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슴아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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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인지 비인지 안개인지 모를 비바람 속에 앉아있으려니
아슴아슴하다,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용아, 아슴아슴하다라는 단어가 있나 찾아봐˝
˝있어요,언니.˝

용이 읽어주는 아슴아슴하다의 뜻에는 아래 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흐릿하다
몽롱하다
희미하다

떠오른 말들과 인식된 말 사이의 거리가 없다고 느껴질 때
기분은 흐릿하지도 몽롱하지도 희미하지도 않다.
명쾌해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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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레멘에 가고 싶어

브레멘을 처음 인식한 때는 초딩시절 고전읽기 목록에 있었던 ‘브레멘 음악대 삽화‘였다. 두번째는 만병초를 검색하다가 브레멘의 어느 공원에 만병초가 그득그득 핀다는 사실을 알고, 아! 브레멘 했었다.
세 번째는 파울라 모더존 베커 뮤지엄이
브레멘에 있다는 걸 알고
만병초가 필 때 브레멘에 갈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와인을 마시다 혼잣말인 듯 무심코 내뱉은 말.

브레멘에 가고 싶어.
왜?
찾아본지 오래되어 가물가물한데 브레멘인지 그 근처인지에
파울라 미술관이 있어.

가자!
진짜?
그럼, 나랑 함께인데 안되는 게 뭐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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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계하지 않아서 관계가 유지되는 관계

관계라는 말이 가진 의미가 서로 엮인다일터인데, 관계하지 않았기에 거리가 유지되고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가 뼈아프기도, 감사하기도 한 시간이다.
관계하려고 했을 때 관계가 깨질 것이라는 예측도 계산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상대가 싫어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노력하지 않았고 저절로 그리 되었다.

노력해도 그러기 힘든 관계가 있고 자연스럽게 관계가 유지되는 관계가 있다. 그것이 현실이라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으며, 나에겐 처음부터 낭만적 연애관이 또는 사랑관이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낮으면 갈등할 일도 불화할 일도 없다. 관계에 대한 기준이 없으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할 일도 없다. 비정상이라고 질책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없다.

정이현의 산문집 ‘우리가 녹는 온도‘가 나왔다. 대개 낭만적 사랑에 빠졌을 때의 남녀는 녹는 온도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그 다름에 매력을 느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기에, 녹는 온도가 다르다하더라도 당시의 뜨거움 때문에 같이 ‘녹고‘만다. 누구의 온도 때문에 ‘같이‘녹게 되었는지는 구별이 불가한 채로 서로 비슷하다 느낀다.

비슷한 온도의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마음도 녹는다. 자연스러운 나다움이 드러나고 상대가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좋아한다는 믿음때문에 나를 긍정하게 된다. 다른 온도의 사람과 있으면 차가움에 상처받고, 뜨거움에 화들짝 물러나게 된다.

관계하지 않음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충성심이 베이스가 된다. 관계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기대치가 없는 맹목적인 헌신이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관계에서 ‘서로‘라는 의미를 제거하면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게 관계가가진 아이러니다. 정이현의 소설집에서는 낭만적사랑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우리가 녹는 온도에서는 어떤 일상을 산문으로 끌어왔는지 두 권을 같이 읽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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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원두와 보헤미아 원두를 탈탈 털어 마지막 커피를 내렸다.온 가을 내내 겨울까지 어느 분의 호의가 멀리 이름모를 사람들의 모임 자리를 향내나게 하였다.
감사하다.

어제 도서관 강의에서 우연히 알게 된 분이 어깨를 톡톡 두드리시더니 건넨 시집 한 권.
제목을 보고 소름 돋았다.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 싶은 곳.

나의 해바라기라니.
나의 해바라기라니.

나는 해바라기에 대해서라면
정말 할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시집은 아직펼쳐보지 않았지만
이렇게 또 하나의 감사가 쌓여가는 겨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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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 (양장)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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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2-2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쑥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그것보세요, 공작. 제노바도 루카도 보나파르트 일가의 영지, 영지나 다름없이 되어버렸잖아요. 미리 말씀드려두지만, 그래도 전쟁 같은 건 없다고 하시거나 반그리스도의(정말 저는 그자가 반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어요) 추악하고 무서운 소행을 변호라도 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당장 당신과 절교하겠어요. 당신은 더이상 제 친구도, 당신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제 충실한 노예도 아녜요.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잘 오셨어요. 제가 당신을 놀라게 해드린 것 같군요. 자, 앉아서 말씀을 들려주세요."

