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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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우연히 마주친 벌거벗은 타인이었다. 그녀의 '삶'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았던 사람이었다. 한때 그녀를 이끌고(헤엄치며) 어여쁜 어머니의 음부를 통과했다.

 낯선 사람과 삶의 시작 전부터 알던 사람이라는 두 가지 경우 모두 그 양극성은 견디기 어려웠다. 해소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극단의 그 거리. 132쪽

 

차코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진수성찬을 즐기다 들켰다. 로스트치킨,감자튀김,스위트콘과 닭고기 수프, 파라타빵 두 개와 초콜릿 소르를 곁들인 바닐라 아이스크림, 배 모양의 소스 그릇에 담긴 소스, 차코는 종종 자신의 야망은 과식하다 죽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맘마치는 그것이 억압된 불행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후라고 말했다. 차코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저 '식탐이 많을 뿐'이라고. 162쪽

 

마거릿은 차고에게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치 차코가 그녀의 선반에 그의 오슬 놓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런데 그라면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혼을 요구했다. 166쪽

 

"차코?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게 꼭 필수적인 가요?"

"규칙은 없어." 차코가 말했다. "하지만 대개 그렇지."

"차코, 예를 들어서요." 라헬이 말했다. "그냥 예를 드는 건데요, 암무가 나와 에스타보다 소피 몰을 더 사랑할 수도 있나요? 아니면 차코가 소피 몰보다 날 더 사랑한다던가요. 예를 들면 말이에요."

"' 인간 본성'에선 무엇이든 가능하단다." 차코가 예의 '낭독조'로 말했다. 갑자기 분수 머리를 한 어린 조카딸은 의식하지 않고서 이제 어둠에 대고 이야기했다. "사랑.광기.희망.무한한 기쁨."

 그 '인간 본성에서 가능한' 네 가지 중에서 무하아한 기쁨이 가장 슬프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차코의 말투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하아한 기쁨. 거기엔 교회의 어감이 묻어 있었다. 온몸에 지느러미가 난 슬픈 물고기처럼.

차가운 나바이 차가운 다리를 들어올렸다.

담배 연기가 구불구불 밤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뚱뚱한 남자와 어린 소녀는 잠들지 못하고 침묵 속에서 누워 있었다. 168쪽

 

사랑이라는 지독한 끈이 거의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가슴을 조였다. 그는 잠들지 못하고 누워서 공항으로 떠날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172쪽

 

무언가 땅 밑에 묻혀 있다. 풀밭 아래. 23년간 내린 6월의 비 아래.

잊힌 작은 것.

세상이 전혀 그리워하지 않을 것.

시곗바늘이 그려진 어린아이의 플라스틱 손목시계.

두시 십 분 전.

어린아이들 한 무리가 걷고 있는 라헬을 뒤따랐다.

"안녕, 히피" 하며 아이들이 25년이나 늦어버린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예요?"

그때 누군가 라헬에게 작은 돌을 던졌고,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 가느다란 팔을 마구 흔들면서 달아났다. 179쪽

 

암무는 알레피에 위치한 바라트 여인숙의 어느 지저분한 방에서 죽었는데, 누군가의 비서 일자리 면접을 보러 갔던 곳이었다. 그녀는 홀로 죽었다. 천장 선풍기의 소음을 벗삼아, 등뒤에 누워 그녀에게 이야기할 에스타도 없이. 서른 한 살이었다. 늙지도 않은 젊지도 않은, 하지만 살아도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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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것 - 일상과 우주와 더불어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조영렬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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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 손을 잡는 것

 

다니카와 슌타로 '산다' 중

 

저도 뭔가를 쓰려고 할 때는 가능한 한 제 자신을 텅 비우려고 합니다. 텅 비우면 말이 들어옵니다. 그러지 않고 내 안에 말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판에 박은 표현으로 끌려가버리지만, 가능한 한 텅 비우면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어온다. 그런 느낌입니다. 호흡법과 닮은 데가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45쪽

