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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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데뷔작이라고 하는 <여섯 번째 사요코>. 난 책을 직접 발굴해 읽는 걸 좋아하는데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너무)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한 번 '이 작가 괜찮다!' 싶으면 데뷔작부터 최신작까지 찾아 읽는다. 그래서 만약 내가 독서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성격이었다면 같은 작가의 책이 연달아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다 리쿠는 다르다.

 

왜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흡인력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작품 속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 미스테리한 스토리, 여운이 남는 필체. 읽자마자 이 작가는 내 취향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랄까. 온다 리쿠는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던 장점이 마음을 술렁이게 하니까. 흔들흔들 마음이 흔들려 이대로 계속 이 사람의 세계를 엿보다가는 내 감정이 감당할 수 없게 흘러넘칠 것 같았다.

 

이 <여섯 번째 사요코> 역시 온다 리쿠의 작품답게 마음이 흔들흔들거렸다. 다만 역시 데뷔작이라 그런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여러가지 의문들이

감정 뒷편에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점이 좀 아쉽다. 처음에는 데뷔작이라는 걸 모르고 읽어서 '왜 이 작품은...?'하고 생각했지만 데뷔작이라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보통 온다 리쿠의 작품은 본질적인 질문을 남긴 채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본질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스토리나 장치 자체에 대한 의문이 남아서 다른 작품들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도대체 '사요코' 게임이 정확히 어떤 게임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 의아해 했던 분이 분명 나말고 또 있을거라 믿는다....

 

'학교'는 이상한 장소다. 성인이 되기 전의 사람들이 모여서 부딪히고 감정을 낳고 적응하려 발버둥치고. 작고 명료해서 무서운 사회다.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의 학교는 풋풋한 로맨스가 피어나고 젊음의 혈기를 발산하며 생을 밝히는 곳이 아니다. 분명 그 학교도 다른 여느 학교처럼 그런 면도 있겠지만, <여섯 번째 사요코>의 학교는 '학교'라는 틀 안에서 꿈틀대는 하나하나 다른 학생들의 고민과 불안감이 불안한 괴담의 형식을 빌어 '나타난다.' 덕분에 그런 밝은 면보다 미스테리한 면이 두드러진다. 학교라는 곳은 좁기 때문에 학교와 집 뿐인 학생들의 인생에는 큰 의미를 준다. 학교는 학생들의 유일무이한 '세계'인 것이다. 살아가야만 하는 세계. 그런 좁은 세계, 학교 안에서의 소문은 모호한 괴담을 낳는다.

이제 막 '사회'에 입문하는 초등학교도, 어딘가 어중간한 중학교도 힘들지만 성인이 되기 직전의 고등학교는 특히 그 긴장감과 불안감이 더하다.

 

읽을 당시 감기에 헤롱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잘 연결이 되지 않았는데, 정리하자면 '사요코'라는 게임은 즉, 학교의 괴담전설 중 하나인 것 같다. 미술실의 초상화가 밤에 눈을 돌린다든가 하는 식의. 굳이 얘기하자면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는, 학교의 '전설'이 아닐까. 아무도 뭐가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 정체도 모호하지만 학생들은 충실히 그 '전설'의 관객이, 주인공이 되길 마다하지 않는다.

 

이 '사요코'는 사회로 나가기 전 학생들이 겪는 '학교'라는 관문의 부스러기 같은 것이다. 사회로 나가기 전의 불안감. 불확실한 미래의 그림자. 뭔지도 모르면서 '올해도 무사히...'라고 안도하는.

 

온다 리쿠의 작품에서는 유난히 '완벽한 여자아이'가 자주 등장한다. 검고 긴 윤기나는 머리칼에 희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의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모호한 분위기의 여자아이가. 그런 '쓰무라 사요코'는 완벽한 여자아이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외모를 지닌 덕에 그녀의 '불안감'은 외모에 휘말려 사라져 간다. 난 평생 겪어본 적 없지만 너무 예뻐서 생기는 문제도 분명 있는 것이다. 사요코. 전설 속에서 등장한 듯한 그림같은 미소녀가 뿜어내는 오묘한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런 '게임'이 있었다면 지루한 학교 생활에 뭔가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굳이 얘기하자면 '마피아' 게임의 불길한 버전?

