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 소리 없이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붉은 재앙
조나단 월드먼 지음, 박병철 옮김 / 반니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아직 철기시대에 살고 있다. 알루미늄, 플라스틱, 티타늄 등 다양한 소재들이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소재는 여전히 철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막대한 수요량을 철 외엔 만족시킬 수 없다. 현대 문명은 철의 기둥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철은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 역시 가지고 있다. 바로, ‘녹’ 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미국 뉴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하나의 클리셰로 사용된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거대한 금속 조형물의 파괴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만한 위기를 의미한다. 그런데 영화가 아닌, 실제로 자유의 여신상이 파괴될 뻔한 적이 있다. 범인은 거대한 해일도, 지진이나 태풍도 아닌 ‘녹’ 이었다. 그 당시엔 부식은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만약 자유의 여신상이 녹으로 인해 파괴되었다면, 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 자유의 여신상의 부식은 미국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철의 역사에 있어서 부식방지의 역사는 매우 짧지만, 혁신적인 변화는 모두 부식방지에서 비롯되었다. 철에서 강으로 변화했고, 아연을 도금했으며, 니켈과 크롬을 이용해 스테인리스스틸이 탄생했다. 페인트의 성능은 더욱 좋아졌고, 코팅기술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느냐고 자문할 정도가 되었다. 현대과학이 제공하는 부식기술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녹슨 철을 상상하기 힘들게 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아직 철의 부식을 정복하지 못했다. 스테인리스는 부식이 혁신적으로 느리게 생길 뿐이다. 음료가 든 캔을 먹을 때 걱정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여전히 극소수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다.


현대문명을 유지시켜주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지만, 부식에 관해 방만한 운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나단 월드먼은 묻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유지 보수보다 교체하는 쪽을 선호한다. 부식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만한 교육 시스템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것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철을 많이 사용하는 나라다. 1인당 철강 사용량은 1,109.5kg로, 3위 일본의 497.3kg에 비교해 압도적 1위를 자랑한다. 과연 그 위상만큼 부식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부식방지관리와 비용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녹과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하면서, 환경과 문명에 이로운 쪽으로 개선해 나간다면 우리는 매끄럽게 빛나는 철기시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의 언어 - 암호의 역사와 과학
사이먼 싱 지음, 이현경 옮김 / 인사이트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누구나 비밀이 있으며,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상자에 넣어 깊숙한 곳에 숨기거나, 책 사이에 지폐를 끼우고, 직박구리 폴더에 비밀번호를 걸어둡니다. 반대로 비밀을 알아내고 싶은 사람들도 있으며, 비밀을 풀기 위해 비밀을 건 사람만큼 노력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정부와 정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성자와 해독자의 대결은 역사의 방향을 결정했고,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주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암호의 역사에서 탄생한 컴퓨터가 제공하는 편의성 없이는 현대사회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전작《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서 현대수학이 이뤄낸 위대한 성과를 저술한 사이먼 싱은,《비밀의 언어》를 통해 암호의 과학이 만들어낸 매력적인 세계를 소개합니다.《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수학자의 모험담, 마치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내용이라면,《비밀의 언어》는 숨겨진 보물을 찾는 트레져 헌터의 이야기 같습니다. 비밀의 해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막대한 보상을 안겨줍니다. 암호의 진보가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 위해, 또는 빈곤과 차별을 이겨내기 위해 이루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주요한 발전은 전쟁을 위해서였습니다.

