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 - 1세대 페미니스트 안이희옥 연작소설 7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가 된 일상의 기록
안이희옥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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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었다. 책을 받은 것이 그러니까... 기억이 안 날 정도니 오래 미루어두었다. 비가 쏟아지는 토요일 밤, 책상 위의 어려운 책들에 손이 가지 않아서, 좀은 소설소설한 거 읽고 싶어서, 책장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숙제(?)로 각인된 책을 꺼내들었는데 호로록 다 읽고 만 것. 미뤄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러나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한 번 읽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나, 요즘 생각한다. 그러니 첫인상 정도를 적어둔다는 마음으로...^^;; 


지난번 읽은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과 방식이 비슷하다고 할까, 문장들이 비슷하다고 할까, 다른 이야기이지만 겹치고 그러면서도 좀더 포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전적 이야기라서 그럴 수도 있고 한국 현대사의 중요사건들을 짚고 있어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많은 사건들을 이야기에 담다 보니 언급하고 지나가는 느낌도 든다. 이것도 넣어야지, 저것도 뺄 수 없잖아. 그럴 수밖에. 하나하나가 한 편의 소설이 될 수 있는 엄청난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 같은 이유로 좀은 헉헉거리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게도 잘 몰라서 그렇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나니 부끄러움이 커진다.


"아녜스가 80년대 세대라면 요세피나는 90년대 세대로서 시대적 억압이 덜한 성장기를 보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거대 담론에는 별 관심이 없고 소소한 일상사가 주된 화제였다." (185)


거대 담론과 소소한 일상사는 별개의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러나 90년대에 20대였던 내 모습이 정확히 저기 저 말에 일치하는 듯해서. 앎과 모름의 차이. 그것에 대해서도.




"... 최초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나는 최초의 기억이 이 막막함이야. 어둡고 축축한 공간에 나 혼자 서 있었어. 밤이었는지 새벽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아마 적산 가옥 마루였던 거 같아. 나는 자다가 깨어 방에서 나와 있었지. 다락의 다다미방에서 아버지가 피리 종류를 불고 있었어. 가냘프고 애틋한 관악기 소리가 슬퍼서 나는 흐느껴 울었어. 다락으로 통하는 계단은 어린 내가 기어오르기에는 가팔랐어. 막막했지. 가 닿을 수 없는 아버지의 애절한 슬픔. 달빛이 희뿌연 가운데 안개가 낀 듯했어. 나는 울었어, 소리 없이...... 그때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왔고 놀라서 나를 끌어안았어. 따듯한 어머니 살이 차가워진 내 몸을 폭 감쌌지. 나는 울음을 그쳤어. 거기까지야, 최초의 기억은." (100)


공감하기는 어려운 구절이지만 최초의 기억,이라는 말에 내 최초의 기억은 뭐지, 한참을 생각했다. 딱히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 머릿속에 영화 장면이 아니라 사진으로 남아있는 기억들. 최초, 기원, 이런 것이 중요한가 싶기도 하다.




" 「저는 한국을 떠난 적이 없는 토종 페미니스트예요. 유학 다녀오신 교수님들과는 경험이 조금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한국 여성으로서 토착적 한이 있지요.」

「어릴 때부터 생선을 먹으면 여자들은 꼬리와 머리 부분을 먹었고, 남자들은 몸통을 먹었어요. 도시락에 달걀도 남자만 싸줬어요. 차별이 심했어요. 그런 얘기를 쓰고 싶어요.」" (214)


이 부분이 왜 마음에 걸리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지는 정확히 알겠다. 다만 토종,이라는 말은 아닌 사람과 구별짓는 단어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무엇이 토종인가 의문이 생긴다. 말하고자 하는 토착적 한이 저런 것이라면 모르는 여성이 있겠나 싶다. 그러니까 남성과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저런 대화가 만들어진 것이겠지.


간간이 응? 싶은 문장들이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옳다고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니 섣불리 뭐라 할 수는 없겠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읽을 때가 오면 그때는 얼마나 다르게 다가올지. 이 어정쩡하고 왠지 미안한 마음이 조금 가실 수 있을지.