전교생이 모두 알고있지만 이야기 하지 않는 '비밀'이라니 체육대회보다 전교생을 더 잘 묶어주는 짜릿한 '비일상' 아닐까!

 

 

-학교란 얼마나 이상한 곳인가. 같은 또래의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모여들어 저 비좁은 사각 교실에 나란히 책상을 놓고 앉는다. 얼마나 신기하고 얼마나 유별난, 그리고 얼마나 굳게 닫힌 공간인가.
같은 학생이라도 대학생과는 사뭇 다른 게 고등학생이다. 그녀에게 대학생은 이미 어른이다. 그들은 이미 어엿한 사회의 일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교생은 어정쩡한 경계 지점에서 자신들의 가장 허약한 부분으로 세상과 싸우고 있는 특수한 생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3년 동안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은 기묘한 느낌으로 허공에 붕 떠 있다. 그렇게 붕 떠 있는 불안을 비집고 뭔가가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23)

 

-전설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몇천 명, 아니 몇만 명의 학생이 스쳐간 이 낡은 학교에는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 뭔가가......또는 이 공간 안에 겹겹이 배어 있는 에너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스며 들어온다. (44)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모두가 그 생각을 하고 있다. 모두가 지금까지 감추고 입을 다물어왔던 뭔가가 폭로되려 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서 말하지 않는다. 터부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 여기 천 명이 넘는 젊은이들, 곰팡내 나는 인습과는 인연이 없을 터인 그들이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149)

 

-고3이라는 특별한 시기에 고등학생으로서의 부속적인 요소를 모두 박탈당한 지금, 그들은 그저 '수험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가족들이 오죽이나 여러 모로 신경이 쓰이겠는가 싶은 마음도 있지만 본인들 입장에서 보면 입시 준비다, 공부다, 하며 부산을 떠는 동안 그 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로 겨울이 왔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갑자기 늘어난 여러 가지 모의고사들 사이에서 날짜를 헤아리고 일요일에는 모의고사를 보러 가는,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확고하게 '수험생' 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밀려 들어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면서도 계속 달리는 그들은 숨을 힘껏 들이마시고는 뱉어내지 못하는 상태로 매일을 소화하고 있었다. (190)

 

-학교라는 건 돌고 있는 팽이 같은 거야. 항상 똑같은 위치에서 똑바로 서서 빙글빙글 돌고 있지. 그리고 너희 학생들이 끈을 잡고 팽이를 열심히 탁, 탁, 내리쳐서 팽이가 속도를 잃고 쓰러지지 않도록 열심히 분발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끝을 후배에게 전해주고 차례차례 다른 학생이 팽이를 돌리지. 팽이는 내내 똑같은 하나의 팽이지만 끈을 쥔 사람, 치는 사람이 자꾸 바뀌는 거야.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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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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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데, 난 '정의의 편'이라기 보다는 내 편할 때만 정의를 찾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상이라는 건 의외로 정의와 불의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딱히 불편을 느낀다든가 내 스스로가 혐오스럽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그런 내가 '아, 그래도 난 역시 정의를 좋아하는구나'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다. 내가 "이런" 소설이라고 하는 건... 뭐랄까 선과 악이 불분명해서 더더욱 현실스러운 소설이랄까. 예를 들면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이라든지 강도는 약하지만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랄지. 어쩌다보니 다 일본소설만 예로 들게 되었지만 요컨대 (내가 생각하기에)악인이 악인이라고 밝혀지지 않는 게 나는, 진절머리가 나게 싫다.

 

세상에는 언론 플레이라는 게 존재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매일매일 알려지지 않은 채 지나가는 진실이 많다는 걸 알고는 있어도 책을 읽으며 눈앞에 들이밀어지면 역시 기분이 나쁘다.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가슴이 답답하고 내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책을 다 읽고 덮고나면 이렇게 푸념하고 싶은... <모방범>은 그런 책이었다.

 

역시나 이름치 답게 난 한권만으로 다른 책 2권이 될 <모방범> 시리즈 3권 내내 얘가 누구지... 하며 감으로 주인공을 구분하는 미련한 짓을 해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아리마 요시오' 할아버지와 단순히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아서 기억한 신이치는 언제든 구별해 낼 수 있었으니 대충 그정도면 합격점을 줘도 되지 않을까...