단순한 규칙으로 변환되는 단일 치환 암호는 중학생이라도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해독하는 것은 상당한 실력과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단일 치환 암호는 상당한 보안을 제공해주었지만, 자주 출현하는 알파벳들, 즉 a,t,e 같은 단어의 빈도수를 계산해 해독하는 방법이 고안되면서 보안성을 잃게 됩니다. 이후 등장한 비즈네르 암호문과 같은 다중 치환 암호는 단일 치환 암호의 약점을 극복하며 등장했지만, 변화가 반복된다는 특징이 공략당하며 역사속으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새롭게 고안된 일회용 난수표 암호문 방식은 현재도 깨뜨릴 수 없는 암호체계이지만, 무선통신 시스템에 적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용성이 떨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세계대전은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암호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황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꿔놓았던 치머만의 전보 해독,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독일의 암호기계 에니그마의 등장, 에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한 폴란드와 영국의 분투, 미국에 의해 해독당한 일본의 퍼플 시스템, 일본에 의해 공략당하지 않았던 미국의 암호체계 등은 1차 세계대전이 화학의 전쟁이였다면, 2차 세계대전은 물리학의 전쟁이기도 하면서 암호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암호의 전쟁은 고도의 시스템이 만든 지성의 대결이면서, 기존의 틀을 깨는 회의주의자들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원주민 나바호 통신병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에 전쟁이 발생했을 때 제주도 방언을 사용해 보안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실제로 제주도 방언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에게도 암호나 다름없습니다.

복잡한 암호만이 안전하게 메시지를 전송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된 암호 중 가장 안전했던 암호는 제일 단순한 형태의 암호였다. - p.266


독일의 로렌츠 암호문을 공략하기 위해 영국이 만든 기계 콜로서스는 현대 컴퓨터의 기원입니다. 전자통신의 시대가 열리면서 암호에 대한 개념도 변화해야 했고, 루시퍼 시스템에서 DES 체제가 출범합니다. 실시간으로 움직여야 하는 네트워크 시대는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키, 열쇠 분배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밀을 교환하기 전에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딜레마를 해결하는것이 현대 암호의 시작이었고, 만나지 않고도 공개 암호 열쇠 방식을 통해 언제든지 열쇠를 교환하는 방식을 고안했습니다. 비대칭 암호 체계가 고안되면서 공개된 열쇠로 암호를 풀 수 있는 방식을 완성시켰고, 공개 열쇠 암호 RSA방식은 높은 보안성을 제공함으로서 현대 사회의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현대의 암호는 볼 수 있지만, 풀 수 없는 방식입니다. 7 이나 13과 같은 소수로 된 키 두개를 곱한 N값은 공개되지만, N값을 풀려면 인수분해를 해야 하며, N값이 엄청나게 크다면 소수를 유추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슈퍼 컴퓨터의 연산력을 활용해도 수백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해독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PGP를 통해 정부나 기업, 군대 뿐만 아니라 개인도 엄청난 보안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소수를 이용한 체계는 해독되지 않았으며, 보안 사고는 트로이 목마나 바이러스 등 보안 외적인 부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해독자들이 도전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P-NP 문제 같은 소수에 관한 수학이론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줄지도 모르고, 새롭게 등장하는 양자 컴퓨터는 기존의 컴퓨터와는 비교도 안되는 속도로 엄청나게 큰 N값을 인수분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독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전무결한 암호 체계가 고안되었습니다. 현대의 암호를 대체할 것으로 평가되는 양자 암호는, 양자물리학을 기반으로 합니다. 양자 암호를 무찌르기 위해선, 양자물리학을 무찔러야 합니다. 사이먼 싱은 오랜 암호의 역사, 작성자와 해독자의 길고 긴 결투는 결국 작성자의 승리로 끝날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암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스노든이 폭로한 NSA의 이야기처럼 암호를 어떻게, 누가 사용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이야기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또한 이집트 상형문자나 선형문자B의 사례처럼, 아직도 인류가 도전할 수 있는 암호 문제들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12-24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5-12-2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선님,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좋은하루되세요^^
 
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의 기원을 밝힌다는 웅대한 꿈을 가진 과학자들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만 하더라도 학명 플리오바테스 카탈로니에, 별명 라이아로 명명된 1160만 년 전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화석을 통해 유인원의 시조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긴팔원숭이에 좀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발견이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가 되지는 않지만, 과학자들은 언제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화론은 명실상부하게 현대의 패러다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 과학, 지적 설계, 성경직역주의 등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특히 과학적 근거와 무관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창조론과 달리, 성경에 쓰인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며, 이것이 창조주의 존재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은, 진화와 관련된 과학전쟁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떤 면에선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진화론과 창조과학의 대립 덕분인지 많은 과학자들이 대중을 위한 저술을 하고 있고, 그만큼 좋은 진화론 책들을 만날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그중엔 숙달된 독자들을 위한 무거운 책도 있을 수 있으며, 부담없고 가벼운 책들도 있습니다.《인류의 기원》은 후자의 책입니다.

