뜀틀, 넘기
박찬희 지음 / 한끼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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뜀틀, 넘기

박찬희 작가의 장편소설.
청소년 시절 타인들의 시선과 오해,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좌절속에 성장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체육교사 박원은 남들과 조금 달라도 보통의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그의 반 아이들 서바움, 공미숙, 정다솜, 변우혜가 주요 인물이다. 타이틀 <뜀틀, 넘기>는 누구나 다 할 수 것 같은 ‘뜀틀 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는 것, 사는 동안 반드시 넘어야 할 것은 ‘뜀틀’ 이 아닌 편견과 좌절, 그리고 포기라는 것을 뜻한다. 바움은 영어학원 원장인 엄마와 항공사 기장인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상당히 풍족하게 성장했다. 공부도 잘했고, 엄마의 영향 덕분인지 이제 겨우 중1 인데 영어로 회화가 어느정도 가능한 수준이다. 딱히 무언가 불만이거나 문제가 될 것이 없어보이지만 가족력으로 인해 왜소증을 앓고 있다. 단순히 키가 작은 정도가 아니라 다리가 자꾸 휘어지고 벌어져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것도 불편을 느낄 정도다. 혼혈 그리고 왜소증으로 인해 학교에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에 늘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할 뿐이다. 같은 혼혈이지만 미숙은 아버지가 없다. 마트에서 근무하는 어머니는 직원들의 파업으로 요즘은 얼굴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다. 꼭 연예인이 되려는 건 아니지만 sns에 일상을 공유하며, 긴 다리와 큰 키로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다솜과 우혜는 어릴 적부터 친구다. 고등학생은 되어 사귀는 친구가 평생친구라는 엄마의 말을 부정하고 싶을 만큼 우혜는 다솜을 좋아한다. 둘은 우정반지를 맞출 정도지만 요즘들어 다솜은 우혜와의 약속을 잊거나 전화도 제대로 안받을 만큼 소원해졌다. 담임인 박원과 함께 미술교과 선생님인 경복과 교감 이선도 주요 인물 중 하나다. 경복은 아이들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고, 이선은 아이들에겐 어른의 보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물론 두가지 모두가 다 아이들에겐 필요하다.

바움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굳이 찾자면 슬픔이 배어 있다는 걸 박원은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애들하고 다르잖아요. 똑같이 연습하다가는 다칠 위험도 있고, 애들한테 피해주는 것도 싫어요.” 72쪽

조별로 뜀틀을 연습하고 넘어야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과제가 바움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연습만 계속해도 점수를 얻을 수 있지만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조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았다. 무거운 뜀틀을 나누어 옮기는 것도, 무엇보다 같은 혼혈이라 사람들의 시선을 더 받을 수 밖에 없는 미숙과 한 조라는 것도 불편했다. 바움이 자신을 찾아올거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박원은 바움에게 뭐라고 해야 할 지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박원에게는 ‘영원이 불가능하다는 체념이 아닌, 그러므로 포기하겠다는 절망이 아닌(72쪽)’ 것을 바움이 깨닫기 바랐다. 학교에서는 조별 연습으로도 충분히 복잡한데 집에서는 엄마의 장애인 서류를 우연히 보게 되어 더 심란해졌다. 분명 자신은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던 엄마가 자신을 배신한 것 같았다. 자신과 달리 건강한 동생과도 이제 더이상 함께 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바움을 보며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떠올랐다. 언니와 계속 놀고 싶은 동생 안나와 비밀을 감추고 피하려는 언니 엘사처럼 마냥 밝기만 한 동생이 바움은 부담스럽다. 바움의 고민이 깊어지듯 미숙에게도 위험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고, 자신을 점점 소홀하게 대하는 우혜는 다솜을 만나기 전 가장 친했던 예지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깊어져간다.

