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을 읽고 있으나 나는 아직 서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책 미주에 있는 말들이 너무 어렵기 때문인데, 이것은 내가 ‘철학적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때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을 때 어렴풋한 무언가가 잡히기도 하니까, 그냥 읽는다, 여러 번. 미주만 밑줄긋기하는 것도 처음이네. 일단 밑줄. 그리고 또 때로는 책을 다 읽고 서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니까.

책의 제목은 <행복의 약속>이고 부제는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이다. 나는 나를 불행한 자에 놓는다. 사라 아메드여, 불행한 자를 위함이 이렇게 어렵습니까???

싹 다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데 철학이론 책(아, 남성철학자들 책...)은 읽을 욕심이 안 생기는 건 무슨 조화냐.ㅋㅋㅋㅋㅋㅋ




10 느낌이 옳고 그름의 척도가 될 때 그런 접근법이 갖는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리처드 레이어드는 뭔가 그릇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해지거나 감정이 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이어드에 따르면 행복학은 "본질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부의 재분배를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불평등이 불행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Layard 2005: 120-21).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에는 유감스럽게도, 만일 불평등이 불행을 증가시키지 않는다면 불평등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노예들은 자유를 원했다. 그 이유는 수입을 더 늘릴 수 있어서가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이 주는 굴욕 때문이었다. 노예제는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도는 옳지 않은 것이다"(121[170]). 노예제가 그릇된 것인 이유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관념은 이런 그릇됨의 모델에서 무엇이 그롯된 것인지 보여 준다. 그것은 사회적 그릇됨을 개인화하고 심리화한다. 사회적 그릇됨과 상처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내 책 ‘감정의 문화정치 (2004)의 결론과 고통과 불의의 융합에 대한 벌란트의 중요한 비판(Berlant 2000)을 참조. 특히 주목할 점은, 불의와 상처가 융합돼 생기는 문제 중 하나는, 타인의 감정에 접근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델에서는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형태의 그릇됨도 보이지않게 된다. - P413

13 페이 웰던이 여성과 행복에 관한 저서에서 한 말을 인용해 보자. "젠더 평등을 위한 투쟁은 외모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진화를 통해서도 전해지지 못한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어떤 보상도 얻지 못한다면, 그 투쟁은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신의 턱만 발달시키고, 보톡스로도 가릴 수 없을 이마 주름을 만들며, 뷰티 플래시[안색을 밝게 해주는 화장품]를 아무리 발라도 지울 수 없을 만큼 안색을 탁하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좋은 점이 아무것도 없다"(Weldon 2006: 52). 웰던은 불행 때문에 외모가 상할 것이며 그 불행은 평등을 위한 싸움이 유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하다는 건 외모가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웰던이 보기에 행복하려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다시 말해 여자가 더 나은 남자를 얻으려면, 평등을 위해 싸워서는 안 된다. 행복은 자기-증진의 기술이다(그녀는 이를 진화적 신체 단련이라고도 한다). 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행복과 여성에 대한 리서치는 전통적 여자다움의 형태로 돌아가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행복은 수동성과 연결되는데, 이는 행복을 능동성과 연관 짓는 기존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이 책의 결론에서 행복과 능동성의 일치에 대해 논할 것이다. - P414

14 그렇다고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법이 이런 비판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단지 현대의 행복보다 고대의 행복을 이상화하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행복을 덕으로 보는 오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서의 글들은 인생에 대해 덜 배타적인 또는 덜 특정한 개념에 근거한 대안적 좋은 삶 개념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매킨타이어는그의 저서에서 덕은 "후천적인 인간적 자질로 그것의 소유와 실행은 우리가 선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것의 결여는 우리가 그와 같은 선을 성취할 수 없도록 효과적으로 가로막는다"
라고 설명한다. 매킨타이어의 무의식 개념적 분석 (MacIntyre 2004) 개정판 서문도 보라. 여기서 그는 정신분석적 모델들을 비판하며 "합목적론적으로 구조화된 삶"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을 옹호한다. 그는, 신경증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판은 "인간의 번영이라는 개념과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런 개념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서 인간의 번영을 "[인간] 특유의 잠재력의 실현이 이성에 근거한 활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재정의하는데, 이는 그도 여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중시하는 배타적 모델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34-35). 이와 같은 설명을 제안해 준 데이비드 글로버에게 감사한다. - P414

15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하는 사람은 다른 유형의 덕 있는 사람보다 외적인 재화를 덜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Aristotle 1998: 193[374]). 그가 보기에, 사색하는 철학자에게 외적인 재화는 오히려 사색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조하는 철학자로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는 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193[374-375]). 바로 이 지점이 정치경제가 개입되는 지점이다. 철학자 주체의 좋은 삶을 사는 역량의재생산은, 인간으로서 갖는 특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노동은 철학자를 부양해 주는 노동으로 따라서 가구처럼 배경에 머물러 있게 된다. 퀴어 현상학』(Ahmed 2006)에" 있는 후설과 철학이라는 노동, 그리고 가사 노동이라는 "배경에 대한 나의 해석을 보라. - P414