"세 여자는 지금 별 탈 없이 사는 것에 감사하자고, 하루하루 건강 유지에 애쓰자고 서로 덕담을 나누었다. 자식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 세대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해결하게 하자. 전전 세대, 전쟁 세대, 4·19 세대, 유신 세대, 전대협 세대, 한총련 세대, ·X 세대, · N 세대, MZ 세대 모두 저마다의 과제가 있으니까. 다만 많이 미숙했던 여성 운동은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데에 입을 모았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도 여성 운동의 하나다. 서로 다독이며 살자고, 가능하면 송이도 자주 찾아보자고 다짐했다." (267)


위로가 되는 문장. "건강하고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도 여성 운동의 하나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롤모델도 더 많이 필요하고 스스로 그렇게 될 필요도 있다. 그러니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고 일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그러는 것만으로도 '여성 운동'을 하는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작아지지 마! 사라지지 말자고! 주문을 외며, 여전히 비가 내리는 일요일, 우산을 받쳐들고 고인 물 위에 발걸음을 찍으러 나간다. 




(겉표지와 속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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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7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사회에서 여성에게 가장 어려운 게 건강하고 아름답게 나이드는거 아닐까요? 대부분이 골병들고 억척스럽게 나이가 들죠. 사는게 너무 힘들잖아요.

난티나무 2022-06-27 19:5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말이에요....ㅠㅠ
그래서 그렇게 나이드는 게 여성운동이라는 말이 더 다가오는 것같기도 하고 현실이 힘들고 어려우니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도 동시에 여전하고요. 역시 계급... 문제도 걸리고 특권의식이라는 말도 생각나는 지점이에요. 어려워요.^^;;;
 
레이디 크레딧 - 성매매, 금융의 얼굴을 하다
김주희 지음 / 현실문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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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으로 대체하는 리뷰) 



책을 읽는 내내 분노했다. 분노했으나 분노에 그쳤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은 짜증으로 이어졌다. 온 세상에 회색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 그 중 남자들의 얼굴을 짚으며 저 사람들은 포르노를 보지 않을까, 생각했다. 길을 가는 사람들, 그 중 남자들의 얼굴을 보며 저 사람들은 '성매매'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집 안에 서식하는 남자들, 그 중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보며 얘네들은... 하... 


이 분노와 더불어 치솟아오르는 감정들은 매우 복잡하다. 분노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고 바뀌지도 않으리라는 일종의 체념 비슷한 감정도 자리한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체념적이다. 차라리 슬픔,이라고 해두자. 분노한다고 해서, 열폭한다고 해서, 슬퍼한다고 해서, 내게서 바뀌는 것은 없다. 그런 감정들은 오히려 호사스러운 것이 된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접하는 수많은 다양한 군상들 중 힘들고 불행하고 쥐어짜듯 착취당하고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그 이야기를 읽고 분통을 터뜨리는 나는, 우리는, 이미 그 분통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불행이 내게 올 리가 없어, 그건 다른 세계의 이야기야, 나는 그런... 계층의 사람이 아니야, 정말 불쌍하다, 짠하다, 그 사람들의 삶이 슬프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 또한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려 하는 대책 없는 안일함. 스스로 만들어낸 안온함의 가면들. 


돈이 없어 힘들었던 대학 시절을 생각한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갈 곳이 없어 입주 과외라는 것도 하고 선생님의 타이핑 작업을 돕기도 했다. 서빙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하지 않았던 이유로 내 용기없음을 꼽아왔는데 이제 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나는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고 그래서 현실감 없이 돈을 벌었으며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정서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연애라는 환상적 감상 안에서 내가 처한 위치를 가늠하지 못했다. 등록금이 모자라 학과장 선생님께 돈을 빌릴지언정 다른 방법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내가 더 돈이 없는 상태였다면, 굶어죽을 지경이었다면, 빌린 돈을 갚을 수 없는 처지였다면, 아예 돈을 빌릴 사람이 아무도 아무 곳에도 없었다면, 나도 내 몸을 자원으로 삼아 돈을 벌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룸살롱을 찾아가는 대학생들. 나는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야, 내게는 절대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뻔뻔하다. 건방지다. 나락은 한순간에 펼쳐진다. 


