를 들려주며 병석의 아버지와 소통한다. 그러나 아이는 가난하다. 아버지의 연금과 아이가 양로원 노인들과 산책을 하는 대가로 받는 불규칙적인 임금이 수입의 전부다. 아이는 돈을 모으고 또 모은다. 가게 앞에서 언제나 솔개를 바라본다. 그 솔개가 겨울에 얼어죽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하지만 아이의 소망은 너무 멀어 보인다. 아이는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을 알고 염치가 있다. 아이는 공짜로 커피를 마시는 아저씨에게 모은 돈으로 고급 커피를 사다드린다.

어느날 아저씨가 아이에게, 자기 누이가 고양이를 처분해달라고 했다며, 넌지시 그 일을 제시한다. 곧 울듯이. 아이는 그 비열한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작은 고양이 영혼들이 떠도는 집에서 울지 않는 아이는 깊은 우울에 시달린다. 아이가 고양이를 익사시켜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양로원의 한 노인은 늙고 병든 개를 맡긴다. "꼭 하지 않아도 돼."라고 아저씨가 물었지만 아이는 덤덤하게 "할게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는 눈이 많이 온 그 날, 그 개와 함께 철길을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개가 더는 못 따라올 때까지 멀리 가서, 개를 버리고 온다. 그러나 개줄이 떨어진 자리와 개발자국을 보고 숨이 막힌다. 울지 않으려면 생각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 않으면 슬프지 않을까? 아이는 작은 울음이다. 아저씨가 "세상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고 했을 때, "그 일은 제가 했잖아요."라고 아저씨를 위로한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 솔개를 산다. "빌어먹을, 넌 그 솔개를 사서 대체 뭐하려는 거야?"라고 소리치는 상인을 뒤로 하고, 아이는 그동안 닦고 또 닦았던 새장 속에 솔개를 넣는다. 아버지에게 이젠 좀 더 실감나는 솔개 사냥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솔개에게 먹이를 주는 그 순간의 의례적인 대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안부 인사다. 그러던 어느날 죽음을 예감한 아버지가 말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너와 영원히 함께 있을 거다."
아버지의 그 말씀에 나는 갑자기 목 뒤가 쭈뼛해지더니 무언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소름은 몸을 타고 계속 내려가 무릎까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소리 없이 나를 텅 비워버렸다. 아버지는 내 상태를 짐작이라도 한 듯 속삭이셨다.
"아...미안하다. 나를 용서해다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이는 솔개를 갖고 있다는 실감을 더는 갖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울지 않는 아이는, 조용히 부츠에 윤을 낸다. 우는 건 어머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무심하다기보다 잔인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밤마다 어디론가 사라져 새벽에 들어온다. 어머니는 아이를 종종 끌어안고 운다. 그리고 밤에 외출할 때 스위치를 켜고 계단을 내려가 아버지의 잠을 설치게 만든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스위치를 켜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는 법을 알려준다. 그런 아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불필요한 읽을 거리라 여기고 있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 읽은 텍스트가 전부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소설을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실이 소설을 압도하기 때문에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혹은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라고도 말한다. 인문서적이나 실용서적에 비해서 소설읽기는 말 그대로 유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소설들도 많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재미도 의미도 없고, 그저 종이 위에 적힌 문자인 말들. 이제 갈수록 문자와 예술을 가려내기가 힘들어진다. 책을 팔기 위해 말은 과장되고,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한 독서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자기 복제만이 가득하다. 발칙한 척은 하지만 실제로는 제도권에 충실한 소설만이 제도권 안에서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발칙한 척은 하되 제도를 공격해서는 안 되는 '착한 소설'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작고 진실한 목소리가 있다. 거창한 이야기가 없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들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단순한 추체험이 아니라 남의 마음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울지 않는 아이의 마음을 경험하게 한 '마지막 눈'도 그러했다. 아이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걷고 달리고 말하고 일한다. 때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도 저지른다. 그 일은 아마 아이가 죽을 때까지 떠다닐 것이다. 죽은 고양이와 개의 영혼이 아이를 목쥘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한 일을 방어하지도 않고, 죄책감을 느껴 짐을 떨쳐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롯한 자기의 몫으로만 남겨, 그 고통을 받아들인다. 도대체 이 작은 아이는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물지 않으면서도 그저 줄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아이는, 얼마나 큰 가슴의 구멍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너무 아프다. 소설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아리다. 말하지 않음으로 슬픔을 말한다. 아마도, 효용이라고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인간다운 삶에 대한 탐구. 인간임을 잊지 않는, 뜨거운 가슴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영혼의 마사지. 그리고 울고 싶고 웃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감정의 정화. 김영하가 추천사에서 밝힌 '촉수 낮은 전구의 카타르시스'가 여기에 있다. 김영하의 헌사는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요약과 작품이 너무 다르다. 줄거리만으로 말해지지 않는 소설, 감정을 흔들고, 가슴을 떨리게 하는 소설, 그런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우리 시대의 어느 이야기도, 이런 방식으로 써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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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동물원
츠츠이 야스다카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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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신나는 이야기들. 상상력의 발현. 킬링타임용이지만 때때로 의미심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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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과 자지 않았어요
나딘 고디머 외 지음, 최선희 옮김 / 거송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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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병사의 모험 - 이탈로 칼비노

