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크로메가스 바벨의 도서관 13
볼떼르 지음, 이효숙.이승수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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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로 더 유명한 볼테르의 소설들은 당대의 사회와 인간상을 풍자하고 있다. 풍자는 고도의 수법이라 이 기법을 쓰는 소설은 많지 않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다. 또한 어설픈 풍자는 웃음꺼리가 될 뿐이므로 섣부르게 시도하기도 어렵다. 전략을 세우는 것만큼이나 주제를 정하는 것도 어렵다. 그런 면에서 볼테르는 사상가이자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시가 삶에 대한 가장 고도의 은유라면, 소설은 그 다음이리라. 우회적인 말하기가 가장 훌륭한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방식인 건 사실이다. 모두에게 각자 다르게 기억되는 이야기는, 모호하기에 현실에 더 가까워보인다. 모호함, 혹은 모순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 아니던가.


‘멤논 혹은 인간의 지혜’는 현명해지기를 바라는 한 청년의 어리숙한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다. 멤논은 “아주 지헤로워져서 그 결과 행복해지려면 열정이 없어야 한다(19)”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잃어버릴 미모를 가진 여자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또 술이나 음식에 탐닉해서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한다. 욕망을 절제하여 소비를 조절하고,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지 않도록 무난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다짐도 한다. 그는 누군가를 부러워하지도, 누군가가 부러워하게 만들지도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이런 멤논의 결심은 삶의 변수를 무시한 얕은 지혜로 그려진다. 볼테르는 멤논을 ‘현자’라 반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러나 멤논은 계획을 세우자마자 유혹에 흔들린다. 한 여성이 친 사기의 덫에 걸린 것이다. 절망하여 집에 돌아온 그는 친구의 초대를 받고 파티에 간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다 실수로 눈을 잃게 된다. 이어 재산을 잃는 사고도 당한다. 이 모든 것은 삶의 복잡다단한 변수들 때문이다. 보다 못한(?)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금기를 알려준다. 어리석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완벽하게 능숙해지는 것, 완벽하게 강해지는 것, 완벽하게 세력을 떨치는 것, 완벽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다. 우리도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한 행성이 하나 있긴 하지만, 광대무변함 속에서 흩어져 있는 수천억 개의 세계들 속에서 그 모두가 서서히 잇따르고 있지. 두 번째 세계에서는 첫 번째 세계에서보다 지혜와 쾌락이 적고, 그 다음도 그런 식으로 마지막 세계까지 이어져서, 그 마지막 세계는 모두가 완전히 미쳐 있지.”(28)


‘위로받은 두 사람’은 타인의 불행에 대한 충고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준다. 슬퍼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보다 더 불행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위대한 철학자’의 이야기다. 인간은 자기의 불행에 몰두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정작 그가 불행에 처했을 때, 위로받은 사람들은 그와 유사한 불행을 겪은 사람들의 목록을 그에게 가져다준다. 하지만 짧은 반전은, 가장 효과적인 위로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스카르멘타도 여행기’는 불관용한 종교에 대한 풍자이다. 너그러운 관용과 무한한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가 정작 이방인들에게는 얼마나 불친절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미크로메가스’는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걸리버여행기’의 우주판이라 부를 만하다. 키가 오천 미터 가까이 달하는 시리우스 거인이 우주를 여행한다. 엄청난 수명을 지닌 그는 수많은 분야에 박식하다. 그는 토성에 가서 키가 이천 미터인 ‘난쟁이’인 토성인과 친해진다. 미크로메가스와 토성인은 지적인 대화를 나눈다. 토성인들은 일흔두 가지의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상상력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수많은 정념을 가지고도 그들은 지루해한다. 시리우스인은 천 개의 감각을 갖고도 “더 완전한 존재들이 있다고 끊임없이 경고하는 뭔지 알 수 없는 희미한 욕망과 불안(63)”에 시달린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존재들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진정으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욕망하고, 만족스러운 정도보다 더 많이 필요로(63)” 했다고 한다. 시리우스인과 토성인은 자신들의 수명이 너무 짧다고 한탄한다. 토성인은 만 오천년을 산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거의 동시에 죽는다는 것을 잘 아시겠죠. 우리의 존재는 하나의 점이고, 우리의 지속 시간은 한순간이며, 우리의 별은 하나의 원자입니다. 우리가 조금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경험을 얻기도 전에 죽음이 찾아옵니다.(64)” 


그렇다면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지구인은, 점의 원자인 셈이다! 보르헤스가 좋아하는 문장도 이어 나온다. 