 1805년 7월 마리야 페오드로브나 황태후를 가까이 모시면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女官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는 자기 집 야회에 맨 먼저 도착한 위세 있는 고관 바실리 공작을 맞아들이면서 말했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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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를 읽기 시작했다. 4권이 완간된 기념으로 뭔가라도 하고 싶었고 그 뭔가는 일단 책을 손에 드는 것, 하루에 한 시간 백여쪽씪 읽어보자고 맘 먹었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사흘 동안 백쪽을 못 읽었다. 하루 한 시간씩 투자를 못했고, 다른 책들과 달리 한 시간에 백여쪽 읽기가 안되는 책이었다. 시작부분은 이름과 상황이, 대화부분을 활자를 달리해서 뭔가 가독성이 떨어졌다. 그래도 첫부분 진도가 안나간다는 팁을 미리 들었기에 참고 책장을 넘길 수는 있었다. 40여쪽 지나가니 적응이 되었고, 하루에 시간을 정해놓고 읽기는 부적합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 지나서 펼쳐보니 금방 또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주말에 죽기살기로? 읽어서 두어권씩 읽어 버리는 것이 내겐 맞는 방법인 것 같다.

 

1권은 565쪽이고 3장으로 되어있다. 각주가 자세히 달려 있는 편인데, 처음에 아예 각주를 좀 따로 읽고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다. 첫 부분과 각주 1)을 읽고 들머리를 장악해버리면 읽기가 좀 쉬워진다. 시간과 체력을 핑계로 송년모임은 거의 고사했는데, 연말연시에 읽기로는, 왠지 '전쟁과 평화'가 넘 어울린다. 겨울밤에 읽는 소설로 모양새가 그만이다. 기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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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1~5장에서는 1800년대 초 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 살롱의 생활상이 재현되고 있다. 안나 파블로브나 야회에 온 손님들의 대화에는 조정의 정통주의자적 페테르부르트 사회"'유행''시사 문제'가 반영되어 있고, 특히 이시기 유럽의 정치 투쟁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의 반향을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에서 군인으로서 명예를 획득한 나폴레옹은 1804년 황제의 칭호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면서 노골적으로 영토 침탈을 감행했다. 그는 1797년 첫 이탈리아 원정 때 제노바를 점령해 리구리아 공화국에 분여했고, 1805년 점령지 공화국을 이탈리아 왕국으로 선포한 뒤 스스로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 1799년에 침탈한 루카는 1805년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와 그의 남편인 바키오치에게 분여했다.(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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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이 출간 되었다는 걸 알고 너무 기뻐서 바로 주문을 했다. 가 아니라 내가 지금 이런 걸 읽을 때가 아니지 하는 마음으로 책사기는 있는 뒤로 미뤄 둔 상태다. 당장 급한 책들만 e북으로 읽거나 도서관 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읽는 정도.

 

그럼에도 불과하고 어쩐지 허전한 마음과 '아버지의 유산'을 읽기 전에 뭔가 로스를 정리해 두고 싶어서 머리 맡에 있던 '에브리맨'을 읽었다. 로스의 책들은 하도 몰아치듯이 읽어서 '미국의 목가'나 '네메시스','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포토노이의 불평','전락'을 제외하곤 글의 내용이 머릿 속에서 뒤죽박죽 섞여있다. 다시 찬찬히 읽고 싶은 이유다. <에브리맨>을 읽으면서 <에브리맨>을 읽은 것을 알게되었고, 이제 확실히 <에브리맨>의 줄거리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아직 못 읽은 로스 책이 <콜롬버스여 안녕>과 <휴먼스테인1,2>라는 게 인식이 되었다. 그전에는 읽은 책과 안 읽은 책들이 오락가락 종잡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시험기간에 책상정리한 효과가 이나마는 있었다고 해얄까.

