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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빛을 따라 ㅣ 암실문고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1월
평점 :

<창공의 빛을 따라>는 나탈리 레제가 남편을 잃고 느꼈던 깊은 상실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의 슬픔을 읽기 전 손으로 가만가만 어루만져본다. 허공을 더듬거나 감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창공의 빛을 따라> 표지 앞면에 타이틀과 저자 그리고 역자가 각인되어 있어 손끝으로 감각해본다. 짧지 않은 시간 도슨트를 하면서 해설 준비를 마친 뒤 전시장으로 처음 들어서서 마주하는 것은 ‘전시서문’일 것이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지금은 그녀 곁에 없는 그래서 모든 곳에 있을 수 있는 남편 장-루 리비에르가 기획한 전시 책자의 제목으로 문을 연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내가 없는 지도가 필요하다. 11쪽
남편과의 마지막을 앞둔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 장면을 마주하는 내 마음은 당연하게도 끊임없이 가라앉는다. ‘시작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끝과 시작 사이에서 벌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14쪽)와 마찬가지다. 이제 페이지를 펼쳤으나 그녀의 아픔은 내게 기다림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 죽음답다. 죽음은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내주며 친절하게 참석할지 여부를 묻지 않는다. 예고할 순 있어도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오로지 너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발면된 게 아닐까?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힘을 잃고 천국이 쓸모를 다하게 되자 필름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이제 필름에 깃든 유령들은 마치 휴양지에 다다른 듯 언제까지나 거기 머물게 되었다. 32쪽
백남준의 비디오 푸티지 작품들을 해설 할 때 종종 그런 말을 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작가는 비디오 작업을 통해 가능케 한다고. 머스 커닝햄과 악수를 나누던 뒤샹은 죽고 없지만 그 장면을 담은 작품속에서 여전히 뒤샹은 뒤로 걷거나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다. 나탈리 레제와 남편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나오는 영상을 보며 그녀는 그가 ‘있었던 사실’을 확인받음과 동시에 위로를 얻는다. 동시에 그럴 수 없었던 딸을 잃은 빅토를 위고를 불러와 ‘다시 보다는 것(같은 페이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 처절한 상실은 기억의 부재를 낳는다. 하지만 무엇이 처절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인가. 책의 초반에 저자는 말한다. 아무리 슬퍼도 겉으로는 멀쩡할 수 있다고. 그러니 누군가 상실의 아픔을 견뎌내는 방법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 하여 그 슬픔마저 기대와 다르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느낀다.
나는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보다 구체적인 곳으로, 보다 투명한 곳으로 나아간다. 날이 밝아 온다. 나는 거꾸로 뒤집힌 하늘의 신선함 속으로 나아가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창공의 빛을 따라 몸을 던진다. 76쪽
시작부터 나를 끌어내린 그녀의 슬픔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그녀는 자신 역시 ‘계속해서 나아’간다. 창공의 빛을 따라 몸을 던진 그녀를 통해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누군가의 죽음으로 비롯된 슬픔에 던져져 무언가를 찾아 떠오를 수 있었다. 그것은 애도, 살아있는 자를 위한 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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