 

말은 의식의 표면에 있는 말보다 의식 아래에 있는 말이 재미있다. 그쪽이 새롭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혼돈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혼돈 속에 온갖 언어경험이 다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러니까 시인이라는 것은 역시 흔히 유통되는 말보다 좀더 앞의 말이라고 해야 좋을지....말이 되어가고 있는 말에서 말을 찾아내는 그런 게 있지 않나 싶습니다. 48쪽

 

요컨대, 시인이란 너무나 미성숙한 인격이라는 겁니다. '오늘 하얗다고 말하고 내일 검다고 말해도 전혀 상관없다. 시인에게 그것은 양쪽다 진실이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어제는 하양이었던 게 오늘은 검정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73쪽

 

저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

벌써 반세기 넘는 동안

명사와 동사와 조사와 형용사와 의문부호 따위

말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오다보니

굳이 말하자면 無言을 좋아합니다.

 

자기 소개 (일흔 살 버전) 중 일부

 

역시 저 같은 나이가 되지 않으면 '저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라는 식으로 쓸 수 없습니다. 전에는 조금 허세를 부리며 썼었지요. 시적인 표현으로. 이런 식으로 일상적으로, 비교적 이렇게 직접적으로는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81쪽

 

* 잘된 시는 어떻게 짓는 것입니까?

그런 걸 알았으면 고생 안했겠지요.(웃음) 모릅니다.

시라는 게 공부해서 잘 쓰게 되는 그런 건 아니잖아요.

음, 그러니까 그거는 매우 어려운 점이지만, 잘 쓴다 못 쓴다 하는 것도 매우 주관적인 거지요. 그리고 잘 썼지만 뭔가 상투적인 문구가 말끔하게 늘어서 있는 정도는 시도 있거든요. 그런 거는 못 쓴 시보다 재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온몸으로 파악한 언어로 쓴 시가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의외로 세상에 유통되고 있는 상투어구를 죽 늘어놓아 시처럼 보이는 시를 쓰고 마는 경우도 많지요? 그런 거는 역시 재미가 없어요.

 

말하자면 타인의 말이기는 해도, 남에게 배운 말이 자기 경험을 거쳐 자기 말이 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자기 말이 된 말이 나와주면, 그것은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88쪽

 

갓 딴 사과를 베어먹었던 적도 있고

바다를 향해 홀로 노래했던 적도 있다

스파게티 먹으며 수다를 떨었고

커다란 빨간 풍선을 불었던 적도 있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속삭이고 그리고

짭짤한 눈물의 맛도 이제 알고 있다

그런 나의 입술....

 

이제 비로소 - 당신에게 드립니다

온 세상이 소리를 죽인 이 밤에

 

다니카와 슌타로 '드립니다' 전문

 

언어는 의미에 얽매이기 마련이지요. 아무래도.

특히 음성으로 소리를 내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경우에는

그 말의 어조, 소리에 관련된 요소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을 순수하게 파고들면, 아무래도 음악이 되어버리는데요.

저는, 물론 좋아하는 시는 있습니다만,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의 음악 한 대목과

좋아하는 시 한 구절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모차르트의 음악이 소중하거든요.

그러니까 늘 시는 음악을 좇지만

따라잡지는 못한다는 기분이 강합니다.

108쪽

 

시라는 것은 산문과 달라서, 의미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울림이라든지 이미지라든지 여러 가지 것을 동원해서 언어라는 놈을 전달합니다. 그러니까 무의미한 것을 시에 씀으로써 거꾸로 그 의미 이전의 세계를 만져서 느끼고 손으로 더듬어....존재 자체의 리얼리티 같은. 뭔가 언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이 시가 맡은 역할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12쪽

 

저는 비교적 처음부터 언어를 신용하지 않아서,(웃음) 시도 줄곧 신용하지 않는 입장에서 해온 셈입니다만, 그래도 인간은 절대로 언어에서 도망칠 수 없지요. '신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당연히 전제로서 존재하는 것이겠습니다만, 그 '넌센스'라는 것이 지닌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꼬, 그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그저 부정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갸, 그렇게 생각합니다. 116쪽

 

* 무엇이든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사람도 있는데요.

