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잭 린치 지음, 송정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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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리어 왕, 햄릿, 맥베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하나라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영문학의 정점에 서있다고 칭송받으며, 한 광신도는 오만하게도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꾸지 않을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셰익스피어 사후 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에 관한 논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예술가들이 원하는 것, 불멸의 이름을 얻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떴습니다.

저자 잭 린치는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수백 년 전 영국 땅에서 살아가던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현재 우리가 아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셰익스피어 작품에 관한 음모론은 아닙니다. 잭 린치는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셰익스피어로 변화했는지, 또는 발명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문화영웅, 셰익스피어는 오롯이 그의 예술성, 작품성을 통해 영웅이 되지 못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은 당시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더 엄청난 성공가도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성공한 엔터테이너에서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대문호로의 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사회는 가톨릭과 청교도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이 치열했습니다. 오늘날 기성세대가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천박한 취미라며 멸시하는 것처럼, 당시 청교도들은 연극을 천박하고 음란한 문화로 생각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죽은 뒤 청교도들은 충분한 정치적 권력을 획득했고, 그들이 싫어했던 연극을 법적으로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크롬웰이 죽은 뒤 청교도는 몰락했고, 찰스 2세가 돌아와 왕정이 복구되면서, 동시에 연극도 부활했습니다. 새로 등장한 극단들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희곡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청교도가 지배하는 수십 년 동안 희곡은 단 한 편도 쓰여지지 못했고, 결국 극단의 단장들은 옛 작품을 선택했습니다. 벤 존슨, 프랜시스 보몬트, 존 플레처 등 많은 작품이 있었지만, 가장 이득을 본건 셰익스피어였습니다.