“영원을 겪었다는 것이나 하루를 겪었다는 것은 정확히 같은 것이라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별에서보다 천 배 더 오래 사는 나라에도 가보았습니다. 거기서도 주민들은 여전히 투덜거리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창조주는 이 우주에 풍요한 다채로움과 아울러 경탄스러운 일종의 균일성을 널리 퍼뜨려 놓았습니다. 생각하는 존재들은 서로 다른데, 모두들 생각과 욕망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비슷합니다.(65)”


그리고 그들은 지구로 왔다. 그들은 너무 작은 인간을 보지 못해 지구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현미경으로 겨우 고래를 식별할 정도로 그들은 컸다. 그들은 인간처럼 작은 원자가 말을 하고 생각할 수 있으며, ‘영혼에 상응하는 것’이 있으리란 사실이 부조리하다고 여긴다. 고래들의 소유인 듯한 지구에서 인간이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는 의문이라니! 그러나 토성의 난쟁이는 그들의 키를 알아낸 인간의 지혜에 놀란다. 극미한 물질도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신을 찬양한다. 그러나 지구에도,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없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양보다 더 많은 물질이 있어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지요.(82)” 


한 인간의 말이었다. 지나친 물질, 혹은 지성이 악을 만들어낸다는 풍자다. 우리 종은 모자를 쓴 미치광이들이 터번을 쓴 광대들을 죽이곤 하니까.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분노한 미크로메가스가 지구인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자, 인간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죽일 것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자기네들의 신에게 감사드리는 야만인이니까 말이다.


거기다 인간의 영혼에 대해 논해보라는 말에 인간들은 서로 다른 철학자를 인용한다.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장 이해 못하는 언어로 인용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86)” 그리스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한 철학자의 논리다. 그리고 모든 철학자들의 말을 정리해버리는 인간의 한 마디. 모든 비밀은 신에게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마들어졌다는 장엄한 주장에 두 우주인은 배꼽 빠지게 웃어댄다. “무한히 작은 것들의 무한히 큰 오만함(89)”이라니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백과 흑’은 우리의 영혼을 조정하는 좋은 귀신과 나쁜 귀신에 대한 이야기다. 천사와 악마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원칙과 나쁜 원칙은, 우연이란 실타래에 걸려 뒤섞여버린다. 신탁은 수수께끼처럼, 진실을 가린다. 한편 우리의 삶이 우리가 꾸는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볼테르는 우리가 책을 읽으며 팔십 만년의 역사를 훑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무한한 역사의 바퀴 아래 끝없이 작아지는 바퀴들이 함께 돌아간다. “노아의 방주에 있었던 앵무새는 모든 것을 보았지만 겨우 한 살 반밖에 되지 않았다.”(116)


‘바빌론의 공주’는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신비로운 여행기이다. 아름다운 공주와 그에 걸맞은 신랑감이 사랑의 결실에 도달하기까지의 긴 모험기이다.


볼테르의 단편소설을 읽다보니 ‘캉디드’도 읽어봐야겠다는 의욕이 솟는다. 볼테르의 단편집도 찾아봐야겠다. ‘미트로메가스’의 상상력과 풍자력은 여전한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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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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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데리다, 움베르트 에코, 옥타비오 빠스, 존 바스 등에게 영향을 미친 소설가가 있다. 이른 바 <책에 대한 책쓰기>를 주요 전략으로 삼은 이 소설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이다. 1899년에 태어나 각종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그는 그 명성에 버금갈 정도로 일생에 후회 없는 작품들을 남겼다. 오죽하면 스웨덴 한림원이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주지 않은 것을(혹은 줄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두고두고 탓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유럽에서 언어와 예술을 배우고 도서관 사서로 근무했던 그는 50대 이후에 거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악스러운 책벌레였다. 고전과 신화, 철학, 언어 등에 대한 그의 해박함은 소설 곳곳에서 묻어나와 <실용적 책읽기>를 하는 독자에게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소설가가 끊임없이 공부하여 지식을 축적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그에게서 증명된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수법과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가짜 주석(책, 잡지 등을 인용한)을 이용한 사실적 환상주의 

