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 연구에서 한용운의 시 인과율에 대한 문화사적 이해와 불교 교리에 근거한 이해는 공히 제도로서의 결혼 혹은 사랑의 맹세를 지키면 당신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신념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는 최초의 근대 청년한용운의 불교 이해를 동양 전통으로 수렴시킨다는 문제를 갖는다. 하지만 한용운이 1910년대에 불교의 근대화에 헌신해 왔다는 상식에 기대지 않더라도 님의 침묵이 발간된 다음 해에 신여성을 향해 녀성해방 운동은 녀성 자신의 운동이라야 함니다 남자에게 피동되는 운동은 무의미하게 되며 또 무력하게 됨니다.”라고 하여 1920년대 문화청년에게 오히려 더욱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한용운의 사상과 실천에 주목해 보면 유독 한용운의 문학은 신여성의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작용, 사랑의 맹세를 지키는 균형감각, 옛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신념 등의 다소 소박한 보수성(‘동아시아 문화 일반이 지닌 전통’)으로 이어진다는 해석이 타당한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본고는 한용운의 불교 이해의 근대성에 주목하겠다. 인과율에 대한 선행 연구는 한용운의 불교유신론의 진보성을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용운의 불교 이해에 영향을 미친 량치차오에게서 불교는 근대에 재발명된 신종교였다.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은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불교를 중국의 종교로 선택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는 종래의 불교에 가해졌던 비판들, 가령 미신이라거나 염세적이라는 등의 내용을 거부하면서 불교가 국민정신을 통일하고 문명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종교라고 본다. 량치차오의 이러한 관점은 불교를 통한 근대화의 가능성을 만해에게 열어준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는 량치차오에 대한 언급이 5번 나온다. 당시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근대적인 체험이었는데 이는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개화운동의 실천의 일부로 중요시되었다

량치차오는 19032월부터 19042월까지 신민총보근세 최고 철학자 칸트의 학설4회 연재하며 이후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에 수록한다. 량치차오식으로 전유된 칸트는 한용운의 사상에도 흔적을 남기는데 이 점은 한용운의 불교유신론불교의 성질편에서 확인된다.

 

우리의 일생의 행위가 다 내 도덕적 성질이 겉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인간성이 자유에 합치하는가 아닌가를 알고자 하면 공연히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으로 논해서는 안되며 응당 본성의 도덕적 성질에 입각하여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야 누가 조금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덕적 성질은 생기는 일도, 없어지는 일도 없어서 공간과 시간에 제한받거나 구속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뿐인 것인바, 사람이 각자 이 공간, 시간을 초월한 자유권(본성)에 의지하여 스스로 도덕적 성질을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나의 진정한 자아를 나의 육안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러나 도덕의 이치로 생각하면 엄연히 멀리 현상 위에 벗어나 그 밖에서 있음을 보게 된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 한용운은 불교의 성질을 칸트의 초월철학을 전유한 자유의 문제로 해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용운에 대한 지성사적인 이해를 전제로 이번 논문은 한용운의 문학활동은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라는 각도에서 조명하거나 그 귀결점은 전통적인 반려애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다.”는 평가와 다른 접근을 시도하겠다.

권보드래, 이선이가 대표하는 문화사적 접근의 요점은 한용운의 시가 연애의 시대의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로서 전근대적(동아시아적) ‘반려애로 수렴된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한용운의 시에서 불교적 인과율동아시아 문화 일반이 지닌 전통의 원리로 해석한 것은 근대 사상으로서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누락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전환기에 보여준 한용운의 도덕적 우위를 옛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소박한 인과율 이해와 관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근대사상으로 정초하려 한 동아시아 근대 전환기 지성의 한 전형인 한용운의 구체성은 간과할 수 없다. 한용운은 량치차오를 매개로 하여 칸트 철학을 이해하는 한편 불교 사상을 통해서 량치차오와 차별화된 방식으로 칸트 철학을 개조하려 하고 있다. 이번 장에서는 먼저 한용운이 주목한 칸트 철학이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고에 어떤 자극을 줬는지 확인하겠다.

 

이에 비겨 주자의 명덕설 같은 것은 (...) 이 명덕이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을 받는다 하며,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에 있어서 한계가 명료치 않았으니, 이것이 칸트에 비겨 미흡한 점이다.”

