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택시 - 프랑스 현대문학선 25 프랑스 현대문학선 25
레몽 장 지음, 이인철 옮김 / 세계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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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여주인>을 읽고 그 가벼운 유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던져뒀었는데, 이 책은 읽을 만하다. 통통 튀는 아이디어와 재기 있는 말솜씨가 단편에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벨라 B.의 환상>은 정말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다. 벨라라는 한 여자의 강박관념도 그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소동도 감칠맛 있었다. 특히 마지막의 반전은, 소설에서 반전이 보여주는 힘을 여실히 드러냈다.


<미라 또는 공원>도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권위적이고 정신병적이기까지 한 경찰서장은 한 공원에서 사기극을 벌인다. 경찰이 건달 변장을 하고, 한 여자에게 접근해서 폭행의 시도를 가한다. 그때 그 주위에 있던 남자 두 명과 아이 엄마, 부부는 그 일에 방관했다는 죄로 경찰서에 연행되어 간다. 경찰서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가 그 여자를 구할 수 없었던 ‘합리적인’ 이유를 대었고, 그 이유를 대지 못한 ‘나’는 억울하게 서장의 취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오페라택시>도 설정이 재미있다. 우연히 같은 택시에 동시에 올라탄 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하게 된 남녀가, 매번 결혼기념일마다 택시를 동시에 타는 연극을 벌인다. 그러다 어느 날 차를 도둑맞는다. 그리고 며칠 뒤에 차가 고스란히 돌아왔는데, 도둑이 차를 빌려서 미안하다면서 공연 티켓을 차에 꽂아 둔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에 다녀오니, 침대를 제외하고 집이 몽땅 털려 있었다. 참으로 지능적인 수법인데, 이걸 따라하면 성공률이 높을 것 같다는 생각도.


<P.K. 35km지점>은 두 명의 미인 히치하이커를 차에 태웠다가 강도를 당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겨우 도망쳐서 인근의 경찰서를 찾았는데, ‘근육질의 우람한’ 여자 경찰관이 자기의 이야기를 믿어주지도 않으면서 비웃으며 듣고 있는 걸을 보며, 결국 그 곳에서도 도망쳐 나온다는 이야기다.


<치마>도 뛰어난 단편이다.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사창가에 가서 아내더러 ‘10분만 기다리라’고 하며 창녀와 함께 건물로 들어가버린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 당황하던 그녀를, 한 멋진 남자가 자기 차에 태워 호텔로 데려간다. 일생 처음으로 그녀는 놀라운 섹스를 하고, 오르가즘을 느낀다. 그리고 남자가 권하는 차를 마신다. 호텔에 나와 길을 걷다 남편을 만난다. 남편은 ‘자기가 잠시 돌았다’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사죄한다. 정신분열적인 남편인 것이다. 추잡한 짓을 했다며 용서해달라면서 남편은, ‘ 차 시킬까?’라고 묻는다. 그녀는 이제까지 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좀전에 호텔에서 마신 것을 제외하고는. 남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벌써 한 잔 마셨어요’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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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이혼
사토 겐이치 지음, 이정환 옮김 / 열림원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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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나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흥미로워해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다른 시간과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현재’를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현재’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세계에 대한 선험적인 지식이 나와 다르기에,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의 ‘과거’가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흥미는 ‘시험’을 거치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솔직히 지금도 누군가가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보라고 하면, 나는 제대로 할 수 없다. 물론 세계사 선생도 아닌데, 세세한 목록 나열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머릿속에 체계적인 영상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다만 연표와 개별적 사건의 나열에 불과한 것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세계사나 국사 시험에 100점을 맞아도, 역사는 설명할 줄 모른다. 연표나 사건, 조약 이름, 사람 이름 따위는 시험을 보고 나면 그냥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때로 누군가는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이 책은 대부분의 역사책에 한 두줄로 간략하게 기술되고 말았을 ‘팩트’를 박진감 있는 ‘픽션’으로 엮어내고 있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일본어를 쓰는 일본 사람이라는 점이다. 외국의 역사를 다룬다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걸 얼마나 실제처럼 그려내는가에 승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거의 손색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역사를 꼼꼼하게 연구한 작가의 노력이 빚어낸 성과인 것이다. 큰 반전은 없지만 소설을 읽어볼 생각이라면, 줄거리는 모르는 편이 좋다.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조건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통속소설 같은 분명한 선악 구분도 크게 문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는 재미있다. 거기다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흥미로움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것이 실제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긴박한 재판과정을 전개함으로써 독자에게 단숨에 읽기를 요구한다. 장정일이 말했던가. 단숨에 쓴 책은 단숨에 읽히게 되어 있다고. 손을 놓게 만드는 책에는 그만큼 열정이 빠져 있다고. 물론 아무리 재미있는 책을 만나 밤을 새고 싶어도 생업은 그런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노는 날’은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읽힌다’는 점만이 소설의 장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보다 많은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읽힌다’는 관점은 사실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범상치 않은 주인공 프랑수와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스무 살 무렵, 사랑하는 여자 벨린다와의 결혼과 수도사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첫장에 등장한다. 그리고 나서 다음 장에 마흔 일곱이 된 그가 등장한다. 그는 수도사 대신 변호사가 되어 있다. 물론 중세유럽의 법정이라는 것도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쫓겨난 영웅’이다. 그를 쫓아낸 것은 당시 국왕 루이 11세. 청춘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프랑수와는, 루이 11세의 딸이자 현재 루이 12세의 왕비인 잔 드 프랑스의 재판을 구경하러 먼 곳에서 왔다. 그는 폭군의 딸이 단죄받는 것을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그는, 옛 연인 벨린다의 동생인 오엔과 왕비의 합작에 의해 왕비의 변호를 맡게 된다. 일방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있던, 절름발이에 추녀인 이 왕비는 프랑수와에게 있어 ‘원수의 딸’이었지만, 그는 곧 폭군과 그녀를 연관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강하고 당당한 사람인데, 부당하게 모욕받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수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재판에 가담한다. 그리고 법정은 프랑수와의 멋진 변론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대중은 프랑수와와 왕비의 편이 되어, 최고 권력자인 루이 12세를 비웃는다. 