'상업성이 곧 작품성'인 것이다. -《피카소 만들기》p.36


셰익스피어 시절의 연극은 넓고 트인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싼 가격에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왕정복고 이후의 연극문화는 화려한 건물에서 소수의 여유있는 사람들이 비싼 값에 즐기는 고급문화가 되었습니다. 이는 찰스 2세가 두 곳의 극단에서만 연극을 할 수 있는 특허권을 부여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하비 레벤슈타인이 지적한 것처럼, 한 문화가 인정받기 위해선 하층민을 배제하고 상류층이 문화를 독점함으로서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연극은 있는 자의 품격있는 문화가 되었고, 그 연극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역시 더 높은 예술성과 작품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당시 등장한 출판기술의 발전 역시 셰익스피어의 위상을 높여줬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책으로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읽고, 연극에 뛰어든 청년들은 그를 공부하고, 학자들은 그의 작품에 주석을 달면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모든 사회에서 모든 계층이 인정할만한 훌륭한 예술성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바로 그 완전하지 않은 이유로 인해서 생명력을 유지했고, 인기를 얻었습니다. 수백년 동안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셰익스피어가 쓴 것 그대로 공연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각색했고, 그의 작품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변화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3S 정책을 활용한 것처럼, 연극은 정치적 선전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표현했습니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분명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지만,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아니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상, 당시 사람들이 숭상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영국다움'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18세기 작가들에게 그것은 전혀 불합리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셰익스피어가 그것을 원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여기 엄청난 역설을 소개한다. 18세기 비평가들과 관객들에게 셰익스피어는 가장 개선되었을 때 가장 그다웠다는 사실을. - p.192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분명히 인도와 바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역사와 지리를 잘못 묘사하는가 하면, 운율은 불규칙했고, 줄거리는 아무렇게나 전개되었으며, 날짜는 잘못 썻고, 말장난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작가였다면 신춘문예 예선도 통과하지 못할만한 작품의 약점들은, 모두 그의 장점이 되었습니다. 그 불완성 덕분에 수백 년 동안 비평가들의 논쟁을 거치며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생전의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은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역시 원전 그대로 남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작품을 즐기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는 큰 플랫폼이며, 대중들은 작품의 2차 창작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들의 셰익스피어는, 그 셰익스피어는 아니지만, 분명히 셰익스피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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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11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흔히 `위인`으로 알려진 문화영웅들의 실제 삶을 살펴보면 인간적인 약점이 많아요. 그들의 능력이 많이 부각될수록 약점이 알려지지 않게 됩니다.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
김성곤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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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수십만 년 전 인간이 대지에 섰을 때와 현대의 인간은 생김새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며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불과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시대를 살았고, 여성의 참정권이 없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변화는 많은 진통을 동반하지만, 결국 우리는 변화합니다. 그 과정이 부정의 변증법이던, 패러다임의 전환이던 간에 우리는 언제나 경계를 넘어왔습니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현재 영역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고대, 중세, 근세를 넘어 근대가 도래했을 때, 세계는 근대적 합리성과 과학성이라는 새 가치를 받아들였고, 모더니즘이라는 영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가 전세계적인 전쟁의 광풍을 불러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되자 우리는 다시 변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근대적 가치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를 느끼며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이나 포스트콜리니얼리즘(탈식민주의) 등이 등장했고, 새로운 경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시민들 스스로 감시하는 규율권력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처벌 역시 공개되지 않고, 이데올로기는 재생산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야만성을 일정부분 제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맹점은 여전합니다. 여전히 무수한 인종학살이 자행되고, 난민들은 국가를 떠나고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립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처럼, 국가폭력, 자발적 복종, 합리성은 여전히 현대성의 핵심에 있으며, 그것은 언제든지 모더니즘 시대의 홀로코스트를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이런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또한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력입니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이 동력이 될 때도 있고, 사소해보였던 한 사건이 동력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인터넷의 등장 등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많이 있습니다. 문학 또한 그런 동력 중에 하나입니다. 로버트 단턴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기반에 반동적이었고, 반신앙적이었고, 음란했던 책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계몽사상가 테레즈》라는 음란소설은, 남녀관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귀족이건 평민이건, 남자건 여자건 모든 몸은 궁극적으로 평등하다고 말합니다.《2440년》은 2440년의 파리를 배경으로 먼 미래에 이뤄질 이상향을 공상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했습니다.《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는 왕은 보통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의 경계를 넘어섬으로서 문학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저자 김성곤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들입니다. 그 시대의 정신은 그 시대의 문학에 깃들며, 문학은 그 시대를 대변함과 동시에 새 시대의 문을 살짝 열어줍니다. 종이책과 전자책이라는 형태의 경계, 순수문학과 서브컬처,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의 경계는 문학에 있어서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가상현실과 컴퓨터게임에 대한 이야기, 인간과 기계를 다룬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문학은 시대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과감히 경계를 넘어서 열린 마음으로 타자를 포용하는 것이 현재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라고 말합니다. 다문화사회, 국제화사회, 인터넷사회는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으로 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 새로운 시대를 문학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학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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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자 아이들이 더 공부를 잘할까? - 알파걸 베타보이 이야기
유진규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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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여학생들은 모든 주요 과목에서 남학생보다 평균 성적이 높았습니다. 국어, 영어 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은 아마 못하지 않을까?" 하는 편견이 조금 남아있는 수학마저도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들만큼, 심지어 더 잘하는 모습을 보이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교육 수준이 사회 지도층과 오피니언 리더등을 형성하는데 강한 요소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래의 사회를 이끌 주역은 남자들보다 더 많은 여자들일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학업능력의 변화가 여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가져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능력을 인정받는 사회로 나아가는 시작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가치는 남자와 여자의 동등한 발전을 추구하고 있으며, 사회구조 또한 과거보다 여성적 가치라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미디어에서는 이제 여자가 할수 없는 일은 없다며 여군 등의 모습을 비춰주고, 여성 CEO, 여성 국회의원 등 남자와 다를 바 없는 권력을 가진 여성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더이상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지 않게 되면서 심리적인 유리천장은 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의 지배층이었던 남자들보단, 과거의 피지배층이었던 여자들입니다. 남자들은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지만, 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새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학생들의 성적 약진 현상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약해진 성역할 고정관념의 제거에 있습니다.