책을 읽었다고 쓰고, 다른 사람에게 읽히려고 애쓰고, 틈만 나면 이야기를 들춰내 떠벌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최소한을 뛰어넘는 또다른 일은 이렇게 지내다 보면 생길 것이다. 작은 단위의 경험은 큰 단위의 경험을 불러온다고 믿는다. 경험을 단위로 말하는 게 좀 웃기지만. 


남자들이여, 지금 있는 그 자리, 안온하신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포르노도 보지 않고 '성매매'도 안 한다고? 그래서 떳떳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 중 누구도 그 거대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매매'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각종 기관들이 어떻게 그 '산업'에 가담하고 공조하는 모양새로 기능하는지, <레이디 크레딧>을 읽으면 알게 된다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평소의 '성매매' 혐오발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두루뭉술하게 후려쳐서 생각하던 '성매매 산업'의 구조를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매매'로 뒤덮여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책에 나오지 않은 뒷배경이 더 있을 듯하다.) 다시 한번 되새긴다. 그 누구도 '성매매 산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자도, 여자도. 


회색 비가 내리는 마음 속에 아침의 환한 햇살이 내리쬔다. 창을 여니 발랄한 새들이 노래한다.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제목에 불행,과 안온,을 써놓고 보니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행은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안온한 것인가. 그러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해 그냥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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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4-27 19: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리뷰 쓰시는 분들의 마음이 왜 죄다 절절하게 읽히는지...ㅜㅜ
저도 비슷한 생각들을 많이 했던 한 달이었습니다.
난티나무님도 읽으신다고 고생하셨어요.
잘 읽고 갑니다^^

난티나무 2022-04-27 21:06   좋아요 4 | URL
그러게 말이에요 책읽는나무님…^^;;; 힘든 책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열폭하면서요. 진짜 ‘성매매공화국’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네요. (룸살롱공화국,이라는 책이 있어요.)

수이 2022-04-28 10:40   좋아요 2 | URL
물론 대한민국도 그러하지만 여성의 몸을 돈을 주고 사려는 이들은 전세계 어디나 마찬가지 같아요. 여성의 몸에 안전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겨요.

난티나무 2022-04-28 13:2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비타님. 안전한 곳이 없어요. ㅠㅠ 그리고 생각보다 엄청나게 전세계에 퍼져 있다고… 한국 세계 1등… ㅠㅠ

수이 2022-04-28 13:36   좋아요 2 | URL
아 우리나라가 1등인가요? 🙄 ㅠㅠ

책읽는나무 2022-04-28 14:30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는 가만 보면 좋은 쪽 1등은 안하고 나쁜 쪽 1등은 좀 많이 하는 듯요!!!

다락방 2022-04-27 19: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휴 고생하셨습니다, 난티나무 님. 리뷰에 담긴 난티나무 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네요. 저도 모르는 많은 것들이 성매매를 둘러싸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이보다 더한 일들이 또 여기 있겠지요.

여러가지 의미로, 힘냅시다!

난티나무 2022-04-27 21:08   좋아요 4 | URL
그쵸 다락방님. 책에서 말하지 않은(못한) 것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요…@@
힘들었지만 좋은 독서였습니다. 페이드 포 읽다 말았는데 그새 4월 말이라고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4-27 20: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글 보면서 경제 문제에 얽힌 20대 시절의 제가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분노가ㅠㅠ 여러 모로 힘든 책 읽어내느라 고생하셨어요!

난티나무 2022-04-27 21:08   좋아요 4 | URL
분노는 표출해야 합니다!^^
감사해요, 거리의화가님~~~~

라로 2022-04-27 20: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려고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그런데 매일 달라가 오르는 거에요,,ㅠㅠ 내일 더 오르면 내일 살까? 뭐 이러고 있;;; 나 왜 이래요? ㅠㅠ

난티나무 2022-04-27 21:09   좋아요 3 | URL
기다리면 더 오른대요? 그럼 기다려요~~~~ㅋㅋㅋ

미미 2022-04-27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완독 수고하셨어요!*^^*
저도 읽으면서 만일 대학 다닐때
등록금을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면, 그러다 친구중 누군가가 큰 돈이 된다며 나를 유혹했다면 어찌됐을까를 생각했어요.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고 휴학하고 일했거든요.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수업으로 전환되어도 등록금 할인해줄 생각 1도 안하는 대학들...이번 정부 들어서 인상규제도 풀려 더 오를거라는데 그럼 그 돈을 갚기위해 학생들이 정작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그건 또 어떤 희생으로 이어질지 걱정입니다.