 

이야기는 방대한 양 답게 복잡하다. 희생자들의 이야기, 범인의 이야기, 그 범인을 잡으려는 사람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 이 세상이 범인과 희생자만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항변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사건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듬 조각케이크처럼 조심스럽고 아름답게(단순히 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야기의 구성이) 답고 있다.

 

1권의 초반에서는 야금야금 희생자 가족과 발견자, 경찰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도대체 범인이 누구야! 라고 부르짖었지만 후반에는 딱 봐도 이 자식...하는 말이 절로 나올 범인이 등장한다. 이런 멍청이라니,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2권, 3권을 읽으면서 차라리 그 멍청이가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력적인 악당을 좋아한다. 오지랖 넓고 이리저리 치이는 천사표 주인공보다는 쿨하게 자기 이유를 관철하는 매력적인 악당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지만 (주위에 주는 피해는 제쳐두고;) 핵심은 악당의 인간성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에게만 쏟아졌던 '감정이입'이 악당쪽에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감정이입이라기 보다는 불운한 과거에 대한 동정-쪽에 가깝지만. 하지만 그건 이야기 구성 안에서 악당이 자기 이야기를 펼쳐보일 무대가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뤼팽은 괴도지만 그 엉뚱하고 기발한 변신능력이며 가끔 나오는 유모, 그의 취미 등을 종합해야 그를 '매력적인 괴도'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모방범>은 그런 무대가 없다. 덕분에 나는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에 가슴을 쳐야 했던 거고. 2권까지 범인은 이름도 없이 별명으로만 등장한다. 그의 이유없는 악의, 단순한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 덕택에 그는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진정한 이유를 펼쳐보일 무대를 박탈당한다. 아니 뭐 그놈이 한 일이 있으니까 기회를 준다해도 뭐라고 거짓말을 할지는 모르겠다만. 아니 사실 힐끗힐끗 드러난 과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나같은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감정이입'할 자신이 없다. 거기에 감정이입하게 되면 내 인간성은 끝이다, 라는 확신이 들어서일까.

 

따지고 보면 전체적으로 내가 답답했던 이유는 <악인> 때와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언론의 섣부른 판단과 보도에 '진실'을 아는 내가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거다. 물론 현실에서야 내가 '진실'을 알아낼 재간이 없으니 주어지는 정보를 순순히 읽고 보지만 그 이면에 실은 그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절절한 경고- 내지는 고발을 읽는 셈이다.

 

난 정의를 옹호한다기 보다 법을 선호하는 편이고(물론 악법도 법이다, 라고 단언할 자신은 없지만) 오손도손 살아가는 집안의 평화를 좋아한다.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행복을 태연히 지켜보는 범인의 심정을 이해도 못하겠거니와 언론의 자유, 알 권리를 외치면서도 결국은 '흥미'위주, '화제'위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언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렇게 당장은 분개해도 이 책의 여운이 사라질 때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고 TV를 볼 내 자신이다, 슬프게도.

 

뭐 그런 답답함을 뒤로 하고, 이 <모방범>은 과연 극찬받은 평가가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뒤가 궁금해서 두꺼운 두께도 상관않게 되는, 그런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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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와 나 - 세계 최악의 말썽꾸러기 개와 함께한 삶 그리고 사랑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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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다. 우리집 개답게 (어째서인지 우리 집에 오는 강아지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먹을 걸 무척이나 좋아하고 산만하며 더불어 시츄라 덩치가 약간 있다. 먹을 걸 좋아하는 점 이외에는 우리 가족 탓임이 분명했다. 냄새에 민감한 엄마는 개를 '좋아하는' 우리가 모든 뒤치닥거리를 한다는 조건하에 개 기르는 걸 허락했고 아빠는 너무 바쁘셔서 걸핏하면 달려들어 장난치는 녀석과 느긋하게 놀아줄 수 없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내 방조차 청소하기 싫어하고 매사가 느슨한 주인라 제대로 혼내는 것조차 잘 못했다.

 

동생과 배변 치우기/뒷정리 하기/목욕시키기 등으로 싸우기는 해도 녀석은 우리집의 귀염둥이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작은' 개들과는 덩치가 다르긴 해도 손바닥만할 때부터 키워와서 이제는 그 덩치조차 귀여워 보이고, 엄마가 '저 바보'라고 말하는, 자기 꼬리를 잡기 위해 빙글빙글 도는 모습조차 흐뭇하게 바라본다. 다른 집 개들은 주인이 우울하면 위로도 해준다는데 이 녀석은 내가 울 때조차 자기 좀 편하게 자겠다고 날 두고 총총거리며 방을 나가 순간 어이없어 날 웃게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저렇게 귀여운데!