 

위의 인용은 성리학에 비해 칸트가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을 명료하게 한 점에 주목한다. 칸트의 자연필연성에 속박된 현상적 자아와 자유로운 초월적 자아의 구분을 량치차오-한용운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지식인은 불교에서의 무명과 진아의 구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칸트 철학이 존재 영역에 대한 이분법적 조망이 경계 설정을 통해서 인간적 실천의 당위성을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과 대응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선행 연구에서는 낭만적 사랑의 열정이 근대적 주체를 생산하는 계기인 데 비해서 한용운의 인과율은 서구적 근대의 수용과정에서 균형을 맞춰주는 전통에 비견되고 있었다. 이는 현상계와 본체계에서 무명과 진아가 분리된다는 한용운의 인식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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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에 수록된 한용운의 시를 사랑시로 읽을 때 이 시들은 근대적 사랑의 실제와 한계를 현시한다. 1920년대는 소위 연애의 시대였는데 당시 연애는 오늘날의 남녀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한국어에서 사랑하다는 원래 생각하다는 뜻이었지만 그다지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었다. 기독교의 전래이후 사랑은 신의 사랑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신에 대한 사랑과 비슷한 용례로 국가에 대한 사랑이 함께 쓰이기도 했다. Love의 번역어로서 사랑이 남녀의 사랑으로 쓰이게 되는 것은 1920년대로 보인다. 하지만 1920년대에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사랑이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에 한정한 연애가 더 많이 쓰였다. 근대전환기 근대적 개인의 출현은 사랑(연애)이라는 화두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연애는 인생 최고의 선이요 미이며 예술이라는 진술이나 아아 강렬한 자극 속에 살고 싶다는 토로가 보여주듯이 근대 문학은 사랑의 움직임에 대한 문서고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서고에서 한국 근대시사의 주류적 경향에 거스르는 사랑시로 한용운의 시를 살펴보겠다

(중략)

이번 논문은 한용운이 최초의 근대 청년인 동시에 1920년대 연애의 시대에 기성 세대의 대표성을 갖고 있었음에 주목한다. 소위 세대론에 기대면 왕년의 청년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어떤 갈등이 야기되는지 예단하게 되기 쉽다. 하지만 한용운은 근대성의 복합적인 측면의 중요한 일부를 견지하면서도 새로운 청년 문화와 대화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어른이었다.

이번 논문은 한용운의 시 인과율자유연애를 매개로 하여 이러한 대화의 성과를 밝히고자 한다.

.2장 근대인이 대면한 이율배반으로서의 인과율

 

근대전환기 청년 지성으로서 한용운의 진보적인 태도는 당대에는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님의 침묵이 나온 1920년대에 한용운은 40대의 기성세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20년대의 문화 청년들에 비해 보수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근래의 문화사적 연구는 이러한 상식적 추정에 근접하는 해석을 보여준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1910년대 중반에서 1920년대까지는 우리 사회에서 자유연애에 관한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제기된 시기이며 자유연애 담론과 근대적 독자층의 형성은 님의 침묵이 집필되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한용운의 문학활동은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라는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근래의 문화사적 해석을 대표한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연애와 결혼 특히 자유연애와 자유결혼 그리고 자유이혼을 근대적으로 학습해야 할 내용으로 인식했다. 근대적 사랑은 다른 어떤 기준에도 의존하지 않는 열정을 요청하며 이러한 열정이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문학활동을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라는 각도에서 조명할 때 관건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 여부에 있으며 이것은 한용운의 시가 근대적인 개인의 상호적인 계약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연애의 이상보다는 전통적인 반려애와 유사하다는 다음의 비판으로 연결된다. 한용운은 전통적인 사랑의 정서와 새롭게 유입된 사랑의 방식을 접목시켜 우리 나름의 근대적 사랑의 윤리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도로서의 의미는 컸지만, 그 귀결점은 전통적인 반려애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사 연구의 흐름 속에서 인과율은 구체적인 비판점을 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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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진태원 지음 / 그린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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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판 스피노자를 동네 독립서점 살리기 차원해서 굳이 주문해서 방문 구매했었는데
알라딘에 들어와 보니 한정판 판매가 종료되고
페이퍼백이 나와 있어서 반갑고 아쉽고 했어요
저는 이미 샀으니 아쉬울 건 없지만^^
한정판은 애초에 한시 판매인 걸 공표한 것이고 특별한 선물을 넣어서 손해보는 느낌으로 파는 개념이라고 알고 있어요
책에 수작업이 들어가면 사소한 것도 비용이고 정성이니까 오래 판매할 수 없는 거죠ㅠㅠ
10년 뒤에 기념으로 다시 한정판 나오면 반갑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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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불교개혁은 불교를 통한 문명 진보 운동” - http://m.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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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활
7월 문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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