난티나무 2022-04-28 00:35   좋아요 3 | URL
미미님도 등록금 때문에 힘드셨었군요..
정말 등록금 너무합니다. 학생이 돈으로 보이는 건가요. 또 오르면 학교 어떻게 다니라고???@@ 서울로 몰리는 것도 그렇고 교육의 변질도 그렇고 총체적 난국이네요…ㅠㅠ
 
프로이트를 만든 여자들
잉에 슈테판 지음, 이영희 옮김 / 새로운사람들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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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르타 베르나이스, 베르타 파펜하임, 이르마, 엠마 엑크슈타인, 도라, 자비나 슈필라인, 헤르미네 후크 헬무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마리 보나파르트, 힐다 두리틀, 헬레네 도이취, 카렌 호르나이, 멜라니 클라인, 안나 프로이트.

아는 이름이 있는가? 몇 명이나 되는가? (프로이트도 정신분석학도 뭐하나 아는 게 없기는 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 많아서 충격이었다.)


책을 읽을 때 기본으로 갖게 되는 감정은 분노이다. 책 전체에서 간간이 나오는 프로이트의 '발언'들은 무엇보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사람들은 자기를 숭배해야만 한다는,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그 위대함에 흠집을 내는 어떤 요인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두려움은 감추고 허세는 부풀리는,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지금도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남자의 전형. 그가 자신의 연구에서 '정상'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의 제목처럼 '프로이트를 만든 여자들' 덕분이었다. 이 여자들은 각각의 입장과 사고를 가진 인물들이었으므로 한꺼번에 뭉퉁그려 우러르거나 반대로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들은, 프로이트를 열렬히 사랑하고 숭배했고, 평생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해 저항의 길을 걸었다.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이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여성 정신분석학자가 많았다는 사실도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된다. 그들이 궁금해진다. 카렌 호르나이나 멜라니 클라인 같은 사람의 저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게 된다. 똑똑하고 재능 있었던 여자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가장 덜 알려진 존재이면서 가장 많이 힘들었을 사람은 마르타 베르나이스가 아닐까.(개개인의 삶의 고통을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으로 53년의 결혼 생활을 했는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평생을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연구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기도 편지도 무엇도 없다.('프로이트문서보관실'에 편지가 보관되어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남자의 전형인 사람 곁을 오랜 시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지치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책의 한 부분에 마르타는 아이들을 아버지 프로이트가 '분석'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잘 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유명한'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으며 자랐겠지만 정신분석의 대상까지 되었다면 그들은 더 힘든 삶을 살았으리라고 혼자 추측해본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프로이트를 이어갔다고 평가받는 안나 프로이트의 삶도 안타깝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프로이트를 만나서 대상으로 분석되었을까.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활동하던 남성학자들, 정신분석학에 종사하던 그들이 만난 여자들까지 생각한다면, 우리가 모르는 것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세상 훌륭하고 위대해서 존경받는 역사 위의 남성들을 떠받치고 있는 건 그 주변의 여성들이라는 사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로만 깔려있는 그 여성들은 지금도 세계 어디에나 있다. 아직도, 여전히. 남자를 떠받치고 있는 여자, 이 그림을 각자의 집안으로 가져가도 별 무리없이 들어맞지 않나? 이런 구조는 깨어져야 한다. 변하지 않을 사람들보다는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자각으로부터. 내가 왜 엎드려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네가 엎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것에서부터. 그렇게 생긴 균열은 반드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할 것이다.


(제목 '역사가 망각한 여성의 업적'은 역자 후기에 나오는 구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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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3-31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서재 더 자주 들리지 못해 민망스럽다 하려던 차에, 첫 문장 나열된 이름 중 딱 하나 알아보는 저.