18 콜브룩은 이런 구분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행복에 대한 니체의 새로운 철학적 개념화를 든다. "행복은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순간의 특수성이나 구체성을 능동적으로 긍정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역량 혹은 힘이다" (Colebrook 2002: 19). 그러나 이 "새로운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기존의 행복 개념들과 별 차이가 없으며, 이 책의 결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 개념들 상당수가 능동성으로서의 행복 관념에 입각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새로운 것의 언어 속에 존재하는 오래된 것의 유산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즉, 철학은 일상으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할 때 기존의 습관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자신의 습관을 유지할 뿐이다. - P415

20 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특히 1장과 결론에서 윤리와 씨름하게 될 것이다.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아감벤이 인간을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이자,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삶이 행복에 할당돼 있는 유일한 존재"로 정의하고 "그렇지만 이 사실 자체가 곧 삶의 형태를 정치적 삶으로 구성한다"(Agamben 1996/2000: 4[14])라고 하면서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정의하는 데 있어 행복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해 두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행복을 위험에 처해 있는 무언가로 만들면서 아감벤은 행복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문에 부치려 한다. 심지어 이 질문은 고통스럽다. 인간에 관한 질문은 행복에관한 질문이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 P415

23 행복의 시기는 "반명제antithesis가 사라진 시대로 "역사의 빈 페이지"(Hegel 1837/ 1988: 29)라고 하는 헤겔의 명제와 내 주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평해 둘 필요가 있다. 그의 명제는 역사의 활동은 불행과 부정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나는 개념-어concept-word인 행복의 역사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즉, 행복은 사고의 지평을 제공한다. 개념어로서의 행복의 과잉결정은 행복이 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 명멸해 왔는지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역사 속의 행복이 공백이 아니라고, 즉 공백은 행복의 규제력을 관념으로서 유지시키는 판타지라고 주장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의 공백은 투쟁이나 부정성의 부재를 나타내는 표지가 아니다. 행복이 주어져 있을 때 우리는 투쟁이나 부정의 표지를 볼 수 없을 뿐이다. 행복이 공백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상황이 진행되고 우리가 "잘 지낼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공백의 느낌을 만들어 내는 노동을 비롯해 "잘 지냄"을 나타내는 표지들에 의해 지워진 것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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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4-0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합니다. 미주가 왜 이리 긴가요ㅠㅠ 미주 읽는데 한참 걸려서인지 진도가 계속 멈춰있어요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7 18:21   좋아요 0 | URL
흑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부분 어떡하나요? ^^;;;;; 미주는 또다른 책이라고 해도 될 정도네요… ㅎㅎㅎ

시에나 2023-04-0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미주도 읽으시는구나... 전 세번 읽었어도 미주는 안 읽..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7 18:22   좋아요 0 | URL
악 그러시군요. ㅎㅎㅎ 격하게 안 읽고 싶어지네요.ㅋㅋㅋㅋ
 















서문(- 왜 하필 지금 행복을 이야기하는가)에서 딱 한 구절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아래 구절을 고르겠다. 


⌈ 주체들이 "몰입" 상태가 아닐 때 그들이 만나는 세상은 저항적이며, 행동을 가능하게 하기보다는 차단한다. 그래서 불행한 주체들은 세상을 이질적인 것으로 경험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나는 칙센트미하이가 신체와 세상의 친밀성에 기초한 행복의 현상학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만약 세상으로의 몰입에 단순히 심리적 속성만 있는 건 아니라면 어쩔 텐가? 만약 어떤 신체들이 세상을 저항적인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 이유가 세상이 어떤 신체들을 다른 신체들보다 더 잘 "수용"하기 때문이라면 어쩔 텐가? 그렇다면 우리는 특정 신체들에게는 공간으로의 몰입을 가능케 하는 바로 그 삶의 형식들이 [다른 신체에게는] 스트레스로 느껴진다는 점을 숙고해 봄으로써 행복에 대해 다시 쓰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행복의 경로를] 따라가지 않는 경험, 스트레스를 받는 경험, 우리가 속한 공간에 섞일 수 없는 경험이 아마도 행복에 대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지 모른다. ⌋ (29~30) 



왜냐하면 나는 킬조이killjoy이고 싶기 때문이다. ㅋㅋㅋ 


대체로 무엇이든 어디에든 적응을 잘 한다고 여기고 살았으나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성향을 가졌던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분위기 깨는 자'에 속했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좀은 다른 방식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였던 듯하다. 그러니까 불만은 있는데 그걸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내가 왜 불만을 갖게 되는지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그런 사람. 자연스레 말투는 삐딱해지고 인상은 굳어졌다. 당연하지. 원인을 모르는데 어떻게 불만이라고 말하겠어.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낯선 이와의 대면에서도 같았다. 말도 행동도 엉뚱할 때가 잦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이해되지 않는 언행들이 그야말로 수두룩... 우리는 진짜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알아채는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나? 억누르는 교육만 받고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또르르... 

아무튼지간에 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이런 부분들은 알 수 없는(던) 나를 좀 알게 해주고 어떤 면에서는 토닥거려 주기도 한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야, 라는 생각은, 어떤 사람에게는 매일 말과 글로 보고 들어야만 할 수도 있다. 


+ 몇 가지 언급해보자면. 


- 21쪽 '결혼'에 대한 이야기. 대표적 행복 지표 주자 되시겠다. 뭐 두말 하면 입 아프지. '그래도 해보는 게 낫다'에 격하게 반대합니다. 안 하고 행복하게 사세요.ㅋㅋㅋ 


- 25쪽 긍정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 "스스로의 행복 추구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게 주로 여자들에게 강요되는 거잖아. 


