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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현대 사회 - 인간과 철학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 이학사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빈곤과 더러움, 그리고 비열한 안일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은 생존 자체를 정당화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후의 인간(ulitmate man)이다.……
아아, 인간이 더 이상 어떠한 별도 낳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이다.
아아!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멸시할 줄 모르는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의 시대가 오리라."
니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중
예측불가능한 생의 불안
1. 불안의 요인들
나의 삶을 규정짓는 외적 조건들에는 국적과 나이, 성별, 직업, 출신 학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는 이러한 규정이 갖는 공통성을 뛰어넘는 특수성 또한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현실적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 왔으며, 어떤 취향을 지니고, 어떤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고, 인정받는 것은 다분히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사회적 관계는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고, '함의된 것처럼 보이는' 가치 속으로 나를 종속시킨다.
나는 사회라는 직선의 레이스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선수이며, 나와 내 옆의 선수가 도달해야 하는 지점은 확실하게 보인다. 그러나 내가 왜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골인 지점에 도달하면 나의 달리기가 멈출 수 있을지 장담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는 멈추어서는 안 되며,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지상명령'을 듣는다. 나는 마치 달리기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골인 지점이란 사회적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시험이나 세속적인 성공, 안정의 획득, 정상적인 삶의 궤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달리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다른 골인 지점을 정해놓고 달리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상명령'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이므로, 따르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지 않을까, 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결국 나는 어떤 레이스이건, 마음 놓고 달릴 수 없다.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는 이러한 갈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일단 불안의 요인으로 개인주의를 꼽았다. 근대 이후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자유와 평등을 어느 정도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복종해야 할 절대 군주나 사명이 없으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지평은 그 어느 시대보다 존중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우주적 존재의 일원'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할 수 없는 현대인은 실존의 부재감에 시달린다. 거대목표가 없는 현실은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부채질할 수 밖에 없다. 진리와 선악의 절대구분이 사라진 현대에서는 누구나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상대주의란 대부분의 경우 신념을 상실케하며, 눈에 보이는 뚜렷한 현실 문제에 개인을 종속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인간은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비슷하다. 최후의 인간은 더 이상 "어떠한 별도 낳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존재이다. 이들에게 있어 개인의 생존과 쾌락, 안정과 사회적 성취는 뚜렷하고도 결과론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들은 개개인의 삶을 지극히 단조롭고 평준하게 만든다. 일상화되고 반복되는 삶은 더 이상 새롭거나 창조적일 수 없으며, 개인을 권태 속으로 한없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 불안의 요소는 도구적 이성의 지배이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근대 시대의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기계를 만들어내는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발전해야 한다는, 변화해야 한다는, 결과물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은 근대의 '지상명령'이었고, 개별적 인간은 자연을 변형시키며 이런 지상명령을 따르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인간은 그와 같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 있다. 자연은 무한한 재료가 아니며, 한번 훼손된 것은 빠른 시일 내에 결코 재생될 수 없다. 이는 도구적 이성의 성취물인 신제품이 나오기 무섭게 또 다른 업그레이드 제품이 나오는 현상과 대비된다. 교환가치와 물신성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는 인간 또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테일러가 주장하듯이, 현대문명의 놀라운 쾌거를 이룩한 근대의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중세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이성을 자각한 새로운 인간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이러한 "도구적 이성의 원천"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자의 총체적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현상들에만 주목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현대 의학자를 예시로 든 것처럼, 도구적 이성은 마치 삶의 수많은 문제들이 정확하게 산출되는 기계적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또한 결과론적인 효용성을 지닌 존재만이 가치있다고 믿는 사회 속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훼손당할 수 밖에 없다.
세 번째 불안은 자유와 자결권의 상실에 대한 문제이다. 현대의 인간은 제도적인 존재이며, 사회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혹은 사회나 국가, 시장)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은 이런 제도에 수정을 가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식의 결론을 내리기 쉽다. 현실상 정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개인은 이런 현실정치의 결과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과정 속에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낀다. 이러한 개인들은 점차 현실정치와 멀어지며, 최소한으로 행할 수 있는 정치적 행사권마저 포기하게 된다.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에 도취되어 있으면서, 거대조직이나 기관에 대해 아무 것도 행사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테일러는 이러한 불안감들을 분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대안은 "자기진실성의 이상"이다.
현대의 이상이란 무엇일까. "부러워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영웅호걸담이 아니라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성공일 뿐"이라고 역설하는 블룸의 말처럼, 현대인의 이상은 더 이상 고결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앞에서 예를 든 레이스의 경우처럼, 나는 보다 빨리 골인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탈락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타인에 대해 비윤리적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출발 지점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가 대두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평등하지 못한 출발점을 '어쩔 수 없는 악조건'으로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또한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식의 말이 통용되기도 한다. 이는 성공과 생존이라는 지상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식의 비윤리적인 수단도 가능하다는 식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어떠한 개인이 제도의 허점이나 우연성으로 큰 부나 권력을 쥐게 된다 해도, 이는 개인의 명백한 탓이라기 보다 사회 제도의 모순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식으로 드러난 현실 문제들은 이러한 '현대적 의미의 이상'을 더욱 왜곡시킨다. 그러나 개인에게 있어 제도의 모순을 파헤치는 것보다는, 현실논리에 순응하는 것이 훨씬 손쉬워 보인다. 또한 앞에서 말한 세 번째 불안 요인에 의하면, 제도 앞의 인간은 스스로를 더욱 무기력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는 사회전반에 팽배한 패배주의를 더욱 심화시키며, 제도적 모순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진실성의 추구'란 개념은 의미심장하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시대에나 합의된 사회적 윤리가 반드시 존재한다. 이는 수많은 철학가와 사상가가 인간의 존엄과 인권, 자유과 평등, 정의에 대해 논하고 행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만 봐도 명백하다. 그러나 현실논리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사회적 윤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명확한 불평등이나 부조리 앞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면 이를 외면해버릴 가능성이 많다. 인간적 동기란 그렇게 "도덕적 이상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도 인간들을 행위하게 만드는 비도덕적인 것들일 뿐"인 것이다.
