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약속 -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딕테 시리즈 2
사라 아메드 지음, 성정혜.이경란 옮김 / 후마니타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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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독서 모임 멤버들로부터 성실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모임에 빠지지 않고 읽어와야 할 분량을 읽어오고 정리하자고 하면 꼭 몇 글자라도 끄적여서 오고, 그래서 멤버들은 나를 모범생, 우등생, 이라고 불렀다. 나도 안다, 그게 칭찬인 것을. 그러나 나는 모범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거부감을 가졌다. 칭찬하는 말에 적절한 대응법을 (아직도) 모르겠어서 흥흥 웃고 말았지만, 그 후로 왤까, 계속 생각했다. 뭐가 싫은 걸까. 

모범생, 우등생, 학교에서 말 잘 듣고 허튼 짓 안하고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시키는 것(만) 잘하는 사람. 내 머릿속에는 하라는 대로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만 둥둥 떠다녔다. 이건가, 내 거부감은. 사실을 말하자면 학창 시절 나는 모범생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우등생은... (아주 잠깐 그렇기도 했지만 대체로 절반쯤은) 아니었다. 시키는 걸 잘하고 싶었으나 애를 쓰지는 않았다. 애를 써도 할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도 지나고 사회 생활도 지나오고 기혼 생활도 웬만큼(?) 해본 나를 돌아보자니, 떠오르는 에피소드 속의 내 모습이 아주 적확하게 '정서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늘 그렇지는 않았어도 자주 그랬다. 하. 나는 뼛속까지 이방인이었어. 그걸 알아서 항상 나를 탓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안 돼, 이상한 짓 하지 마, 벗어나면 안 되지... 

다시 모범생이라는 말로 돌아오면, 정서 이방인으로서 나는 모범생이었던 적이 없다고 해야 맞을 듯하다. (역사를 다시 쓰자.ㅋ) 좋아하는 것을 했고 약속을 했으므로 그 약속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과 모범생이라는 단어는 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 단어로 칭찬받는 것이 싫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칭찬하는 말도 새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칭찬이 싫음, 기분 나쁨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걸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올바른' 생각인지를 생각했다. 


나를 수동적 인간이라고 여겼다.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안 되는 거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는 한 가지 면만 갖고 행동하지 않는다. 같은 행동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내가 '정서 이방인'으로 행동한 순간들을 떠올리면 그건 단순히 수동적,이라는 단어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꼈던 것, 수동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 모든 게 부정적이라서 내 입꼬리는 항상 아래를 향하고 있다고, 아주 불만이라고, 여겼던 것 들이 실은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나 뒤늦게 알아차리는 거, 이거야말로 '행복'이겠지.ㅋㅋ 그런데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우등생이 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라서 못했던 때처럼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몰랐을 뿐일지도. 


남들과 비교해 내 삶이 보잘것 없고 '실패'했다고 생각하다가, 아니다, 그런 게 어딨어, 정해진 기준은 없고 세상에 '성공'한 사람만 잘사는 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실패한 게 아니야, 그냥 내 삶을 살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의 전환을 이루었으나, 곧 이건 '합리화'가 아닌가 싶어 나를 의심하기를 반복했는데, 이젠 정말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책을 덮으며 또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기존 관념의 연장선에 내 생각을 놓는다. 기존 관념을 의심하는 시각으로 내 생각을 본다. 그거 또다른 기존 관념 아니야? '합리화'라는 말로 너를 다시 옭아매려는 술책?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자책은 금물이다. 자책할 시간에 책을 한 글자 더 읽자. 


도입부가 어려워서 어렵다고 끙끙거렸다. 다시 읽으면 덜 어려울 것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좋아서, 물론 아메드의 말을 따라 나를 생각하면서는 슬펐지만, 그 슬픔은 좋은 슬픔이었다. 나는 이제 이 느낌을 기분 좋은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슴이 아프지만 좋은 느낌이라고, 좀 고통스럽지만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라 아메드 덕분이다. 


잘난척하는 사람을 보면 묻고 싶었다. "그래서 넌 행복하냐?" 내 눈에는 하나도 행복해보이지 않는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하다고 대답했겠지. 이런 게 행복 아니겠냐고 말했겠지. 나도 내 기준에서의 행복이라는 관념을 설정해두었을 것이다. 내 기준에서의 행복. 그걸 아직 '행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쉽다. 그땐 좀 헛발질하는 느낌으로 행복이라는 걸 상상했다면 지금은 발 끝에 단단하게 무언가가 와닿는 느낌으로 '좋음'을 상상한다. 그게 별것 아니라는 사실, 스쳐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 이미 수없이 스쳐보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사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는 아메드의 말을 되새긴다. '행복'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자주 쓰던 단어 '어쩌면'이 심하게 더 좋아질 것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행복)'! 






