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제목을 미처 외우지 못했는데 비슷하게 안 외워질 것 같은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이 나왔다. 쉬운 것 같은데 은근히 헷갈리는 제목들이다.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가 정적이면서 고요한 소설이라면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은 기본적인 톤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가볍고 위트 있다.
실실 웃어가며 꿀잼이네, 동네방네 마쓰이에 마사시 신간 나왔어 카톡해가며 산만하게 즐겁게 읽었다.

에드가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에 ‘거소의 성격이 일반적으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의 성격으로 인정되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런 사람이다. 머무는 공간이 중요한 사람. 자기의 정체성을 거소에 반영해 구현하려는, 더 나아가 삶의 디테일에 집착하는 남자다. 삶의 미시성에 예민한 사람들 대부분은 로맨티스트일텐데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 나오는 주인공이 제철요리에 집착하듯 로맨티스트들은 삶의 속도보다는 머묾, 즉 여유에 방점을 두는 사람들이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에 나오는 주인공은 오십대를 바라보는 편집자인데 르클린트의 조명기구와 덴마크 엔틱가구를 사고 로열코펜 하겐의 이어플레이트를 사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남자다. 그냥 공원이 아니라 자연림이 남아 있는 공원 옆에 살고 싶어하는 남자고 취향이 달랐던 아내와 삶의 적당한 순간에 혼자 살게 된 운이 좋은 남자이기도 하다.

그가 우아함을 추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겉보기에 제법 우아해 보이는 혼자가 된 그. 마침내 눈치보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그런 그 앞에 느닷없이 닥친 우아와는 거리가 먼 노년의 삶과 다시 함께의 삶은
삶의 아이러니를 던져준다. 누구나 맞이 하는 스스로의 노년도 버거운데, 미리, 이전에 감당해야 하는 부모의 노년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삶의 질에 집착하는 작가답게 대단히 매력적이고 영리한 결말을 보여준다.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는 건축학도를 꿈꾸었지만 문학을 전공하고 편집자의 길을 걷게된다. 하지만 그는 취미로 설계도를 그리고 건축공부를 꾸준히 해서 건축가가 주인공인 여름은 그 곳에 남아를 집필할 때도 건축에 대한 자료 조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건축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마쓰이에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건축가가 가구 디자인을 겸하듯 마쓰이에의 관심사도 공간을 안을 채우는 디테일에 뻗어 있다.

여름은 그 곳에 남아 만큼은 아니지만 우아한지 또한 건축용어나 건축가, 디자이너, 동식물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한 번은 그냥 읽고 한 번은 찾아가며 읽었는데 덴마크 황실에서 쓴다는 조명기구 르클린트나 덴마크건축가이자 가구디자이너 폴 키에르홀룸,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하다는 사워도 브레드 같은 것을 찾아 보았다.

개인적 취향의 재미있는 부분들은, 또 이런 것이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이름이 군데군데 툭툭 튀어나오는 것 그것이 장소 앞에서이기도 하고 상황 속에서이기도 하고 미래의 장면이기도 하면서
심심할 수 있는 소설에 윤기를 더해준다.

˝다자이 오사무가 몸을 던져 떠내려간 상수는 당시만큼 물살이 빠르지 않았다˝ p73

˝이럴 때 다니자키라면 어땠을까. 어떻게 혼자 보내겠습니까라며 반강제로 따라갔을까. 적어도 다니자키의 소설에는 이렇게 어중간한 배웅장면은 없었지˝p74

˝외톨이가 된 류 지슈(오즈 야스지로 영화 주연배우)에게 쓸쓸하시겠어요 하고 창너머로 인사하는 것은 친절한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닌가˝p245

˝펜던트 조명은 르클린트 제품을 방마다 각각 다른 타입으로 달기로 했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지출이 꽤 컸지만 나는 만족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폴 키에홀름이 디자인한 등나무 헌팅 체어를 이층 다다미방에 놓고 매미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고 싶다. 사십대 후반에 이렇게 물욕 넘치는 꿈을 꾸다니, 헤어진 아내는 물론 아들에게도, 아니, 가나에조차도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p118