소설을 읽는 동안 중학교 1학년일 뿐인데도 이렇게 많은 고민과 눈물, 상실 심지어 세상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주 오래 전, 내가 그 나이였을 때도 분명 그런 고민들이 있었고, 지금 와 생각해보면 사소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것도 아니라서 박원이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뜀틀 과제를 내주었는지 조금씩 납득할 수 있었다. 또 어떻게든 아이들을 품에 두고 지키려했던 교감 이선의 아픈 사연까지, 그야말로 사연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는 커녕 더 상처를 주는 악랄한 존재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부디 그들에게 지지 말고 이 아이들처럼 함께 견뎌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청소년소설 #차별 #뜀틀넘기 #독서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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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빛을 따라 암실문고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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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빛을 따라> 나탈리 레제가 남편을 잃고 느꼈던 깊은 상실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의 슬픔을 읽기 전 손으로 가만가만 어루만져본다. 허공을 더듬거나 감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창공의 빛을 따라> 표지 앞면에 타이틀과 저자 그리고 역자가 각인되어 있어 손끝으로 감각해본다. 짧지 않은 시간 도슨트를 하면서 해설 준비를 마친 뒤 전시장으로 처음 들어서서 마주하는 것은 ‘전시서문’일 것이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지금은 그녀 곁에 없는 그래서 모든 곳에 있을 수 있는 남편 장-루 리비에르가 기획한 전시 책자의 제목으로 문을 연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내가 없는 지도가 필요하다. 11쪽


남편과의 마지막을 앞둔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 장면을 마주하는 내 마음은 당연하게도 끊임없이 가라앉는다. ‘시작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끝과 시작 사이에서 벌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14쪽)와 마찬가지다. 이제 페이지를 펼쳤으나 그녀의 아픔은 내게 기다림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 죽음답다. 죽음은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내주며 친절하게 참석할지 여부를 묻지 않는다. 예고할 순 있어도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오로지 너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발면된 게 아닐까?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힘을 잃고 천국이 쓸모를 다하게 되자 필름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이제 필름에 깃든 유령들은 마치 휴양지에 다다른 듯 언제까지나 거기 머물게 되었다. 32쪽


백남준의 비디오 푸티지 작품들을 해설 할 때 종종 그런 말을 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작가는 비디오 작업을 통해 가능케 한다고. 머스 커닝햄과 악수를 나누던 뒤샹은 죽고 없지만 그 장면을 담은 작품속에서 여전히 뒤샹은 뒤로 걷거나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다. 나탈리 레제와 남편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나오는 영상을 보며 그녀는 그가 ‘있었던 사실’을 확인받음과 동시에 위로를 얻는다. 동시에 그럴 수 없었던 딸을 잃은 빅토를 위고를 불러와 ‘다시 보다는 것(같은 페이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 처절한 상실은 기억의 부재를 낳는다. 하지만 무엇이 처절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인가. 책의 초반에 저자는 말한다. 아무리 슬퍼도 겉으로는 멀쩡할 수 있다고. 그러니 누군가 상실의 아픔을 견뎌내는 방법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 하여 그 슬픔마저 기대와 다르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느낀다.


나는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보다 구체적인 곳으로, 보다 투명한 곳으로 나아간다. 날이 밝아 온다. 나는 거꾸로 뒤집힌 하늘의 신선함 속으로 나아가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창공의 빛을 따라 몸을 던진다. 76쪽


시작부터 나를 끌어내린 그녀의 슬픔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그녀는 자신 역시 ‘계속해서 나아’간다. 창공의 빛을 따라 몸을 던진 그녀를 통해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누군가의 죽음으로 비롯된 슬픔에 던져져 무언가를 찾아 떠오를 수 있었다. 그것은 애도, 살아있는 자를 위한 애도였다.



#애도 #상실 #죽음 #나탈리레제 #암실문고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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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나의 것
니컬러스 파담시 지음, 김동욱 옮김 / 롤러코스터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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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나의 것.

영국은 나의 것
니컬러스 파담시 장편소설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는 이란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를 둔 이주민 2세대다. 무슬림 소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좋아하던 아티스트가 이슬람이 서구의 가치관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가 ‘캔슬’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점점 극우에 가까워진다. - 역자의 말 중에서

데이비드 그리고 하산. 두 사람은 한 사건을 통해 마주한다. 서로에게 별다른 기억이 없었지만 그 이후 하산은 절친들의 말도 안되는 행동을 보고 더 이상 만남을 이어가지 못한다. 피해자였던 데이비드는 그 날의 사건이 절친과 헤어지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날의 사건은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무겁게 시작되진 않는다. 그저 대학 입학을 앞에 둔 청소년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성장소설처럼 다가왔다. 축구를 좋아하는 하산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전화봉사를 시작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튜브를 운영하게 된다. 가장 쉬운 방법이라 생각했던 전화봉사가 시간을 생각보다 많이 할래해야 할 뿐 아니라 관심없던 크리켓 경기까지 챙겨봐야 했지만 하산의 사고와 움직임은 건강했다. 반면 데이비디는 그 날 이후 자신만의 방식을 찾은 듯 보였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기 전 아버지가 사준 게임을 직접 번 돈으로 결제하고 그곳에서 친구들을 사귀는 것 처럼 보였다.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실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의 두 학생들도 게임에 심취해 있었다. 게임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온라인 세상도 결국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어느 때에, 누군가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었다.