프랑수와의 성공담은 계속 이어진다. 프랑수와에 의해 국왕과 교황청은 궁지에 몰린다. 명민한 천재형인 그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실패까지도 계산하는 것이 진정한 영웅의 면모이니까. 재판은 그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는 대로, 그는 ‘반쪽 영웅’이며, ‘고뇌하는 영웅’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싸구려 통속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된다. 비현실적인 천재가 아니라 개연성을 갖춘 불운한 천재의 성공담이 된다. 물론 프랑수와의 위기는 당연히 찾아온다. 주인공을 궁지에 빠뜨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자에게 계속해서 다음 장을 펼쳐보게 만드는 힘이 아닌가. 


그런데 가장 중요한 화두인 것처럼 여겨진 승소는,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어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다. 천재는 결국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한다. 재판을 하는 내내 그는 승소가 가져올 의미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것은 그의 삶과 사랑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실수로 인생을 포기하게 된 벨린다나 지극히 모자라보이는 왕과의 이혼을 한사코 거절하는 잔 드 프랑스를 이해하고, 또 다시 사랑하게 된다. 그렇기에 재판이란 건 사실 프랑수와가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만들고, 잔 드 프랑스라는 편견의 대상과 진정한 인간애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중세 유럽의 법정이 생생했던 이유는, 어쩌면 재판과정이나 등장인물이 지극히 현대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상대적인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속의 영웅들도 일상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책 속에서 박제되어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읽어내는 것은 재미있는 시도다. 프랑수와를 둘러싼 인물들도 제각기 색깔 있는 조연 역할을 다 해내고 있다. 흥미진진한 읽을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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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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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소설가이며 에세이스트인 그의 이 책은,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현대인의 '불안'을 탐구하고 있다. 다 아는 얘기긴 해도 체계적으로 정리된 글을 읽는 것은 반갑다. 대단히 획기적이거나 놀라운 생각을 제시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 책은 불안의 유래, 의미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면서 독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있다.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답이 없는 세상이다. 결국 자신의 일상 속으로 되돌아오고 말겠지만, 불안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잠깐의 위안이 될 수는 있다. 다만 죽음을 생각하며 염세적이 되는 것은 긍정적인 영향 같지는 않다. 죽음 이후의 사후 세계를 전혀 믿지 않으며, 죽음 후에는 오로지 영원한 무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를 이루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 후의 영광이 내게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신경 쓰는 이 '살아 있는 나'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살아서 숨쉬는 이 수많은 '죽음 뒤의 무를 예약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일까? 


높이 치솟아 가는 욕망과 이전투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저승까지 돈을 싸 가지고 가지 못하면서도 돈을 계속 모으는 것은,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명예'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라고 보통은 정의했다. 그렇기에 부자는 더 부자가 되려고 안달을 한다는 것이다. 명예의 기준이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종류의 명예를 얻을 생각이 없어도,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원한다. 더 많은 돈이 안락한 삶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더 많은 돈이 목표인 삶이, 괴로워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삶보다 더 나아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돈이란 목표는 너무나 단순명쾌하고 즐거우며 쉽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는 시간을 줄일수록 돈을 버는 시간은 많아진다. 돈을 버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따라서 걱정도 줄어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제대로 사는 걸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 그러나 그렇게 불안을 따라가며 살아간 인생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을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에 후회 없을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이정표가 되어 주는 별이 사라진 지금, 발 붙이고 있는 땅은 혼란과 불안만을 가중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21)


우리는 무력하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부모의 돌봄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했다. 아기는 물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세속적인 보답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아기는 그냥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즉 발가벗겨진 상태의 정체성으로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는 것이다. 아기는 그 통제할 수 없는,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특성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애정은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예의를 지킨다든가, 학교나 다른 곳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든가, 계급이나 명성을 얻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훌륭한 행동으로 남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근저에 깔린 감정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부엌 바닥에 집짓기 블록을 늘어놓기만 해도, 부드럽고 통통한 몸을 뒤치며 믿음이 담긴 눈으로 말똥말똥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를 끌어안아주었던 그 관대하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다시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30)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안 되지, 얘야.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도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5)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38)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 인구 대다수는 농민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가난했고, 영양 상태가 부실했고, 추위와 공포에 시달렸고,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고통을 겪다가 죽곤 했다. 평생 일을 해도 그들의 손에 남는 가장 값비싼 소유물은 암소나 염소나 항아리에 불과했다. 기근은 늘 가끼이에 있었고 병은 어디에나 만연했다.(45)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56)


