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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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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리 출판사에서 공을 들여도 책소개만으로는 도저히 진가를 가늠할 수 없는 책이 있다. 내게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주목신간을 정하려고 책소개를 살펴볼 때도, 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된 후에도, 그래서 책이 배달된 후에도, 사실 그냥 시큰둥했다. 이런 류의 책들이 워낙 쏟아져 나오고, 이미 집에 있는 일본 가정식 책만도 4-5권쯤 되어서, 도시락이라고 뭐 새로울까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책을 펴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읽기 시작해서, 매우 흡족하게, 풍요로워진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사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도시락 얘기가 한 축이라면, 도시락을 둘러싼 다양한 삶의 이야기, 때로는 도시락과 무관한 사는 이야기가 적지 않은 비중으로 또 한 축을 이루고 있어, 생각보다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도시락을 통해 이웃의 소소한 삶을 들여다본다는 저자의 기획 의도가 충실히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도시락하면 학창 시절의 추억에 그치는(이것도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됐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과 달리, 일본 사람들에게 도시락이 갖는 의미는 평생에 걸쳐 매우 다채롭게 전개되는 듯싶다. 그래서 도시락은 둘이서 먹는 거잖소. 싸주는 사람과 그걸 먹는 사람 둘이서 말이오. 만들어 주는 사람의 기분이 전해지기 때문에 늘 고맙게 생각해.’(99)라거나 먹는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매일 축적되어 가는 일종의 수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163) 같은 근사한 나름의 철학이 무심결에 배어나기도 한다. 또 도시락을 먹는 장소가 대부분 일터이니만큼, 다양한 직장 풍경과 인터뷰이가 그 일을 하게 된 계기, 일에 대한 애착 등이 자연스레 묻어나는 점도 흥미를 돋운다. 참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점심 한끼 챙겨먹을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해 틈틈이 도시락으로 때우고 있구나, 싶다가도,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도시락이 이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러 도시락을 한곳에 놓고 보니, 본인이 싼 도시락과 다른 사람이 정성껏 싸준 도시락에서 은근한 차이가 엿보였고,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진마다 빼곡히 담겨있는 도시락 반찬 중에 매실장아찌와 계란말이가 거의 빠지지 않는 것도 흥미로웠다.

 