“내 말 좀 들어봐.” 엄마가 계속해서 말한다.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너는 아무것도 몰라.
이란이 겪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인 거지, 종교적인 게 아니야. 오늘 파리에서 일어난 일도 종교적인 게 아니야. 이슬람은 적이 아니야.259쪽

소설에서는 폐쇄된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논리에만 빠지게 에코 챔버 현상을 보여준다. 가족들도 데이비드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그에게 어떻게든 다른 이야기를 던지려 하지만 데이비드 귀에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의 안타까운 변화를 보는 것이, 데이비드가 자신의 아버지의 나약해지는 모습을 볼 때의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의 필력에 놀라게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분명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누군가는 데이비드의 행동의 실수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방법자체를 탓할 지도 모르겠다. 하산의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배치한 것, 그러다가 결국 하산과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상황을 통해 폭력을 폭력으로 응답할 때 결코 그 고리를 끝낼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데이비드가 몸을 떨었고, 하산은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본 것만 같다. 끔찍했던 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브라힘의 오줌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울던 데이비드의 모습이.
하산이 제자리에서 서성인다. 데이비드가 적대적인 것도 이해가 간다.
눈물이 뚜렷해지기 전에, 더 난처하게 만들기 전에 그만 가는 게 좋겠다.
“잘 지내, 친구야.” 410쪽

영국의 이민자 그리고 이슬람과 무슬림을 배경으로 했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을 우리는 소설 밖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심지어 가족안에서도 그렇다. 그럴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영국은 나의 것’이란 제목을 읽기 전에는 와닿지 않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이보다 더 소설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 만 같다. 오로지 나만이 무언가를 소유하려할 때, 그 외의 다른 것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우주서평단 #영국은나의것 #니컬러스파담시 #롤러코스터 #서평

★ 북스타그램_우주 @woojoos_story 모집, 롤러코스터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rollercoaster__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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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이옥토 리커버 에디션)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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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고통의 착즙기처럼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있다는 자각.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젊지만 낡아빠진 기자스러운 다짐은 어쩌면 약자에게 목소리를 빼앗겠다는, 그들의 말을 고르고 편집하여 내보낼 권한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의 위선적인 버전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본문 중에서


김인정 기자의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특정 사건에 대한 진실된 부분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 만약 내가 독자 한 사람이 아니라 같은 기자였다면 그의 글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자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피해자 혹은 약자편에 서야겠다는 마음이 되려 그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처럼 편집하고, 때로는 그로인해 오해를 빚는다면 분명 위의 발췌문과 같은 고민이 반복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을 얻어냈던 것은 피해자들의 아픔에 애도하고 그들의 아픔이 그들만의 아픔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언론이 하는 일은 겪은 이들과 겪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기억의 연결고리가 깜빡이다 꺼지지 않도록 기능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공적인 애도에 대해 적으려면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야기가 때론 이야기에 불과하고, 지나치게 매끈히 다듬어진 이야기는 오히려 해체가 필요할지도 모르며,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위험성을 또렷이 기억하면서. 기억을 듣고, 이야기로 꿰어서, 이해로 마음을 집어넣는 일이 쉬워지면, 슬픔을 나눈 공동체를 상상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262쪽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집필하는 사람과 독자가 늘어나야 하는 이유가 위의 내용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한계와 위험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야기로 꿰어져야 하는 이유는 결국 방식을 달리하더라도 그 이야기안에 내재되어 있는 '슬픔'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애도한다라는 것이 낯설지도 어렵지도 않게 될 것이다. '흔한 고통'이 되어버려 더 자극적인 기사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 산업재해를 바라볼 때 단순히 구매거부에 동참하고 이를 인증하면서 또 다른 차별과 컨텐츠 생산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뉴스를 바라보는 데 있어 심각성을 고려할 때 나와의 심리적 거리에 비례하여 그 중요여부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에도 공감되었다. '멀리 있는 사건이나 타국의 고통이 주목받기 위해 우리와의 연결을 인위적으로 덧붙이는 보도 관행(174쪽)'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발생의 원인과 가해자와 피해자를 현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미디어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개인이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을 파헤치고 바로잡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혹은 이제 검증할 수 없을만큼 쏟아지는 가짜뉴스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부터가 어쩌면 애도의 시작이지 않을까. 누군가의 고통을 구경하는 것을 넘어 다중적으로 약자를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최소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2023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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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구직자 - 그리고 소설가 정수정의 화요일 다소 시리즈 5
정수정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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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구직자‘라니. 블랙 유머 같은 제목을 내세운 이 소설은 반복되는 취업 실패를 겪는 경력단절 여성을 통해 문제의 원인이 개인이 아닌 무기력과 체념을 학습시키는 불합리한 직장 문화와 사회 구조에 있음을 드러낸다. _소설가 김의경 추천사 중에서