자기 진실성은 일단 사회와 도덕 문제에 눈감지 않으며, 부당함을 느낄 때 거부감을 표할 수 있는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적 연대가 지원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진실성을 갖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또한 자기 진실성이라는 것은 테일러가 말하고 있는 세 가지가 일단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입장과 관점을 상대주의적인 것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기 진실성이란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일 것이다. 자기 진실성이란 규정된 가치의 추구나 증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타인의 삶에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의미지을 수 있다. 문제는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며, 그것이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속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삶의 행로를 따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사회라는 거대의 바퀴의 살에 지나지 않다고 규정짓는 것이 문제다. 요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결국 내가 택해 일생을 영위하는 일에 회의감만 느끼고, 일상의 무력감 속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삶은 진실하지 못한 삶이다.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이란 정서와 느낌이라고 말한다. 이는 "내면의 목소리"이며, "내적 본성과의 접촉"인 것이다. 자신의 삶과 본연적인 독자성에 진실하다는 것이 나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가치들을 끊임없이 논의하여, 진실성을 발굴해야 한다. 테일러는 이를 "투쟁"이라고 표현한다. 이 투쟁은 전투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다양한 지평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다양한 가치를 위하여 투쟁은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자기진실성을 보여주는 한 방법에 속한다. 근세 이후, 예술은 더 이상 미메시스가 아니라 독자성을 표출하는 총체적 창조품이 되었다. 세계를 표현한다는 말은, 세계 안에 숨어 있는 총체성을 발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은 꼭 예술작품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인 삶도 있으며, 예술적인 일상도 있을 수 있다. 예술가란 일상과 삶 속에서 총체적으로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그다지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치열한 경쟁과 생존의 투쟁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자기 진실성을 갖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다. 나의 존엄을 지키고, 나의 독자성을 발현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 내가 원하는 여가 생활을 즐기는 일 등은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전제되어야 한다. 눈앞에 닥친 생존의 문제는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된다. 일상적 삶 속에서 이러한 충돌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결국 현실은 꿈과 조화시킬 수 없으며, 생존 문제는 이상과 조화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식의 대안을 찾아야만 하는가.
정치의식을 함양하는 것은 자기 진실성의 추구에 동반한다. 테일러는 특히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경계한다. 제도에 대한 개인의 무력감은 종종 '공동체적 이상'을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공동체적 이상'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의 수정에 참여하고, 보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즉각 반영할 수 있는 사회이다. 테일러는 "올바른 형태의 민주적인 자발적 행동"만이 도구적 이성의 지배 권력을 되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테일러의 두 번째 대안이 곧 "자발적 정치운동"이다. 이 정치운동은 소규모 집단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야 하지만, 거대 집단 안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전자는 다원화된 가치를 서로 인정하고 조율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보다 투명한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함이다. 근본적인 사회 구조가 평등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지 않으면, 개인의 자기진실성 추구는 매우 곤란해진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 내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 자신의 이상과 다르고, 이상을 추구하는 일이 현실을 배반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목표란 살아남는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삶의 목표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서로의 목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능동적인 개인들의 몫이다. 결국 이러한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제도적 규정이 아니라 개개인의 정치적 의식인 것이다.
3. 창조적이고 다원화된 개인주의를 위하여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이 책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언급되기도 하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는 파편화된 생의 추구가 아니다. 인간관계가 분절되기 쉽고 미래가 불확실한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개인주의를 추구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어떤 개인주의를 추구하냐는 것이다. 타인이라는 이름의 개인을 존중할 때 자신의 개인성도 존중된다. 개인주의는 보다 넓은 의미의 관용성이 함의된 개념이다. '똘레랑스'라고 흔히 표현되는 관용은 공동체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이다.
또한 각각의 개인들은 보다 넓은 의미의 정체성을 획득해야 한다. 앞에서 논의된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일은, 곧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속해 있는 집단이나 외적 조건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개인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총체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나아가 창조적인 개인들은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지평을 더욱 넓혀가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 복지국가 같은 경우에 소득차이에 따른 세금규정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평균 복지 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느 정도의 평균적 합의하에 자유경쟁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개인의 경제적 성취욕이 감소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지만, 전반적인 문화 수준은 당연히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높은 문화 수준이라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여가를 충분히 누릴 시간이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어느 정도의 경제적 평등이 이러한 문화적 상승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국가에서 추구되는 개인주의는 다원화된 개인주의일 수 밖에 없다. 개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동일한 이상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상을 성취하는 데 있어 심각한 장애가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개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창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적 이상이 아닌 사회적 이상 또한 궁극적으로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갖추었을 때, 불안하고 예측불가능한 이 현대사회에서 보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