2-실존 인물의 가짜 주석에 대한 언급 

3-가상 인물의 실존 사실에 대한 발언 

4-실존 인물의 가상 인물에 대한 발언 

5-전혀 관계없는 연대에 활동하는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 

6-사실에 대한 왜곡과 역추리 


그의 소설은 각종 환상적 수법과 드라마틱한 반전은 물론 거대한 명제를 담고 있다. 그의 소설은 한 마디로 우주적이고 무궁무진하다. 그는 자신의 소설과 지식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으며, 각각의 다른 우주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그의 아포리즘은 오랜 시간의 사색을 통해 얻은 명증한 진리, 혹은 창조적 진술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물론 그의 주석들은 읽기 어렵고 까다롭다. 대체 보르헤스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과 탐구 정신(?)으로 집중하지 않는다면 탐독하기 어려운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정말로 내 말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는 보르헤스가 독자를 우롱하거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다. 다만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오류와 억측을 품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 


보르헤스의 이야기에는 고전적인 주인공이나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가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의 주인공들은 실존하는 그나, 그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고, 가상의 인물에 주석을 단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철학이기도 하고, 에세이, 우화, 전기이기도 하다. 그의 소재에 다양하듯이 그의 소설의 형식이나 구성도 역시 다양하다. 이 <바벨의 도서관>은 주인공이 없으면서 모든 이가 주인공인 그러한 소설이다. 그는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신적인 것들과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고찰과 인식론적 절망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반듯한 글씨로 찍힌 책의 활자와 서투르고 열이 맞지 않게 덧붙여 놓은 글씨로 신과 인간을 비유한다. 그렇다면 도서관이란 어떤 곳인가. 이 정교한 활자들로 이루어진 모든 책들이 담겨져 있는 육각형 진열실들은.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보다 앞서 철학적으로 풀리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해결을 묻는다. '도서관과 시간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도서관이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게 공표되었을 때 사람들이 받은 첫 느낌은 엄청난 행복감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숨겨진 어떤 보물의 주인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도서관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의 신념은 이러했다. 우선 바벨의 도서관은 '모든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다. 지상의 모든 책이 하나의 도서관에 모두 모여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이 도서관에 대한 소문만으로도 지식욕에 불타는 사람들은 들뜨게 된다. 그들은 아직 읽지 못한 수많은 책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혹은 책장에 사놓고 읽지도 않은 책들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 다만 지상의 모든 책들이 이미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기뻐한다. 그리고 언제나 관념 속에서 '모든 책'-그것이 하나의 책임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다. 또한 보르헤스는 세상의 모든 책이 각각 다른 책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한 권의 책은 유일무이한 것으로서 대체가 불가능하지만 도서관은 총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항상 그것에 대한 수십만 권의 복사본이 있다. 그것들은 단지 글자 하나, 또는 쉼표 하나가 다를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상의 모든 책들은 이전이나 현재의 모든 책들의 조합이며, 변형이라는 뜻일 것이다. 순수하게 창조적으로 나오는 글이 없기 때문에 보르헤스는 단 하나의 새로운 책도 없다, 라고 선언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자신들이 살았던 행복했던 도서관을 버렸고, 각자 자신의 <변론서>를 찾으려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층계 위로 내닫았다. 그 순례자들은 비좁은 낭하에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음험한 악담들을 지껄이고, 신성한 층계에서 서로를 목졸라 죽이고, 자신의 <변론서>로 잘못 알았던 책들을 터널의 밑바닥에 버렸고, 뒤이어 당도한 사람들에게 떠밀려 죽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정신 이상이 되어버렸다. 변론서들은 존재한다(나는 미래의 사람들, 실제로 존재하게 될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두 권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변론서>를 찾아나선 사람들은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그 책의 불충분한 해적판들이나마 찾을 수 있는 확률이 <영>이라는 것을 생각치 못했다. 