 

아마 내가 말리를 만났다면 일단 겁에 질려 백리밖으로 도망갔을거다. 저멀리서 눈을 빛내며 달려오는 덩치 큰 리트리버 개라니! 하지만 말리라면 우헤헤 웃음이라도 흘릴 표정으로 내 뒤를 쫓아와 장난을 쳤을거란 생각이 든다.

우하하. 생각만 해도 웃긴 장면이다. 비록 말리 밑에 깔려있는 게 바로 나고 내가 개 침으로 세수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염두에 둔다쳐도 남들보기에 흐뭇할 장면임은 틀림이 없다. 게다가 그 큰 개가 날 싫어해서 쫓아오지 않은 게 어딘가!

 

말리보다 덩치는 작지만 말썽으로는 빠지지 않을 개를 기르는 입장에서 책을 읽으며 난 단박에 말리가 좋아졌다. 강아지들이 너무 얌전해도 재미없다는 건 말썽많은 개를 겪어본 사람만이 (씁쓸하게 웃으며) 공감할 수 있는 일일거다. 그리곤 포기한 듯 웃으며 '그래도 착해요'라고 말하겠지.

 

개를 기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몇 년이 지나면 말도 알아듣고 제 앞가림을 하는 아이들과 달리 개는 평생이 지나도 못 알아듣는 말이 있고 뒷정리를 스스로 할 수도 없다. 배변 습관을 잘 들이지 않으면 집안은 지린내로 진동을 하고 벽지를 물어뜯는 일도 다반사며 어째서 휴지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다 물어뜯어놓아 집 안을 온통 하얗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물을 싫어해 목욕 때마다 주인에게 달려들어 결국 주인도 목욕을 하게 만들고 뭔가에 집착하며 물어뜯어 놓기도 한다.

 

그렇다.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돌보지 못 하면...' 하고 엄포를 주는 게 장난이나 협박이 아닌 것이다. 집안의 개를 제대로 돌보지 못 하면 집안의 사람들도, 그 당사자인 개도 불행해진다.

 

하지만 그 처음의 미칠 것 같은 과도기를 겪고난 뒤 슬슬 이 작은 존재가 내 삶의 한 구석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면 어쩐지 내가 손해보는 것 같은 공존생활을 즐기게 된다. 축축한 콧등이 손바닥을 문질러올 때, 동그랗고 까만 눈이 난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현관 앞에서 날 반기며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고 있을 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퍼지는 걸 막을 수 있는 '귀찮은 일'이란 없다.

 

그 순간 귀찮던 '개'가 '가족'이 된다. 아무리 내가 화를 내도 내게 화내지 않을 사랑스러운 가족이.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개, 말리를 만난 존 그로건은 행운아인 셈이다. 사람을 붕 날아올라 환영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개, 남의 얼굴에 침 범벅을 만들어놓고 신나하는 개, 다른 사람들에게 "얘는 사는 게 즐거운가 보군요"라는 말을 예사로 듣는 개. 그런 개 옆에 있으면 피곤한 날조차 얼굴에 웃음꽃이 피지 않을까?

 

하지만 슬프게도 개의 수명은 짧고 강아지로 있는 기간은 더 짧다. 늘 곁에 있던 '존재'가 사라진다는 건 그 존재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쓸쓸하고 슬픈 일이다. 내가 기르던 첫 강아지가 죽었을 때 나는 꼬박 일주일을 울었다. 마지막을 보지 못했기에 실감은 나지 않은데 집 안 어디에도 그 조그만 녀석이 없다는 것, 더이상 컹컹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 자꾸 날 괴롭혀댔다. 모르겠다, 그 때의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리 성실한 주인은 아니었지만 그 동그랗고 까만 눈에 홀라당 빠져있었다. 그 눈이 사라진 게 슬펐고 잘 대해주지 못해서 괴로웠다. 이런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며 100% 사랑해준 그 작은 존재가 뒤늦게 안쓰러웠다.