(밑줄들은 '결론'에서 가져왔다.) 


⌈행복은, 니체가 이야기하듯, 당신이 하도록 요청받은 것을 따르는 방식일 수 있다. ...... 우리는 능동적 활동과 수동적 활동을 경험하는 방식의 질적 차이를 설명할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능동과 수동의 구분 자체에, 그런 구분이 존재의 계급 구분을 고정하는 방식에, 행복한 사람과 길을 건너는 닭들을 고통 받는 영혼과 움직이지 못하는 길들과 구분하는 방식에 도전해야 한다.⌋ (378) 


⌈로드는 작품 내내 우리가 상처 주는 것으로부터 보호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지 상처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상처를 야기하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작업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 말은 알아차리지 않도록 배워 온 것을 탈-배움unlearning하라는 의미다. 힘과 피해의 관계인 폭력이 어떻게 다른 신체가 아닌 어떤 신체로 향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려면 이런 작업이 필수적이다. ⌋(388) 


⌈이 책에서 내 목적은 나쁜 느낌들이 단순히 반작용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살펴보는 것이었다. 나쁜 느낌들은 끝나지 않은 역사들에 대한 창조적 반응들이다(Ahmed 2004:200~202도 참조). 우리에게 불행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는 느낌에서 로맨스나 의무를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단지 불행을 극복해야 할 느낌 이상의 것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390) 


⌈가능성을 받아들이려면 과거로의 회귀, 즉 우리가 상실한 것뿐만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것, 포기한 것뿐만 아니라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가능성에 대해 배우는 것은 계보학을 하는 것, 현재의 도착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현재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에 대해 배우는 것에는 현재로부터의 일정한 소외가 수반된다. 익숙한 것이 물러나면 다른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정서 이방인들은 창조적일 수 있다. 우리는 그릇된 것들을 바랄 뿐만 아니라, 포기하라고들 하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이런 바람들을 중심으로 생활 세계를 창조한다. 우리가 행복에서 멀어져야 일이 벌어진다. 우연 발생이 생겨나는 것이다. ⌋ (392)


⌈불행할 자유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를 포함한다. 그런 자유는 행복 하중을 가볍게 할 것이다. 불행할 자유는 그러므로 행복을 제쳐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연발생을 행복 안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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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9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난티나무 2023-04-30 05:42   좋아요 2 | URL
하뚜하뚜!!!

다락방 2023-04-30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 님, 너무나 좋은 리뷰 입니다!! 멋져요!!

난티나무 2023-05-03 06:45   좋아요 0 | URL
오홍홍 칭찬은 기분 좋은 것입니다!! 충성! 아 이거 아닌가…^^;;;;;; 🥰

거리의화가 2023-04-3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난티나무 2023-05-03 06:45   좋아요 0 | URL
유후!!! 😘
 
행복의 약속 -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딕테 시리즈 2
사라 아메드 지음, 성정혜.이경란 옮김 / 후마니타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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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렇게나 수동적이고 부정적인지 불만이었는데 사라 아메드 덕분에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그것이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인간이 규정지은 모든 것에 의문을 품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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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4-28 2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다 읽었는데 할 일 많았던 바람에 백자평 이제 적음. 나는 과연 4월 30일이 지나기 전에 리뷰 비슷한 거 쓸 수 있을까???

거리의화가 2023-04-28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읽으며 느낀 감정들이 많았는데 막상 정리하려니 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지ㅋㅋ 결국 쥐어짜낸 백자평으로 퉁치고 가네요ㅠㅠ

난티나무 2023-04-29 02:49   좋아요 1 | URL
ㅋㅋㅋ 모두들 좀 그러신 거 같아요.^^;;; 근데 책은 정말 좋았어요 저는.ㅎㅎㅎ 뭐라도 써야 할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ㅋ

- 2023-04-29 12:5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거참 신기한 책이죠?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4-29 22:08   좋아요 0 | URL
신기해서 더 좋은 듯요 ㅋㅋㅋ
 
남성 특권 - 여성혐오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케이트 만 지음, 하인혜 옮김 / 오월의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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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목, 이런 내용의 책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순한 맛‘이고 마무리가 살짝 아쉽기는 했으나 충실한 분석, 적절한 비판, 어렵지 않은 서술방식에 별 넷 대신 별 다섯. 같이 읽고 토론하기 좋은 책. 페미니즘 입문자에게도 적당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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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30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완독하셨군요. 축하합니다!!

