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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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번역출판의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연도에 따라 어느정도 차이는 있지만, 출판시장에서 번역서의 비중은 전체 도서의 25~30%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학습지처럼 번역서가 전무한 경우도 있지만, 만화, 자연과학, 철학의 경우 다른 장르보다 번역서의 비중이 높습니다. 전체 도서의 50%가 번역서인 장르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출판환경에서 번역자는 작가만큼 중요하며, 번역의 질은 출판문화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규칙을 가지고 있는 언어를 전환시켜야 하기 때문에, 번역은 그 특징상 논란의 대상이 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매우 어려운 분야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어머니'로 번역하다가 '엄마'로 번역하는가 하면, 제임스 조이스의《피네간의 경야》처럼 번역됬지만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천황이냐 일왕이냐 덴노냐 하는 문제처럼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정치적 입장을 보일 수도 있고, 귀여니의 소설을 중국 번역자가 번역한 것이 귀여니 소설의 작품성을 잘 살린 것이냐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존댓말과 반말이 있는 언어와 없는 언어를 번역할 때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으며, 최근에 있었던《이방인》번역 논란처럼 번역이 작품 전체의 뉘앙스를 바꿔버렸다는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좀 딱딱하지만 원어의 구조와 표현을 살려줄 것이냐, 아니면 독자가 사용하는 언어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문장을 사용할 것이냐는 두 가지 번역에 대한 태도는 나라마다 다릅니다. 번역서의 비중이 낮고 영어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영미권 출판사의 경우 의역을 선호하는데, 체코 작가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거리, 다리, 사람 이름을 전부 영어식으로 바꿀 정도로 자국화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일본의 경우 문학작품은 의역을 선호하며, 자연과학서와 인문, 사회과학서는 직역을 선호합니다.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로 자국의 언어표현을 선택하는 것은 역자의 자율성 문제이기 때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직역주의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책 앞에 실린 작가의 감사의 글까지 빼놓지 않고 번역을 하는데, 이 부분은 사실상 책의 내용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정도까지 원작을 중요시할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복주(覆奏), 부서(簿書), 함사(緘辭)처럼 두꺼운 국어대사전에도 안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놔둔 번역은 엄격하게 말하면 번역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 p.30

저자는 우리나라 번역의 지나칠 정도의 원문 지향적인 태도를 지식층의 숭배에 가까운 외국어 선호경향에서 찾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한문이 지식의 중심일 때는 한문을 읽으면 됬고,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어가 지식의 중심일 때는 일본어를 읽으면 됬기 때문에 한글로의 번역 필요성이 적었고, 번역하더라도 원어 중심의 번역을 선호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어의 영향력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해방 이후 서양의 서적들을 번역할 때 일본어로 번역된 책들을 통해 중역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영한사전을 만들때도 영일사전을 중역할 정도였습니다. 영어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존중은 번역에 있어서 영어의 느낌 그대로를 살리는데만 집중하게 했습니다. 저자는 논문이나 과학서 뿐만 아니라 아동용 도서에서마저도 '현실 정치'란 번역을 굳이 '현실 정치(real politics)'라고 불필요하게 번역해줄 정도로 외국어를 대접하는 관행이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어 실력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인상적인 부분은 직역 번역문을 많이 접하면서, 한국어 사용자들이 점점 직역 번역문에 익숙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책에도 직역 번역문의 자취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책장에서《현대자동차에는 한국 노사관계가 있다》는 책을 펼쳤더니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자동차(현대차) 노사관계는 한국 노사관계의 유형설정지(pattern setter)라고 말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번역문의 구조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지만 언어의 구조와 규칙은 점점 외국어, 특히 일본어와 영어 구조로 사고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영어 5형식을 기반으로 수많은 영어 문장을 학습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에겐 영어 구조로 언어를 사고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번역을 할 때 결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갈 수 없다. 사전을 이용한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항상 현실 세계를 거쳐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가야 한다. 각 언어는 현실 세계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와 직접적으로 비슷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언어의 종말》p.482

