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읽는 고시조
임형선 지음 / 채륜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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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선의 [이야기로 읽는 고시조]는 '~습니다.' 혹은 '~다.'로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저자의 의도를 살려 좋게 평가하자면 그야말로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고, 만약 저자보다 나이가 더 많은 독자라면 '반말'투가 약간 거슬릴지도 모른다. 그럴 때 마다 저자의 의도 - 시조가 어렵고 고리타분하다는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저는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4p-를 떠올리자. 책을 다 읽고나니 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고시조를 알리고 싶었는지 납득이 가기 때문에 나 또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 좋은 고시조를 그동안 어렵다고 피해왔던 것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소개하기 전  전체적인 작품 및 시대상황을 이야기처럼 들려준 뒤 그에 꼭 맞는 작품 혹은 일부를 원문으로 소개한 뒤, 풀이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책의 구성은 크게 사랑, 정치 끝으로 자연, 풍경 그리고 풍류로 나뉜다. 두루두루 여러 편을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테지만 이번에는 마음에 오래 남겨질 작품들을 각 챕터 별로 몇 편 골라 소개하기로 한다.


사랑이 엇더터니 두렷더냐 넙엿더냐

기더냐 쟈르더냐 발을러냐 자힐러냐

지멸이 긴 줄은 모로되 애 그츨만 하더라  125쪽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풀이를 읽지 않으면 확 와닿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해석은 책에 나와있으니 생략하고 저 짧은 내용을 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랑이 어떻더냐 하고 물으면서 그 사랑이 사람의 속을 얼마나 애태우는지는 알만하다 라는 내용이다. 저자의 말처럼 휴대폰과 다양한 SNS가 존재하는 지금도 이런저런 상황에 의해 연락이 쉽지 않은 연인들이 많은 데 전화조차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그 사랑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싶다. '애 그츨만 하더라'는 애(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라는 표현이니 사랑때문에 아파보고, 가슴태웠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시조를 쉬이 넘길 수 없을거라 생각한다. 결코 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의 작품은 무명씨의 작품이고 사랑을 주제로 한 이정구의 시조도 과연 사랑이란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밀당'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 여기에 있다.



님을 믿을 것인가 못 믿을 것은 님이시라

믿어왔던 그 시절도 못 믿을 줄 알았도다

믿기야 어렵지마는 님을 아니 믿고 어찌하리 93쪽

이번에는 원문이 아니라 풀이된 상태로 연인관계라기 보다는 부부가 된 이후에 상황처럼 느껴진다. 사실 밀당은 양쪽에서 밀고 당기기라고 한다면 위의 작품은 어째 유달리 한쪽에서만 믿어보려고 애쓰는듯한 느낌이다. 물론 이풀이는 저자가 아닌 사견으로 일 혹은 육아문제를 핑계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라면 딱일 것 같다. 저자의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첨가하자면 14세의 나이에 과거시험에 장원을 했고, 세자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던 엘리트 중에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역시 머리좋은 사람이 연애도 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미 내용과 시조가 쓰이던 전후사정을 아는 작품들은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지나치게 생경한 작품들만 실려있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어쩌면 조선시대 대표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단심가>를 소개한다.



이몸이 주거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 ㅣ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싈줄이 이시랴 163쪽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원문으로 가져왔다. 이방원이 조선을 건국할 당시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를 읊었을 때 정몽주는 위의 시로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했다.  그런 후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교살로 죽음을 맞이한다. 재미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만약 정몽주가 이방원의 회유책에 '화답'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랬다한들 저자의 말처럼 그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도 살해한 마당에 변절자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을리 없지 않은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며 숭고하게 떠나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마지막 자연, 풍경 그리고 풍류편에서는 성혼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어쩌면 마지막 장의 작품은 우리가 시조를 떠올렸을 때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되는 주제가 담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야말로 시조를 읊는 선비들의 모습은 자연과 벗하고 안빈낙도하는 그 모습이지 싶다. 바로 이 작품이 그런 분위기를 잘 담았을 뿐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물질이 인간과 자연보다 앞서있는 세태를 본다면 작품의 저자가 자신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탄하지 않을까 싶다.