˝나는 가족이 아니라 좋은 집을 원하는 게 아닐까˝
p120


˝폴 키에르홀름(Poul Kjaerholm, 1929~1980)
폴 키에르홀름은 덴마크 가구 디자인의 전통을 세운 카레 클린트의 제자다. 클린트는 새로운 미학을 찾기보다 기존의 우수한 디자인을 더욱 연구해서 기능적으로 개선하는 디자인 방법론을 가르쳤다. 그러나 키에르홀름은 재료부터 차가운 금속을 사용했고 기능보다는 빈틈없는 미학적 긴장에 몰두해 북유럽 디자인 전통에서부터 벗어나 있다. 키에르홀름이 개선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바우하우스의 절제된 미니멀리즘 미학이다. 그는 초기 모더니즘 미학을 더욱 가다듬고 정제해서 순수한 조형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폴 키에르홀름은 자신이 사는 작은 마을의 가구 장인에게 가구 제작을 배웠다. 코펜하겐으로 가서 대니시 스쿨 오브 아트 &디자인에서 가구 디자인을 배우고 동시에 왕립 코펜하겐 미술학교의 카레 클린트 수업도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미국의 찰스와 레이 임스, 바우하우스의 미스 반 데어 로에, 데 스틸의 게리트 리트벨트였다. 학생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키에르홀름은 1950년에 PK0 의자를 발표했는데, 유기적 형태와 합판을 재료로 한 것에서 임스 부부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1950년대에 그는 덴마크에서는 매우 급진적으로 보이는 성향의 가구를 연속해서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인 PK22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바르셀로나 의자를 더욱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형태로 밀어붙여 디자인한 것처럼 보인다. 접합 부위가 전혀 안 보이게 하려는 노력은 디테일을 강조한 미스 반데어로에의 강령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PK24는 선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미니멀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구현됐다. 폴 키에르홀름은 아르네 야콥센과 함께 전후 북유럽 디자인의 새롭고 급진적인 방향을 보여준 대표적인 디자이너다.˝ 월간 디자인

˝샌프란시스코 사워도우 브레드

거의 금문교만큼이나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사워도우 빵은 1849년, ‘골드 러쉬어’들이 밀려들어오고 빵집이 크게 늘어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제빵용 효모(이스트)가 발명되기 전인 이 시대에 빵을 부풀려 구우려면 ‘첫반죽(starter)’이 필요했다. 즉 물과 밀가루로 만들어 발효시킨 반죽을 한번에 다 구워내지 않고 조금 남겨두었다가 그 다음 번 반죽을 만들 때 섞는 것이다. 부풀려 구운 빵은 아마도 수천 년 전에 이집트인들이 우연히 발견한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로 온 빵장이들은 자신들이 구운 빵에서 어딘가 다르고 정의할 수 없는 맛이 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는 그것이 샌프란시스코의 안개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는 인근의 포도 재배 지역에서 가져 온 야생 효모 때문에 빵맛이 바뀐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들이 붙인 사워도우(시큼한 반죽)라는 이름이 그대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는 물론 다른 지역에도 사워도우를 만드는 빵집은 많지만, 진짜 원조 샌프란시스코 사워도우는 프랑스의 부댕 가에서 만든다. 이 전설적인 빵집에서는 1849년에 처음 만들어진 ‘첫반죽’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사워도우 빵을 만든다.˝ 죽기전에 먹어봐야 할 세계음식백과

알바 알토 주택
폴 키에르홀룸 의자
르클린트 펜던트 조명
영화 파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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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할 때부터 눈여겨 보았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았다.
괜찮을 것 같아, 볼까?라는 마음과 넘 무거울거 같아, 안볼래라는
마음이 반반이던 영화였는데 눈앞에서 하고 있길래 굳이 피하지
않았다. 역시나 많이 묵직한 영화였다. 개봉관에서 보고 나왔다면
같이 본 누군가와 말 없이 술 한 잔을 기울이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을 것 같다.

몇 년 전에 본 영화 ‘러덜리스‘와 줌파 라히리의 축복 받은 집에 나오는 첫 번째 단편 ‘잠시 동안의 일‘이 떠올랐다. 세 편 모두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리라의 슬픔의 정서에 맞닿아 있다..

잠시 동안의 일이었지만, 생이 지속 되는 한 고통이 삶을 짓누르리라.
살아 있는 한 떼어낼 수 없는 슬픔 또한 지나고 보면
잠시의 일에 불과하리란 희망을 가져야 할까,
어느 곳에도 그런 기운은 없지만 그러함에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뎌나가는 약한 존재의 강인함이 처연하다.

주말에 봤는데 장면이 계속 떠오르고
인물들의 마음자리가 짚어진다.
여운은 길고 할 말은 없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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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에 5월 중순을 경험한 날
미세 먼지도 없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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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욕.커피.꽃보러가기.

이맘 때 연휴기간에 늘 하던 일이다. 올 해는 타이밍을 놓쳐서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못했더니 속에서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갑자기 올라간 기온 탓일지도 몰랐다. 며칠 만에 드디어 혼자가 되었고 곧바로 커피를 내렸다. 혼술은 곧잘 하지만 혼커피는 드문 일이다. 늘 같이 마시려고 대여섯 잔 이상의 커피를 내리기에.

‘이렇게 조금 갈아도 되는거야?‘
속엣말을 하며 평소의 반도 안되는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천천히 핸드밀을 돌렸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라는 스님 말씀을 상기하며. 하루에 대여섯 잔의 커피도 두려움 없이 마시던 시절은 언제런가 싶게 지나고 아침 일찍 커피 한 잔도 조심스럽게 마시게 된 게 한참 되었다. 그런 만큼 커피 한 잔이 더 소중하고 애틋해졌다.