저자는 과도한 직역주의와 수많은 번역문을 접하게 되는 것이 한국어의 개성 상실에 이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직역 번역문에 익숙해져간다면 추상 명사가 주어나 목적어 자리에 오는 것을 꺼리고, 능동태가 더 자연스러우며, 대명사를 잘 활용하지 않는 규칙 등 듣기에 자연스러운 한국어의 개성이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번역서가 아닌데도 외국어 규칙을 기반으로 한 한국어를 쓰는 한국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고, 독자들도 그것이 부자연스럽다는것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저도 수많은 직역 번역문을 읽고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직역의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자는 직역 위주의 현실에서 균형을 잡아줄 한국어의 개성이 살린 의역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독자들이 번역서를 통해 원하는 것은 '뿅가죽는'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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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여자 - 과학이 외면했던 섹스의 진실
대니얼 버그너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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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성 의식을 조사한 설문조사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성관계를 해본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것도 남자가 여자보다 많았고, 사랑 없는 성관계가 가능하냐는 질문에도 남자들이 여자보다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위행위를 한다는 질문에도 남자가 여자보다 높은 확률을 보였고, 결혼 전에 허용할 수 있는 성적 행위를 묻는 질문에도 남자가 여자보다 더 끝까지 원하는 걸로 조사되었습니다. 가장 성관계를 활발히 할 나이인 대학생들의 성 의식 조사는 남자들이 여자보다 더 성행위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조사는 성 관계에 있어서 남자는 적극적이지만 여자는 수동적이며, 남자는 동물적이고 여자는 문명적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인식은 남자의 사랑을 포르노로, 여자의 사랑을 로맨스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자는 한 남자와의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반면, 남자는 무수한 여자와의 사랑 없는 성관계를 꿈꾼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한발짝 더 나아가 남자의 성욕이 여자보다 더 높다는 가정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남자들의 성욕이 더 높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자들보다 성적으로 더 난잡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니얼 버그너는 이러한 인식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대니얼 버그너는 과학 실험을 통해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정숙하다는 것은 가부장제 질서의 남자들과,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대니얼 버그너는 여성의 욕망은 철저하게 동물적이라고 말합니다.

페니스 크기의 미세한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은 이 가설을 현대적 기술로 테스트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연구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동성애 혐오도를 파악하고 며칠 후에 그중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인 남자들을 불러서 동성애 관계를 다룬 영화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영화에 전혀 흥미가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그런 영화를 보면서 발기를 경험할 확률은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높았다. 비동성애혐오자는 34퍼센트만이 페니스가 커졌지만 동성애혐오자는 그 비율이 80퍼센트나 되었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p.14
대니얼 버그너는 혈류측정기를 이용해 사람들이 성적인 자극을 받을 때 어떤 변화를 보여주는지를 말합니다. 남자들은 자위하는 남자, 동성애, 이성애 장면에서 흥분했고, 그 결과는 남자들이 예측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의 실험 결과는 평범했지만, 여자들의 결과는 흥미로웠습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자위하는 여자, 동성애, 이성애 장면에서 흥분했지만, 여자들은 자신들이 흥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했지만, 여자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현상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러나 혈류측정기가 말해준 것은 여자들이 원하는 것도 남자들이 원하는 것과 같았다는 사실입니다.