그러나 '도서관은 너무 광대하기 때문에 인간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손실 부분은 극소량에 불과하다'.바벨의 도서관이 소장한 '모든 책'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같은 인간의 영원한 지식에 대한 탐욕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모든 책은 하나이다―혹은 하나의 책은 모든 책이다'라고 말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는 '나머지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책'이 있다는 것이 인식론적 한계에 부딪힌 인간의 환상이다. 그러나 바벨의 도서관의 수많은 책 속에서 '모든 책'을 과연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그 책을 찾는 자는 아마도 신이 될 것이다. 급기야는 그 '하나의 책'을 본 사서에 대한 또 다른 환상이 등장한다.



#한 사서가 그것을 대략 훑어보았고, 그는 신과 유사하게 되었다. 


겨우 훑어 본 것으로 신과 유사하게 된 사서. 그렇다면, '그 책'을 지은 이는 (당연히)신이 아니다. 그는 신을 뛰어넘은, 신을 초월한, 가공의, 위험스런, 괴기스러운 존재이다. 보르헤스는 '미지의 신들 중에게 한 사람―단 한 사람, 그게 몇 천년 전일지라도―이라도 좋으니 그 책을 들춰 보고, 그것을 읽어본 사람이 있기를 기도했다'. '만일 영광과 지혜와 행운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되게 하소서. 비록 나의 자리가 지옥일지라도 천국이 존재하게 하소서.'라는 것이 그의, 혹은 인류의 간절한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다시 이 위험한 가정을 딛고 하나의 현명한 대안을 내놓는다. 


#우주의 어떤 책장에 그러한 총체적인 책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나는 반복해 말한다. 어떤 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단지 불가능한 책만이 존재할 가능성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어떤 책도 사다리가 될 수 없다. 물론 틀림없이 이러한 가능성을 주창하고, 부정하고, 증거하고 있는 책들과, 그 구조가 사다리꼴을 하고 있는 그런 책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책>을 부정하고 저주하는 무리 또한 있다. 나는 부정하고 냉담하며 도서관을 파괴하려는(테러리스트?!) 그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모든 것이 이미 씌여졌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폐기처분되어 버리거나 환영으로 돌변해 버린다.' 왜 그러한 책이 있기를 바라는가? 그러한 책을 찾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세계를 모두 알아버린 후 당신은 과연 생을 지속할 의욕과 용기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 책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모든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추상적이며 불안한가.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을 '마치 정신착란에 빠진 신처럼 모든 것을 긍정했다가 부정하고, 그리고 나서는 혼동에 빠져버리는 책들이 소장되어 있는 '열병'에 걸린 도서관'이라고 말한다. 이 열병은 바로 우리가 지닌 '위대한 책-혹은 도서관'에 대한 상상을 저지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라함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것. 모든 것에 기대를 걸었다가는 아무 것도 아닌 이 신(책)에게 세계는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열병에 대한 두려움 또한 완전이 잠식당하면 위험한 사고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이 두려움은 자칫 세계에 대한 탐구, 영원성에 대한 탐구와 그 도전을 말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해서 절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영원 또한 사실은 유한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은가. 유한이 없다면 무한도 없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책'이 있다는 가정 없이는 우리의 책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보르헤스의 말에 따르면 한계가 없지만 주기적이므로. 그 주기적인 상황 속에서 행운을 얻을 그러한 사람이 반드시 있지 않을까? 


#세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 아득한 곳에 이르면 그들이 상상하는 어떤 모습으로 낭하들과 층계들과 육각형 진열실들이 끝이 날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치에 어긋난 생각이다. 반대로 세계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책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 오래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무질서가 반복되면 질서가 되리라. 신적인 질서가. 