대략 40명의 이야기가 소개되지만, 그 중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역시 고양이가 남긴 참치로 김밥을 말아온다는 어떤 디자인학과교수의 스토리였다. 이분, 어딘지 척박해보이는 인상과 썰렁한 도시락 사진, 김밥을 우겨 넣는 식사 모습부터 범상치 않더니, 현재 연구 중이라는 문어 항아리 이야기에서 단연 빛을 발하신다. 과거 일본에는 방 한쪽에 문어를 잡을 때 사용하는 초벌구이 항아리가 장식되어 있었다는데, 이 항아리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문어가 도망치려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잡히면 문어의 책임이 된다는 점에서 무척 공정하게 느껴진다며, 아마 문어도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본인이 초대형 문어항아리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봤는데 거기서 나오기 싫어하는 문어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더라는 말로 끝맺는데, 이 대목에서 문어항아리가 금시초문인 나조차도 어쩐지 바닷속의 블랙홀처럼 보인다는 그곳에 목숨을 걸고 머무는 문어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것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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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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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한다. 이 리뷰는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시간에 밀려 쓰는 글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리뷰만 올리고 나면 다시 책으로 돌아가 내일이 월요일이건 말건 간에 오늘 밤 안에 이 책을 야금야금 읽어 치우고 못내 아쉬워할 것이라는 점이다. 책을 진작에 읽지 못한 것도 아쉬울 테고, 당분간 더 읽을 게 없다는 것도 아쉬울 터이다. 그만큼 읽는 내내 배고프면서도 행복하고, 뭔가 내 음식에 관한 추억까지 자꾸 헤집어보게 만드는 책이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음식 관련 추억담을 기막히게 적절한 길이로 센스있게 요리한 글 솜씨도 여전하지만, 이 책 가치의 절반은 제목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많은 음식 관련 에세이들이 왜 저런 황금 같은 제목을 지금껏 그냥 내버려두었을까 싶을 만큼, 누구나 들으면 공감할 만하고, 여기저기 갖다 붙일 데도 많은 제목이다. 나만 해도 이 책 제목을 듣고 나서 대화 중에 두세 번은 이 말을 인용했던 듯싶다. 책과 무관한 대화였는데도 말이다. 특히 저자의 전작을 재미있게 읽고도 끝끝내 책제목이 기억에 남지 않아 저자 이름으로 몇 번이나 검색해봤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책에서 유독 재미있다 싶은 부분은 문학 작품을 인용하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글들이다. 하루키를 좋아하는지 그의 작품을 인용한 구절이 여럿 있고, 또 직접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작가나 책들 이야기가 쏠쏠히 나오는데, 이런 부분마다 글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한층 풍성해지는 느낌이 들고, 또 독자 입장에서 아는 책이나 구절이면 반갑기도 하다. 예전에 저자가 쓴 영화 속 음식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과거 소설가를 지망했다는 이력을 살려 아예 문학 속 음식 이야기를 따로 써봐도 참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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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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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7년 나오키 상 수상작가라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름도, 작품도 전혀 몰랐던 작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화차>와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겠거니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소비자금융의 위험성과 다중채무자들의 말로를 그린다는 점에서 주제는 확실히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다만 20년이라는 집필 시기의 간극 때문인지, <화차>가 실종된 인물을 추적해가는 추리소설의 얼개를 유지하며 그 과정에서 문제를 짚어내는 데 주력하는 반면, 이 책은 이미 곪을 대로 곪아버린 문제의 단면을 다각도에서 대단히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그 배후를 직설적으로 까발린다. 덕분에 작가의 주제의식과 실제 사태의 심각성이 훨씬 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 “…사실은 그러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신용회사나 소비자금융의 주요 고객이야. 따라서 다중 채무에 빠지기 쉽지….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저소득층의 평범한 사람. 금융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말하길, 주요 타깃이 되는 이는, 연령이 이삼십대로 비교적 젊고, 연봉이 이백만 엔대의 고객이래. 왜 그런지 알겠니? 연봉이 사오백만 엔 정도 되면, 모처럼 고금리로 돈을 빌려도, 몇 년만 분발하면, 원금에 이자까지 전액 갚아버리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러면 좋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금융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필사적으로 매월 금리만 갚고, 원금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좋은 먹잇감이지. 그들은 그것을 최고의 상환이라 해. 그런 고객은, 예컨대 오십만 엔을 빌리고, 몇 년에 걸쳐서 금리만 갚아나가, 총 오십만 엔 이상을 반제했는데도, 원금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 저소득층 젊은 사람이 빚을 끌어안고 있어도, 이상하게, 새로운 금융 회사의 심사를 통과해. 업계 용어로 돌린다고 말하는 상태에 빠뜨리기 위해서지. 여러 회사가 한 사람의 젊은이를 캐치볼처럼 이리저리 던져 대출금을 눈덩이처럼 불리는 거야. 문득 제정신이 들었을 땐, 월말마다 빚은 노예로 전락해 있어…. 결국 평생토록 몇천만 엔이란 돈을 갚아도, 죽을 때가지 다중 채무로 남아. 이것이, 소비자 금융이 수익을 올리는 방식이야.” (249-250)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것은 주제뿐만이 아니다. 읽어갈수록 뭔가 지독한 늪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 정도의 기분 나쁜 흡입력과 자본주의의 전성시대를 살아가던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을 바닥까지 꿰뚫어보는 서늘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왠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읽는 내내 대단히 불쾌하고 질척대지만, 중간중간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기막히게 정확한 묘사들 때문에 도저히 읽기를 중단하지 못한 채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식이다. 그런 면에서 처음에는 대단히 비호감으로 느껴졌던 표지 그림과 색상이 글의 느낌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 요시노 군처럼 특별히 잘생기지도, 스타일이 좋지도 않은 평범한 아저씨에게, 여자가 걸려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틀림없이, 그 욕망이 너무나, 무거워서.