- 28쪽 로렌 벌란트 언급됨. "로렌 벌란트는 이런 행복에 관한 판타지를 "어리석은" 낙관의 형태라 부르면서, "특정 형식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방식에 적응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행복이 보장될 거라는 믿음"이라고 지적한다." 이거 지금 읽고 있는 <정동 이론>에 나온다. 제목은 "잔혹한 낙관주의". 그러나 말이 어려워서 두 번 읽고도 정리가 안 되고 있음. 이해하고 싶다... 그래도 반가웠다. 로렌 벌란트. 


- 33쪽 각주의 용어 설명. 이것 참 곤란하네. 사라 아메드의 이 책에서 affect를 '정동'이라는 단어 대신 '정서'로 번역한다고 되어 있다. 처음부터 '정서'로 생각하고 읽으면 상관없는데 이미 <정동 이론>을 읽고 있어놔서 조금 헷갈림. 


- 41쪽 "내 관심을 끈 것은 그 영화가 결말에서 보여 준 행복한 화해의 이미지였다" 괄호 안의 작은 글자인 이 문장을 보자 수많은 영화의 해피엔딩이 떠올랐지만 그 중 문득 <에에올>의 결말이... 만약에 말이야, 조이가 에블린에게 그래도 반항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에블린에게 100% 감정 이입하면서도 결말의 '형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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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4-04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주문한 책이 왔습니다^^

난티나무 2023-04-04 21:20   좋아요 2 | URL
😍 열공해요 우리~!!!^^

건수하 2023-04-04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동과 정서 가 같은 개념이라니 동-서 반대인데 말이죠 … (썰렁)

저도 좀 킬조이 경향이 있는데, 페미니스트면 다 경험도 그런 경향도 있을듯요. :)

난티나무 2023-04-04 21:22   좋아요 2 | URL
악 동/서!!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어쩐지~~~~~ㅋㅋㅋㅋ

맞아요 비슷하게 그럴 듯해요.^^
수하님도 킬조이! 저는 요즘 집에서는 완전 그렇고요.ㅋㅋㅋㅋ 분위기 깨부수는 자.ㅋㅋㅋ

시에나 2023-04-06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해보는 게 낫다‘에 격하게 반대합니다. 안 하고 행복하게 사세요.ㅋㅋㅋ >>> 아악, 너무 마음에 들어요. 딱 제 마음!! 이 책 2장으로 가면 결혼하면 그래도 행복해질거라고 강요하는 것들에 대해서 킬 조이!! 해버리는데 으찌나 속이 시원하던지요.

그리고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 이런 말들이(저 진짜 이 말 싫어했는데 이유를 알았!!) 어떻게 여성들에게 행복하기를-곧, 가부장제에 순응하기를 은연 중에 강요하는지도 말해주고요. 진짜 저의 인생 책입니다!! (같이 읽어가고 싶은데.. 열심히 댓글이나 달아야겠어요)

난티나무 2023-04-06 16:36   좋아요 1 | URL
오 저 지금 1장 다시 읽으면서 버벅거리는 중인데 2장에 대한 희망(?)으로 이겨내야 겠어요.ㅋㅋㅋ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왜 행복을 멀리(?) 했나(그러니까 행복이라는 말과 개념을)를 탐구(?)해보게 될 것 같아요. 답을 찾기보다는 탐구…ㅎㅎㅎ
 

이제 막 잠에서 깨어 아침을 먹으러 내려갈까 하며 폰을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갑자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나 듣던 소리다. 이게 뭐더라. 잠시 혼란한 사이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실제 상황입니다. 화재 경보입니다. 모든 투숙객은 지금 즉시 대피하십시오. 실제 상황입니다."

맙소사. 내 생에 이런 일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와 나 죽을 수도 있는 거야? 사이를 기타등등의 생각과 함께 두서없이 오갔다. 진짜 불이 난 건지, 경보가 실수로 울리는 건지, 전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컸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것은 실재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실재적이게 되어 있을 것이다. 위험이 존재했든 하지 않았든, 그 위협은 두려움의 형태로 느껴졌다. 실제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위협은 현재에 임박한 현실성을 가진다. 이러한 실제적 현실성은 정동적이다.

두려움은 어떤 위협적인 미래의 현재에 속하는 예상적 현실이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느껴진 현실이며, 그 문제의 정동적 사실affective fact로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99)




급히 잠옷을 벗어던지고 바지를 꿰입고 배낭에 눈에 보이는 소중한(!) 것들을 쓸어담고 운동화를 끌고 복도로 난 문을 (열어도 되는지 겁이 났으나 일단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으므로) 열었다. 옆에서도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사람들이 없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직원이 화재 경보 아니라고, 들어가라고 한다. 어휴. 