어쨌든 도서관은 존재한다.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 그 혼란스러운 지식의 육각형 창고 속에서 사서는(또한 우리는) 영원히 하나의 책을 갈망하며 저 모든 책을 읽고자 할 것이다. 모든 책은 하나의 책이다. 하나의 책은 모든 책이다. 어차피 한 인간이 평생을 다해 읽은 책은 그에게 '모든 책'이자 '하나의 책'일 뿐이다. 


#아마 나이와 두려움이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인류―유일한 종족―는 소멸해 가고 있는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도서관'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불을 밝히고, 고독하고, 무한하고, 부동적이고, 고귀한 책들로 무장하고, 쓸모없고, 부식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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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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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은 종교의 문제를 다루면서 '구원'이나 '행복'의 문제를 뿌리깊이 파헤치고 있다. 제목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아들'-혹은 '신의 아들'이란 예수이다. 예수는 약혼자가 있는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뼈와 살을 가지고. 그러나 그는 여기에 또 하나의 신-혹은 신의 다른 모습-이 내려보낸 진정한 '사람의 아들'로써 아하스 페르츠를 등장시킨다. 이 소설은 아하스 페르츠의 신학적 방황과 궤를 같이 하는 70년대의 인물 민요섭과 그를 따르는 조동팔이 바깥 이야기로 등장한다. 


소설은 살해당한 민요섭의 행적을 쫓는 남경사의 눈으로 진행된다. 일종의 액자 소설로써, 민요섭이 남긴 아하스 페르츠의 일대기가 담긴 노트의 내용이 중간중간 발췌된다. 소설은 우리 종교의 가장 절실한 문제인 '지상의 구원'과 '천상의 구원'을 논하고 있다. 당장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병과 고통에 신음하며, 이유 없는 죄과를 치르는 이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천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 뿐이다. 어린 시절, 남다른 기지와 총명함을 가진 아하스는 메시아임을 자처하는 광인을 만나 첫 번째로 이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째서 저 숱한 인간들을 고통과 신음속에 버려두는 것일까. 어째서 신을 저버리는 반역자는 생기고, 신을 애타게 불러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카인이나 유다의 배반, 저 소돔과 고모라의 독신, 신을 부정하고 현실의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신은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말한다. 선한 의도를 심어두었으나, 결국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해선 인간에게 선택하게 하였다는 것, 그러나 왜 신은 그러한 결과를 알면서도-죄를 지을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리 자유의지가 있다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들을 방치해두는가.


저 육신의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에게 선처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 고작 '고마우신 하나님'의 자비인지. 하나님은 행복한 사람들의 자기애적인 눈물겨운 찬양 속에서만 존재하시는 분인가. 빛 가운데서, 빛에 둘러싼 자들에 찬양을 받는 그 분은 우리 모두의 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처럼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한 때 내가 믿었던 신에 대한 의문들도 이 소설의 의문들에 많이 섞이게 되었다. 만일 신이 인류를 사랑하신다면, 고통받는 인류는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천국의 구원이 아닌, 여기 현실의 구원을. 만일 신께서 죄악을 만드셨다면, 그 죄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만약 죄악이 신의 뜻이 아니라, 어떤 다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신은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죄를 범하는 인간들에 대한 신의 딜레마이다.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해 충격적인 질문을 '신'에게 던진 것이다.


사막에서 예수를 유혹했다는 악마는 실은 진정한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였다는 말. 예수를 배반했다는 유다는 실은 진정한 눈뜸을 실행한 자라는 이야기. 아하스는 사막에서 예수에게 민중이 바라는 것은 육신을 달래줄 빵과 편안함이며, 당신은 그들을 교란시키고 세상의 제일 큰 독재자, 질투심 많은 신, 야훼의 명령을 전하는 자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신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는 것. 민요섭과 조동팔이 만든 신에 대한 '쿠아란타리아서'에서는 놀라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선과 지혜라는 두가지 면을 가진 신. 우리는 선 없는 지혜를 악이라 불렀고, 지혜없는 선을 선이라 부른 것이다.