난티나무 2023-03-30 14:40   좋아요 0 | URL
아니 다락방님! 저 이번달 2등으로 읽었거든요? ㅎㅎㅎㅎㅎㅎ 백자평 늦게 썼어요. 까먹고 있다가 ㅠㅠ

다락방 2023-03-30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ㅋㅋㅋ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죄송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3-30 14:48   좋아요 0 | URL
😅😅😅🤓

책읽는나무 2023-03-31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자평 쓰신 걸 축하드립니다.
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3-31 18:41   좋아요 1 | URL
ㅋㅋㅋ 감솨해요.ㅎㅎㅎㅎ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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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는 사람을 멀리 데려간다. 거기에 어떤 감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불현듯 다다르게 되는 그곳은 내 경험, 내 생각에 빗대어 시작된 공간이자 시점이며 순간이다. 때로는 깨달음으로, 기쁨으로, 분노로, 우울로, 각양각색의 감정 집합소인 그곳들. 


 비비언 고닉의 책을 관통하는 몇 가지 화두 중 나를 끌어당긴 건 '우정'이다. 한 단어로 말하자면 그렇고, 두 단어로 말하자면 '좋은 대화'다. 뉴욕의 거리, 사람들, 공중을 떠도는 말들과 관계들 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듯 이야기하고 거기에서 배어 나오는 통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대화, 좋은 대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우연'이 매 순간 겹쳐지는 관계, 나는 그것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슬펐다. 단순히 슬프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 뭐든 그렇지 않겠는가. 언어에서 명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글 곳곳에서 나와 겹쳐지는 무언가가 보였고 지극히 사적인 감정으로 그 문장들에 나를 대입했다. 그러면서... 


 뒤늦게야 깨닫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되묻지 않는, 그런 말 없이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관계. 그런 관계를 찾고 싶어 하는 것, 그게 나이고, 인간이구나. 그게 안 돼서 매번 실망하고 자책하고 돌아서는구나. 흔하디흔한 말이지만 '열린' 마음, 그걸 갖추기가 그렇게 어렵다. 자기 비하 성향은 이미 존재하는 것마저 가려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다. 



" 원하는 일을 하면 기대에 못 미칠 게 분명했고,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들을 따라가봤자 거절당할 게 뻔했으며, 암만 매력적으로 보이게 꾸며봤자 그저 평범해 보일 것이었다. 계속 움츠러들던 영혼은 그렇게 손상된 자아를 둘러싼 모습으로 굳어져 버렸다. 나는 일에 몰두했지만 마지못해 그럴 뿐이었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은 있어도 두 걸음을 옮긴 적은 없었으며, 화장은 했지만 옷은 되는대로 입었다. 그 모든 일 중 무엇 하나라도 잘 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 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 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142/195)


 손상된 자아, 두 걸음 옮기지 못하는 것, 두려움을 사랑하는 일... 저기, 혹시 내 얘긴가요? 좋고 많은 이야기들 다 놔두고 이런 구절이 눈에 훅 들어온다. 그리고 이젠 나도 좀 달라져야지 생각한다. 이 생각은 뻔한 전개로 이어진다. 나는 비비언 고닉이 아니고, 깨닫는다고 변화하는 건 아니니까. 



" 좋은 대화란 공통된 이해관계나 계급의식이나 공유된 이상 따위보다는 기질에 달린 문제다. "그게 대체 뭔 소린데?"라고 따지기보다는 "뭔 말인지 딱 알지" 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색하게 되는 기질. 그런 공통의 기질이 있으면 대화는 자유로우면서도 거침없는 흐름을 어지간해선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기 마련이다. " (110/195)


 저자의 다른 책에도 언급되는 이 구절을 좋아한다. 맞는 말이고 당연해 보이는데, 일상에서도 그렇다고 느끼는데, 유독 이 구절이 뇌리에 오래 남아있다. 친구들이 떠올랐고 '공통의 기질'을 가졌을, 그래서 대화가 좋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 내게도 있다, 그런 '우연의 순간'들이. 그러나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인 동거인과 나에게는 대화에서 필요한 '공통의 기질'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걸 깨닫고 표현할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를 자주 내뱉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었고, 나중에는 알고 싶은 마음을 버렸는데, 귀를 열어도, 되물어서 답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게 무슨 말이야?'는 아직 서로 자주 쓰는 말이다. 몸으로 막연히 느끼던 것을 책의 언어로 마주하는 일이 기쁨이면서 슬픔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세상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과의 관계이고 세상 가장 따스한 것이 또 인간과의 관계이다. 우리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아주 절실하게. 인생에서 말이 통하는 친구만큼 필요한 게 또 있을까? 우정은 곧 사랑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심리적 거리다. 고닉도 '절친' 레너드와 한번 만나면 일주일 동안 연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나야 그와의 대화가 그리워진다고. 너무 찰싹 붙어있지 않기. 