이 방향에서는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역사가 망각한 여성의 업적] 명확한 제목만큼이나 메시지도 명확하겠네요
이름을 기억 못한다는 자체가 소극적 가해일까? 자기반성해봅니다. 저역시 이름 기억은 커녕 남지조차 않을 존재이면서....

난티나무 2022-04-01 00:52   좋아요 2 | URL
저도 대부분 모르는 이름들이었어요.^^;; 책을 통해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프로이트 🐕 나쁜 놈인 거도 알아서 다행이고요.^^;;;;
재미있으면서 슬프고 분노가 불타오르는 책이었습니다. 절판되어 아쉬워요…
말씀하신 소극적 가해… 저도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mini74 2022-04-0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몀 유명남성들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이 많은거 같아요. 수학잘했던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부인, 볼테르의 조력자였던 에밀리 뒤 샤틀레. 그리고 난티나무님이 알려주신 프로이트를 만든 여자들 ㅠㅠㅠ이런 글들 읽으며 많이 배우는 거 같습니다 ~

난티나무 2023-03-31 15:09   좋아요 0 | URL
아니 답글이 없네요!!!! 이런 @@
mini74님 잘 지내시죠? 소식 궁금합니다.^^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 영화,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개정판 여이연문화 3
바바라 크리드 지음, 손희정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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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포함, 영화와 드라마 등을 보며 느꼈던 찝찝함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잘못된 환상과 상상과 판타지는 깨부수어야 하는 것이다. 바기나 덴타타, 남성의 거세 공포. 차별과 혐오는 두려움에서 나온다. 조금 어렵기는 했으나 매우 유익하다. 이제 판타지를 부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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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3-30 23: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완독 수고하셨어요!!!🌹🌹🌹 구구절절 공감됩니다*^^*

난티나무 2022-03-30 23:53   좋아요 4 | URL
헥헥 오늘 달려서 겨우 끝냈어요.^^ 🥰🥰

mini74 2022-03-30 2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저도 완독 축하드립니다 *^^* 이데 판타지를 부수러 가자 ! ㅎㅎ 나무님 맛지세요 *^^*

난티나무 2022-03-30 23:5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드라마 욕(?)을 좀 해야 겠어요. 영화도! 책도! 시청자와 독자로서 비판하는 일도 의미가 있겠죠.🤗🤗

난티나무 2022-03-30 23:59   좋아요 3 | URL
그리고 일상에서도!!!!!!

다락방 2022-03-31 05: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난티나무 님! 저도 이 책이 좀 어렵지만 좋더라고요. 자, 우린 계속 달립시다!! 💪

난티나무 2022-03-31 18: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조금 어렵지만 좋은 책이었습니다!!!
5월 책도 준비 완료~ 달려달려~ (아니 잠깐만... 조금만 숨 좀 돌리고요, 헥헥....ㅋㅋㅋㅋㅋㅋ)

수이 2022-03-31 07: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어요 저는 아직도 많이많이 남아서;;;;; ㅠㅠ 울고 있습니다

난티나무 2022-03-31 18:32   좋아요 1 | URL
vita님 달려요~~~~~~~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03-31 08: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려웠지만 유익했다는 말에 공감합니다^^ㅎㅎ 난티나무님 완독 축하드립니다!^^

난티나무 2022-03-31 18: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어요.^^

공쟝쟝 2022-03-31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난티님 저 치입니다 ㅋㅋㅋ 부수러 가쟤!!! 꺅 😭 너무 좋아! 언니 멋져!!

난티나무 2022-04-01 00:48   좋아요 0 | URL
하나씩 부솨 봅시다! ㅋㅋㅋㅋ 🥳🥳🥳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모두 밑줄감
(~33쪽까지 읽고)

여성의 시 언어는 남성의 시 언어와 다르다. 여성의 언어는 이제까지 밖에서 주어졌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터져나온다. 여성의 언어는 본래적으로 위반의 언어인 것이다. 이 위반이 이제까지 있어왔던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 때문에 여성의 시는 기존의 서정시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습적 인식에 대항한다. 그러나 이 위반의 자리에 서면, 시의 온전한 재료이며, 존재 비평인 언어마저도 여성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엄혹한 현실이 닥쳐온다. 이렇게 부유하며, 쫓기는 그 자리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이 불러야 하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시 잉태하고, 분만해야 한다.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그 명명의 자리에서 사랑의 아픔으로 뒤범벅된 여성시인의 다양한 발성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 P7