여자의 능력이 남자들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을 발휘하는 시점은 유치원에서도 발견됩니다. 야구배트는 누구에게 어울리는가, 인형은 누구에게 어울리는가 등의 성 역할 고정관념을 유치원 아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야구배트는 당연히 남자의 것, 인형은 당연히 여자의 것 등의 높은 고정관념을 보인 아이들은 대부분 남자였습니다. 반면 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에 비해 고정관념이 낮았습니다. 고정관념이 낮은 아이들은 리더십이 강하고 남을 잘 설득해 인기가 높았던 반면, 고정관념이 높은 아이들은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하고 남을 잘 설득하려 하지 않아 인기가 낮았습니다. 유치원생부터 조직을 리드하는 것은 여자 아이들이었습니다. 유치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에서 흥미로운 점은, 고정관념이 높은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유치원에 한 번도 안 온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고정관념이 낮은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아내와 함께 유치원에 오며 육아에 많이 개입한다는 점입니다. 가정적인 남편, 직장을 가진 아내의 조합은 좀 더 나은 미래를 아이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요즘 보면 여자들이 주당 80시간 넘게 일합니다. 그런데도 집안일과 양육에 남자가 참여하는 시간은 전혀 늘지 않았습니다. 양성성이란 성역할의 감옥에서 해방되자는 것인데 여자만 남자다워지는 것은 양성성 이론의 개념이 아닙니다. 남자도 변해야 합니다. - p.58


젠더의 변화에서 여학생들은 남자의 장점을 배우고 있는 반면, 남학생들은 여자의 장점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단 사회의 문제가 더 강합니다. 여자가 축구를 하고, 군대를 가고, 담배를 피우고, 데이트를 주도하는 등의 '남성적' 행위는 시대적 변화라고 인정하거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남자들이 인형을 가지고, 타인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데이트를 주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 남자 맞냐?" 와 같은 존재성의 부정으로까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양성성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남자들은 자신의 여성성을, 여자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어떤 가치가 남자다움, 여자다움으로 지칭되고 있지만, 이런 변화가 계속 지속될 경우 어떤 가치가 특정 성과 연결되는 일도 사라질 것입니다.

신체적인 부분에서 남자와 여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에, 그런 부분에서의 평등은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공간지각력, 손과 눈의 협응력은 남자가 더 뛰어나며, 감각기능, 언어능력은 여자가 더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런 부분의 차이는 분명히 인정하며,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적에서의 여풍이 말해주는 것은, 성역할 분업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는 사회, "나는 여자니까 이런 건 못한다"는 체념, "나는 여자니까 이 정도면 된다"는 제약, "나는 여자니까 더 대우 받아야 된다"는 특권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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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충성 - 충성과 배신의 딜레마
에릭 펠턴 지음, 윤영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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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충성을 봅니다. 전쟁터에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병사들, 이 회사의 제품은 뭘 내주더라도 사주는 고객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자신의 충절을 의심하지 말아달라며 문자메시지를 보낸 한 국회의원의 모습까지, 우리는 충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관계들을 만들어가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충성을 미덕으로 생각하며,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충은 효에 버금가는 최상급의 사회적 가치였습니다. 반대로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기피하며, 도덕적인 관점에서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계속 충성, 충성을 외칩니다. 군인들의 경례구호도 충성이며, 자기계발서들은 직장생활을 잘 하기 위해선 충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저자 에릭 펠턴은 이런 충성의 다양한 측면을 사유합니다. 저자는 충성을 관계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미덕이라 말합니다. 충성은 결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제공하는 복종이 아닙니다. 7개월만에 300km의 거리를 달려 주인 곁으로 찾아온 진돗개 백구의 이야기는 분명히 충성적이며,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미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충성은 이리 쉽지 않습니다. 백구는 자신을 길러줬던 주인에게만 충성하면 되지만, 우리는 수많은 가치 중에서 충성할 대상을 선택해야 합니다. 때문에 충성은 순수한 선이 결코 아니며, 손쉽게 충성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충성은 가장 나약한 미덕이면서, 가장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충성을 쉽게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에 충성할 것인지 끝없이 고뇌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갤럭시냐 아이폰이냐 하는 문제라면 고민할 가치도 없지만, 가족을 선택할 것이냐 국가를 선택할 것이냐라는 상황이 온다면 답을 내기 힘듭니다. 언제나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할 수도, 언제나 국가를 최우선적으로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충성할 대상이 가족이 된다면, 그것은 반사회적인 가족이기주의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충성할 대상이 국가가 된다면, 전체주의의 망령이 부활할 것입니다. 충성에 서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충성이 가져오는 철학적 의문은 예로부터 많은 철학작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도덕적 의무가 충돌할 때 진짜 의무는 하나뿐이라고 주장한 칸트나, 어떤 선택을 해도 올바르다는 사르트르 등 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이런 관계와 충성 속에서의 딜레마입니다.

