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시간의 암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다름아니다.



암흑에서 빠져나와 빛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 만들어온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타인과 공감하는 자인가 아니면 홀로 만족하는 자인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홀로 족한 자’와 ‘공감 하는 자’이다. 타인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그와 반대로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곳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빛에 에워싸인 채 나누고 교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영생은 죽음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자신에 만족한 채 매일매일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기자신의 심판관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4-10-1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저도 읽었는데. 참 좋았어요. 그죠?^^

니르바나 2004-10-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좋은 책이지요. 이 가을에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어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보훈 팔복중에서 이 두가지만 현재시제이다.
이것은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여기 와 있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성프란시스코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나누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라고 자문했는지 묻는 것이다. 이렇게 자문한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인 것이다.

마지막 행복은 반드시 순교자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날  하늘나라는 이미 이 땅에 와 있음을 의미한다.

신앙을 모른다고 스스로 말하는 많은 이들이 사실은 힘없는 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들의 타고난 성품으로 인해 하느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궁전,

가끔 완벽한 고요가 그리울 적에 이 사진을 들여다 봅니다.

始原에의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오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니르바나 2004-10-1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 번 가 서고싶다. 저 신화의 땅에
 


觀, 구도자의 여의봉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그 능력이 자기 성찰이고 觀이다.
그렇다고 덮어 놓고 관한다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관을 하되 관이 잡혀 있어야 한다.            

곧, 구도자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마치 연극 무대위에 선 자신을 바라보듯

냉정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그러면 부동심을 가지게 된다. 견성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자기성찰의 힘으로 생로병사의 윤회도 탈출할 수 있다.

자기성찰, 觀을 하면 하늘과 남을 원망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에게 닥쳐 온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남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므로 하늘과 조상을 결코 원망하지 않게 된다.

일체를 자기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마음이 늘 안정되고 평안하다.
일상생활에서 觀만 할 수 있다면 도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철두 철미 객관적으로 보는 주체가 眞我이고,

자기 자신을 동정하거나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는 주체는 假我이다.

암벽타기의 경우 초보자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무서워한다.
그러나 바위를 자주 타면 바위와 친해지고 긴장하고 조심을 할 망정 겁내지 않는다.
자주 바위를 타면서 친해져서 오랫동안의 관찰과 경험으로 고소공포증을 느끼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을 장기간 관찰한 사람은 마음을 잡게 되고,

인생의 큰 실수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생로병사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0년 전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수녀님의 눈을 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그 눈길과 마주쳤을 때 내 안에서는 전율 같은 것이 일어났다.

그것은 아득한 전생부터 길이 들어온 침묵의 눈이었다.

그 눈은 밖으로만 하는 현대 여성의 들뜬 눈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안으로 다스리는 맑고 고요한 수행자의 눈이었다.

진실한 수행자의 눈은 안으로 열려 있다.

내면의 길을 통해 사물과 현상 너머의 일까지도   멀리 내다볼 줄 안다.

그때의 그 눈길이 때때로 나 자신을 맑게 정화시켜 주고 있다.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는 말은 조금도 빈말이 아닐 것 같다.                       

오늘날 도시의 횡단보도나 버스 안에서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성스러운 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