20세기 말 까지만 해도 영장류 암컷의 행동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세라 블래퍼 허디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과 영장류 암컷이 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동적인 동물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 고 지적했다. 그녀는 영장류 암컷이 어떻게 그들 나름의 전략을 구사하는지, 그리고 영장류 암컷의 사회적 관계가 집단의 역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했다. -《센스 앤 넌센스》p.144
여자의 몸이 말해주는 사실은 여자들도 남자들만큼 에로스적 사랑, 포르노적인 사랑을 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성욕을 억제해야 합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남성의 성적 본능은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성취욕으로 인정되었지만, 여성의 성욕은 억압되어 마땅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공공장소에서, 심지어는 공중파 방송에서마저 야동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여자들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표현한 순간 밝히는 여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헤픈 여자가 되고, 질 나쁜 여자라는 꼬리표가 어김없이 따라붙게 됩니다. 사회적 시선과 질타는 여자로 하여금 자신의 성적 욕망을 감추고 부정하게 합니다. 때문에 여자들은 변형된 형태의 성적 욕구를 추구하게 되며, 비현실적인 로맨스소설, 야오이물, 남성에게 의존하는 소극적 형태의 성관계를 소비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갖고만 있을까요? 왜 여성의 성을 그 안에 담아두고만 있을까요? 어째서 우리는 여성의 성욕을 상대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걸까요? 상자가 열리고 여자들의 족쇄가 풀리면 우리 남자들은 자신이 바람난 부인의 남편 꼴이 될까봐 두려운 겁니다. 상자 안에 있는 그것이 두려운 거죠. - p.95
여자의 성관계엔 유대감과 서로에 대한 이해, 충실함이 중요하다는 신화를 계속적으로 주입시키며 성욕구를 억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술의 발달과 인식의 변화 속에서 여자의 당당한 성욕구를 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점점 더 많은 여자들을 포르노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으며, 낭만적 사랑과 사랑 없는 섹스, 정신적 관계와 육체적 관계라는 이분법 구도를 깨고 있습니다. 온라인 포르노 사이트 이용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 상품들은 꾸준히 출시되고 있습니다. 남성적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포르노의 영역에서도, 여성이 추구하는 욕구를 바탕으로 한 포르노들이 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연인 관계에 있어서 성욕의 대상이 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면, 사랑하는 이의 욕망을 재어보고 가늠하고 건너가야 할 거리가 없어지며, 서로를 향한 욕망도 사라지고, 욕망의 충만한 힘이 도달할 결승점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욕망을 충족하려면 친밀함이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은 여성들이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선 남성 의존적인 포지션에서 벗어나 주도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포르노는 남자의 문화였을 뿐 아니라, 남자한테만 허용되는 문화였지만, 이제는 여자들도 포르노라는 에로티시즘을 즐기며 자신을 관능적이고 주체적인 몸으로 인지해가고 있습니다. 단체 스피드 데이트를 통한 실험은 이런 구도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이트 진행을 남자들이 하며 남자들이 파트너의 자리를 바꿔가는 규칙에서는 여자들의 성적 욕구는 분출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룰을 바꿔 여자들이 자리를 옮기며 남자들을 선택하게 하자 여자들의 흥분도는 하늘로 치솟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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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의 재발견 - 당신에게 맞는 커플의 형태를 찾아라
필리프 브르노 지음, 이수련 옮김 / 에코리브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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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사랑하며 평생 행복하게 살아가겠냐는 주례의 질문에 언제나 그럴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답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날로 늘어가는 이혼율과 부부상담은 현행 결혼 제도에서 성공할 확률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인 저자 필리프 브르노는 결혼한 커플 세 명 중 한 명은 이혼하고, 한 명은 불만족 속에서 살아가고, 한 명만이 만족하고 있다고 말하며 현재의 결혼 제도를 재검토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조, 상호의존성, 일부일처제라는 사회의 미덕에 대한 도전입니다.

형태에서 진화가 요구하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인간은 다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일처제로 살아가는 동물들은 암수의 구별이 어려운 단형태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혼으로 살아가는 동물들은 암수의 구별이 확연합니다. 남녀 구분이 확연히 드러나는 인간의 경우 의심의 여지 없이 다혼하며 살아온 동물입니다. 그러나 일정 조건의 환경에서는 일부일처의 동물이 다혼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다혼의 동물이 일부일처를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 방식은 진화의 가능한 한 단계로서 종족과 주변 환경의 필연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남자와 여자가 점점 비슷해지는 유니섹스 경향은 인간이 다혼에서 일부일처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구조적으로 하렘과 다혼은 일부일처제보다 안정된 사회형태지만, 일부일처제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일부일처는 수컷에게는 생식의 기회와 영토의 지배가 좀더 제한되고, 암컷에게는 자신의 후손을 다양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지므로 불리해 보일 수 있지만, 자손을 보살피고 교육시키고 보호하는 관점에서는 강점을 가집니다. 일부일처는 가계 발달을 보장하고 부권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에 초기의 결혼문화는 단 하나의 파트너와의 결합이라는 엄격한 제도로 발현됩니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파트너에 대한 영원한 정절을 보여주는 회색거위에게서 이상적인 일부일처제를 발견하고 이를 기독교 문화에 적용합니다. 인간이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근친상간도 어떤 사회는 사촌간에는 허용하거나, 어떤 사회는 부모와의 결합만 금지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터부는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중요한 것은 전통이며, 사회적인 질서입니다.