여자라는 것은 어리석은 동물이라서, 애정이나 성의, 사회적 안정, 그 어떤 것도 아닌, 자신을 향한 남자의 욕망의 깊이와 어둠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꾸라지고, 데굴데굴 추락하고 만다. 나라는 여자는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우쭐한 마음이 되어서. 그것을 알고 욕망을 연기함으로써 노련하게 노는 남자도 있지만. (154)

 

개인적으로 읽고 난 느낌이 산뜻하지 않아서 다시 이 작가 책을 읽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작가가 하려는 말을 대단히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소설이란 점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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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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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읽을 때마다 늘 습관처럼 드는 생각이 있다. ‘이걸 대체 내가 왜 읽고 있을까?’ 절대로 하루키의 책들이 나쁘다거나 읽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굳이 하루키의 팬을 자처하기 어려운 내가 진정 경애해 마지않는 어떤 작가의 책보다도 의무적으로, 빠짐없이 찾아서 읽게 되는 이 습관의 연유를 되묻는 것이다. 하루키 본인도 책에서 아무런 메시지도 없다. 흐물거리기나 하고 사상성도 없고 종이 낭비다’(34)라는 비판을 받을 때도 있다고 고백하는데, ,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굳이 안 읽어도 그만인, 사는데 지장 없을, 그렇다고 미친듯한 흡인력으로 시간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도 아닌 이 에세이들을 꾸역꾸역 찾아서 읽는 것은 독서에 게으른 나로서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런 일개 독자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하루키는 맨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은 꽤 그럴싸한 변명 아닌 변명을 슬며시 내놓는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정말로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겪으면서 여기저기 몸의 구조가 변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상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음악이 있었다, 라고 할까, 그때마다 그 장소에서 나는 뭔가 특별한 음악을 필요로 했다. … 음악은 그때 어쩌다보니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걸 무심히 집어 들어 보이지 않는 옷으로 몸에 걸쳤다.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219)

 

그가 말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그의 에세이에서 확실히 나는 뭔가 위안과 희망 비슷한 것을 줄곧 얻어온 듯하다. 현실적으로야 유명 작가와 독자라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지만, 왠지 책을 읽는 동안에는 하루키처럼 혼자 글 쓰고 번역하고 달리고 맥주 마시고 음악 듣고 여기저기 여행하며 사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 꽤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인생에 대한 무지막지 버거운 부담을 슬쩍 내려놓고 연히 내가 바라는 이상향의 라이프스타일을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러자면 정녕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테고, 또 현실적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평소 나도 모르게 꽉 조였던 마음의 끈을 잠시나마 느슨히 풀고 모처럼 쉬는 기분이 드는 건 분명 사실이다. 이렇듯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평범한 독자들에게 부담 없이 다가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위안을 준다는 점이 하루키의 단연코 특출난 매력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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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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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정답고, 때로는 우주적 감수성이, 때로는 사유를 촉발하는 통찰이 빛을 발하는 글들. 하지만 영원히 푸른 청춘일 것만 같던 작가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던 산문집. 그래서 조금은 작가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조금은 정체모를 쓸쓸함을 맛보다가도, 여전한 건재를 알리는 이런 문장에 환호하곤 했다.

 

일본에서 신사에 들렀을 때, 일본인 친구의 권유로 재미 삼아 소원을 빌었다. 주택가 옆 작은 신사를 빠져나오는데 일본인 친구가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더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나기를, 그리고 그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고 대답했다. 예컨대 어떤 일이냐고 그 친구가 내게 물었다. 말하자면 예측할 수 없이 변하는 날씨처럼, 늘 살아서 뛰어다니는 짐승들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처럼. 그처럼 단 한순간도 내가 아는 나로 살아가지 않기를,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있으면 그 언제라도 편안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244-245)”

 

그럼에도 유독길고 긴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매사의 의미는 지나봐야 안다는 깨우침’, 그러므로매 순간 집중하며 지금 당장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할 당위성을 강조하는 글들이 여럿 눈에 띈다. 그토록 많은 어른들이 하는 말을, 그토록 명민하고 성실하게 인생을 탐구해온 작가가 반복하고 있으니 맞는 말이겠지, 결국 인생에서 가장 많은 선배들이 공감했던 경험칙이 있다면 이 정도이겠거니, 생각하며 그 내용을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겨본다. 그리고 달리고 싶을 때 한 시간씩 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인생을 압축적으로 맛보며 오만 가지 깨달음을 얻고 심지어 무아지경까지 경험할 수 있다니, 이 비 그치는 대로 달리기에 취미를 붙여봐야겠다고 새삼스레 다짐한다.

 

그나저나 읽을 때는 몰랐는데, 서평을 쓰고 나니 왠지 산문집을 자기개발서로 멋대로 바꿔 읽었다는 자책감이 든다. 그냥 그만큼 작가의 말이 한층 현실감 있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는 두루뭉술한 소감으로 변명을 대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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