 

그렇다. 자신의 100%로 주인을 사랑하는 존재가 없어진다는 건, 상상 외로 쓸쓸한 일이다.

 

그래도, 그런 슬픔도 감수할 정도로, 반려동물이란 존재가 인생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풍부해진다. 말리와의 추억이 가득한 <말리와 나>를 보라. 인생이 초콜릿 상자와 같다면 반려동물이 있는 인생은 또 다른 초콜릿팩이 딸려오는 스페셜 초콜릿 상자일 것이다.

 

<말리와 나>. 고맙다, 새삼 우리집 강아지의 사랑스러움을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 내 인생이 작은 존재로 인해 얼마나 풍요로운지 깨닫게 해줘서.

 

 

-말리는 그저 덩치 크고 사랑스러운 멋진 개로, 침입자를 공격한다고 해봐야 죽도록 핥아주기만 할 녀석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 집을 노릴 수도 있는 좀도둑이나 공격자들이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이들에게 말리는 덩치 크고 힘이 세며 걷잡을 수 없이 날뛰는 개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69)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멈춰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항상 날뛰는 말리가 어깨를 제니 다리 사이에 끼고는 큼직하고 뭉툭한 머리를 제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꼬리는 축 늘어져 있었는데 이 꼬리가 우리 두 사람 중 하나 아니면 무엇인가를 치지 않는 모습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눈을 제니 쪽으로 향한 말리는 작은 소리로 낑낑대고 있었다. 제니는 말리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갑자기 얼굴을 말리 목의 두툼한 털가죽에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창자를 끊어내듯 격렬하고 멈출 수 없는 흐느낌이었다. (76)

 

-거칠 것 없는 야생마 같은 말리도 패트릭이 옆에 있을 때는 달라졌다. 말리는 아마 패트릭이 연약하고 힘없고 조그만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고, 그래서 아기가 옆에 있을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며 아기의 얼굴과 귀를 부드럽게 핥아주곤 했다. ~ 말리는 패트릭 주변을 맴도는 마음 착한 거인이었으며 이제 2등으로 밀려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155)

 

-말리가 그렇게 믿음직하고 단호한 태도로 우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개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너무 맞는 말이다. (169)

 

-하지만 손바닥으로 살짝만 쳐도 분노가 담겨있거나 아니면 엄한 목소리로 야단이라도 치면 즉시 깊은 상처를 받는 것이었다. 덩치는 태산만한 녀석이 엄청나게 예민하다는 얘기다. 제니에게 맞았다고 다친 것은 아니었고 다친 것 긑처에도 못 미쳤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제니가 말리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힌 것이 분명했다. 제니는 말리의 모든 것이었고, 세상에 둘뿐인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는데 이제 제니가 말리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제니는 말리의 여주인이었고 말리는 충실한 종이었다. 제니가 때릴 만해서 때렸다면 말리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고 맞고 있었을 것이다. 개 치고도 말리는 영리한 편이 못된다. 그러나 충성심 하나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5)

 

-말리는 용기만 있다면 내가 갖고 싶었던 특징, 그러니까 거칠 것 없고 반항적이고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고, 나는 녀석의 이런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얻었다. 그리고 말리는 삶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삶 속에 단순한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무리 많은 지시를 받아도 말리는 항상 의도적 불복종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상전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말리는 자기 자신의 상전이었다. (196)

 

-2년 전 우리가 집으로 데려온 것은 살아 숨쉬는 생물이었지 구석에 세워놓는 액세서리가 아니었다. 좋든 나쁘든 말리는 우리 개였다. 우리 가족의 일부였고, 무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말리는 우리에게 받은 사랑을 수백배로 불려 갚아주었다. 말리가 우리에게 보인 정도의 충성심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9)

 

-말리가 어떤 식으로든 삶의 모범이 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발코니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생각해보니 녀석이 '잘 사는 것'의 비결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며, 마치 사춘기 소년 같은 활력, 용기, 호기심, 장난기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내라.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달력이 몇 장이 넘어가건 여전히 젊은 것이다. 괜찮은 인생 철학이었다. 물론 소파를 찢어 놓거나 세탁실을 난장판을 만드는 부분은 제외하고 싶지만. (259)

 