「위협이 물질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은 아니다. 그것은 진짜로 느껴진, 어느 과거-미래의 모든 정동적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미래의 위협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연기된 것이다. 그 상황은 영원히 열려 있다[끝을 알 수 없다].」 (99)

「수행적 행위나 말a performative은 항상 자동-발효되는self-executing 명령으로 닥쳐온다. ...... 경보라는 기호는 아무것도 없음 이상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명령법에 불과하고, 여전히 자율적으로 하나의 명령을 발효시킬 뿐이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해서, 우리가 외부를 향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향해 하나의 사태 현실에 깨어 있게 한다. 그것은 계속 주의를 강제로 집중시키며, 다음 느낌으로 변이되면서 이전의 느낌을 깨뜨린다. 여전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하나의 기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 경험이며, '지각이 드러내는 것 이상'보다 더욱 많은 것을 포함한다.」 (121~122)




글로는 짧게 썼지만 방에서 허우적거린 시간이... 음. 실제 상황이었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렸다. 경보가 울리고 방송이 나올 때부터 그랬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려고 노력해야 했다. 위기대처능력 꽝인 나. 어렵거나 곤란하거나 난처하거나 힘들거나 위험하거나 한 상황에 놓이면 어쨌거나 나는 줄곧 이런 신체 반응을 보일 텐데 하는 생각에 소심해졌다. 이걸 뒤집으면 그동안 나는 꽤 안전(?)한 생활을 했다는 말일 테다. 아니 딱히 그렇지도 않... 흠 헷갈린다. 심장 두근거리는 것부터 어떻게 좀 하고 싶다. 쉽지 않겠지. 아무 일도 없다는 직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호텔에 울려퍼지는 경보와 안내방송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물론 방문을 열기 전과 후의 내 마음은 당연히 달랐다.


「기호활동semiosis은 기호가-유도하는 되기이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의 기호가 실제 경험에서 몸의 되기를 역동적으로 결정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하나의 추상적 힘이 어떻게 물질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실수로 기표화된 현재 존재하지 않는 불에 대해서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미래-발생적 불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선취적으로 옳을 것이다.」 (123)




경보의 시간이 지나고 옆지기와 나는 화재가 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묵고 있는 방은 건물 7층, 만약 중간 어디쯤에서 화재가 나고 복도가 연기로 가득하다면, 문을 열고 탈출할 수 없다면, 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리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까지도.


「 선제행동이 명시적으로 생산하고자 했던 안전은 그것이 피하고자 했던 것을 암묵적으로 생산해 내는 것에 입각하고 있다. 즉, 선취적 안전은 그 자체가 기여하는 불안전의 생산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제행동은 그 자체의 실행을 위한 조건을 생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선제행동은 본래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위협-잠재성에 내재된 자기-원인적인 힘을 그 자체의 작동을 위해 포획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109)

「위협의 정동적 현실은 전염성을 가진다. (107)

...

위협은 아무런 실제 지시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 선제행동이란 아무런 실제 지시대상이 없는 위협을 대상으로 삼는 권력의 한 양식이다. 선제행동의 정치학이 그 자체의 작동에 대한 위협의 잠재능력을 포착하면, 권력의 실제적 대상을 찾는 것을 중단한다.」 (111)




가끔, 내가 지금 죽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었어, 하는 순간이 온다. 진짜로 불이 난 거였다면, 방에서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지만 내가 사라진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다.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위기대처능력도 없고 근력도 없고 끈기도 없고 수영도 못하는 나는 죽을 위험에 처하면 그냥 죽는 것인가. 몇 년 전의 나보다 죽는 게 좀 덜 억울할까. 그러면 몇 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 좀 덜 억울하게 될까.

그 와중에도 물건을 챙기려고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대책 없다. 옷도 갈아입었고 책도 쓸어담았다. 챙기지 않은 물건들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화재였다면 나는 내 목숨을 아까워하는 귀신이 되었을지도...@@


「신체적인 활성화 사건은 아직 능동성과 수동성의 구분이 없는 거듭-깨어남의 문턱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몸이 자신의 '본능'과 기호의 구성적 수행에 의해 전달된 거듭-깨어남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124) (*마치 꿈과 사건의 경계처럼)

「선제적 논리는 정동적 기재에 기반하여 작동하고 현재와 미래 사이를 돌고 도는 비선형적 시간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규범적 논리에서와 같은 무모순noncontradiction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규범적 논리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선형적 인과관계에 특권을 주며 현실의 효과에 대한 원인을 미래성에서 찾기를 꺼린다.」 (105)




밖으로 나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벽에 박힌 글자들을 보았다. 무심히 지나치던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화재시 절대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마시오." 그 옆에서 소화기가 빨갛게 빛나고 있다. 내가 저걸 사용할 줄 알던가. 


 "만일 우리가 [과거에] 위협이 있었던 것처럼 [현재] 위협을 느낀다면, [미래에도] 위협은 항시 있을 것이다. 한 번 위협은 영원한 위협이다once and for all,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되는 비선형적의 시간 속에서." (100)






** 인용문 : 2장 정동적 사실의 미래적 탄생 (브라이언 마수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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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4-04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화재가 아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지만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던 그 시간의 떨림은 쉬이 가라앉질 않겠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순간은 자꾸 떠오를 거예요. 저도 교통사고를 목격했던 것,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것들이 여전히 수시로 떠오르거든요.

인용하신 정동이론의 문장들은 정말 다 맞춤하네요. 그리고 어쩐지 이런 순간들의 불안을 좀 다스려주는 느낌도 들어요. 정동이론 사야겠네요. (왜 결론이..)