 

저는 절대로, 언어라는 것은 정말로 부자유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게 모순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모순되어 있지 않으면 현실이 아닌 거지요. 그것을 언어는 표현랄 수 없다. 그러니까 언어에 의지하는 것은, 어떻게 하더라도 인간의 현실을 놓칠 가능ㅅ어이 있으니까, 늘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19쪽

 

의미의 세계와 무의미의 세계가 있서, 그것이 서로 보완하고 있다고 말하면 될까요. 그 양쪽에 리얼리티, 현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120쪽

 

현실의 일상생활만이 아닌, '산다'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산다는 것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을 시야에 넣지 않으면 산다는 것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비교적 젊은 시절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34쪽

 

시인으로서의 목표 따위는 없습니다만,

인생에서의 목표는, 이제 즐겁게 건강하게 죽고 싶은 게 목표입니다.

노후의 즐거움은 역시 '죽는 것'이지요.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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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시를 써 온 시인의 육성을 듣는다는 것.

인터뷰집의 묘미,

60년의 지혜를 미리 당겨 알 수 있다는 것(과연?)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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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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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을 만나, 미지의 매력적인 삶을 접하고, 오로지 그의 사랑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르셀 프루스트 -카라오스만오울루의 번역본에서

 

서문

 

나는 매년 여름 게브제 군에 일 주일 머무는 동안 그곳에 있는 폐허 같은 문서 보관소에서 무엇인가를 긁어모으곤 했는데, 칙령과 땅문서 등록부와 재판 기록부와 공문서로 빽빽이 찬 먼지 나는 궤짝 안에서 1982년에 이 필사본을 발견했다. 누렇게 낡은 문서들 틈바구니에서, 꿈꾸는 듯한 푸른색 에브루로 고상하게 만든 표지와 또박또박 씌여진 글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이 필사본은 쉽게 내 눈에 띄었다. 내 호기심을 더욱더 자극하기 위해 원작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책의 첫 장에 제목을 써놓은 것 같았다. '포목상의 의붓아들'.다른 제목은 없었다. 책의 가장자리와 빈공간에는 단추가 많이 달린 옷을 입은, 머리통이 작은 사람들이 서툰 솜씨로 그려져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는 단숨에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이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베껴 쓰려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특별히 감시하지 않는 그곳 청소부의 신임을 악용하여 재빨리 그 책을 내 가방에 넣은 다음, 젊은 군수조차 '문서보관소'라고 부르지 않는 그 쓰레기장 같은 곳을 빠져 나왔다. 12쪽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는 길이었다. 터키 함대가 우리 길을 가로막았다. 우리 배는 고작 체 척이었고,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그들의 갤리선 대열은 끝이 없었다. 우리 배 안은 갑자기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였다. 대부분이 터키인과 무어인으로 구성된 노 젓는 노예들은 함성을 질렀고, 우리는 신경이 곤두셨다. 17쪽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다시는 서로 헤어지지 못하는 닮은 사람들 55쪽

 

나는 이제 이스탄불 거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 자신이 투명인간이며, 그들 사이를, 정원에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밤나무, 박태기나무 사이를 유령처럼 지나가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59쪽

 

지금 추억을 더듬어 과거를 만들다보니, 이 부분이 내가 어린 시절 들었던 동화나 그 동화를 그림으로 그리는 화가들에게 재료가 될 만한 행복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60쪽

 

중요한 것은 아이가 학문과 궤변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다시 '인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마치 인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인식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행동했다. 61쪽

 