진화론에 관해서 많은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현재 우리의 행동들이 어떤 기원을 가지는지, 신체가 어떤 방식을 통해 구성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과학자들은 사회생물학, 인간행동생태학, 고인류학, 진화심리학, 문화진화론, 유전자-문화 공진화론 등을 통해 인류가 어떻게 진화하면서 지금 하는 행동들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농업을 시작하면서 왜 영양적으로 더 안좋은 결과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할 수 있었는지, 인간은 언제부터 우유를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현재 어른이 되면 왜 마실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은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원동력은 더 커진 두뇌가 아니라 두 다리였다던지와 같은 이야기들은 진화론과 고생물학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흥미로운 지식들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진화되어왔다는 이야기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진화론의 호소력있는 메시지들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기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화론은 나치와 우생학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필트다운인의 이야기처럼 잘못된 애국심을 발휘해 과학의 눈이 멀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진화론은 인간이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은 협력과 이타심을 가지는 것이 진화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사회학자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진화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원적이지만 엄격하고, 다산적이지만 자기비판적인 과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센스 앤 넌센스》p.414

저자가 말해주는 다양한 고인류학적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협동, 양육투자, 여성의 성적 행동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문화, 의사결정, 언어, 임신, 낙인찍기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습니다. 과학은 유전자관점, 혈연선택, 진화적 게임이론 등 인간행동을 탐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해줍니다. 이런 방법론은 근엄한 장소에서 학문적 토론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와의 가벼운 술자리에서 이야기거리로 나올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익힌 고기를 너무 좋아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리처드 랭엄의 말을 빌어 화식이 진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에서 진화한 우리들은, 과거의 우리를 알기 위해 끝임없이 노력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은 반역이다 - 물리학의 거장, 프리먼 다이슨이 제시하는 과학의 길
프리먼 다이슨 지음, 김학영 옮김 / 반니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담배가 해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담배의 유해물질이 사람의 몸에 미치는 효과가 알려지기 전은 물론이고, 알려지고 난 뒤에도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은 담배가 괜찮다고 믿었습니다. 담배가 해롭다고 말하는 과학자도 있었지만, 담배가 괜찮다고 말해주는 과학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담배회사에 고용되어 담배가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한 과학자들을 훗날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그들은 편향된 데이터와 거짓 추론 그리고 논리적인 잔재주가 뒤범벅된 그 무엇이다. 숨겨진 데이터, 특정 결과를 염두에 둔 추론, 공격적인 독단주의, 그러므로 다시 말해 완전한 사기인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그것은 간디의 말마따나 인간성 없는 과학이었습니다.

저자 프리먼 다이슨은 슈뢰딩거 다이슨 방정식으로 알려진 원로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과학자라면 반역자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학의 역사는 반체제의 역사였으며, 과학자의 반역 기질과 지적 역량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토머스 골드, 조지프 로트블랫, 아인슈타인, 노버트 위너, 리처드 파인만 등 수많은 과학자들은 모두 훌륭한 반역자들이었습니다. 과학은 반증적이어야 한다고 칼 포퍼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연구분야에서 반증적이었습니다. 과거의 유산들, 기존의 체제에 대항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반역자의 몫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반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적 교만과 문화적 금기를 경멸했고,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안된다고 외쳤습니다.