 

'500days in Ireland'라는 작은 활자에 끌려 <너는 어떻게 나에게 왔니>를 들춰 보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그 때, 소외도 괴로움도 외로움도 없었던 나의 500일. 동화 같은 세상에서 겪은 진찌 동화 같은 나의 이야기'

 

'키 작은 동양 소년이 꼬박 이틀에 걸쳐 도착한 유럽의 작은 마을, 여기저기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마음이 진해지던 곳, 다섯 채의 집과 끝없이 펼쳐진 들판. 검은 밤하늘에 흐르던 은하수와 별빛이 가득 채운 나의 마음. 깊은 밤을 날아 적어 내려가던 작은 일기들을 보며 다짐하던 일'

 

'올리버가 잠들기 전에 나는 항상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우리가 오후에 산책을 하면서 본 개미떼 이야기, 젖소가 새끼를 친 이야기, 내일은 비가 올 거라는 이야기, 오늘 만든 핫초콜릿은 영 맛이 없었다는 시덥잖은 이야기까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야기들로 마무리 짓던 밤, 우리에겐 늘 내일이 찾아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시시콜콜한 내일도, 지루한 모레도, 꼭 찾아 와주길 바랬다'

 

<너는 어떻게 나에게 왔니>는 군대를 다녀 온 이십대 초반의 한국 청년이 영국 시골의 장애우공동체마을에 가서 지낸 일상의 순간들을 담백하게 묘사하고 풍경과 마음을 잘 그려낸 감동적인 에세이었다.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봄에 나온 나희덕 시인의 에세이집인데, 나란히 꽂혀 있길래 손에 들었다. 여는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의 마지막 단락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중년의 시인은 길 위에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짧은 글들의 면면이 여행의 경험을 살린 차분한 글들이다. 쿠사마 야요이 전시회를 본 소회를 적은 '소멸의 방'이나 고흐와 안네 프랑크, 카프카의 방들을 엮어서 이야기한 '그들은 방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처럼 한 가지 주제를 엮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아우를 수 있는 공간을 다녀 보았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가지를 다섯 갈래는 칠 수 있을 것 같은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돋보인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도 잔잔한 글들과 더불어 조화롭다. 연말에 사람 많은 곳을 피해 조용히 있고 싶을 때 이런 책들을 손에 잡는다면 편안한 쉼이 될 듯하다.

 

요즘 곁에 두고 아무 데나 펼쳐서 읽는 <고마워 영화>. 자전거를 탄 소년에 이어 눈에 띈 영화는 '서칭 포 슈가맨'이다. 밥 딜런, 롤링스톤, 엘비스 프레슬리 시대에 공존 했던 가수 로드리게즈에 대한 다큐.

 

그는 자신이 살던 디트로이트에서 음반 두 개를 내고 달랑 6장만 판매되고, 잊혀진다. 그런 로드리게즈의 40년 후 반전의 삶이 펼쳐진다고 하면 적확한 표현이 아니고, 이미 반전의 삶을 살아 왔었다고 해야 하나...배혜경님은 이 영화의 OST를 사서 듣고 주변에도 선물을 했다고 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영화를 주변인들도 봤으면 하는 열망이 넘쳐서 친한 친구와 중학생이던 딸을 데리고 다시 영화관을 찾았었다. 서칭 포 슈가맨을 본 사람들은 아마 대개 그랬을 것이다. 혼자만 보기엔 너무 아까운 영화. 보는 내내 다 보고 나면 정말 묵직한 감동이 밀려 오는데, 그 묵직함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기적은 화려한 것도 뜻밖의 기이한 것도 아니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다. 영화보기도 읽는다는 행위로 묶을 수 있는 '어떤 움직임'이다. 그 행위들이 자신의 삶에서 구체화 되었을 때 비로소 읽기에 의미가 부여 되는 것 같다. 고마워 영화를 읽으면서 저자는 영화 읽기나 책 읽기가 자기 삶에서 구체화 되는 분이라고 느꼈다. 한 행위가 다른 행위로 전이되고, 보다 더 구체화되어서 삶에서 녹아 날 때 비로소 살아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는다 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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