영장류처럼 인류에게도 일부일처제가 그다지 널리 퍼져있는 것은 아니다. 1957년 머독이 시행한 관찰 작업은 그때 연구된 일부 종족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관찰된 종족의 경우 일부다처제가 약 74.3퍼센트, 일처다부제는 0.7퍼센트, 일부일처제는 25퍼센트였다. 이 비율은 현재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법적인 일부일처는 인류 사회의 3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 p.74

수천 년간 인간의 사회를 지배한 전통적인 일부일처제는 반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제도였습니다. 전통적인 결혼은 평등한 수단이 아니며 남자보다는 여자를 더 구속했습니다. 일부일처제 하에서 여성은 남성들 사이에서 물질적인 재화와 똑같은 취급을 당하며 사회구조의 교환가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고, 여성의 자유로운 성욕은 항상 위험하고 반사회적이기 때문에 통제되어야만 한다는 보편적인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문화에서 결혼한 커플에게 다른 이성과의 관계는 금지되었으며, 성행위는 오직 자식을 낳는 용도로만 허용되었습니다. 부부간의 금욕을 지향하는 결합은 사랑과 결혼을 분리시켰고, 결혼한 커플에게 더이상 사랑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탈은 자주 일어났으며, 주로 남성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서양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성적인 순결에 대한 도덕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극소수 개인에게서 시작되어 억압과 승화라는 공동 가치를 중심으로 지금도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이어지고 있으며, 여전히 여성의 복종을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랑의 다른 형태를 요구하는 궁정 연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결혼과 현대적인 결합 사이의 단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부일처를 단 하나의 파트너와의 결합이라고 엄격히 정의한다면, 다혼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서구는 물론 많은 나라들이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두 가지 형태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혼과 재혼을 통해 연속적으로, 다른 하나는 비밀스러운 이중생활을 통해 동시적으로 이뤄집니다. 이혼이 합법화되고 사회도덕이 자유로워지면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매춘의 감소입니다. 매춘은 엄격한 일부일처제 하에서 번성하기 때문입니다. 영구적인 일부일처제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것은 효과적인 피임법 덕분이었습니다. 피임 덕분에 성행위와 출산이 분리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결합 형태를 찾아나섭니다.

피임약 덕분에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성욕과 출산이 분리되어 여성과 가족의 삶이 변화하였다. 피임약의 출현으로 사회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는 피임을 하는 그 순간부터 남자들은 구속에서 벗어난 여자들의 성행위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커플이 욕망과 쾌락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커플의 발명에 이르게 될 부활을 예고한다. 전통적인 결혼에서는 결혼의 결과물에 불과하던 성행위가 커플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 p.132

그러나 아직도 영구적인 일부일처제 이데올로기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 이데올로기는 커플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가 요구하는 서로간의 공조와 의존, 정조, 두 사람이 하나를 이룬다는 환상을 심어주는데, 이타성을 지워버리고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려는 융화적 커플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을 부인하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가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배출하고자 합니다. 이런 가치관은 의존적인 사람들끼리 만난 커플의 경우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커플 중 한 사람이 자아가 뚜렷한 경우 서로 요구하는 것에서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저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해서 부부간의 합일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각자의 독창성이 커플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차이와 대립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한다고 말합니다. 합일이라는 기독교적 이상이 찬미하는 융화적 사랑에서 분열적 사랑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패러다임의 전환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전통적인 결혼이 현대 남녀의 사고체계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혼의 절차 역시 더 쉽게 변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실패한 결혼생활을 계속 끙끙 앓으며 살아가는 것보단 이혼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게 해주는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 과정이 이혼 과정보다 쉽다는 것은, 사회가 이혼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의존하고, 자신의 충동은 내재화하고 억압하게 만드는 신화들이 항상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비롯해 백마 탄 왕자님 이야기들은 초월적 사랑, 평생 행복하게 잘 살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신발을 구입해본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신발을 구입하는 것이 힘든 것처럼, 아무리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선택하더라도 한번에 평생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사람들에겐 연애의 자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20세기에 미국에서 있었던 공동체 실험은 그에 대한 영감을 말해줍니다. 가장 오래 지속된 공동체는 자유연애를 실행한 집단으로, 성행위가 그룹의 구성원에 의해 자율적으로 결정되는 곳이었습니다. 반면에 가장 짧게 지속된 공동체는 남편의 힘과 사유가 지배하는, 파기불가능하고 폐쇄적인 결혼체제를 가지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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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 서울대생 1100명을 심층조사한 교육 탐사 프로젝트
이혜정 지음 / 다산에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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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던 A씨는 지난해 5월 캐나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제자 릴리(가명)양이 수업 중에 질문을 자주 해 수업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반 어린이 전체가 "릴리 바보"라고 세 번 크게 외치게 했습니다. 교사 A씨는 이 외에도 릴리 양을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고, 릴리양 부모는 뒤늦게 딸로부터 이런 사실을 듣고 A씨를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릴리 양은 이후 병원에서 적응장애 진단을 받고 수개월 동안 심리 치료를 받았습니다.