난티나무 2023-04-04 15:33   좋아요 1 | URL
그런데 좀 웃긴 건요, 그 순간엔 다리가 후들후들 정말 무서웠는데 몇 개월 지난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무엇일까요? 일단 미시트라우마로라도 기억을 간직하지 않겠다는 무의식으로 보면 그건 또 나름 칭찬(?)할 만한 반응인데, 만약 위험에 처했던 경험이 없어서 혹은 위기대응방식에 무지해서 그 공포를 잊은 거라면?? ㅠㅠ 그렇다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하게 작동한 거잖아요. 생각이 많아집니다…

책 재밌다니깐요? ㅎㅎ 2장에서 제가 겪은 일과 엮으려고 인용문 뽑아왔지만 대테러대응 등 정치적 위협과 정동을 연결지어 이야기하거든요. 뒷장들도 재밌어요. 저는 5장까지 읽었지만 정리하려니 끙 힘이 듭니다…ㅋㅋ

그레이스 2023-04-04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놀라셨겠어요.
우리 아파트 화재경보는 일상이어서 듣고 무심히 지나요.
정동이론 읽어보고 싶네요
수동과 능동 깨어남...!

그런데 막상 위기의 순간엔 제 기질과 습관만 발휘될듯 ㅠ

난티나무 2023-04-04 15:39   좋아요 2 | URL
아이쿠 경보가 일상이면 어쩌나요… 양치기 소년 생각나요.ㅠㅠ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의 (형편없는) 위기대처능력을 욕하는 사람으로 ㅠㅠ 저도 비슷하다는 걸 인식하게 됐어요. 일단 팔뚝힘을 키우는 걸로!(읭?)

책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바람돌이 2023-04-04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화재경보가 오보여서 다행이고요.
그런데 그런 순간을 저렇게 막 이론과 연결시켜 글을 쓰는 난티나무님의 능력에 깜짝 놀라고요. 역시 열심히 공부하는 분의 글은 다르구나 막 느끼면서 보고나면 다 까먹고 글은 글이고 생활은 생활인 저를 또 막 반성하고요. ㅠ,ㅠ
그래도 정동이론 어려울거 같아서 안읽을거같은걸 또 미리 반성하고요. ㅠ.ㅠ

난티나무 2023-04-04 15:50   좋아요 1 | URL
작년 가을에 있었던 일을 대략 써놓았었는데 책을 읽다가 똭 나와서 끄집어내 보았습니다. 짜맞춤이죠.^^;;;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생각은 계속 했거든요. 아마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실제로’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겠죠. 경험을 풀어내주는 글을 만나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여러 가지로요.^^

책은 끌리면 읽는 거지요. 반성이라니요.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4-0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재 경보ㅜㅜ
놀라셨겠어요ㅜㅜ
가슴 두근거림!
오늘 지인을 만나 나이 들수록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우리는 왜 심장 두근거리는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런 얘기를 나눴었는데 난티님의 화재 경보 울림으로 인한 급박한 상황이었다면.....ㅜㅜ
암튼 다행입니다.
이게 정동이론과 연결된다니?
띠용~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4 21:43   좋아요 1 | URL
심장 두근거림! 그러고 보니 그런 신체현상도 억압교육의 결과로 볼 수 있겠네요.ㅠㅠ 뭐 하나 연결 안 된 것이 없어요...@@
알고 보면 모두가 ‘정동‘인 것이죠....ㅋㅋㅋㅋㅋㅋㅋ
 

5장 힘의 행사



(5장 중간에 바타유의 소설 이야기가 나온다. 토 나오는 긴 줄거리와 소설을 심오하고 훌륭하다고 한 비평가들이 나온다. 인용하고 싶지 않아서 패스한다. 다 미친 것 같다.)

성철학자들은 포르노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여자에 대한 사회적·성적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자가 남자 이상으로 위험하거나 남자만큼 위험하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여자의 새디즘은, 남자에 의해서 관리되고, 남자에게 쾌락을 주기 위하여 조작될 수도 있다. 남자의 시스템에서 지배는 쾌락이다.
동시에 만족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여자는 남자들에게 통제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는 환상이다. - P219

사진은 또한 강간의 기록이다. 여자들을 배치하고 사용하였을 적에, 제1의 강간이 실현되었고, 그후에 독자가 사진을 소비할 때마다, 강간은 되풀이된다.
......
수잔 브로거가 적고 있듯이, 『강간의 본질은...... 심리적·육체적인 힘의 정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남자의 여자에 대한 태도, 즉 위장된 강간이나 노골적인 강간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 안에 존재한다. 여자를 희생자로 고려하는 권리를 획득하기 전에, 여자가 죽음의 상태나 적어도 피를 흘리기를 요구하는 태도는, 위와 동일한 것이다.』
...... 강간의 본질은, 그러한 사진 - 어떠한 방식, 어떠한 정도도 포함한 - 이, 남자의 권력과 무관계하게 남성지상주의의 범주 바깥에, 남자의 힘에 오염되지 않고 존재하는 여자의 성욕을 보여 줄 수는 없다는 확신 안에 존재한다. <그런 식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는 것처럼 보이도록 여자에 대해 카메라가 한 강간은, 현대사회에서 여자의 희생자성의 명확한 제1조항이다. 그녀는 죽거나, 피를 흘리지는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 P221

중심적인 문제는, 힘이 무엇이고 자유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좋은 질문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잔혹성의 영역 - 역사의 영역 -에서 그것은 완전히 추상적인 의문이다. 중심적인 문제는, 힘이 인종적 및 성적으로 멸시당하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을 때에는, 왜 힘이 힘으로서 절대로 인식되지 않는가이다. - P231