그러나 어떤 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심리를 생각해보면 이런 박탈감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떤 것-예를 들어 부나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건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중세 조상의 생활과 비교하여 판단할 수도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가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다고 강조하는 소리를 들어봤자 전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오직 우리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56)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58)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일반 병사는 상사나 상병에게 느끼는 것에 비교하면 장군에게는 전혀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작가 역시 평범한 삼류작가보다는 자신에게 좀 더 접근한 작가들로부터 질투를 더 받는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 데이비드 흄(59)


왜 어떤 사람은 땅을 갈아야 할 운명이고 어떤 사람은 연회장에서 잔치를 즐길 운명이냐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지배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창조주의 의지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 국가의 모든 기관은 인간 신체의 여러 기관에 비유할 수 있다. 통치자는 머리이고, 의회는 심자이며, 법원은 허리이고, 관리와 판사는 눈, 귀, 혀이고, 재무 담당자들은 배와 내장이고, 군대는 손이며, 농민과 노동자는 발이다. 이 이미지에 따르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는 바꿀 수 없는 역할이 할당되어 있으며, 농민이 영주의 저택에 살면서 정부의 일에 대해 발언을 하는 것은 발가락이 눈이 되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해괴망측한 일이었다.(62)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게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귀족 계급의 지원을 받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사회는 그 참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맛보기 어려운 몇 가지 행복을 누렸다. 민중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신분 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도자와 동등해지기를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갔지만 반감을 품지도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고난이라고 생각했다. 농노는 자신의 열등한 위치가 불변의 자연 질서의 결과라고 여겼다. 사회는 불평등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지는 않았다.(67)


가난한 시민은 부자 시민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했으며, 언젠가는 그들의 뒤를 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늘 틀린 것은 아니었다. 초라한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큰 부를 일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예외가 규칙이 될 수는 없었다. 미국에도 여전히 최하층 빈민이 있었다. 그러나 귀족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68)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71)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은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감이기도 하다.(71)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80)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82)


경제적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상속이나 다른 유리한 조건 없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개인은 과거 아버지에게서 돈과 저택을 물려받았던 귀족은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개인적 정당성의 요소를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 실패는 과거에 삶의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던 농민은 다행스럽게도 겪을 필요가 없었던 수치감과 연결되었다. 경제적 능력주의와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불운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었다. 따라서 빈자들은 이제 부자들의 자선과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자수성가한 강건한 개인들의 눈에는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 사회진화론자들은 모든 인간이 처음에는 돈, 일자리, 존경이라는 빈약한 자원을 놓고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쟁에서 일부는 우위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이점이나 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뒤처진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더 힘이 세며, 그들의 씨는 더 강하며, 그들의 정신은 더 빈틈없다.(113)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119)


전통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위대한 야망은 이러한 방정식의 전체적인 역전을 제도화하고, 세습 특권과 세습 비특권을 없애 개인적 성취가 지위를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개인적 성취란 주로 경제적 성취를 의미했다.(123)


고대 그리스인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재능을 뮤즈라는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서사시, 역사, 연애시, 음악, 비극, 찬가, 춤, 희극, 천문학을 담당하는 뮤즈가 다 따로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든 그 사람은 자신의 재능이 진정한 자기 것이 결코 아니며, 이 예민한 신들의 마음이 바뀌면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125)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신의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된 일은 없을 것이다. - 구이차르디니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와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 마키아벨리(130)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며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 쇼펜하우어(165)


이렇게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_-;)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 사회의 소도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샹포르(166)


이 세상에서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167)


교양은 새로 나온 책을 비평하는 사람에게는 바람직한 특질이며, 순문학을 하는 사람에게도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일상생활이나 정치에 적용할 경우 이것은 편협한 흠잡기, 이기적 편안함의 추구, 우유부단한 행동을 의미한다. 교양인은 살아 있는 인간들 가운에 가장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뻔한 현학과 양식 결여라는 면에서 어떤 사람도 그와 동급이 될 수 없다. 그에게는 어떤 가정도 비현실적이지 않으며, 어떤 목적도 비실용적이지 않다. - 해리슨(171)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력, 용기, 지능, 체력이다. (248)


물자를 아주 많이 소유하는 것은 이 물자가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명예를 제공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일이 된다. (250)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다. (..) 즉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연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256)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268)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직업에 포함된 많은 것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269)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 우선순위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물질적 축적 과정을 가장 놓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웠다는 것이다.(269)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 러스킨(271)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298)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용기를 얻어 사회의 기대 가운에 정당성이 없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골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300)


바니타스 미술의 목적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으로 그 소유자를 우울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의 구체적인 면에서 결함을 찾아낼 용기를 주고, 동시에 사랑, 선, 신실, 겸손, 친절 등의 미덕에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자유를 주었다.(306)


현자, 귀족, 권력가, 왕, 정복자/죽음은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왜 한 시간의 영광을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는가?/부의 냇물에서 거닐고 명성이 높이 치솟으면 뭐하는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도 “여기 그가 누워 있다”에서 끝이 나고/가장 고귀한 노래도 “흙에서 흙으로”가 마무리를 하는데. - 에드워드 영(309)


문장의 자랑, 권력의 허세, 모든 아름다움, 모든 부가, 똑같이 불가피한 순간을 기다린다. 영광의 길은 무덤으로 통할 뿐 - 토머스 그레이(310)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질 운명이다. 영원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들 가운데 중요하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 우리의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가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라서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315)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든 가장 힘 센 인간과 커다란 자연-큰 사막, 높은 산, 빙하와 대양-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320)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인 깨달음이다.(330)