 다른 의미에서 또 슬펐던 부분이 있다. 노작가 앨리스의 요양원. 그가 요양원에서 보낸 7년이라는 시간. '좋은 대화'를 할 수 없어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생활. 어떤 모양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노년에는, 앨리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가닿은 여러 명처럼 그렇게 나와 연결된 친구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 나는 좋은 대화를 계속 갈망할 수밖에 없겠다. 노년을 생각하기 전에 지금, 여기에서. 읽고 쓰고 말하면서. "뭔 말인지 딱 알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위해서. 지금 그런 관계인 친구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새 친구와,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낯선 이와도 우연의 순간을 나눌 수 있기를, 매일 보는 이와도 그런 순간을 맞을 수 있기를, 책을 읽으면서도 자주 그럴 수 있기를. <짝 없는 여자와 도시>가 내게 그런 순간들을 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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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6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6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3-03-17 0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럴 수 있을 거예요☺️

2023-03-17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7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에나 2023-03-17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에서 제가 별표 막 해둔 문장이랑 똑같아요. 저도 동거인과는 대화가 아예 안 되는데 (좋은 대화만이 아니라)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남성에겐 그런 기대도 안 했고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할 생각도 안했다는 걸 깨닫고...아악.ㅋㅋㅋㅋ
내가 한 마디 하면 그 뒤에 숨어있는 열 마디를 캐치해주는 대화가 있죠. 쾌락 폭발!그리고 좋은 대화를 나누려면 (고닉과 레너드처럼) 적절한 거리감과 은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하는 거 같아요. (고로 동거하면서는 힘들닼ㅋ)

난티나무 2023-03-17 20:24   좋아요 1 | URL
오홍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하셨다니 역시! 저는 기대를 했더랍니다...ㅠㅠ 배우자 선택 기준도 그거였는데... 하... 안 되더라고요. ㅎㅎㅎ
동거하면서 그게 되려면 진짜 거리 필요하고요, 은은한 그리움, 음 이건 어째야 하나... 주말부부 정도면 딱 좋을 거 같은뎅, 아니 한 달에 한 번 보는 사이 ㅋㅋㅋㅋㅋ

baboya333 2023-05-05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난티나무가 떠오르네요.

난티나무 2023-05-05 13:18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 ㅋㅋㅋㅋㅋ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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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떤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어쩌면 이 책은, 비슷한 이유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얼핏 일관성이 없는 듯한 이야기들에서는 솔직함이 빛을 발한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관계의 역학, 누구나 겪는 느낌을 명확한 언어로 말하기. 주관적 별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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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3-02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자평 잘 쓰고 싶은데 잘 안 됨.ㅎㅎ
명확,하게 쓰고 싶다...

다락방 2023-03-02 0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자평 못쓰기 챔피언인 다락방이 여기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3-02 18:20   좋아요 0 | URL
아니 내용을 알기 어렵다 뿐이지 그건 매우 잘 쓴 백자평 아니었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3-0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100자평 잘 쓰고 싶어요. ㅠ.ㅠ 원래 짧은 글이 제일 어려워....ㅠ.ㅠ
하지만 이 책은 읽고싶어요. 난티나무님이 주관적으로 좋다니까 막 신뢰도가 업업!!!

난티나무 2023-03-02 18:22   좋아요 1 | URL
짧은 글도 삘 받아야 그나마 쓸 수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ㅎㅎㅎ
바람돌이님 읽으시고 어떤지 알려주세요~~~^^

그레이스 2023-03-0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비언 고닉이군요
이 책이 차라리 좋을듯 하던데...

난티나무 2023-03-03 18:22   좋아요 1 | URL
리뷰대회 말씀이시죠? 그것 보다가 출판사 다른 거 알았어요.^^

그레이스 2023-03-03 18:31   좋아요 0 | URL
아!

거리의화가 2023-03-0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자평 쓸 때마다 머리 쥐어뜯어요ㅠㅠ 짧은 글일수록 핵심을 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책 보관함에 몇 달째 있는데 섣불리 도전하기가 어렵네요. 그래도 여러 분께서 추천하셔서 언젠가는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난티나무 2023-03-03 18:26   좋아요 0 | URL
백자평 어렵죠? ㅎㅎ 저도 고민하며 씁니다. ㅠㅠ
고닉 책 좋아요.^^