-말리를 보면 인생이 짧다는 것, 그리고 순간의 기쁨과 놓쳐 버린 기회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의 전성기는 한 번뿐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은 꼭 갈매기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에 차서 바다 한 가운데를 향해 끊없이 헤엄쳐 가는 날이 지나면 물그릇의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히기조차 힘든 날도 온다. 패트릭 헨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에게도 인생은 한 번뿐이다. (328)

 

-말리는 이것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이제까지 말리에게 한 번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 말이다. 나는 말리가 죽기 전에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말리, 넌 훌륭한 개야."(365)

 

-말리는 우리를 실망시키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소중한 선물을 공짜로 주었다. 조건 없는 사랑의 기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어떻게 주는지, 어떻게 받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조건 없는 사랑만 있으면 다른 것들은 대부분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간다.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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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초 살인 사건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의 세계는 독특하다. 온다 리쿠를 잘 알고 작품도 잘 아시는 분들에 비하면 나야 겨우 입문자에 불과하지만, 겨울날 따뜻한 집에서 현관문을 열면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듯이 그 세계의 입구에만 서있어도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장르도 내용도 다르지만 작품에는 공통적인 분위기가 있다.

 

온유하게 흘러가는 일상과 그 밑에 숨겨진 이면. 그 미묘함이 자아내는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는 현실의 전혀 다른 면을 들여다봐야만 하는 이야기의 부산물일 것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은 환타지와 전혀 무관한 내용일지라도 독특한 긴장감 덕분에 현실인 듯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더더욱 오싹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그런 점이 매력적이기도 하다.

 

이 1001초 살인사건의 제목은 '일본의 환상 소설가 이나가키 다루호의 1001초 이야기를 패러디했다고 뒷표지에 친절하게 쓰여 있다. 그 밖에도 수록된 단편의 간단한 정보를 뒷표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외우거나 뭔가를 연결하는데 영 재주가 없는 나는 분명 책을 읽기 전 뒷표지를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제목과 정보를 매치시킬 수 없어 그냥 열심히 읽고 소화시켜야만 했다. 분명히 알고 읽으면 더 재미있었을텐데 아쉬운 일이다. (물론 모르고 봐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단편소설집이라 총 14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제일 처음 수록된 「수정의 밤, 비취의 아침」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엄청난 미소녀인) 리세는 나오지 않지만 그 작품의 뒷 이야기가 나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더군다나 실질적 리세의 파트너인 '천사같은 외모의' 요한이 나왔으니! 작품이 좀 더 길지 않은게 애석할 뿐이다. 시원섭섭하게 한 단편을 끝내고 났지만 아직 이야기는 13편이나 남아 있다.

 

기대되기도 하고 얼른 읽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나를 갈등하게 하는 부분이다. 더 읽을 거리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기쁘지만, 얼른 이 책을 다 읽어 끝을 보고 싶기도 하고. 책을 읽을 때마다 두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늘 책을 그만 읽어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단편집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 이번에는 수월하게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펴들수 있었다. 장편인 경우에는 애매하게 끝이 나면 수업 시간에 안절부절 책 표지만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하니까. 덧붙여 말하자면 장편 중에서도 몇 권으로 나뉜 책은 정말이지 학업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밤을 새워서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니까. 그런 의미에서 새 학기에 단편집을 집어든 건 정말이지 괜찮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온다 리쿠의 책. 온다 리쿠의 책은 펼치는 순간 이세계다. 긴장감과 미묘한 분위기가 독자를 끌어들여 책 속의 세계를 부유하게 만든다. 책을 덮는 순간 머리가 아찔해 질 정도로. 그게 바로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내 일상에서 탈피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가체험의 세계. 그게 비록 새학기의 시끄러운 강의실일지라도, 책을 펴드는 순간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묘한 긴장감의 세계. 그게 바로 온다 리쿠의 세계고 매력이다. 그런 '세계'가 14개나 펼쳐지는 별천지의 책, 1001초 살인사건이었다.