푸른 산은 말이 없고, 흐르는 물은 모양이 없다

맑은 바람은 값이 없으며, 밝은 달은 임자 없는 모두의 것이로다

이런 것들 병이 없는 이 몸도 분별없이 늙으리라  298쪽

저자는 이 작품을 두고 '없다'라고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은 '있는'것으로 욕심없이 살고자 하는 작자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저 작품을 마주했을 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안빈낙도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거듭 보면 볼수록 종교와 닮은 점이 많게 느껴졌다. 특정 종교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無'와 같은 마음가짐은 불교를 닮았고, 임자 없이 모두의 것이라 하는 표현에서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욕심을 모두 비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것, 내 의견만 옳다는 편협된 생각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소개한 네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품을 다 둘러봐도 고리타분하거나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나크로니즘적인 작품도 없었다. 우리가 고전읽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처럼 <이야기로 읽는 고시조>를 통해 고시조의 아름다움과 시대를 관통하는 선인들의 혜안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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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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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소설 / 김상훈 옮김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230쪽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표제작을 포함 총8개의 단편이 실린 그의 첫 작품집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작품집이기도 하다. 리뷰의 시작을 발췌문으로 시작한 것은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절대지식은 결국 미래를 보는 것과 맞닿아있을 때 미래를 아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가 아니냐하는 것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표제작을 통해 자유의지를 가졌다면 미래를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미래를 알면서 자유의지를 가질 수 는 없는데 그것을 세계의 책을 읽게 되는 한 여자를 통해 쉽게 설명한다. 외계인의 언어를 분석하라는 정부 요청에 의해 헵타포드라 명명한 외계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점차 지구인들의 방식이 아닌 헵타포드의 방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는 언어학자.  그 과정을 딸아이에게 이야기 해주는 듯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상황연출은 읽는 내내 [컨택트]란 제목으로 개봉했다는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들었다. 시점의 모호성이 결말을 예고하기는 하지만 막상 이야기 끝에 다다르면 역시나 알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화자가 곧 외계인들을 만날 줄 뻔히알면서도 대면한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가하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배움에 늘 목말라하고 무언가 배우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이해>라는 작품이 가장 흥미로웠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영원히 놀라움이 이어지게 되는 것일까? 예의 그 악몽이 사라지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자 내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독서 속도와 이해력이 향상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읽을 생각으로 책장에 꽂아두긴 했지만 딱히 그럴 시간을 만들지 못하고 방치해두었던 책들을 이제 나는 실제로 읽을 수가 있었다. 심지어 난해한 기술서적까지. 61쪽


<이해>는 신경손상된 환자들에게 호르몬 K요법으로 치료했을 때 인간의 이해능력이 고도로 높아졌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다뤘다. 이 작품 역시 영화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하는데 앞서 소개한 표제작 보다 사실 이 작품이 더 기대된다. 총이나 폭탄과 같은 무기가 전혀 없이 오로지 상대와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이 어찌 보면 상당히 우스운 코메디 연출같을수도 있다. 만약 영화가 개봉된다면 이 작품을 분명 여러 희극인들이 패러디 할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호르몬 K 요법과 같은 의학기술이 발달한다면 미래가 다분히 희망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야훼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39쪽