최근에 알려진 이 흥미로운 뉴스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사 A씨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는데, 한국 교육에서 수업 중에 질문을 한다는 것은 '바보'나 할 짓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 대학 입시에서 다른 사람을 제치고 성공하기 위해선 학생들은 교사가 말하는 것을 그냥 듣고 외우는 기계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중, 고등학교까지 대학 입시를 겨냥한 정답 맞히기 교육, 문제풀이식 교육이 이루어지고, 이런 식의 교육에 가장 잘 적응한 학생들은 서울대에 모입니다.

저자는 그런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성공한 승리자들 가운데서도 학점 평균 4.0 이상을 놓치지 않는 최우등생들이 과연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서울대의 최우등생들은 장차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리더들이고, 그들은 최고의 교수진과 최고의 환경속에서 번득이는 창의력과 비판적 사고력으로 지성을 갈고 닦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A+를 받는 학생들의 비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고등학교때 하던 방식 그대로 공부하면 A+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교육과정에 나오지 않은 망상을 품거나, 자신의 생각을 외쳤던 학생들의 학점은 별볼일 없었습니다.

최우등생들에게 주변 학생들 중에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이 높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냐고 물으니 대부분 '있다'고 대답하면서 그런 친구들은 학점이 낮다고 증언했다.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보다 수용적 사고력이 높아야 학점이 높다는 이들의 고백은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이 높으면 학점이 낮아진다는 역설과 직결되었다. - p.40
박근혜 정부가 국정 핵심 과제로 '창조경제'를 내걸었던 것처럼,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 번득이는 창의력이 미래의 핵심 가치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독특한 아이디어로 창업해 새 산업을 일구기 위해, 기존의 산업에서 다른 나라와의 경쟁을 이기기 위해서, 학생들의 창의성을 육성하는 것이 한국 교육이 내세우고 있는 제1 목표입니다. 그러나 가장 앞에서 리더가 될 서울대 최우등생들은 A+를 받기 위해선 강의 시간에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교수의 말을 한 자도 놓치지 않고 받아쓰고, 강의가 끝난 후에 재정리하면서 외우고, 시험 볼 때 그대로 옮겨적는 수용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학생들은 교수가 강의중에 했던 농담과 기침까지도 노트에 기록합니다. 대학교 학점이 졸업 이후 취업 시장에서 가지는 가치를 감안한다면, 학생들이 비판적 사고를 버리고 수용적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기 위해선 공부를 즐기는 태도를 가져선 안 되며, 공부를 견디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특정 분야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분야만 공부했다간 인생 막장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교수 스타일을 분석해 성적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고, 일정 수준 이상 깊게 공부하지 않으며, 시간배분을 칼같이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수님의 의견에 의문을 가질 시간에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것, 자신의 견해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교수님의 의견대로 답변하는 것이 고득점의 비결입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라는 말이 있는데, 의외로 서울대 학생들은 예습은 하지 않고 복습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하버드 학생들은 예습만 하고 복습은 하지 않는다고 답하는데, 이런 차이는 예습을 해야만 하는 수업은 발표나 토론을 많이 하는 종류의 수업이고, 복습을 해야 하는 수업은 교수가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학생들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그냥 받아 적기만 하는 종류의 수업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한국은 항상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나라다. 한국에서 온 김 군은 학창 시절 우등생이었을 뿐 아니라 대학에서 전공한 신경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 인문학 분야에서 푀펠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과정을 시작한 그는 실로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두뇌 기능뿐 아니라 신경의 작동방식, 두뇌의 세세한 부분과 그 속에 담긴 비밀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복제 가능한 지식에 지나지 않았으며, 독창적인 지성 면에서는 처참한 낙오자였다. 비정상적인 조합이나 연관성에 대한 상상력이 전무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나 학문 방식을 고안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은 형편없었다. 엄청난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과학자가 실제로는 바보와 다름없는 게 아닌가! -《노력중독》p.33
저자는 만약 대한민국 교육이 창의성을 가진 인재를 진정한 인재로 생각하고 그들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서울대와 미시간대의 교차 연구를 통해 한국 교육은 그저 교육자의 지식을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그대로 붙여넣을 뿐인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방식은 과거 중세나 근대까지만 하더라도 어느정도 유효한 방식이겠지만, 오늘날 디지털의 발달로 인해 기존의 지식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검색이 가능해 외우는 것이 필요없어진 상황에선 불합리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학생들은 존재하지만, 그런 가치가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고, 그들이 중요한 학창시절의 시간을 낭비하는 '바보'로 취급되는 이상, 그들의 창의성이 사회에 쓰이기는 매우 힘들 것입니다.