스위스에서는 가장 큰 도시에 가도 낯선 사람들과 함께 버스나 열차를 타는 일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로스앤젤레스나 런던만큼 강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취리히의 최고 수준은 전차 네트워크 때문이다. 취리히의 전차는 청결하고, 안전하고, 따뜻하며, 그 정확성과 기술적 솜씨라는 면에서 교훈적이기도 하다. 불과 몇 프랑이면 효율적이고 당당한 전차를 타고 황제도 부러워할 만한 안락함을 느끼며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으니 굳이 혼자서 여행을 할 이유가 없다.(333)


샤를 보들레르는 시인, 그리고 더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전사’가 되지 않고는 어떤 일을 하든 영혼이 망가진다고 선언했다.(356)


개인 변호사나 직물 제조업자나 영리한 은행가의 활동적이고, 근면하고, 품위 있고, 긍정적인 생활은 부로 보답을 받지 부드러운 감각으로 보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의 심장은 조금씩 굳어간다. 주말마다 2000명의 노동자에게 주급을 주는 사람들은 이런 책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늘 유용하고 긍정적인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스탕달(359)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로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즐겨 쓰기 좋아했다.(363)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그들은 돈과 공적인 지위가 궁극적으로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사람과 몇 분간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오직 부르주아적 영웅들의 공적만 보도하면서 다른 대안적 야심의 가치를 은근히 우습게 여기는 잡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의 평정이 흔들리고 우리의 헌신적인 태도가 도전에 부딪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364)


보헤미안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업적 성공 능력보다 어떤 사람의 윤리적 상상력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주는 표시도 없다.(366)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에머슨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살고, 옷을 입고,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고귀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에머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순응이니 조화니 하는 이야기는 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372)


다다의 창립자 트리스탄 차라는 1915년에 취리히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똑똑한 사람은 표준적 유형이 되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백치다. 다다는 모든 곳에서 백치적인 것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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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이영조 지음 / 풍림 / 1986년 1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때 읽고 전율했던 이 소설을, 서점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1987년에 발행된 책인데, 재판을 하지 않아서 책이 없는 것이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해서, 바로 샀다. 내가 읽었던 그 판이 맞다. 그리고 감동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1987년에 번역된 것이라 말투나 외래어 표현 등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많았지만, 내용이 좋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랴. 도대체 이렇게 좋은 책은 왜 번역을 안 하고 내버려 두는 것일까?


레이몽 훠스카. 그는 1297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 600년 간의 이야기를, 배우인 레진느에게 들려주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불사의 인간이라니, 정말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레이몽이 만난 숱한 사람들은 불사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불사인 그를 저주하고, 그의 곁을 떠난다. 사랑하던 여인도, 아들도 마찬가지다.


배우인 레진느는 자신의 삶을 좀 더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녀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두 사람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나는 말을 나누고 있는 나, 또 하나는 말을 듣고 있는 나. 그래서 한 사람은 살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나를 사랑할 수 있을 터인데! 난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터인데. (16)’ 더구나 그녀는 자기 존재가 보잘것 없다는 것에 대해 미치도록 절망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성인이 지나치게 많았고, 성녀 또한 남아돌고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평등하고 보편적인 자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25)’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는 많은 인간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그리고 그녀 역시 무엇 하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릴 이 호텔의 변함 없는 방을 증오했다.(29)’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다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외한 정도로만 사랑을 줄 수 있다. ‘그녀는 그의 계산된 상냥함, 지성이 뒷받침된 헌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넋도, 몸도 그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해서 그녀가 품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그에게 쏟고 있었다.(34)’


그리고 우연히,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는 레이몽을 관찰하다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금 ‘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레이몽은 거부한다. 그러나 레진느는 끊임없이 그를 독촉한다. 그는 ‘나는 살고 있어. 그런데도 나는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소. 나는 결코 죽지 않을 테지. 그래서 내게는 미래도 없어. 나는 그 누구도 아닌 것입니다. 내게는 결국 역사도 없고, 얼굴도 없는 것입니다.(49)’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윽고 ‘나를 밤과 무관심에서 구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여자들 속에서 당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세계가 다시금 그 모양을 되찾을 것입니다. 눈물이나 미소나, 기대나 두려움이 생겨날 테지요. 나는 산 인간이 되는 겁니다.(61)’ 그는 또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레진느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아름다움과 젊음이 덧없으며 그녀 존재가 하나의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녀는 시도하고 있었다. 한 집안의 주인역의 연기를, 영광의 연기를, 유혹의 연기를. 그것은 모두 오직 하나의 연기, 존재의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104)’


그리고 이윽고 그는 레진느에게, 자신의 600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어느 거지가 떠벌리는 불사의 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먼저 생쥐에게 시험해본다. 그리고 그걸 마시기를 반대하는 까뜨린느의 말을 무시하고, 결국 불사의 몸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음을 겪는다. ‘나의 아내는 죽어 있었다. 그 아들도, 손자도. 나의 모든 반려는 죽어 있었다. 나만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닮은 것은 이제는 세상 천지에 아무 것도 없었다. 과거는 내게서 떼어내어져 버렸다. 이제는 나를 묶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억도, 사랑도, 의무도.(153)’


나는 눈을 떴고, 지루해 있었다. 나는 침대 밑으로 뛰어 내렸다.

- 하지만 이 세상에서 무얼 바랄 수 있지?

- 많이 있습니다.