<바빌론의 탑>은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으로 지구가 아직 둥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 인간들이 신에게 대적하려고 탑을 쌓아올리는 것을 그냥 방치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끝도없이 탑을 쌓다보니 탑의 끝에 다다르려면 수개월이 걸리고 그렇다보니 그곳에서 아이들이 태어나 가정을 꾸리는 등 있음직한 내용들이 펼쳐진다. 더불어 물리학을 전공했다는 저자의 지식을 옅볼 수도 있는데 만약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해가 불가능할 만큼 어렵게 쓰여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고 저자의 의견에 의의를 제기하는 등의 묘미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서 말이다. 나처럼 기초지식이 전혀 없어도 소설을 이해하고 흥미를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앞서 소개한 <이해>의 경우는 컴퓨터공학을, 표제작은 언어학과 물리학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부럽기도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글의 구성이나 상황연출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위트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자의 노고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흥미로우면서도 무언가 앎에 영역에 다다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작품들도 모두 만날 수 있는<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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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자서전 -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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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인생에는 무슨 일이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원하는 것을 모두 갖지 못했어도,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은 것에 감사해라." 242쪽



위의 내용은 책의 거의 후반부에 나온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서문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자유로우면서도 반전주의자였으면서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아마도 저 문장으로 다 이해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밥은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아버지였던 그가 해준 이야기라고 적었지만 제3자인 내 입장에서보면 저것은 이기적이고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이야기의 첫 시작이자 보브가 카페에서 노래를 하고 보조를 맞추려고 일자리를 알아볼 당시에 그의 모습은 진정한 포크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으면 그 흔치 않은 사람중에 자신이 포함되어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을 확신한 듯 보였다. 실제로 카페를 오가며 별볼일 없다고 판단되는 곳은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고, 나름의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등의 치밀함도 보였다. 뿐만아니라 연주를 잘하는 사람과 곡을 잘 만드는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았고, 또한 좋은 곡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효과적인지도 파악하려고 애쓰는 진지한 모습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왜냐면 내가 밥 딜런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너무나 높은 자리에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출발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대사라고는 한 마디도 없는 역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스타라도 된 것 같았다. 의상이 마음에 들었고 기분은 붕 뜬 것 같았다..... 로마병사로서 지구의 중심에 선 무적의 사나이처럼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없이 오래 전에 잇었던 엄청난 몸부림이었다. 138쪽


가수인 그가 연극무대에 그것도 종교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출연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의 본명이 밥 딜런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그의 노래 중 일부가 교과서에 실려있기까지 한 사실등도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된 이야기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순차적으로 쓰여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가 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서는 다분히 순차적인 이야기로 끌고오지 않았나 싶다. 그랬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감상, '이미 한참 지난 과거의 일을 마치 지금의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념을 가지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모습이 한 때 그에게 있었다고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마음을 울리는 감상적이고 진솔한 노랫말로 변화되었다고 해서 그의 열정이 사그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조의 강약과 상관없이 인간이 누리는 삶 그자체에 대한 사유를 이토록 직접적이면서 은유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그만의 힘이 가장 그다운 모습일 것이다. 사실 음반을 통해 내가 알던 밥은 고뇌와 삶을 아우르는 진지함보다는 유쾌한 리듬 그 자체였다. 내가 그의 음악을 들을 당시의 기분은 조금 더 '흥겨워지고 싶을 때'였으니 대략 이해가 될 것이다. 물론 그런 노래만 골라서 들었기 때문인데 달리 표현하자면 밥 딜런의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즐기느냐는 철저하게 각각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은 밥 딜런의 한 면만 보던 나와 같은 이들에게 다양한 그의 모습을 만나게 해주는 참고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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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1-1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에 감사해라, 이 가르침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 나의 극우 가정사
클레어 코너 지음, 박다솜 옮김 / 갈마바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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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 나의 극우 가정사


 