세키젠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평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상이다. 평화는 인간 최고의 이상이다. 일본은 평화를 사랑한다. 우리는 평화와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국가를 잊는다면 진정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방식에 관계없이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해도 언제나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전쟁이다." -《전쟁과 선》p.125


결혼을 하는 것도 충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단순히 파트너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서약 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있어서 충성의 서열을 재배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성의 우선순위가 여전히 부모로 향한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관계의 혜택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기 때문에,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친구가 진짜 충성입니다. 기업들은 충성의 매력을 깨닫고 충성 마케팅을 펴곤 하지만, 정작 충성고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업으로부터 불리한 대우를 받습니다. 수십년간 SKT 인터넷을 쓰던 사람도 KT나 LG U+로 바꾸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SKT로부터 혜택을 다 받아내지 못합니다. 기업은 직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충성하는 직원들에게 잘해주지 않습니다. 승진하지 못해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충성스러운 직원과, 적절한 급여나 직급을 보상받지 못하면 경쟁회사로 옮길 직원중에 먼저 승진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충성의 관계를 가장 강조하는 곳은 역시 군대입니다. 전쟁을 해야하는 군인들에게 있어서 국가, 군대, 상관, 동료에 대한 의무가 충돌할 때, 병사들은 대부분 동료를 택합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서로에 대한 충성이 높다고 해서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 보고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둔한 미군 부대의 사기가 높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병사들이 계속해서 동료의 윤리적 위반행위를 묵인하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병사들은 전우와의 충성을 택한 대신, 민간인 학살, 고문 등 동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눈감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부그라이브 등의 사례를 보면서,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리더가 충성심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우에는 고민스러운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선,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대개 사악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옳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도덕적 불안을 충성의 힘으로 극복하려 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충성을 강요하는 사람일수록 거의 예외 없이, 충성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몰염치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영국의 군사이론가이자 역사가인 바실 리델 하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상사에게는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하에게 충성을 강요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 p.226


우리는 동료가 자신을 배신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충성의 관계에 있어서 공적인 것보단 사적인 것에 충성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향은 내부고발자에 대한 안좋은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면 해군의 군납비리를 고발한 내부고발자 김영수 소령은 해군과 동료를 배신한 사람으로 낙인찍혔고, 당시 정옥근 해군 참모총장은 국정감사에서 그를 맹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뒷날 정옥근 해군 참모총장은 해군복지기금을 횡령했고, 정보함, 고속함, 호위함 등 해군에서 나오는 모든 군사장비와 관련된 비리에 관여한 인간쓰레기인걸로 드러났습니다. 김영수 소령은 동료와 자신이 소속된 해군에 충성하는 대신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충성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고뇌와 시련을 가져왔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우리는 행사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국가에 대해 공개적인 충성맹세를 하는 이런 행위는 오히려 진정한 충성을 훼손한다고 말합니다. 충성은 믿음을 소중히 여기는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어야지 단순히 의무의 규칙이나 억지로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정말로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맹세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국가나 조직에 충성하기 위해 하는 여러 행동들이, 정말로 진정한 충성과 연결되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충성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충성은 닫힌 사회에서 치명적인 악덕으로 부패하기도 하지만, 그 부패한 것을 정화시키고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동력을 제공하는것 역시 충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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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위선 - 스탠퍼드 법대 교수가 말하는
데버러 L. 로드 지음, 윤재원 옮김 / 알마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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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관은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교육하고 지식의 저변을 넓히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카디널 뉴먼은 고등교육의 역할은 지식인을 양성하고 이성에 대한 역량을 확대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는 실제 얼마만큼의 성과를 냈는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목적인 것입니다. 대학의 연구와 교육은 모든 분야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 사회의 복지와 진보에 필수적인 기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나오고 있고, 그로 인해 대학간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학교수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대학의 문제입니다.