나는 웃어젖혔다. 그녀를 만족시키기란 손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까뜨린느를 파묻은 그날, 이제는 아무 것도, 그 어디에도 나를 기다리는 것이 없어진 그날처럼 팔에 힘이 없는 것을 느꼈다.(165)


그는 까뜨린느의 죽음 이후, 아들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자 한다. 그는 아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키고, 전쟁으로 인해 그를 잃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격리하여 보호한다. 그리고 ‘이 아이의 운명을 만들어 준 것은 나인 것이다. 앙뜨완느가 웃는 소리를 들으면,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뛰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생명을 준 것이다. 또한 세계를 준 것이다.(170)’라고 생각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베아트리스를 성에 머무르게 하며, 그녀와 앙뜨완느가 우정을 누리게 한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앙뜨완느를 사랑하고, 앙뜨완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레이몽의 비밀을 모르는데도, 레이몽에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당당하다. 나이는 고작 ‘22세! 그러나 그녀는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녀는 몇 세기 전부터 이 세상에 살고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이 세상을 자기집 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재판하고 있었다.(176)’


앙뜨완느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증명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레이몽은 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억지로 베아트리스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그의 비밀을 알게 된 베아트리스는, 평생 그에게 다정한 키스 한 번 해주지 않았다.


- 아뇨, 당신은 악마는 아닙니다. 나는 악마를 믿지 않아요.

- 그렇다면?

- 당신은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녀는 느닷없이 사나운 투로 말했다.

- 당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쓰러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그녀의 눈 안쪽에 나를 보았다. 죽어 있는 나를. 겨울도, 꽃도 모르는 삼나무처럼 죽어 있는 나를.(180)

- 당신 곁에서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걸 모르시나요? 당신은 모든 욕망을 죽여버려요. 그저 줄 뿐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아기의 장난감밖엔 주지를 못해요. 앙뜨완느가 죽음을 택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당신은 그 사람한테 다른 생존법을 허용치 않았던 거죠.(182)

- 정말 나를 사랑할 수는 없는가?

- 그 얘기는 그만두도록 해요.

그녀는 이내 말했다.

- 나를 사랑해준다면, 만사는 달라질 텐데.

- 훨씬 전부터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됐어요.

-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아.

나는 흐린 큰 거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주름살 하나 없는 장년의 사나이. 이 근육이 우람스러운 몸은 피로를 몰랐다. 나는 그 무렵의 어떤 사나이보다도 컸다.

- 나는 그렇듯 보기 싫은 인간인가?

나는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 앞에 마주앉았다.

- 네가 앙뜨완느 가운데에 사랑한 것이 내게는 아마 없는 모양이지? (..) 나는 알고 있어. 그 애는 아름답고, 너그럽고 용기가 있는 데다가 높은 긍지를 갖고 있었지. 내게는 그런 덕이 하나도 없나?

- 당신이 나쁘신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고 있는 거죠.(..)앙뜨완느가 호수로 뛰어들었을 때, 또 돌격의 선두에 섰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이기에 그를 찬미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용기란 뭔가요? 당신은 당신의 부귀, 당신의 시간, 당신의 노고를 아낌없이 줍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남에게 주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정도의 숱한 목숨을 갖고 계십니다. 나는 그 사람의 긍지도 사랑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예외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그걸 알고 계십니다. 그래가지고는 내 마음은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녀는 증오도, 연민도 담지 않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말을 통해 오랫동안 잊어왔던 과거의 목소리, 고뇌를 담아 말한 까뜨린느의 목소리를 들었다.

- 내가 하는 것, 나라는 인간은 내가 불사라는 이유로 네 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거냐?

- 그래요. 그렇습니다. 저 여자가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만약 저 여자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저 여자의 노래는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을 걸요.

- 그렇다면 저것은 하나의 저주가 아닌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나는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살아 있어. 너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있지. 미래 영겁에서 나는 다시는 너를 만날 수는 없는 것이지. 만나는 것은 너와는 다르지.(..)

- 당신 몸이 무서운 거예요. 그것은 다른 종족의 거입니다.

- 너하고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구.

눈물이 그녀의 눈에 솟아나왔다.

- 모르시나요?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 손으로 애무를 당하는 일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차라리 더럽다고 말해 버리는 편이 낫겠군.

-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요.

나는 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주받은 손을.

- 이 백년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어. 지금은 알았지. 베어트리스, 너는 자유야. 만약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떠나가라구. 만일 한 사나이를 사랑하게 된다면 아무런 뉘우침 없이 그 사나이를 사랑하도록 하라구.(187)

- 용서해다오.

나는 입술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갖다댔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몇 백만이라는 여자 중의 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애정도, 회한도 지나가버린 것의 맛이 났다.(195)


베아트리스는 결국 그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모르는 곳에서 죽는다. 그는 조국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정복하고, 영토 확장을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죽어가고, 그에게 삶은 점점 의미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 설령 황제라 할지라도 한 인간에게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01)’라는 대답만이 그의 진실일 뿐이다. 인민을 생각하라는 신하의 말을 듣고 그는 외친다. - 나의 인민? 그것은 벌써 거듭 죽었어! 어찌 내가 그들과 맺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결코 똑같은 인민이 아니라구.(195)

그는 점점 불사의 인간이 겪는 실존적 인식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죽은 자는 이미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었다. 세계는 늘 마찬가지로 가득차 있다. 하늘에는 언제나 똑같은 태양이 빛나고 있다. 가엾은 인간은 하나도 없었고, 아까워할 것은 그 무엇 하나 없었다.(229)’ 그리고 그는 생명을 지닌 자들의 놀라운 결정을 수없이 보고 겪는다. ‘그래서 이 불행한 인디언들은 차라리 즉시 죽기로 결정한 겝니다. 그들은 속히 죽기 위해 흙이나 돌을 먹었지요. 그리고 천국에서 스페인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위험을 피하고자 세례를 받을 것을 거부했습니다.(247)’


그는 한 사나이와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싶어한 적도 있다. 그는 그 사나이의 꿈을 실현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운명이 다른’ 존재였다.