오늘의 커피는 인도네시아 아체 가요마운틴이다. 스님이 직접 로스팅해서 주신 커피인데, 이 원두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인도네시아 어느 지역이 그렇게 조용하고 아름답다고. 스님을 모시고 인도네시아에 가고 싶다고 생각을 하며 지도를 그려보고 커피 산지도 표시하며 마음을 키웠었다. 인도네시아 아체지방의 가요마운틴에서 나는 커피들은 거의가 해발 1500미터 이상의 산지에서 나며 대부분이 유기농이라고 했다.

미리 골라놓은, 한국에서 산 폴란드 시골느낌 나는 커피잔을 데워놓고 천천히 드립을 했다. 약배전을 한 원두라 좀 시간을 끌며 드립을 했는데, 뭘 알아서가 아니라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늘 주먹구구식으로 내리기에 내가 내린 커피가 맛있기가 힘든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산미가 과했다. 균형이 깨진 것이다. 산미를 감추려고 급히 쿠크다스 두 조각을 조달하고 물을 더 섞어서 폭풍 드링킹했다. 천천히 마시라고 스님이 그렇게 두 번 세 번 말씀하셨는데 혼자 마시자고 드립을 하는 정도면 정말 너무너무 커피가 고픈 상태라 천천히 마시는 게 불가능하다.

아체가요마운틴을 잘 내리면 어떤 맛일까 싶어 찾아보았더니 어떤 사람은 바디감이 있다고도 어떤 사람은 산미에 꽃향기가 난다고 했다.아체가요마운틴도 품종이 다양했고 로스팅 정도에 따라 풍미가 당연히 다른 듯 보였다.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내린 결론은 기본적인 산미와 풍부한 과일향, 꽃향이 대표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섬지역의 높은 산에서 나는 아체가요마운틴. 인도네시아의 커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시 커피집을 하시겠습니까의 구대회씨 소개였다. 광흥창역에 있는 구대회커피에 매일 도장을 찍던 시절이었는데 그 때 인도네시아에 커피산업이 발달했단 얘기를 신기하게 듣고 커피도 마시고 그랬는데 그 때 마신 커피가 아체가요마운틴일지도 모르겠다.

구대회커피집에서는 머신커피만을, 십삼월에서는 핸드드립 커피만을 판다. 최근에는 성북동 서점 커피집 십삼월에 만나요에서 마신 커피가 진짜 맛있었다. 커피는 공부도 기술도 중요하지만 역시 손맛이구나 싶었던.
오늘 십삼월이 휴무가 아니었다면 아마 먼길을 달려 십삼월에 갔을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도시의 한 가운데서 섬 생각이 간절할 때
바람을 맞듯이 커피를 마시러 가고 싶은 곳이
‘십삼월에 만나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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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

복복 목숨수 풀초

복과 장수를 뜻하는 이름답게 꽃말이 ‘영원한 행복‘이다.
복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의 거의 전부를 함의하고 있기에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 해 복 많이 지으세요

라는 간단한 문장으로도 최대한의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일거다.
언제부터인가 음력설보다는 양력설이 더 새해같고
지금에서야 새해인사를 주고 받는 것이 좀 뜬금없게 되었다.
나처럼 새 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묵은 생활방식으로
뭉기적거렸던 사람들에겐 고마운 유예기간이었을지 모르는 한달 이상의 시간들이 지난 지금, 다시 새 해 복!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야될 일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해마다 음력설에 가는 곳이 있다. 시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복수초가 피는 공원?이다. 공원이라하기에도 너무 소박한 곳이지만 산은 아닌 게 분명하고 공원이라고 굳이 팻말을 세워 놓았으니 공원이라고 불리는 그 곳.
어느 해는 좀 더 춥고 어느 날은 좀 더 따듯하다.
바람이 부는 날도 있고 눈이 쌓인 날도 있었지만 언제나 어김없이 복수초는 피어있었다.

더 남쪽에는 2월 초에도 피는 꽃이고 눈 속을 뚫고도 피기에 봄꽃이라는 말보다는 겨울꽃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대개는 이맘 때 봄의 전령사라는 이름으로 신문의 한 컷으로 등장하고 봄꽃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지만 언제부턴가 내겐 ‘겨울의 끝‘을 떠올리는 꽃이다.

예전엔 복수초를 보면서 아! 봄이다!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복수초부터 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봄이 너무 지루했다. 개나리 벚꽃이 피어 흐드러질때 쯤은 이미 봄이 너무 식상해서 그때의 꽃들을 흠뻑 즐길 수 없었다. 이후로 벚꽃은 봄의 끝을 알리는 꽃 복수초는 겨울의 끝을 알리는 꽃이구나로 정리를 했다. 봄의 시작과 겨울의 끝이 뭐가 다르지? 왜 이런 것에 의미를 두고 답?을 찾으려 하지? 끝과 시작의, 계절과 계절의 경계를 생각해보는 겨울 끝자락, 올 해도 어김없이 복수초가 피었다.

지금 이 사진을 보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복‘과 수‘가 깃드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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