오늘날 상대성 이론 하면 누구나 말하는 이름은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적 업적이 그러하듯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개념을 내놓은 과학자는 또 있기 마련입니다. 아인슈타인 말고도 상대성이론에 접근한 과학자는 바로 푸앵카레였습니다. 당시 인지도만 놓고 보자면 푸앵카레가 더 유명했고, 상대성이론의 창시자로 불리게 될 사람도 푸앵카레가 더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푸앵카레는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반면, 아인슈타인은 반역적이고 혁명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푸앵카레는 가능하면 옛 이론들을 고수하려 했고, 에테르 개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낡은 기준을 모두 걷어버리고, 더 단순하면서 더 우아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유럽인에게 보내는 선언'이라는, 평화를 위한 반론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유명한 학자는 단 한 사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뿐이었다. 그는 명성 높은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인스티튜트에 막 부임했던 차였다. 자기 생각을 그렇게 공적으로 유포한다면 탄압하겠다는 협박이 없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냉정했다. "평화주의는 나를 지배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어떤 식의 이론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증오와 잔혹성에 반대하는 마음 깊은 곳의 저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단순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투쟁적인 평화주의자였다. "평화와 같이 자신이 믿는 어떤 것을 위해 죽는 일이 전쟁과 같이 자신이 믿지 않는 어떤 것을 위해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은가? 대중은 선전에 중독되지 않는 한 결코 전쟁을 열망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맨해튼 프로젝트는 과학사적 관점에서 큰 발전임과 동시에 과학자들이 군사 권력이나 기업 권력을 위해 일할 경우 과학과 기술이 야기할 수 있는 재앙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국가에서 핵무기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설득하고, 첫 삽을 뜬 사람들은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과학자였습니다. 전쟁과 개인적 성취 속에서 과학자들은 반역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핵분열이 발견되었을 때 물리학자들은 경쟁자들보다 나은 성취를 인정받기 위해 설전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과학적 성취를 공공의 위험보다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반면 DNA 재조합기술이 발견되었을 때 생물학자들은 위험한 신기술의 이용을 제한하고 규제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들은 과학적 이론 그 이상의 것을 보았습니다.

세탁기가 가정주부의 노동력을 크게 해방시켜준 것처럼, 윤리적 문제를 거의 일으키지 않으면서 개인 규모로 작동하는 기술은 개개인의 삶을 윤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점점 오늘날의 과학은 일반인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순수과학은 일상과 거리가 아주 먼 심원한 문제들에만 집중하기 시작했고, 응용과학은 이윤을 내고 팔 수 있는 상품연구에만 집중합니다.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자들이 신상품에 더 많은 돈을 낼 수 있으므로, 시장주도형 응용과학은 점점 부자들을 위한 기술개발에 전념하며, 결과적으로 부의 분배에 불평등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과학에 필요한 것은 빈자들을 위한 새로운 필수품이며, 시장주도형 자본주의에 대한 반역자들입니다. 과학이 계속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부자들에게만 혜택을 몰아주며 발전한다면,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해결책들에 의지할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고합니다.

연구 성과는 또한 현재의 연구 환경과 관련이 있다. 연구에 열성적인 동료가 있으면 도움이 되듯, 설비와 기자재 역시 성과의 차이를 만든다. 크게 성공한 과학자들은 막강한 지원을 약속받고 채용될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든든하게 지원을 받으며 연구하기 때문에 경력이 쌓일수록 성과 차이는 점점 더 커진다. -《경제학은 어떻게 과학을 움직이는가》p.71


과학자는 연구를 해야 하며, 연구를 위해선 기업이나 정부의 자본이 필요합니다. 기업과 정부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연구를 위해 자본을 지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자본에 반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반역의 길을 가지 못하고 기업논리를 충실히 외치는 과학자가 되거나,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침묵하는 과학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역자는 존재해왔으며, 현재도 미래도 반역자들은 필요합니다. 언제나 훗날 긍정적으로 평가될 과학적 업적은 윤리적 진보가 함께해 왔습니다. 시장논리에 반역하며 돈없는 아이들을 위한 신약을 개발하는 것, 모두가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있을 때 평화를 외치는 것, 모두에게 똑같은 교육이 강요될 때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라고 말하는 것 모두 반역자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런 반역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이버 섹스
권수미 지음 / 과학기술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도쿄게임쇼 2014 에서 흥미로운 게임이 하나 등장했습니다. 소니VR인 프로젝트 모피어스용 가상현실 소프트웨어인『섬머 레슨』입니다. 이 게임을 통해 유저들은 가상의 방 안에 있는 소녀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윈도우10을 발표하면서 가상현실 기기인 홀로렌즈와 홀로그램을 통한 마인크래프트를 발표했습니다. 다양한 가상현실 기술의 발전을 보면 영화『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여러 장면들이 현실에 등장할 날도 머지 않은 듯 합니다. 가상현실 기술의 미래에서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 가장 열광하는 것, 그리고 가장 잘 팔릴 것은 아마도 정해져 있습니다. 바로 음란한 것, 포르노입니다.