이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의 초반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전달하고싶은 메세지가 잭 이브라힘과 제프 자일스의 [테러리스트의 아들]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을 줄 알았다. 극우라는 것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뿐 아니라 가정내에서도 크나큰 '폭력'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용 전부를 읽고 난 후 내 시선은 극우는 무조건 '악'이라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책의 저자 클레어 코너는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스스로 인정한 것 처럼 부모로부터 행동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을 제대로 물려받았다. 낙태금지법을 맹렬하게 주장했고, 설사 그것이 산모의 생명을 위협해도, 강간이나 심지어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라 할 지라도 낙태는 결코 안된다는 내용을 모른척했다. 다시말해 이 책의 타이틀 '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에서 '그것'이 극우단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믿고 있는 '나의 주장'과 뜻을 달리하면 무조건적으로 선과악의 기준에서 '악'으로 떠미는 행위나 단체활동이라고 보여진다. 저자의 부모, 코너 부부는 존 버치 협회에서 인정할 정도로 열성적인 회원이었다. 심지어 저자가 겨우 열 세살밖에 안되었을 때 협회에 가입시켰으며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하면 평생 누워지내야 할 지도 모르는 위험에 놓인 자녀를 역시나 어리기는 마찬가지인 손위 형제에게 맡기도 협회활동에 집중하는 '비도덕적인'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놀라운 것은 사랑과 생명존중을 목숨처럼 여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대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식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삭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상황을 떠올리면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이 아브라함에게 원한 것은 '피'가 아니었다. 아들마저 내놓을 수 있을정도로 자신의 '믿느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렇게만 보면 기독교 사상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멀리갈 필요없이 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와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비자유'스러웠던 시대가 과거라고 보이지 않는다. 종전이 아닌 휴전국으로서 당사자인 우리는 태평한 듯 받아들이지만 보수파들에게는 여전히 전쟁의 공포는 현재 진행형이다. 코너 부부에게도 공산주의는 '공포'로 그 자체와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장 눈앞에서 자식을 하나 잃더라도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후손들을 공산주의자들 손에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맞서 싸워야만 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민중은 늘 누군가로부터 '적'의 존재를 주입당해왔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저자 클레어가 부모의 극단적인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자신 역시 '낙태'를 합법화 하는 것이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것과 같다고 느끼는 극단적인 공포에 빠져드는 것이라 믿게되는 상황이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즐겁게 놀이를 하고 덕담을 나누는 그림은 이제 동화속에서나 접하는 생소한 모습이 되었다. 취업여부와 결혼여부를 물어오는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예의없이 대답하면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야하고 그 젊은 것들은 역으로 그 어르신들을  판단력을 상실한 '꼰대'로 치부해버린다. 서로에 대한 배려도 없고, 나와 다른 의견에 있어서는 '의견'이 아니라 '무지한 존재' 심지어 적으로 인식해버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단순히 공산주의라던가, 현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극단적인 상황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미국의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색깔논쟁'또한 당연히 언급된다. 백인들 사회에서만 살아가고 있을 때 저자 역시 인종차별이란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남부지역을 대학에 입학했을 때 비로소 '차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혜택을 덜 누리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부모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여기서 또 중요한 사실은 저자가 결코 부모님의 행동을 '틀린 행동'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데에 있다. 잘못된 것일수는 있어도 그들의 행동 자체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직인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만약 저자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부모를 비방하고 틀렸다고 전면으로 고발하거나 부정했다면 안타깝게도 생물학적인 의미로서의 코너 주니어가 아니라 극우단체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탄생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세상의 둘도 없을 것 같은 클레어의 아버지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딸을 매질하기를 서슴치 않는 불행한 환경속에서 그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을 뿐 아니라 최소한 덜 극단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형제들과 남편의 역할에 큰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오랜 세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당하던 신데렐라 왕자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같은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을 보았던 것과 같았다. 다만 저자에게 다가온 구원의 날개는 보았지만 이 세상 전체를 보자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극우단체를 위한 구원의 날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뿐만아니라 심각할 정도로 왜곡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극우주의자들은 가장 용기없고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언제고 나를 해치고 나의 가족을 살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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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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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 킬러 안데르스로 인해 어른이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의 신간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세 사람의 배경이 다소 과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과장된 것을 굳이 따져보자면 그들의 현실이나 과거가 아니라 그들의 미래가 과장이고 허구에 가깝다는 것이 씁쓸하다. 하지만 이 씁쓸함이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씁쓸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볼 수 없다는 이유라는 것이 작가의 작품을 자꾸만 찾게 되는 이유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경우 어찌보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능청스러운 100세 노인의 모습이 다가왔던 반면 이번 작품은 초기에 능청스러움이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아 과연 웃어도 될까 싶은 불안함이 살짝 들기는 했었다. 특히 친구 두 사람을 위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수입을 가져다 준 안데르스를 속이기까지 하는 모습에서는 과연 그들의 행동이 과거에 상처로 용인되고 이해받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  '킬러 안데르스의 그의 친구 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친구 둘 이라는 명백하고 분명한 표현에 있다. 만약 안데르스를 중심으로만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그의 친구 둘 이아니라 그냥 안데르스의 친구들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수를 명시한 것은 안데르스를 통해 요한나가 신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면 페르에게는 조부와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경제적 지원과 부양해주는 '부양자'로서의 역할을 대신하는 등 상대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리셉셔니스트도 목사도 부동산 임대 방면에는 경험이 없었다. 성년이 된 이후로 페르는 호텔 접수 데스크 뒷방이나 캠핑카에서 자면서 살아왔다. 요한나는 아버지의 목사관이나 웁살라의 학생 기숙사 외에는 살아 본 데가 없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가 자유롭게 놔주질 않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침실과 거기서 20키롤미터 떨어진 직장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왕복해야 했다. 381쪽