 

-선입견이라는 거 참 알 수 없다니까요. 맘대로 그럴듯한 논리를 세워 버리니까 무서운 거구나 싶어요. (68)

 

-어렸을 때 쓰기 연습을 하면서 같은 글자를 몇 번씩 쓰다 보면 점점 글자가 이상하게 보이고 나중에 가선 글자가 읽히지 않게 되고 그랬는데요. (69)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한테 시키는 건 좋지 않아. 자기가 솔선해서 안 하면 아무도 안 따라오는 법이란다. 그쯤은 다들 알 법도 한데 말이야. (181)

 

-그녀는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자기 얼굴을 마법의 거울에 비춰 보지는 않았나. 거울은 그녀의 현실 속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나. 아니면 그녀의 눈에는 이미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녀는 어떤 불행을 짊어지고 있었을까. 어떤 충족되지 못한 갈망을 품고 있었을까. 백설 공주를 죽이는 데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188)

 

-불확실한 세월. 연속되었을 세월. 그 세월 속에 파묻히고 가라앉아 사라져 버린 것은 대체 얼마나 될까. 아니, 오히려 사라져 버린 것이 대부분이고, 남은 것이 조금뿐인지 모른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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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사 10 - 완결
우루시바라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최근 절판의 위험을 감지하고 만화책들을 다시 모아보려고 한다. 물론 신간도 끌리지만 쌓여만 가는 책들과 자리가 부족한 책장을 고려해 예전에 사두었던 책들의 뒷권만 사려고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충사/는 어쩐지 '아..지금 사두지 않으면...' 하는 느낌이 아슬아슬하게 드는 책이었다. 뭐, 언젠가 애장판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이번에 큰 맘 먹고 9권을 한꺼번에(한 권은 이미 집에 있었기 때문에) 질러버렸다. 신기하게도 소설책과 만화책은 택배를 받고나서의 마음이 사뭇 다르다. 어느 책이나 설레는 건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만화책이 더 '보기 쉽기' 때문일까 두근두근 신이 난다. 굳이 분석하자면 불쑥 튀어나오는 조급증 덕에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에 기뻐진 거지만.

 

/충사/가 도착하던 날은 아직 학기 중이었기 때문에 택배를 받아본 건 엄마였고 나는 저녁 무렵이 다 되서야 택배를 뜯어볼 수 있었다. 묵직한 택배 박스가 책으로 꽉 채워져 있다는 걸 느낄 때면 뜯기가 아까워진다. 선물을 풀러보기 전의 두근거림 같은게 사라질 것 같아서. 물론 난 내용물을 다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새 책이다! 싶은 마음에 상자를 열고 책들을 침대 위에 쏟아부었다. 어디서 봐도 재미는 덜하지 않겠지만 책은 자고로 편하게 봐야한다는 게 내 진리다. 추운 날은 침대 위에 작은 책상을 펴놓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읽는 게 딱 좋다. 거기에 아이스크림이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게다가 '충사'는 어쩐지 침대가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충사/는 어딘가 어린 시절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들려주던 전래동화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할머니는 평범하게 혹부리 영감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조근조근 펼쳐지는 이야기, 라는 느낌이랄까. 아마 그건 중간중간 나오는 작가의 '할머니/할아버지가 겪은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에는 좀처럼 듣기 힘든 여우/도깨비에 홀렸다-하는 이야기들이 잔뜩 나와 보고있으면 어쩐지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이불 속에서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숨을 죽이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던 그 때의 기분에 취하려면 역시 진짜 이불 속이 좋겠지.

 

내가 만화를 고르는 기준은 대충 3가지로, 그림체와 스토리, 장르-정도로 나뉜다. 그림체, 라고 해도 딱 이거다! 싶은 그림체라기 보다 보기에 예쁘거나 귀엽거나 정감가는 스타일이 좋다. 스토리는 뭐랄까, 개연성이 너무 부족하다거나 너무 노골적인 '인터넷 소설' 류만 아니면 좋겠고... 장르는 탐정/추리 장르면 스토리와 그림체는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는 의미라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충사를 처음 고른 건 아무래도 '스토리' 쪽이었다. 당연히 탐정/추리 장르는 아니었고 (사실 제목만 보고는 세*코 이야기, 같은 장르인 줄 알았는데...) 그림체는 확실히 정감가는 스타일이었지만 그 당시 난 귀여운 스타일을 선호했기 때문에 볼까말까 상당히 망설였던 만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보게 된 건 사실 애니판 충사를 먼저 봤기 때문일까. 애니판 충사는 상당히 원작에 충실해서 재미삼아 보기 시작했는데 홀딱 반해 (아직 읽지 못한) 원작까지 사랑스러워지는 작품이었다.