그는 "사람이 왜 이런지 또는 왜 그런지 누가 알 수 있겠어. 아, 네가 진짜 의사여서 우리 몸, 우리 몸 속과 머릿속을 내게 가르쳐준다면..."하고 말했다. 그는 조금 무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태연한 척 가장하며 설명했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끝까지 가겠다고 했다. 끝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기도 하고, 그 외에 마땅히 할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이 모든 것을 내게서 배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나중에는 우리 둘만의 비밀인 것처럼 그는 그 말을 자주했다. 하지만 그 단호함에는 환상을 꿈꾸며 자주 질문을 하는 학생의 목소리가 배어 있었다. 끝까지 가겠다,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자신에게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묻는,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슬프고 분노에 찬 저주를 보는 것 같았다. 70쪽

 

끝날 것 같지 않던 불면이 두려웠던 밤, 젊은 시절 동시에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던 내 친구에게 느꼈던 친밀감, 이 후 그 친구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생각하고 그와 함께 산 채로 매장되는 상상을 하며 느꼈던 공포심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이러한 이야기를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후 나는 용기를 내어 내가 지닌 꿈을 이야기했다. 내 몸이 내게서 빠져나가, 어둠 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나와 닮은 사람과 결탁하여 둘이서 함께 내게 대항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93쪽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쓰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의 글 쓰는 스타일과 행동거지에는 내가 좋아하고 배우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훗날에 온전히 받아들일 만큼 좋아해야 한다. 95쪽

 

그는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했고, 왜 그가 그인지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속였고,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쓸데없이 다시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호자는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지겨워지자 한동안 집 안을 서성거렸다. 그는 다시 내게로 왔다. 그러고는 우리가 우리의 진짜 생각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듯,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본질을 볼 수 있다고. 98쪽

 

우리는 이 일을,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하는 일이며, 결국 이 일은 바보들이 왜 그런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서로를 끝까지 안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가장 사소한 것까지 아는 사람의, 악몽을 사랑하는 것처럼, 빠져 들 수도 있을 거라고 나는 주장했다. 103쪽

 

그 당시 나는 나의 불행을 잊기 위해, 잠잘 동안 행복한 꿈을 꾸면 그것을 종이에 써나갔다. 의미와 행위가 같았던 그 꿈들을, 잠이 깬 후,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시적인 언어로 세심하게 기록했다. 113쪽

 

흑사병에 전염된 것처럼 학문에 전염 된 사람도 그것에서 도망칠 수 없다

114쪽

 

우리는 좋은 이야기란 처음 부분은 동화처럼 천진난만해야 하며, 중간 부분은 악몽처럼 무서워야 하고, 마지막 부분은 이별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처럼 슬퍼야 한다고 생각했다. 144쪽

 

왼손잡이 서예가가 깨끗하게 베껴놓은 결론 부분에는, 호자가 아주 좋아했던 그 '가득 찬 서랍으로 비유'된, 우리 뇌의 복잡한 비밀에 대한 수수께끼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정형시가 있었다. 자부심 가득하고 잔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시의 잔잔한 안개는, 호자와 함께 썼던 가장 좋은 책을 슬픔으로 끝냈다. 168쪽

 

나는 그에게 수없이 많은 환상을 말했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기 때문에 나도 오늘날 대부분 믿고 있는 이 환상이, 내가 젊었을 때 정말로 경험한 것인지 혹은 책을 쓰기 위해 매번 책상에 앉았을 때 연필 끝으로 다가온 꿈 같은 이야기인지는 지금 판별해 낼 수 없다. 187쪽

 

언덕에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 황급히 뛴다면 마치 그곳에 당신도 참가하기 원하는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길은 도저히 끝이 나지 않는다. 어두운 숲과 산자락 사이에 있는 평지에 시냇물이 자주 넘치는 바람에 만들어진 더러운 늪이 있다는 것을, 그 늪을 넘은 보병들과 포병들의 엄호에도 불구하고, 그 비탈길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219쪽

 

인생의 가장 멋진 부분은 멋진 이야기를 꾸미고, 멋진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닌가요? 234쪽

 

이 이야기들은 내게 왠지 이상한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울고 싶었다. 태양에 물든 노을이 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에블리야가 내게도 이런 놀라운 이야기들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가 정말로 놀라는 것을 보고 싶어, 동행과 함께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을 것을 청했다. 내게는 그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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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송정림 지음 / 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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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_진부하다. 안 그래도 봄기운에 나른한데, 왠 사랑 타령. 싫다.