결국 학생들이 창의적이지 않은 이유는 창의적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판적 창의적 학습자는 좋은 성적을 받도록 허용하지 않는 시스템을 운영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합니다. 이런 수용적 학습은 결코 동양의 문화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하는데, 조선시대만 해도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교육방법을 시행했을 뿐 아니라, 동양권 학생들도 창의적인 의견을 내는것을 허용하는 환경을 만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한다는것을 실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수가 어떻게 강의하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인식은 확연한 변화를 보여준 것입니다.

서울대가 두루두루 100점, 100점, 100점을 받는 사람을 길러야 하느냐, 아니면 50점, 50점, 200점을 받는 사람을 길러야 하는 질문에 교수들의 답은 예외 없이 동일했다. "역사의 리더는 한 분야에서 탁월성을 보이는 사람들이에요. 두루두루 다 100점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 50점을 받더라도 어느 한 분야에서만큼은 200점을 받는 사람이 진짜 인재인 거죠." 하지만 답은 그렇게 하는 교수들도 자신의 수업에서는 모든 과제에서 100점, 100점, 100점을 받는 학생에게 A+을 주고 있지 않은가. 200점짜리 능력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100점짜리 능력과 동일하게 취급되고 오히려 50점을 받은 과목 때문에 학점 평균이 낮아져 버려 결국 진짜 인재가 단지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취급받게 된다. - p.160
저자는 한국교육이 창의성을 허용하지 않는 여러 원인을 지목하고 있는데, 대학 교수의 경우 평가 기준에서 연구 실적은 중요하지만 강의 능력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강의에 의욕을 낼 수 없는 환경을, 또한 초, 중, 고등학교 수업에는 국가교육과정이 정해 놓은 진도라는 것 때문에 진도를 맞추기 위해 창의적인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저자는 연구 중심의 교수와 강의 중심의 교수를 동등하게 대접하고, 공교육에서 자율적인 재량으로 수업을 설계할 수 있도록 국가통합적인 진도 시스템을 버리고 교육청은 거시적인 교육 가이드라인만 제시할 것을 주장합니다. 진중권은 게임 중독에 대한 토론에서 우리나라는 부모가 교육에 관심이 없으며, 학교에 다 맡겨놓고 학원비 대주면 부모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학교는 교육을 입시교육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진짜 교육이 비어있다고 말합니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진짜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나간다면, 릴리 양은 더이상 상처받지 않고 수업 중에 질문을 자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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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 밥 위에 문화를 얹은 일본음식 이야기
박상현 지음 / 따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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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본음식을 즐겨 먹습니다. 한국의 거리에서 초밥집, 규동집, 일본식 선술집, 라멘집 등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됬습니다. 이런 경향은 현대화와 세계화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음식을 즐겨 먹은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었습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일본의 요리에 조선의 관리들이 열광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을 가깝지만 먼 나라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는데, 식문화에 있어서는 언제나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서 한식점에 들려 한국음식을 먹어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한국에서 제대로 된 일본 음식을 접하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장 확실한 대책은 일본에 가서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 어디에 갈 것인가? 저자 박상현은 일본의 수많은 지역 중에서도 규슈에 가라고 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나라에서 음식이 가장 맛있는 지역은 수도, 혹은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울과 경기도에 맛집이 가장 많은 것처럼, 일본의 음식문화를 선도하는 지역은 도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규슈인가? 규슈는 현대일본음식의 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지형적으로 중국, 한국, 서양의 음식문화가 들어오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음식이 탄생하고 음식이 발전하는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며 음식을 즐기는 것은 음식 그 이상의 것을 즐기는 방법입니다.