대학이 지식보다는 지위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순위문화에서 비롯됩니다. US뉴스에서 발표하는 대학순위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그 영향력에 비해 순위의 기준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교육의 질을 평가할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는 탓에 대학의 명성은 허점투성이인 가짜 정보에 의해 좌우됩니다. US뉴스와 기타 관련지에서 매기는 순위에 사용되는 졸업생 비율이나 전문직 및 상위 학위과정 진입률, 자격증 시험 통과 비율 등의 정보는 교육의 질을 측정하는 좋은 수단이 아닙니다. 이런 기준들은 교육 경험에서 창출된 부가가치가 아니라 입학생들의 능력과 수준을 더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켈리포니아대학의 고등교육연구기관에서 실시한 연구도 이 같은 현실을 잘 드러내는데, 이 연구에서는 졸업생 비율에서 나타나는 변수의 3분의 2는 입학생의 특성에 따른 차이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이려고 노력하면서도 결국 명성을 팔아 연명한다. - p.20

하지만 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데 사실적 근거가 아무리 빈약하다 해도 발표를 하는데는 상관이 없습니다. 최고 행정가들의 주관에 따라 평가되는 순위는 대학의 명성에 상당히 의존한 채 순위를 매기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각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대학의 수준을 인식하기 때문에 타 교육기관에 대한 충분하고도 체계적인 정보가 반영될 수 없습니다. 설문 대상자들은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명성이나 예전의 순위 기록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끝없이 울리며 반복되는 역학구조를 가진 일명 후광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과거의 인지도에 현혹된 평가자들은 해당 기관의 현 실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높은 점수를 매기게 됩니다. MIT에는 법대가 없고, 프린스턴 대학에는 전문대학 기관이 없는데도, 순위표에서는 좋은 실적을 올리는 것으로 나온 적도 있는가 하면, 기존 명문대학들의 텃세가 순위에 명확히 영향을 끼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US 뉴스&월드 리포트가 해마다 발표해온 영향력 있는 미국대학 순위선정 역사상 가장 논란거리가 된 1등은 1999년의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이었다. 평자들은 칼텍이 전미 최고 대학으로 뽑히자 마치 스티븐 킹이 노벨문학상이라도 탄 것처럼 조소를 보냈다.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공과대학이 어떻게 하버드대나 예일대, 프린스턴대, 스탠퍼드대, 게다가 그보다 더 크고 더 유명한 동부의 맞수인 MIT를 능가할 수 있는가' 라는 비판에 직면하자 결국 이 잡지는 굴복했다. 이후 선정 기준을 바꿔 칼텍이 독주하던 학생1인당 비용 지출 항목의 배점을 줄여버린 것이다. 이 잡지가 선정 기준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칼텍은 그 후에도 몇 년간 정상을 지켰을 것이다. 칼텍은 바뀐 기준에 따라 10대 대학 명단의 아래쪽으로 도로 미끄러졌고, 아이비리그와 기타 전통 명문들은 한동안 뒤집어써야 했을 망신으로부터 구제됐다. -《왜 학벌은 세습되는가?》p.335 