목차를 살펴 본다. 아는 책과 모르는 책이 섞여서 서른 다섯 권이 나열되어 있다. 아..질린다. 이 놈의 책들이란. 아는 책이든 모르는 책들이든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투덜거린다.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송정림 작가의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 1,2,3권이 나란히 꽂혀 있는 걸 본 것이 오늘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펼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책이 많은 시대에 감칠 맛나는 에세이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에, 같은 제목으로 1,2,3권을 낼 수 있었다면 필시 매력있는 글쟁이일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투덜거리며 목차를 본 후 펼친 페이지는 <롤리타>였다. 문학동네 <롤리타>번역이 그렇게 좋다며, 신형철 평론가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번역비를 더 드리고 싶다고 표현한 그 번역본이 궁금해서 친구에서 <롤리타>를 삥 뜯었었다. 그리고 잘 모셔두기만 했다. 기회가 있어 강의도 한 번인가 두 번인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롤리타>를 읽지 않았다. 못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두 번 읽으면 더 좋다고 읽으면 읽을 수록 좋다고 한 이야기는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최근에 어느 독서모임에서 <롤리타>를 읽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 온다. 그럼 이 참에 롤리타를 한 번 제대로 읽어 볼까.

 

작가가 <롤리타>에 할애한 페이지는 5페이지다. 이런 제목을 붙여 놓았다

 

사랑은 가시에 찔리지 않고는 장미를 딸 수 없는 비극이다.

 

작가의 감상과 줄거리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격정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작가의 감정은 넘치지 않는다. <롤리타>를 읽어 보고 싶게 만든다. 뒤이어 바실리 악쇼노프의 <달로 가는 도중에>를 소개했다. 모르는 책이다. 이런 제목이 붙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신의 선물을 받아 든 사람이다.

 

왜일까? 사랑하는 사람은 왜 신의 선물을 받아 든 사람일까? 해답을 찾는 기분으로 더듬어 읽는다. 몇 페이지 안되니 해답을 금방 찾았다. 아, 아름답다. 참 아름답고도 슬프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일 것 같고 소개 또한 그러한데 한 권의 책을 읽은 듯도, 몇 장면의 영화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최근에 읽은 <단순한 열정>은 무엇이라 소개되어 있을까. 몇 달 전 나는 <단순한 열정>을 읽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책을 덮고 말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기시감. 에잇, 안 읽어. 했었던. 그리고 얼마 전 전철에서 읽을 얇은 책을 찾다 보니 <단순한 열정>이 눈에 띄었고. 이번에는 다 읽어졌다. 이게 뭐야. 내 감상은 그랬다. 이게, 뭐, 대체, 어쨌다구.

 

사랑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 간다.

 

<단순한 열정>에 붙어 있는 제목이다. 이 아무렇지도 않은 단순한 문장 속에는 얼마나 숱한 감정들이 녹아 있다 같이 사라져 가는가. 단순하다고 해서 맹목적이라고 해서 가볍게 치부 될 수 있는 감정은 없다. 작가는 <단순한 열정>을 '소설이라기 보다 일기에 가까운 그녀의 고백에는 감정이 없다...철저히 육체적이고 단호히 사실적이다'라고 설명 한다. 아, 그랬구나. 감정표현이 없었구나. 어떤 의미로 함몰되는 독서를 했기에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나의 읽기를 짚어 주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이 책, 이런 책이네. 사랑을 권하는 책이 아니라, 책을 권하는 책이잖아. 짧은 단상들이라, 어디에서 펼쳐도 한 챕터는 읽을 수 있는 짜투리 시간 담당 전용, 봄기운에 흐드러지는 모호한 열정을 정리하기에도 좋겠다. 한 권으로 서른권 이상 읽은 효과를 볼 수 있으니 경제적인 책이다. 봄날, 가방에. 마음에 담아두기 좋은 책이다. 둥지라면야 말 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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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 2016-03-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책 찾아보게 하는 책이더라고요ㅎ