나는 여성시인도 바리데기 연희자와 같은 어떤 상징적인 치름, 그 과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여성시인에겐 스스로 인지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자신의 여성적 삶의 현실, 혹은 자신 스스로 구축하지 않으면 여전히 남의 현실로만 존재하는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여성시인은 그 순간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 그 병과 함께하는 죽음을 명명해야 한다는 것을 홀연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 아픈 몸으로 죽음과 삶의 소용돌이를 치러낸다. 그런 어느 시간의 점, 여성시인은 ‘여성성에 들린다.‘ - P15

영감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나‘를 통해 ‘나‘를 무(無)로 만드는 기제, 그러나 그 기제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저 바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바깥이 내게로 여릿여릿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열고 여성성으로 들리자 저 바깥이 착각의 소용돌이인 내 안에서 열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영감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아득해지고, 나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져 있는 것만 같다. 먼지처럼 작은 모래 알갱이들만 소용돌이친다. 나는 휘날리는 모래 알갱이들 같은 불모에 휩싸여 사라져버린 나를 부른다. 나는 나와 만났다 헤어지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나는 온전한 정신이 들었다 사라졌다 하는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걷어차며, 걷어찼다가 끌어안는다. 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방으로 떨어져가며 말의 새끼줄을 스스로 생산해낸다. 그 새끼줄이 나에게서 뿜어져나와 나를 옭아맨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끼줄을 뽑아내지 않으면, 또는 그것에 옭아매여 있지 않으면 나는 영감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미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새끼줄을 끊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그 허방에 목매달려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그 영원한 허방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한 대로 미쳐버릴지도, 아니 벌써 미쳐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 절명의 시각, 내가 나라고 믿었던 사랑과 아픔이 모두 깨어난다.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죽음이 보내온 신기루라는 이름으로. 그때 역설적으로 세계가 다시 내게로 살아나온다. 시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아득한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 P23

특히 여성시인이 ‘나‘를 열어 ‘나‘의 그 알 수 없는 심연의 죽음 속으로 빠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심연이 바로 자신의 존재임을, 시를 쓰는 작업이 바로 그 존재성을 자각하는 과정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여성시인은 그 불모의 사막 속에서 ‘나‘를 보내고, 모든 ‘나‘를 불러들인다.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비추며, 모두를 무성하게 한다. 그것은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부재를 통한 무수한 존재의 발견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모두 있다. 그곳을 여성시인인 내가 방문하는 것이 내 시의 궤적이다. - P25

여성시인의 영감은 이 지상에서 버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유일하게 생산적인 것으로 치환시켜주는 기제이다. 동시에 버려진 아이를 끌어안고, 그 버려진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기제이다. 혹은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 여행을 날마다 감행하는 샤먼처럼 ‘살아 있는 죽음‘ 속으로 스스로 떨어져가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기에 여성시인에게 영감은 남성시인의 관념적인 죽음의 응시, 그 투명한 공간으로의 여행과는 다른 공간으로의 여행을 감행하게 하는, 날마다의 ‘들림‘을 명명한 것이다. 여성시인이 바라보는 죽음, 혹은 무(無) 속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들어 있다. 동양 철학이 궁구하던 무(無) 속에 ‘절대적인 없음‘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듯이, 여성적 영감이 끌어당겨서 홀려가는 여행의 공간 속에서는 언제나 버려진 아이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그 순간, ‘나‘의 죽음은 죽음을 초월해 저 너머로 간다. 저 너머에 있는 죽은 아이인 또다른 ‘나‘를 만나러.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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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2-03-0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읽는 책들이랑 연결되어 보여요. 여성시학 (강추), 여성 시하다 (아직 안 읽음)

난티나무 2022-03-06 14:03   좋아요 0 | URL
여성 시하다,는 사려고 보관함에 담아두었어요. 두 권 다 읽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