- 아아, 나는 정말 불사의 몸이 되고 싶소!

그는 정열적으로 말했다.

- 나 역시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 그렇게 되면 나는 꼭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걸. 나는 지구의 모든 강을 내려가, 모든 대륙의 지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 아니. 자네는 곧 중국에 흥미를 잃게 될 걸. 그 무엇에 대해서도 흥미를 품지 않게 될 거야. 세계에 자네는 다만 외톨이가 되어버릴 테니까.(..)나는 한 번도 친구를 가진 적이 없었어. 인간들은 나를 늘 이국인이나 또는 죽은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지.(272)

- 자네 왜 훨씬 전부터 그 일기에 아무 것도 적어넣지 않았지?

- 자네가 날 바보취급하기 때문이야?

- 내가 자네를 바보취급한다?

- 물론 자네는 아무 말도 안 했지. 그렇지만 나는 자네의 눈을 보고 있었다고. 자네의 시선 밑에 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야. 자네는 먼 곳에서 날 바라보고 있어. 자네는 벌써 내 죽음 저쪽에 있지. 자네에게 있어서 나는 일개의 죽은 인간이야.(281)


또 다른 사랑은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프랑스. 활발하게 사회적 활동을 하는 마리안느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을, 그는 망설인다. 그는 살롱에서 이렇게 말한다.

- 당신네들은 두 사람 모두 잘못돼 있소. 이성도, 선입관도 인간에게 있어 유용한 것은 못되지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절 수 없는 만큼, 무엇 하나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없는 거죠.(..)그들은 행복해지려는 희망조차 바라지 않을 걸요. 그들은 시간이 자기를 죽이는 것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겝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호들갑스러운 말로 자기를 속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지요.(294)

- 우리는 30년, 40년 사랑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까뜨린느나 베아트리스가 쉬고 있는 것과 똑같이 무덤 속에 그녀의 관은 누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망령이 될 것이다.(330)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불사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숨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 채로, 그를 사랑하고, 시간이 흐른다.

- 알아요? 만일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는 일이 있다면, 나 자살해버리고 말 거예요.

나는 그녀를 더한층 힘껏 안았다.

- 나 역시 당신 뒤에까지 살아 있지는 않겠어.(330)

- 그녀는 또 다시 책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죽어야 할 운명을 짊어질 종족이라는 사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충격, 하나의 전략, 결국 마차의 바퀴가 하나 빠진다든가, 말발굽에 채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물러빠진 뼈는 가루가 되고, 심장은 멈추며, 그들은 영원히 죽어 버리는 것이다.(332)

- 나는 그녀가 지상에서 그녀의 일 따위는 생각해낼 수조차 없게 될 무렵의 일을 정열적으로 말하고 있는 걸 듣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334)

- 내게는 풍파를 피할 만한 곳도 없고, 미래도 없고, 또한 현재도 없었다. 마리안느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원히 제외된 자였다.(334)

- 만일 그녀가 불사의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는 모든 과거와 희망이 없는 미래에도 불구하고 진정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340)

- 자연은 영원히 그 비밀을 우리에게 밝히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의문을 생각해내고, 이어 답을 만들어낸 것은 우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관 밑바닥에서 우리 자신의 사상밖에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343)

-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쳤어요. 당신도 생사를 걸어, 당신을 내게 맡긴 거라 믿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은 고작 몇 년 동안만 내게 당신을 빌려주고 있었군요. 나는 다른 숱한 여자 중의 하나군요. 언젠가는 내 이름조차 생각해내지를 못하게 될 거야.

- 마리안느! 내가 당신 것이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나? 나는 이제껏 이렇게, 누군가의 것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또 앞으로 아마 다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할 거야.(..)당신을 알기 전까지 나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테지? 나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든 것은 당신이야. 당신이 나를 버리면 나는 또다시 망령이 되어버릴 거야.

- 당신은 죽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절대로 진짜 망령은 될 수 없어요. 그리고 한 순간도 당신은 나하고 똑같은 인간이 아니었던 거죠. 모두가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당신은 다른 세계 안에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내게 있어 당신이라는 사람은 없어져 버린 거예요.

- 천만에. 우리가 피차를 발견한 것은 바로 지금이라구. 그럴 것이 우리는 이제야말로 진실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니까.

- 당신과 나 사이에 진실이란 하나도 있을 수 없다구요. 두 사람의 죽는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있을 때라면, 두 사람은 몸도, 마음도 사랑으로 단련이 돼요. 사랑은 두 사람의 본질 자체라구요. 그렇지만 당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우연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구요.

- 내 운명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려고 해 봤소?

- 정말 무서운 일이예요.

- 나를 도와주려고는 생각지 않나?

- 당신을 도와요? 십년이나 이십년을 돕는단 말이군요. 그런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죠?

- 몇 세기 동안 당신은 내게 힘을 줄 수가 있지.

- 그 뒤에는? 또 한 사람 다른 여자가 당신을 도우러 오나요? 그럴 정도라면, 다시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345)

- 까뜨린느의 말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죠?

- 서너 개쯤 될까?