그 두 가지 실체의 결합, 이들이 만든 새로운 성서인 '쿠아란타리아서'는 그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신 또한 한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인간처럼 다양한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로마 신화적인 말. 사실 신의 분노와 질투는 성경 곳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사람에게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지 환락이 꿈꾸고 있는 천국의 세계가 아니다. 그 천국에 대한 기대로 신의 시험을 통과한 욥의 신앙은 경건하기 보다는 음흉하다. 신은 인간의 절대적 숭배를 바라면서, 어째서 그 가난하고 비루한 인간들을 따스이 거두어주지 못하시는 것인지. 그 천국의 기대가 아무리 벅차고 황홀한 것이라고 해도, 육신의 괴로움으로 죽어가는 자에게 과연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끝까지 주장할 수 있을런지. 이 한 생이 지나 행복한 삶 가운데 신을 믿은 자들과 고생고생하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자들이 같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진정으로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소설이 신에 관한 목마른 의문을 완전히 해갈시킨 것은 아니다. 또한 꽤 오래전에 쓰여진 작품이긴 하지만, 문체가 메마르고 남경사가 등장하는 한국에서의 이야기 진행이 너무 상투적이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조동팔은 자신들의 신의 경전을 만들려다 다시 '우리 주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간 민요섭을 살해했다는 것이 뒤늦게 발견된다. 결국 신에게로 돌아간 주인공의 모습은 씁쓸함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새로운 신에 대한 설명도 너무 적었고, 미흡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전체성에 대해 어떻게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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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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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구 위에 수십억 명의 인구가 바글거린다 해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공간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 존재할 뿐이다. 더구나 특별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면,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 차단된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 깊고 절실하게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물론 사랑을 담는 마음의 자리가 너무 넓어 동시에 여러 명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소중한 것은 그가 내게 유일무이하며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고, 그와 만들어나가는 관계의 자장이 내 삶을 좌우하기 때문이 아닌가.


에쿠니 가오리의 『울 준비는 되어 있다』는 그러한 관계에 관한 여러 편의 체험기 같은 소설들이 모여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식물이나 동물, 하다못해 공기와도 관계를 맺는다. 온 세계가 바로 관계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관계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파장을 지니고 있는가. 사랑은 일상을 변화시키지만 또 정체시키기도 한다. 사랑은 일상을 황홀한 리듬으로 연주하지만, 연주가 끝난 다음에는 막막한 침묵이 남는다. 리듬이 없는 일상을 견디는 것은 오로지 남은 두 사람의 몫이다. 만약 한 사람의 몫으로만 남는다면 사랑이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에쿠니 소설의 인물들은 관계 속에서 언제나 결핍을 체험한다.「생쥐마누라」의 미요코는 남편에게 충실하지만,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함으로써 일상의 건조함을 견딘다. 백화점에서 독한 술을 혼자 마시면서 결코 누구도 자신을 고독한 사람으로 보길 원하지 않는 미요코는 오히려 더 외로워 보인다.「울 준비는 되어 있다」의 아야노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고, 합의 하에 헤어지고, 합의 없이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식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결국 심장의 일부가 죽었다고 느낀다. ‘빛나는 사랑을 했지만 그뿐’이라고 읊조리는 「손」의 레이코처럼, 사랑은 손가락에서 반지가 빠지듯 삶 속에서 힘없이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오기를 부리며 사랑하는 남자의 포옹을 거부하는 것은 그가 결국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 속에서 사랑은 이미 박제된 동물처럼 싸늘하고 미동 없는 무생물에 불과하다. 몽상적 여행가가 ‘그 어느 곳도 아닌 장소’를 꿈꾸듯이 사랑에 목마른 그들은 ‘그 어느 곳에도 없는 사람’을 꿈꾼다. 그것은 반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을 절실히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관계가 지속될수록 사랑하는 상대는 모호하고 퉁명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전진, 또는 전진이라 여겨지는 것」에서 ‘당신을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라고 반문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라. 뭐든지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남편은 고양이를 버리는 낯선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남편에게도 아내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은가. 누군가를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 그는 이미 알 수 없는 심연 너머에서 물끄러미 이 편을 바라본다. 그러나 인간이 완전 소통을 하는 개미처럼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관계는 끔찍한 올가미가 되어버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알고 싶다는 욕망과 알 수 없다는 절망이 어쩌면 사랑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적 같은 사랑이 잠잠해진 뒤에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관계가 남는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아, 라는 자조는 곧 자기 자신을 상투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인생은 연애의 적이다’라는 치카의 말에 동의하는 건 관계가 결국 일상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와 직면해야만 하는 삶의 변화무쌍함 속에서 관계는 변하지 않는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 한편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단지 관성으로 지속되지 않기 위해서 관계는 또 변화해야 한다. 정체와 변화라는 딜레마 속에서 수많은 연인들은 피로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관계를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 것만이 사랑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창조적인 삶은 늘 현재에 존재하며, 변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다. 사랑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 삶에 부대끼고 지친 한 사람에게 하루의 피로를 달래며 쉴 수 있는 어깨를 빌려주는 용기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은가. 그것이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에쿠니의 주인공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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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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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매혹적이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향기같은 묘한 몽롱함을 주었다. 문장들은 각각 아름다웠고, 눈물겨웠다. 보석 같은 이야기였다. 작가의 독특한 ‘거리 두기’는 냉정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시선으로 삶을 관찰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프랑스나 배트남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국의 나라 같다. 대상에 대해 지니고 있는 우리의 이미지란 얼마나 빈곤한 것인가.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는, 무궁무진한 것이 아닌가.