 

/충사/는 옴니버스 식으로 이어져서 몇몇 등장인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이야기에서만 등장한다. 덕분에 몇 권을 집어들든 재미가 덜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주인공인 '깅코'는 늘 자유롭고 담담한 얼굴을 하고 떠돌아다니는 충사다. (이게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인 이유) 살가운 얼굴 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인 주제에 속정 많고 오지랖도 넓어서 가는 곳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만난다.

 

/충사/는 '판타지' 장르라고 생각한다. 굳이 겹쳐서 넣자면 '드라마' 쪽이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판타지가 아닐까. 엘프나 호빗같은 종족이 등장하지도 않고 마법이 사용되지도 않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충사/의 정확한 시대 배경은 잘 모르겠다. 어차피 일본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더 할 수도 있지만 작가도 딱히 시대에 연연하지는 않기 때문에 모른다고 해서 이야기의 재미가 덜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들 옛날 (일본) 옷을 입는데 깅코는 어째서인지 현대적인 옷을 걸치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아니 정말 왜일까...?)

 

 

어렸을 때, 눈을 감으면 눈 안에서 무언가 반짝 반짝 거렸다. 그 때는 그 작은 빛들이 꾸물꾸물 움직여서 아메바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낭만이 없는 아이였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엔 충분히 아메바 스러웠다.

 

/충사/에서는 그걸 '벌레'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파리같은 벌레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가까운 그런 존재라고. 1권에서 깅코는 "곤충이나 파충류와는 전혀 다른 '벌레'. 대강 설명하면 이래. 이 손의 이쪽 네 가닥이 동물이고 엄지가 식물을 가리킨다고 하자. 그럼 사람은 여기... 심장에서 가장 먼 중지의 끄트머리에 있는 셈이야. 손의 안쪽으로 갈수록 하등한 생물이 되어가지. 계속 따라가다 보면 손목 부근에서 혈관이 하나로 이어져. 여기 있는 것이 균류나 미생물이야. 이 부근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식물과 동물을 구분 짓기가 어려워지지. 하지만...아직 그 앞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어. 팔을 따라 올라가 어깨도 지나간다...아마도...이 부근(심장)에 있는 것들을...'벌레'...혹은 '초록'이라고 부른다. 생명 그 자체에 가까운 것들이지."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충사"란 그런 벌레를 연구하고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을 말한다. 깅코는 선천적으로 '벌레'가 꼬이는 체질이어서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어 이곳저곳을 떠돌며 해를 끼치는 벌레를 쫓아내거나 벌레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다.

 

충사를 읽다보면 확실히 옛날에는 '자연'이라는 게 좀 더 생생하고 무섭고 친근한 어떤 것이었다는 걸 느낀다. 충사의 이야기에는 종종 벌레지만 자연현상과 비슷한 것이 나온다. 무지개를 닮은 벌레, 비를 닮은 벌레, 구름을 닮은 벌레... 거스를 수 없는 것, 두려운 것, 풍요로운 것, 이해할 수 없지만 고마운 것. 지금 같이 일기예보도 자연재해를 막을 수 있는 기술도, 복구할 수 있는 기술도 변변치 않았던 옛날에는 자연재해가 어떤 의미였을까. 그제서야 깅코가 말한 '생명 그 자체에 가까운 것들이지',라는 말을 조금 이해한다. 그런 벌레들은 살아있는 자연에서 파생된 것이니까.

 

지금은 설령 '벌레'가 있다해도 알아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과연 그게 행일까 불행일까.

 

 

이윽고 다리의 통증은..., 마음의 통증까지 수반하게 되었다.
미비하고 하등한 생명에 대한 교만.
이형의 것들에 대한 이유 없는 공포가 야기한 살생.
그런 것들이 적지 않게 감지된 것이다. -2권 /문장의 바다/

 

네 안에 뻥 뚫린 커다란 공동을 꽁꽁 틀어막아.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돼버리기 전에... -4권 /빈 누에고치 따기/

 

땅 밑바닥은 차가우냐-.
답답하냐.
무서우냐.
괴로우냐.
맑은 물과... 무수한 별들이...
사는 곳. -9권 /호중천의 별/

 

어릴 적 가슴을 설레게 했던 방울소리가
몹시 애절하게 들려왔다.
마치 살을 에는 것처럼 아름답고 슬픈 소리였다. -10권 /방울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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