형이상학적인 희생자에 대해, 힘을 사용하는 자에 대해 그 힘을 정당화하고, 다음 그 힘을 불가시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데올로기가 일견 모순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모든 것을 포함한다. 히틀러는 유대인 남자를 강간자, 아리안 여성의 약탈자로 묘사한다. 그는 유대인 여자는 방종하고 난잡한 음란녀, 금발이고 순수한 아리안 여성의 심미적 대극으로 그리고 있다. 남녀 유대인은 모두, 성욕면에서 금수로서 특징지어지고 있다. 광포한 동물은 위험하므로 우리 안에 가두어야 한다. 히틀러가 반유대인적 행동을 호소할 때, 제일의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호소는 경제적인 면, 즉 유대인이 금전을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면이었다. 독일인의 반응을 자극한 것은, 히틀러가 묘사한 유대인의 성욕이었다. 순수한 아리안 여성이 호색한 유대인 남자에 의해 강간을 당하지 않고, 또한 독일인의 정자가 음란한 유대인 여자에 의해 유혹받고, 혼혈아를 낳아 오용되지 않도록 성적인 금수를 복종시킬 것을 참남자다움은 요구한다. 이것은 인종차별주의자의 성적 이데올로기의 전형이고, 인종적으로 멸시를 당하는 모든 집단은 금수의 성적 본성을 부여받는다. - P232

공격자의 힘과 희생자의 의지간의 단순자명한 등식 - 힘=의지의 침해 -은, 침해당한 자가 여자일 때는 결코 수용되지 않는다.
......
박해의 본질은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한 규준으로 자기 자신을 우월한 자라고 정의한 사람이, 이외의 인간을 외부로부터 정의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매저키스틱하다고 - 남자에 의해서 외부로부터 - 규정되는 것이다. 매저키즘은 본질적으로 도발과 복종의 양면을 갖추고 있다. 여자에 대해 가해지는 힘을 정당화하고, 동시에 그 힘을 불가시한 것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는 매저키즘이 여자의 정상인 상태이고, 여자가 좋아하며, 여자가 모두 원하는 것이라고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보다 명확하게 정의내려지기를, 고통으로부터 도출되는 성적 만족인 매저키즘이 소수의 남자에게서 나타나므로, 여자의 매저키즘은 - 똑같은 매저키즘조차도 - 남자의 매저키즘보다 열등하다고 간주된다. 해부학적 차이상, 남자의 성적 본성과, 그것과는 절대로 다른 여자의 성적 본능이 있다는 허구적인 이분법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 특히, 남자가 매저키즘을 나타낼 수 있다고 인식되었을 때 - 남자의 성적 우월성이 기만적인 것으로 지각될 수도 있다. - P234

바타유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의 변형을 소개한다. 즉, 여자는 순결하기를 선택하거나, 매춘부가 되기를 선택할 수 있다. 여자가 이 선택권을 지녔다는 - 여자가 순결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 주장은 세계의 역사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강간이 남자의 끊임없는 성적 활동이다. 그가 말하는 섹스의 선택은, 매춘의 선택을 의미한다. 여자는 <매력적인 한> 먹이이고, 여자가 매력적이지 않는 한 순결을 선택할 수 있다. - P237

인종적으로 멸시를 받는 남자는 중요한 어떤 것 - 인종적 우위에 있는 남자가 선망하는 성욕을 지닌 것으로 승인됨 - 을 뇌물로 제공받기 위하여, 자기와 같은 인종의 여자의 전락, 모든 여자들의 전락에 공모한다. 남자에 대한 모욕에는 찬양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대단한 찬양 혹은 그 같은 필요불가결한 찬양이어서, 인종적으로 멸시받는 남자는 자기 자신의 남자다움의 신화에 의해서 현혹되고, 이 신화가 빈번히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섹스의 힘을 자신의 동일성으로 상정하는 이데올로기를 현혹되어 받아들인다. 그때의 해결책은 간단한 것 같다. 즉, 그는 금기禁忌된 성적 관계를 통해서 인종적인 우위에 있는 집단의 여자에 대해 복수를 하거나, 자신과 같은 인종의 여자를 취하여, 그 여자 파트너에게 자신의 성욕을 행사한다. 그는 자신의 남자다움을 뇌물의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적 공정을 바탕으로 여자와의 연대 - 자신과 같은 집단의 여자와의 연대 - 를 만들어 내는 방식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남자다움을 여자와의 공감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그가 지닌 유일한 것인 남자다움을 약화시키거나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 P245

인종차별주의의 바탕이 되는 필요불가결한 성적 적의敵意는, 여자 소유권이 쟁점인 것처럼 표현하지만, 근본적으로 적의는 동성애적이다.
......
남자의 가치체계에서 성적 쾌락을 높이는 것은 적의를 높이는 것이고, 위험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의 사회에서, 인종간의 다툼은 가장 예민하게 느껴지고 가장 위험한 적의다. 이것만이, 남자의 가치체계에서 인종간의 적의에 성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길이다. - P246