경력단절.
얼마전 한 독서모임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한 독서프로그램을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경력단절‘이란 말 자체가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다가와 오히려 정작 당사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며 해당 용어를 자제하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들었다. 그때도 간략하게 의사를 전달하긴 했지만 경력단절이란 말 대신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경력이 중단된 것이 선택의 문제였다면 다른 용어나 애초에 이런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자녀가 있거나 기혼이라는 이유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해당 언어를 대신할 만한 다른 말을 찾고 싶지 않았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보도자료를 한 글자도 쓰지 못하던 때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정작 취직을 하더라도 일을 못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두려워졌다. 이렇게 계속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114쪽

최근 몇 년간 들었던 칭찬보다 손바느질 수업 첫 시간에 들은 칭찬이 더 많은 것 같다. 손바닥만 한 바늘방석을 들고 집에 가면서, 나는 다음 주를 기다렸다. 158쪽

할 줄 아는 건 하나 더 늘었지만 딱히 더 취직하기 좋아진 것 같진 않다. 224쪽

소설 속 지수는 대형 기획사 홍보업무를 맡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그동안 잘 해왔으니 다시 회사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기혼‘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얻은 직장도 남편의 건강문제로 포기하고 만다. 지수는 계속 일어나는 불편한 상황을 ’도망쳤다‘라고 말하지만 그런 자조적인 말들이 그녀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단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사회적 시선이 그녀를 두고 하려는 말을 저자가 먼저 던졌을 뿐이지 않을까. 퇴사한 직후, 퇴사하기 전, 구직활동을 하며 그녀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바뀔 때 마다 점점 마음이 답답해졌다. 마음이 답답했던 건 지수 때문이 아니라, 결혼 후 내가 지내온 사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나만 남았다. 그토록 많은 걸 시도했는데, 쉬지 않고 뭔가를 해보려 했는데. 부끄럽지는 않지만 조금, 허무하다. 293쪽

멈춘 적이 없더라도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 과정만으로도 인정받기가 어려운 ’활동‘이 구직활동일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가 기혼여성, 자녀가 있는 사람들만 겪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막 퇴사를 하고 애매한 구인광고에 휘둘리는 구직자들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또한 이 소설은 ’경력단절여성의 시련‘ 만을 다루지 않는다. 가족이 가족이기 때문에 더 힘든 서나의 삶은 또 어떤가. 결혼으로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려는 것을 두고 부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서 배우자가 될 사람의 부정적인 평을 전하지 않은 지수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서나가 가족 때문에 받았을 시련을 지수가 시동생과 시어머니와의 단 한차례 등장하는 전화와 만남을 통해 보여주는 대화 장면을 보면 느껴질 것이다. 가족이 때리면 더 아프다는 말. 차라리 진짜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받으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은 그런 마음.

그저 그 애의 선택을 응원하기로 한다. 나는 항상 그랬다.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사람도 있었다. 너네 진짜 친구 맞아? 같은 질문을 가장한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은 이제 나와 서나 곁에 없다. 273쪽

서나와 지수 그리고 소설가 정수정의 글을 마지막까지 다 읽고 든 생각은 ’다소 가까워 지는 우리‘라는 다소 시리즈의 모토였다. 가깝게 느껴졌다. 지수의 모습이 서평에 드러난 것처럼 분명히 내안에 진행형으로 자리하고 있고, 서나에게 주어졌거나 앞으로 견뎌내야 할 삶의 무게를 모르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를 넘어 정수정 작가가 <연쇄 구직자>의 초안을 쓰고, 수십 번의 수정을 거쳐 출판에 이르기 까지의 ’화요일‘들이 내 미래였음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부디 많은 분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가까워’질 다소시리즈, 연쇄 구직자의 만남을 추천한다.

#연쇄구직자 #정수정 #다소 #다산북스 #책추천 @daso_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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