- 그럼 목소리는? 그 사람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마리안느의 손을 잡았다.

- 나는 당신을 사랑하듯이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어.

- 아아! 당신이 나를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긴 그게 좋은 거야. 이런 추억을 모조리 짊어진다면 너무 무거울 거야.

- 당신은 내 마음 속에서 다른 죽는 인간의 그 누구의 마음 속에서보다도 오래 살 수 있다구.

- 아뇨. 만일 당신이 죽는 인간이라면, 나는 당신 가슴 속에서 세계의 종말까지도 살아 있을 거예요. 그럴 것이 당신의 죽음은 내게 있어서 세계의 종말일 테니까요. 그런데도 나는 종말이 없는 세계 속에서 죽으려 하고 있는 거예요.(350)

- 나는 당신이 부럽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나에 대해서도 부러워하지는 마세요.(351)

- 거짓말은 이제 그만 좀 해 둬요! 이제 끝장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구요. 나는 이제 곧 저 세상으로 떠난단 말예요. 나 혼자 떠난다구요. 그런데도 당신은 이 세상에 남아 그대로 있는 거예요. 영원히.

그녀는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 나 혼자! 당신은 내가 혼자 떠나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힘껏 쥐었다. 그 얼마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도 함께 죽겠어. 우리는 같은 무덤에 묻힐 거야. (352)

나는 땅 위에 누웠다. 눈을 감고, 온갖 힘을 짜내어 열려진 문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과거가 존재를 계속하도록 현재가 태어나는 것을 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하루, 하룻밤 이어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전율했다. 암 것도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뚜렷이 묘지의 꽃 사이에서 꿀벌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미 문은 열려진 것이다.

나는 저린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아, 이제 너는 무엇을 하느냐? 일어나서 살기를 계속하려는가?(354)

마리안느와 함께 하나의 세계가 멸망해버렸다. 그것은 이제 영원히 떠올라오지는 않을 것이다.(355)


그리하여, 그는 이제는 불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겠다는 한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 당신이 나를 잊으시는 미래도, 내가 존재치 않았던 과거도, 나는 모두 받아들이겠어요. 그것은 당신의 일부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미래와 과거를 가지고 이 곳에 계신 것은 바로 당신이예요. 나는 흔히 그 생각을 했었지요. 시간이 우리를 떼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구요.(413)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사랑의 힘으로 수세기 이래 나는 비로소 과거나 미래를 잊고, 완전히 현존하고, 완전히 살아 있는 자기를 찾아냈다. 나는 그 곳에 있었다. 한 여자가 사랑하고 있는 한 남자였다. 다른 운명을 지니고는 있지만, 이 지구에 속하는 한 사나이였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닿았다. 단 한 마디로 이 죽은 껍데기는 터지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금 생명이 끓어넘치는 용암이 흘러내리고, 세계는 새로운 양상을 띠며 기대와 기쁨과 눈물이 생겨날 것이다.

-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며칠, 또는 몇 년이 흘러간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주름 투성이의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모든 빛깔은 탁해지고, 하늘은 빛을 잃고, 향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 그것은 헛일이요. 모든 것은 헛일이요.

- 나는 당신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가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불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이 지니는 뜻의 중대함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사랑이 가능했다. 만일 내가 아직도 인간의 탈을 쓸 수 있다면, 이렇게도 말했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가 알게 된 여자 중에서 가장 마음이 넓고, 가장 정열적인 여자다.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수한 여자다’라고.

그러나 이런 말은 이제 내게 있어 아무런 뜻도 없었다. 로르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나의 손은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 그 아무 것도 아니오. 당신은 모릅니다.(414)


마지막으로 레진느에게도 그는 말한다. 그의 불사가 얼마나 지독한 형벌인지를. 죽지 않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며, 살 권리도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만이 전부인 것이라는 사실을.


- 인간이 모두 죽어버리고, 지구는 흽니다. 하늘에는 아직 달이 있고, 새하얀 지구를 비치고 있지요. 나는 생쥐와 함께 다만 혼자 있는 거죠.

그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주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의 눈길이었다.

- 어떤 생쥐?

- 저주를 받은 작은 생쥐지요. 이제 인간은 없어지고, 그 쥐 한 마리만 영원히 빙글빙글 돌고 있을 걸요. 그 놈에게 그런 운명을 준 것은 나지요.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425)