그녀의 복종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포르노에 등장한 여자들 중에서 성적 상징으로서 백색 피부에게 주어진 특별한 관능적인 의의다. 그녀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보스이고, 힘과 폭력과 고통을 자신에게 주기를 요구하는 여자다. 그녀는 질릴 줄을 모른다. 그녀는 가장 비참한 전락 속에서 자신의 여자다움이 달성되는 진정한 복종자다. 여자가 힘을 요구했기 때문에, 힘은 현실적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간이나 구타는 여자의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여자의 의지의 침해로 존재하지 않는다. 강간은 단순히 보다 질이 좋은 성교가 되고, 구타는 양질의 전희가 되어 힘의 찬양 - 필경 그녀가 힘을 찬양함 -으로 통한다. 백인 여자는 강간을 요구하고, 구타를 요구하고, 굴욕을 요구하고, 고통을 요구하기 위하여, 지신의 인종적 우월성을 사용한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바라고, 이 경험 안에서 흥겨워한다. 남자는 공모한다. - P253

남자들이 강간과 구타가 여자의 의지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원인의 하나는, 영향력 있는 남자들이 수세기 동안, 사적인 세계에서 포르노그래피를 소비하여 왔기 때문이다. - P255

인간 여자가 관여하는 성적 행위에 관해 킨제이가 품는 관심은, 벌에 관한 그의 관심보다 작다. 인간 사이에서 그의 주요한 관심은 남자들의 계급층이다.
......
킨제이는 인간 남자에 대해, 자연에 반하는 사회적인 구속을 가한 책임이 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
여자가 남자를 성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킨제이의 눈에는 전혀 여자의 권리라고 간주되지 않는다. 그에게 거절은, 성적 억제·도덕주의·성충동이 약하다는 증거로 보인다.
......
여자가 해야 할 일이란, 예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
아내와 매춘부의 목적은 동일하다. 목표하는 바는 남자의 성적 표현이고, 그것은 남자가 여자의 불복종에 의해서 좌절되지 않는다면 대부분 교접을 표현한다. ... 아내와 매춘부는 동일한 기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내의 기능은, 섹스로써 남자에게 봉사하는 매춘부의 기능으로 유추하여 명확하게 규정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강간은 킨제이의 사고체계에서는 확실한 실재성을 지니지 못하고, 여자가 고발을 통해서 남자를 괴롭히고, 처벌하고, 제한하는 수단으로써의 억압적인 사회개념이다. ... 킨제이의 철학에는 근본적으로, 남자가 뜻대로 여자를 교접에 사용하는 것을 막을 정당한 이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P274

객관적인 과학자들과 포르노업자들은 동일한 견해를 선전한다 - 여자는 그것을 절실하게 원하고, 여자는 그것이 거칠기를 원하고, 여자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도발한다. 그리고, 킨제이가 상정하는 여자의 성적 냉담은 단순히 여자의 의지의 무시를 정당화할 또 하나의 이유를 세운다. 왜냐하면, 여자측의 의지의 주장 - 정의상 거절하기 -은 여자 자신의 성적 본성을 그릇되게 진술하기 때문이다. 그 성적 본성은 여자가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남자에게 성적으로 사용될 때, 특히 교접의 형태로 사용되는 경우에 실현된다고 한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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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물物·대상對象

심리학의 영역에서 남자의 동성애가 그렇게 불평을 사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현재 남자의 성 시스템 중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성적 반응으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대상·물로 보고 관련을 맺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의 권력과 존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그가 사용하는 대상·물에 둘러싸여 있고, 동산 추구형의 감수성을 지닌 인간의 중심핵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는 예를 들어, 다른 남자를 대상·물로 만듦으로써, 자신을 여자의 위치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이는 남자의 섹스 전체를 타락시키는 것이며, 부적절하다. - P176

어머니는 구출 - 어원인 라틴어로 <달려가서 도와 준다>는 뜻을 지닌 - 하는 인간이자 물체이다. 남자 유아는 구출하러 달려오는 물체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다. 여기서 현대의 남성지상주의적 심리학의 영역에 반향되고 있는 어머니의 동산적 의미를 본다. 즉, 어머니는 남자가 생애를 통해서 소유하는 최초의 물체, 구출하러 달려오는 움직이는 자산의 의미를 지닌다. - P178

성적 물체를 사랑하고, 욕망하고, 강박관념을 갖는 것은 남자의 문화에서는 물체 자체의 특질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간주된다. 최초의 관심사가 물체의 형태이므로, 남자는 육욕과 성교능력을 자극하는 특정의 형태를 강하게 요구한다. 성심리학의 분야에서 베커가 신뢰할 만한 반응의 형식으로 부르는 것은, 대체로 대상화objectification라고 불린다. 대상화는 달성된 사실이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형태 - 남자의 추측과 경험 안에서 발기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만큼의 형태 - 에 대해 남자에게 주관화가 되고, 거의 변하지 않게 고정화된 반응이다. ...... 대상화 - 필연적으로 발기를 일으키는 다른 사람의 형태에 대한 고정된 반응 - 는 진정으로 사정을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냉혹한 대단원으로 갖는 가치체계이다. 그것이 마치 남자 개인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인 것처럼, 남자에 의해서 실천에 옮겨지는 대상화는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첫째, 남자가 누구를, 무엇을 증오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둘째, 남자가 누구를, 무엇을 소유하고, 영향을 미치고, 정복하고, 그에 대극하여 자신을 정의내리고 싶어하는가. 셋째, 남자가 어디에 그 자신의 종자를 뿌리고 싶어하는가이다. 대상화의 첫번째 표적은 여자다. 남자의 문화에서, 남자는 대상·물화의 타당한 범위에 대해, 특히 남자가 다른 남자를 대상·물화하는 것의 존속 가능성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한다. 그러나, 남자가 대상·물화하는 것 자체의 도덕적 의미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성적 반응이 구체화된 반응, 즉 존재 안에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대상·물이 환기시키는 반응이라는 것을 당연시한다. - P188