가부장적인 그것도 보수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 목사의 딸 요한나에게 신은 자비롭고 평화로우며 사랑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발언권을 빼앗아가고 자유를 박탈한 존재일 뿐이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녀에게 일말의 양심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될 지도 모른다. 페르는 또 어떤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좋은 어른들이 아닌 나쁜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내밀었던 그는 그저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느냐에 따라 옳고 그림, 좋고 나쁨이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요한나는 초반에는 자신의 목적에 반하는 위험천만한 인물로 킬러 안데르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점차 자신의 목적과 그녀의 목적이 다르지 않고 같은방향이 되면서 요한나의 양심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안데르스가 성경 말씀을 상기하며 범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기적'이자 요한나가 그토록 부인했던 '신'의 진짜 모습을 만나게되는 계기가 된다. 좀 더 종교적으로 접근하자면 안데르스에게 요한나가 신과의 만남을 연결해준 사도가 되는 것처럼 역으로 요한나에게도 강요된 종교가 아닌 신앙으로서의 진정한 만남을 안데르스가 이어준 것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딸', 즉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빠'인 남자에게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성적인 불평등 또한 안데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킬러 안데르스는 그녀의 이야기 중에서 뭔가 귀담아들을 만한 것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집중해서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처음 몇 마디 들었을 때부터 킬러 안데르스는 그 영감탱이는 한번 찾아가서 늘씬하게 패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리라. 필요하다면 한 번 더 찾아갈 수도있고. 97쪽

두 사람모두 킬러 안데르스의 '친구 둘'이 되기 전까지는 몸만 어른이 되었을 뿐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어른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킬러, 사람을 죽이던 안데르스 또한 '친구 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를 '무'로 만들었던 과거를 완벽하게 뒤집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태생적으로 혹은 과거에 천착해서 자신의 삶을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 뜻하지 않은 '우연'이라 쓰고 '인연'이라 정의내리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부분 삶을 통해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서두에 밝힌 것처럼 '희망'에 기대를 걸 수도 있지만 '안데르스'가 성경구절을 떠올리지 않았다면이라는 단 하나의 가정만으로도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들러라면 물론 이런 경우를 두고 스스로가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성경을 가볍게 다루면서도 상황에 따라 절묘하게 어울러지는 위트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흥미롭지만 위의 경우처럼 세 사람의 관계를 분석하거나 서로에게 주어진 역할을 주목하며 이미 다 자란 어른들의 성장기로 받아들이며 미성숙한 자신의 모습을 대입시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세심하고 유려한 묘사와 문장으로 마음을 빼앗는 소설도 있지만 이렇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쫓다가 어느 순간 여러가지 면을 마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역시 이 작가의 대단한 능력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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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11-13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