대학이 순위화되면서 대학의 자본화, 상업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상위대학은 기부금과 지원금이 몰리고 상위대학의 교수들은 많은 돈과 시간을 얻게 됩니다. 그에 반해 일류대학의 교수가 아닌 경우 상대적으로 더 낮은 수입과 높은 업무 부담을 가지게 되었고 일류대학의 교수가 되기 위한 경쟁적 구도가 마련됩니다. 교수는 경력을 위해 점점 더 많은 출판물을 내고 있지만, 이런 출판물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인지도를 향한 욕구는 학문적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질 수 있으나, 긍정적이지 못한 부산물도 함께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예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겉멋만 부린 문체, 난해한 주제 그리고 과도한 인용과 참조이며, 이러한 출판물이 제시하는 현대 학문이 내놓는 글은 난해하고, 사소한 주제를 다루며, 몇몇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읽지도, 읽히지도 않습니다. 또한 교수가 자신의 이해를 좇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비전임 교원이나 대학원생 등 훈련이 부족하고 월급도 적은 고단한 하급 인력들의 손에 학생들을 내맡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교수가 학부 수업을 맡는다 하더라도 해당 과목에 필요한 전반적인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 주제에 따른 특화된 내용만 가르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명성의 추구는 기관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학생들은 종종 교육의 내용보다는 학점에 더 신경을 쓰며 그에 따라 학교, 전공, 교과과정을 선택한다. 헨리 워드 비처는 "만일 누군가 대학에 진학했다면, 그는 타이틀을 딴 것이다. 이는 자부심과 허영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 타이틀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된다." 고 했다. - p.25 

대학의 운영이 점점 자본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대학 내에서의 빈부격차입니다. 노조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사무직 및 관리직 직원의 월급은 최저 생활비를 밑도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대학의 수치스러운 단면입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같은 사회 비평가들은 만일 대학이 인간의 가치와 사회 평등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먼저 기관 내부의 노사관계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본화는 대학의 운영자금과 연구 기금의 출처가 민간 기업 쪽으로 이동하는 추세이기 때문인데, 그들은 상업적으로 즉각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원합니다. 정부의 지원은 줄고 연구비용은 늘어가는 오늘날에는 교수들로 하여금 후원 기업이 보조금을 지원하는 연구가 어떤 종류인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필연적으로 학계와 기업간의 커넥션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뉴잉글랜드 의학 학술지는 지난 3년간 시행된 약물 검토의 절반 가까이가 해당 약품을 생산하는 업체와 금전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연구진들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인정했고, 항암제 관련 학술지 기고문을 검토한 사례에서, 약물의 비용 효율성에 관해 부정적인 결론을 도출한 기사 중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경우에는 5퍼센트에 그친 반면, 비영리기관에서 지원금을 받은 경우에는 38퍼센트에 달하는 차이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나는 베릴륨을 연구하면서 대니얼 로스 박사의 논문을 처음으로 보게 됐다. 그것은 베릴륨 업계를 위한 로스 박사와 폴 레비 박사의 재분석 논문이었는데, 예상할 수 있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개변수 일부를 조작함으로써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높은 수준의 폐암 위험률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레비박사는 R.J.레이놀즈 담배회사에 고용되어 폐암과 작업장에서의 간접흡연 사이의 연관성을 밝힌 연구를 재분석하는 일을 맡았고, 로스박사는 필립 모리스 사의 소송을 도울 전문가 중 한명으로 고용됬다. -《청부과학》p.90 

이러한 대학의 지위의 추구, 교수들의 명예의 추구, 기업과 대학간의 결탁은 학문에서의 우선순위가 왜곡되고, 좋은 수업을 제공하려는 의지를 저해하며, 대학교수로 하여금 공적 지식인의 역할을 훼손합니다. 과거 조지 오웰처럼 대학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는데도 문학이나 정치, 경제 비판 서적을 출간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적 지식인 시장은 대학교수들이 장악하고 있으나, 학문적 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대학교수는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오히려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대학이라는 고등교육 속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대학의 임무는 무엇이며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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