이토록 매력적인 작품을 재판하지 않는 출판사들은 각성 좀 해야 한다.이 소설을 읽고도 불사를 꿈꿀 수 있을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도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 온갖 예술, 철학이 그에게는 한낱 공허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죽지 않는 그는, 인간과 함께 할 수 없다. 그 얼마나 끔찍한 고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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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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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예술 장르의 영원한 소재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사람은 특별하고 전인격적인 관계를 희구하게 되며, 그 대상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인기 있는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닌가 싶다. 낡디 낡은 이야기라서 문제인 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몇 가지 원형적 이야기의 재조합일 테니 말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없다. 이미 그건 하나의 담론으로 굳어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배경이 그다지 좋지 않고 하는 일도 별 신통치 않은 여자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합을 한다는 게 기본 플롯이다. 그 사실 자체야 전혀 흰 눈으로 볼 게 아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란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문제는 왜 언제나 ‘그런 남자’여야 하냐는 거다. 여주인공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재력이나 권력이 없는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곧 사랑이 결혼이라는 제도적 테두리 속에서 비로소 인정받고, 성공적인 결혼이 바로 성공적인 삶이라고 믿는 관념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정이현의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반어와 익살로 우리 시대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정면으로 비웃는다. 소설이 드라마와 다른 점은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완전히 배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진행형인 드라마는 시청자의 입김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나 소설은 이미 완성된 채로 독자 앞에 선보인다.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배반하지 않는 것처럼 한다는 점에 오히려 통쾌함이 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공통점은 이미 이 세계 속에서 남자와의 권력다툼이나 인정다툼을 포기했다는 데 있다. 남자가 이 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건 너무도 명백한 현실이다. 따라서 그 현실에 속한 ‘강한 여자’가 되는 게 그녀들의 현명한 목표가 된다. ‘강한 여자’란 결국 ‘강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고, 더 근본적으로는 금전적 풍요로움을 획득한 여자다. 거기에는 이미 규정된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항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시선을 이동하는 그녀들은 시대의 흐름을 잘 따라가는 세련되고 지적인 여자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강한 여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일단 아름다움을 갖춰야 한다. 그 아름다움은 자연적이든 인공적으로 획득되었든 간에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 존재한다. 아름다움과 동시에 젊음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즉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신선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정숙함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여자는 유리잔’이라면서 ‘금가는 순간 끝장나는 것이 여자의 몸’이라고 주장한다. 강한 남자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소속된 순결하고 지고지순한 여자를 원한다. 그것이 재력과 학력 등의 자본을 소유한 남자의 당연한 요구 사항이다. 마지막으로는 명민함이다. 다른 조건을 갖추고 있는 여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민하고 섬세한 전략을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은 강한 남자를 대하는 십계명까지 만들어서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전략적으로’ 고수하였던 순결이, 정작 증명하고픈 순간에 실체가 없었음이 드러난다.


한편 「트렁크」의 주인공은 사회적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는 여자다. 상사와의 불륜도 그녀에게는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점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거기에는 사랑도 없고, 낭만도 없다. 그래서 그녀의 눈부신 성공을 증명해주는 차 트렁크에 난데없이 나타난 시체는 다만 넘어가야 할 장애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체를 처리하는 데는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은폐에 성공해야만 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순수」에서는 세 번의 결혼에서 모두 남편을 잃은 여자의 독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살인의 동기도, 살인을 할 능력도 없다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남편들의 죽음은 결국 그녀에게 경제적 풍요로움과 일상의 자유를 안겨주었다. 남편들은 그녀의 삶을 위해서는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변태적이고 이기적이며 악마적인 남편들을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도 살해할 수 있는 법. 그것이 또한 강한 여자의 전략이 아니겠는가.


이 여자들의 사랑에는 달콤함도, 부드러움도 없다. 자신의 몸은 보다 높은 상품 가치를 지니기 위해 가꿔야 할 도구이며, 합법적으로 팔아넘긴 매물에 불과하다.「소녀 시대」의 되바라진 여자 아이는 일찌감치 자신의 상품 가치를 파악하고, 포르노 사진을 찍는 중년의 사내와 부모에게 돈을 얻어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자신을 도구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는 이미 인간다움을 망각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자아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들의 성공과 실패는 슬플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지위 상승을 할 수 있는 수단이 결혼밖에 없다는 사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그 지위 상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표면적으로 보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 보다 큰 차, 보다 비싼 옷을 입고 밥을 먹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안락하고 풍요로운 생활만을 보장받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경제적 지위 향상이라는 획일적 목표를 향해 일률적으로 달려가는 오늘날의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형성된 계급은 부르디외가 지적했듯 아비투스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입지를 강화한다. 삶과 소비가 밀접한 관계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부는 새로운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을 형성한다. 단순한 구매 행위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방식에까지 아비투스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또한 ‘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을 소유하는 것은, 보다 인간답고 세련되고 최첨단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반대로 ‘짝퉁’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삶은 인간다운 삶과 거리가 멀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짝퉁을 소비하는 행위는 명품을 지향하지만 그럴 만한 경제적 조건이 되지 못하는 서글픔을 반영할 뿐이다. 그러나 애초에 명품을 소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부유하지 않은 삶에 자격지심을 가질 이유도 없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여자들은 ‘보다 좋은 삶’을 위해 지구력 있게 나아가지만, 정작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허구적 삶의 그림자를 반영할 따름이다.


한편 정이현은 강한 여자들과는 애초에 출발점과 지향점이 다른 여자들을 통해 보다 인간다운 관계맺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무궁화」와 「신식 키친」의 주인공은 제도적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전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이고, 후자는 거식증에 걸린 비대한 육체를 가진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다 풍요로운 삶을 지향하는 여자들 사이에서 소외된 지 오래다. 누구도 그들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데에도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소외된 여자들은 사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죽고, 세상의 흐름에서 비껴나 있기 때문에 또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빛의 한 가운데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이, 삶의 질곡 속에서 숨죽이며 신음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강한 여자들이 결국 강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는 타인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는 낭만이 없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조차 없다. 더구나 자기 자신만의 사랑의 완성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가부장 사회와 폐해를 뿌리치기는커녕 더 굳건히 뿌리내리게 만드는 여자들은 다만 구태의 산물일 뿐이다. 진정으로 강한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단단히 둘러싸고 있는 갑옷을 직시하고, 그것을 벗겨내기 위한 연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연대야말로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찾기 위한 유일한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이현의 소설은 반어적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조롱한다. 그대 강한 여자들이여, 냉정하게 자신을 뒤돌아보라. 지금, 그대들은 진정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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