자신의 물화物化에 관한 여자의 지식은, 보통 필연적으로 표충적인 이해의 지점에서 멈춘다. 즉, 미는 보답받고, 미가 결핍되면 처벌받는다고 이해한다. 처벌은 개인적인 불운으로 이해되고, 체계적·제도적·역사적인 불운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여자는 또한 아름다운 것이 성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가 처벌과 모독·파괴를 하고 싶은 호색의 욕망을 유발하지 않는 못생긴 여자에 의해서, 남자 자신과 그의 사회가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추한 여자를 추방하는 정도를(어쨌건, 남자는 못생긴 여자를 처벌하고, 모독하고, 파괴하지만) 여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 P193

인간을 물物로써 강렬하고 강박관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 인간의 소외의 원인도 아니고, 소외의 가장 마비적인 증거도 아니다 - 인간의 소외의 해결법으로 간주된다.
<사랑은...... 대상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를 확대해> 간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물화하는 - 생명을 지각하고, 생명에 반응하는 능력을 감소시키는 능력 - 사실이 인간의 개별적 특성의 관건이며, 다이내믹한 요소로 간주된다. 남자들은 성적 단편, 조각조각, 이러저러한 옷을 입은 육체의 부분들에만 특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실로 편린에만 반응하는 이 무능력이, 사랑의 미덕적 정의의 하나로 끊임없이 변형되어 간다. - P197

<페티시fetish>라는 낱말은, <마력charm> 혹은 <만들어진 물건made thing>의 의미를 지닌 포르투갈어의 feitiço에서 유래한다. ... 성적인 의미에서, 페티시의 마력은, 페니스의 발기를 일으키고, 지속시키는 힘을 지닌다. - P200

속옷으로부터 부츠, 그리고 레인코트로부터 가죽 벨트, 긴 머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신발에 발을 집어넣는 것과 신발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그리고 그 이외의 더 많은 것이 남자 페티시스트의 소재가 된다. 남자는 무엇이나 페티시화할 수 있고, 실제로 페티시화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떠한 여자도 특정의 남자의, 특정의 페티시와 합치하는 방법을 알 수 없고, 페티시의 반응의 성적 환기를 <도발하는> 것을 예측하는 것도, <도발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도 절대로 알 수 없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여자들이 막연히 알고 있는 것은, 남자의 공통적인 페티시가 여자의 패션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남자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나 드레스를 통해서 남자들을 매료시킨다는 것은, 한 사람 이상의 남자가 공통적으로 갖는 페티시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다. - P202

중국인은 1천 년간 발에 사로잡혀 왔고, 그동안에 소녀의 발을 속박하고 불구를 만들어, 그 변형된 발이 성적 흥미의 첫번째 중심이었다. 속박된 발은 페티시였다. 여자를 속박하고 불구로 만들어, 그 불구가 된 발을 성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속박과 정복이 가치를 지니는 당시의 상황을 지배하였다. 구미의 남자가 하이힐에 매혹되는 것이, 불길하기는 전족보다 덜하지 않다.
성적 페티시는 종종 발기를 일으키는 마력적인 의미를 애매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일례로, 여자들은 신발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이해하지만, 신발이 남자에게 발기를 일으키는 마력으로 이해된 적은 거의 없다. - P204

각각의 문화적 레벨에 나타난 모든 페티시는, 발기된 페니스의 권력을 명시하고 - 특히, 성적 본성뿐만 아니라 윤리적 본성을 지닌, 남자 자신의 감수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발기된 페니스가 지닌 권력을 명시한다. 남자는 여자에 대한 태도의 정의성을 기초로 하여 윤리능력을 판단하는 법이 결코 없으므로, 페티시의 성적인 의미는 지하에 숨어 있다. 한편, 문화적 레벨에서 페티시는 신화·종교·사상·미학으로까지 확대된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필연적이고 본질적으로 남성지상주의로 간다. 그것을 통일하는 주제는 여자를 향해 표현된 증오다. - P205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자로 만들어진다. 여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녀의 인간성은 파괴된다. 여자는 이러저러한 것의 상징이 되어, 대지의 어머니와 우주적 매춘부인 여자가 된다. 그러나 결코 그녀 자신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굳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어떠한 행동도, 여자가 일관되게 지각되어 온 방향을, 다른 물物로 지각하게끔 전복시킬 수 없다. 여자 자신의 목적이라는 이념이 궁극적으로 여자의 목적에 관한 남자의 지각 - 남자가 살아 있는 남근의 권력을 경험하도록 하는 바로 그 물物로서의 - 을 대신할 수는 없다. 포르노그래피에서, 남자의 목적의 이념은 십분 실현된다. ...... 포르노 소설과 포르노 영화에서, 여자는 그러한 물物이 되도록 교육을 받는다. 즉, 여자는 강간당하고, 매를 맞고, 속박되고, 사용되어 마지막에는 여자가 자기 자신의 참된 본성과 목적을 인식하고, 그에 따르게 - 행복한 마음으로, 탐욕적으로, 더해 줄 것을 바라며 따르게 - 될 때까지 가르친다. 여자는 자신이 사용되기 위한 물物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할 때까지 사용된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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