어린 배트남 황제 칸은 루이 16세에게 배트남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왕은 칸을 도울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칸을 어여삐 여기던 피에르 주교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두 척의 배를 준비했다. 선교사, 수녀, 무장한 군인들이 배트남을 향해 떠났다. 불행은 머지 않아 얼굴을 드러냈다. 낯선 기후와 쥐, 괴혈병, 콜레라 등이 그들을 위협했다. 피에르 주교는 배가 배트남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선원들, 수도사들이 하나씩 죽어 갔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잊혀지기 시작했다. 배트남에 도착한 이들은 두 세력으로 갈라졌다. 성직자들은 전쟁이 싫어 평화로운 마을에 남길 원했고 선장은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사이공으로 떠났다. 선장과 부하들은 곧 죽었다. 배트남 마을에 살게 된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습관을 조금씩 버렸다. 수녀 한 명이 또 죽었다. 다시 황제가 된 칸의 아버지는 바딘에 와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아들이 죽은 보복을 했다. 며칠 전 떠난 세 사람의 성직자 외에는 남김없이 학살당했다. 한 명의 수녀 역시 죽고, 모두에게서 잊혀진 두 명의 성직자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6년 후, 둘은 병에 걸려 죽었다.


줄거리는 간략하다. 한 줄로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원정대가 배트남에 가서 학살당하거나 병에 걸려 모두 죽었다, 라고. 그러나 그 과정은, 낯선 문명 속에서 삶의 원초적인 모습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초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화가 거의 없고 감정이나 판단 표현이 절제되어 있기에 오히려 이야기의 진정성은 살아난다. 사랑하는 이들, 동행한 이들의 죽음에 슬퍼할 틈도 없다. 자연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삶에 충실할 것을, 대지에 충실할 것을 명령한다. 소박하고 행복한 배트남 사람들처럼 그들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카트린느 수녀가 글쓰기를 그만둔 것과 기도하기를 멈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명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들을 잡으러 온 무장한 군인들은, 성스러운 성직자가 아니라 섹스 후에 태연하게 잠들어 있는 두 육체를 보았다. 그들은 이미 프랑스인도, 성직자도, 타국인도 아니었다. 후회없이, 조바심없이 살아가는 자연인이었다. 군인들은 감동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삶은 간략하고 단순해졌다. 그들은 온전히 그들 자신으로 살 수 있었기에 더없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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