기차에서 우연히 자신 옆에 앉게 된 부인에 대해 과대망상을 하는 병사의 이야기. 손가락의 위치나 무릎의 움직임, 등의 기댐으로도 성적 기대감은 폭발할 수 있다. ‘모험이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병사는 긴장감 넘치는 장난-혹은 도발을 시도하고 있다. 짧은 순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오해와 미망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어쩌면 그 미묘한 순간의 진실은, 두 사람에게도 있지 않을지 모른다.

  난 당신과 자지 않았어요 - 도리스 레싱

여자의 무기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와 자지 않았다고 주장하기에 당당하다. 그의 아들과 미묘한 교류가 있었지만, 그의 비서로서 애인이라는 오해를 샀지만, 그녀는 그가 자기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수만큼의 진실이 존재하기에, 그와 그녀가 잤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이미 사실 여부를 잊었고, 그녀는 비밀로 이를 간직하고 있다.

제발 좀 조용히 해줘! - 레이몬드 카버

아내는 왜 그 일을 꺼냈을까? 기만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스스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처하고 만다. 남편은 알고 싶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아내의 외도에 대해 듣게 된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사람의 평온한 유리창이 갑자기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다시 붙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유리창을 아예 없애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래서 남편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던지고 끝내버리는 카버식 단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세 시간 전 -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거짓 기억과 착각이 빚어낸 한 편의 촌극. 불행한 기억이나 행복한 기억이나 과연 얼마나 진실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기억을 현실에 갖다 붙이면 어떤 일이 생길까? 오해는 상황극을 만들어내고, 기억의 금기를 깨뜨린 대가는 쓰디쓰다. 세 시간 정도의 해프닝은 버려도 좋을 것이다. 그런 버리기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부끄럽고 민망해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고 싶을 테니까. 잊을 수 있는 능력이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발견 - 나딘 고디머

가장 유쾌했던 이야기. 우리가 누군가와 헤어지거나 깊게 상처받았다고 해서 일반화를 해서는 곤란하다. 아직 발견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남자는 아름다운 보석을 발견하고, 주인을 찾는다. 연극을 하는 여자들, 때로는 아름답고 관능적이고, 동정심을 사기 위해 흐느끼기까지 하는 그녀들은, 반지의 주인이 아니다. 이윽고 진짜 반지의 주인-그것은 확신할 수 없지만-이 나타나자, 그의 기다림은 끝난다. 반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아름다운 여자와 평온하게 함께 할 생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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