점잔빼는 사람들은 남녀가 헐벗은 것, 야한 것들을 싫어하겠지만, 에로틱한 것은 언제나 테크놀로지 혁신의 추진력이었고, 새로운 기술을 먼저 도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카메라, 캠코더, 심지어는 전화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물건들은 모두 성적 행동에 활용되었습니다. 기술 뿐만 아니라 시대, 민족, 계급 등 시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성입니다. 인터넷의 시대에도 포르노는 그 특징을 가장 잘 활용했고, 최근 등장하고 있는 가상현실 기술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마인크래프트를 즐길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 실감나는 테니스를 칠 수도 있고, 의학에 활용하는 등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사람들은 가상현실을 이용해 섹스를 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일본의 일루전 사는 삼성 기어 VR를 기반으로 성인컨텐츠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출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다른 도덕률처럼 그 시대나 사회 풍습에 근거하여 변하긴 하지만 어느 한 시대에서도 이것은 옳고 저것은 나쁜 성행위이다라고 규정해 놓은 적은 없다. 그것은 시대 성원들 간에 암묵적으로 정하는 것일 뿐이며 지나간 시대에서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논할 뿐이다. - p.15

현대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가상의 성, 사이버 섹스를 즐기고 있습니다. 텍스트로 구성된 야한 소설, 그림으로 구성된 야한 애니메이션, PC와 콘솔로 즐길 수 있는 야한 게임, 실제 사람이 연기하는 성인 비디오 등은 모두 가상의 성입니다. 그러나 이 가상의 성들은 가짜이면서 동시에 진짜입니다. 뇌가 포르노에 반응하는 매커니즘은 포르노에 대한 지각이 아니라 포르노 행위 그 자체이며, 뇌의 관점에서는 포르노 시청이 곧 포르노 행위가 됩니다. 때문에 포르노는 가짜 섹스이면서 동시에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실재입니다. 야설보단 야애니가, 야애니보단 야겜이, 야겜보단 성인비디오가 더 실재적입니다. 김종갑은 이런 포르노를 과잉섹스라고 부르는데, 진짜 섹스가 커피라면, 가짜 섹스인 포르노는 TOP인 것입니다. 포르노는 실재보다 더한 실재입니다.

21세기 데카르트적 향유 주체의 세계에는 더 이상 포르노그래피는 없으며, 외설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취향과 선호, 즐김, 향유일 뿐입니다. 포르노 단계를 넘어선 판타지의 세계, 그것이 데카르트적 향유 주체에 대응하는 현대의 세계입니다. 명백히 우리는 사이버 섹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상현실의 시대를 눈앞에 둔 지금, 야설, 야애니, 야겜, 성인비디오보다 더 사이버적이면서 더 실재적인 사이버 섹스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이버 섹스의 발달은, 사랑에 대한 의미를, 터부에 대한 의미를 바꿀 수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이 없는 사랑, 고통없이 기쁨만을 얻을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기존의 연애관 등의 가치는 무너질 것입니다. 근친상간, 페도필리아 등 성적 금기 역시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매개로 한 섹스가 물리적인 섹스에 종말을 고하는 수단이 되거나 그것을 대치하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컴퓨터는 육체와 자의식을 분리한 새로운 형태의 성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미디어 등을 통한 미남, 미녀들의 성적 어필도 매력이 떨어질 수 있고, 성형수술을 원하는 사람들도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미남, 미녀를 파트너로 꿈꾸는 시대에서 컴퓨터를 파트너로 꿈꾸는 시대가 온다면 말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대상과의 성적 체험은, 극한의 자유이자 게임적 리얼리즘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가상현실 사이버섹스의 시대가 온다면 어떤 가치가 사라질 지, 어떻게 사회가 변화할 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매우 중대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