2016-03-21 19:41   좋아요 0 | URL
그쵸 ㅎㅎ

단발머리 2016-03-1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둥지, 둥지, 둥지....
갑자기 둥지냉면이.... 생각나네요 ㅎㅎ

2016-03-21 19:41   좋아요 0 | URL
둥지 냉면 먹고~~

vita 2016-03-20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둥지 :)

2016-03-21 19:41   좋아요 0 | URL
트롯 가사를 써야 겠습니다아~
 
여행자의 책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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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의 의도는 언제나 듣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에 사로잡히도록 하는 것이며, 그의 눈을 반짝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햄릿>의 서두에서,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한 말은 여행 작가의 이런 의도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볍디가벼운 한마디로 네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젊은 피를 열게 하며,

네 두 눈을 궤도 이탈한 별처럼 만들고,

땋아서 묶어놓은 머리채를 풀어놓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세울 수 있으리라.

 

여행의 기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글들이 이 모음집에 대한 주제이다. 물론 여행의 고통도 일부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고통은 서정적인 향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나는 여기에 인용된 몇몇 책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것들은 실로 지난 시대의 낭만이자 드라마였다.

 

여행자들의 꿈과 환희, 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관찰과 통찰이 담긴 이 책은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여행기들을 읽고 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이 책은 여행 안내서이자 실용서 문집이자 편람, 독서 목록이자 회상록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누구나 이동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도 특정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필요성을, 따라서 이것은 이중의 필요성이다. 일단 움직여야 하고 또 어디로 갈지를 알아야 한다.

 

D.H 로렌스 <바다와 사르디니아>1921

 

향수병은 잘 알려진 고통스러운 느낌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고통은 덜 알려진 것이다. 그것은 '타향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눈이 녹고 황새가 다시 찾아들고 첫 증기선이 출발하면, 나는 여행의 충동에 시달린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레센의 편지(1856)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크든 작든 두 힘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하나는 은밀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장소로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하나는 내향성, 다시 말해 왕성한 사고와 환상의 내면세계로 향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외향성, 다시 말해 사람들과 구체적인 가치들이 존재하는 바깥 세계로 향한 관심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1982

 

 

토마스 잰비어가 상상한 사르가소 바다

사르가소 바다는 실제로 존재한다. 콜럼버스가 최초로 목격했고, 쥘 베른이 묘사한 바 있다. (<해저2만리>에서 노틸러스 호는 이 바다를 통과해서 항해했다.) 대양의 여러 조수의 합류점으로, 사르가소 바다는 "큰 해초가 자유롭게 떠다니는 타원행의 거의 대륙만큼 큰 바다의 초원이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리고 이 바다는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버뮤다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버뮤다 삼각지대와 관련된 미스터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바다 안에 있는 이 바다는 뱀장어의 사육 장소이고, 서쪽으로는 멕시코 만류에 접하고 있다. 그 이름은 그 표면에서 볼 수 있는 부유하는 다량의 가랙 모자반속 해초에서 따왔다.395

 

 

떠나지 못하니, '그 곳'에 대한 책읽기를 계획하고 있는 중 눈에 띈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 언젠가 한 번 발췌독을 한 적이 있고 이번에도 그렇게 가볍게 보고 있다. 그러기 좋은 책이다. 온갖 여행에 대한 복합적인 편린들, 어떻게 읽어도 자유롭다. 호기심을 충족 시켜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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