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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을 받고 나서 책장을 들추기까지 전에 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호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간만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 쉽사리 가늠되지 않는 책에 대한 막연한 설렘과 기대감을 최대한 만끽하면서, 좀더 차분한 상태에서 책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소란스러운 마음이 한풀 가라앉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러다가 점점 임박해오는 마감일에 쫓겨 미처 준비되지 못한 채로 책장을 펼치고 사진과 글을 훑어보기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매우 수월하게 읽어내려 갈 수 있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에 으레 따라붙는 선입견과 중압감을 가뿐히 무시한 채, 각 작가들의 사상이나 인생의 궤적을 심도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그들이 현재 거주하는 곳,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 그리고 그들의 현재 일상 등에 초점을 맞추며 시종일관 유유자적한 태도를 견지하는 인터뷰 덕분이었다. 그리고 행여라도 인터뷰에서 아쉬워질 법한 깊이감은, 글에 맞먹을 분량의 근사하고 그윽한 흑백 사진들이 멋지게 보강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이 쟁쟁한 작가들이 어떤 업적과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지를 추측해가는 한편으로, 대부분 인생의 끝자락에 이른 이들이 현재 어떻게 생활하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엿볼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책에서 맛보는 매혹이었고, 가히 황홀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이 책의 매혹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크게 두 가지 지점을 짚어낼 수 있었다. 하나는 문학, 나아가 예술의 본질에 대해 그 체현자들을 통해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해준다는 점이었다. 노벨문학상이라면 순수문학의 극치에 이른 작품들이 받는 다소 한가로운 상이라고 여기던 나로서는 각 작가들이 삶으로 입증하는 문학과 정치·경제·사회의 불가분한 관계가 대단히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이 책에 수록된 작가들 모두 처음에는 다분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했으나, 각자 인생에서 처하게 된 문제적 상황에 주체적으로 반응하고, 갖은 정치적 압력과 경제적 압박 속에서도 그 과정을 글과 작품으로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결과, 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뒤흔들고 나아가 세계의 역사적 조류를 바꾸는 하나의 시대적 표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예술가는 문학과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독창적인 시각 때문에 현실 속에서 문제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고, 결국 그들이 남긴 작품은 한 시대와 패러다임에 저항하는 일종의 반란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숙명 때문에 그들은 작가에서 운동가로, 정치가이자 혁명가로, 나아가 전사이자 반란자로 계속해서 외연을 확장해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노벨문학상이 안겨준 거액의 상금과 유명세 덕분에 여유로운 노후를 누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이 작가들의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저항운동은 왕성하게 계속되었고, 이 점이 나를 두 번째로 놀라게 했다. 그들과 나는 일부나마 동시대를 공유하고 있는데도, 나를 완전히 비껴간 듯했던 역사의 흐름이 그들에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이 작가들의 일상은 각종 정치적 모임과 학술 세미나, 대중적 선동 및 예술 창작활동과 그에 따른 반대세력의 위협과 압박으로 점철되어, 노년기의 나이가 무색하게 분주하고 격렬하며 살벌했다.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몸바쳤던 각종 이즘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한 작가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대신 에이즈, 동물학대, 자연파괴와 같은 보다 현실적인 사안들을 붙들고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도도한 역사 속에서 일개 개인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위대한 역사의 주체로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갖은 핍박과 모진 고난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글 쓰고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에너지를 선보여 자칫 과거 회상 일변도로 흐르기 쉬운 이 책에 역동적인 활력을 불어넣었다. 평생에 걸쳐 불의와의 투쟁을 지속해온 그들의 놀라운 일관성과 끈질긴 생의 의지 때문인지, 흑백 사진에 박힌 그들의 쭈글쭈글한 손과 나이든 얼굴마저도 범상치 않고 위대해 보였다. 다행히도 그들의 노력은 노벨문학상이라는 영예로 보상받았지만, 수상 전까지는 어떠한 보상에 대한 확신이나 보장도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와 무게를 감내해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경외심이 들었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이 책은 이 위대한 작가들의 산책길, 어수선한 집안 풍경,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상적인 모습 등을 담은 사진과 사소하다면 사소할 개인적인 치부나 작업 습관 등을 소개함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위대한 인물들 역시 예술가인 동시에 생활인이고, 희로애락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개 연약한 인간임을 들추어낸다. 이럴 때야말로 위대한 업적과 노벨문학상 수상자란 타이틀에 압도되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던 작가들이 나와 같은 층위의 세상으로 살며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하나의 개인을 위대한 역사적 주체로 발돋움시키고, 다시 죽음 앞에 가까워진 약한 노인으로 변모시킨, 온갖 이데올로기와 투쟁으로 얼룩진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