음식의 본질은 섞임과 나눔이다. 모든 음식은 퓨전 음식이며,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이다. 우리의 혀는 익숙함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방황하며 음식의 유혹을 좇는다. 음식은 복잡한 통관 절차나 입국 심사 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짜장면뎐》p.256

아프리카TV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마추어 인터넷 방송인들의 이른바 '먹방'에 대해 외국 언론이 '푸드 포르노'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거울뉴런계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보는 포르노 시청은 보는이로 하여금 섹스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섹스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뇌가 포르노에 반응하는 매커니즘은 포르노에 대한 지각이 아니라 포르노 행위 그 자체이며, 뇌의 관점에서는 포르노 시청이 곧 포르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먹방이 푸드 포르노가 된다면, 이 책에 나오는 음식 사진들 역시 푸드 포르노와 같은 매력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책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돈가스, 카레, 라멘, 교자, 스시, 우동 등의 음식에서부터 오코노미야키, 잔폰, 게이한, 온타마란돈 등 일본 마니아들만이 알법한 음식까지 넓은 범위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의 역사를 추적하며 일본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생각까지 읽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꽤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오카다 데쓰의《돈가스의 탄생》처럼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은 어렵지만, 광범위한 일본 음식을, 규슈 음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찌되었건, 규슈만 해도 그 크기가 경기도의 4배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음식에 대한 칭찬을 보다 보면, 일본에 가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음식에 대한 생각도 듭니다. 일본에 대한 경쟁의식 같은건 제쳐두고라도, 식문화에 공통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밥을 이렇게 해서 좋은데, 우리나라는 왜 하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하다보면 저자는 예리하게도 그러한 부분을 지적합니다. 음식을 홍보하는데 대한 방법론부터 전통시장에 대한 이야기, 일본 음식 프랜차이즈점에 대한 이야기 등 인류학적인 내용을 넘어 사회학적인 분야로까지 진출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음식에 대한 마음이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안타깝게도 일본의 밥은 확실히 우리보다 한 수 위에 있다. 아무리 허술한 대중식당이라도 밥을 미리 담아 두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주문과 동시에 밥솥에서 담아낸다. 그래서 된장국이나 반찬을 담는 그릇에는 뚜껑이 있는 경우가 흔하지만 밥그릇에는 절대로 뚜껑이 없다.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꾹꾹 눌러 담고 뚜껑을 덮어 보관하는 습관만 개선해도, 우리 대중음식점의 밥맛은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다. - p.323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영국요리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영국은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자가 요리하는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문화에 대한 지적을 들은 적 있습니다. 영국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도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기만 해도 부정탄다고 생각하던 문화가 존재했었고, 아직도 어느정도 남아 있습니다. 음식장사는 대충 손맛으로 승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한국 음식문화의 발전을 저해하고, 음식점 폐업률 95%에 달하는 기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동네 빵집의 맛이 한국 호텔 빵집보다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한국에서 유래됬다는 기록이 있는 두부가 오늘날 일본두부의 맛이 한국두부보다 월등히 낫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책의 조언이 하나의 교훈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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